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63화 (63/357)

#63. <태풍을 기다리는 대붕>

용봉지회와 나, 그리고 만검들의 중간에 내려앉은 모용강이 나를 보며 말했다.

“끌끌끌. 젊었을 적 나도 미친놈 소리를 많이 들어봤지만, 네놈처럼 미친짓을 한 적은 없었다.”

모용강은 허공에 떠있는 검들을 보며 작게 탄성을 질렀다.

“기록에 남아있는 이야기들이 순 거짓이라 생각했건만…….”

모용강은 마치 별을 처음 본 아이와 같은 눈빛을 보였다.

“……이건 기록이 부족한 느낌이구나.”

이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증명이라면 이미 끝났으니 검을 거둬라. 선천지기가 뭔 줄 알고 함부로 사용하는 것이냐!”

나는 종벽기를 가리켰다.

“저자가 저와 저의 사문, 그리고 저희의 태사조님을 모욕했습니다.”

“이곳에서 생사대적이라도 벌일 셈이냐?”

“점창파가 모욕을 당했을 때 할 행동을 똑같이 하겠습니다. 종벽기! 그대의 사문이 모욕당하면 어찌하겠는가!”

“…….”

내 모습에 피식 웃음 지은 모용강이 종벽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말코 도사 놈. ……사과하거라.”

종벽기는 다짜고짜 사과하라는 말에 당황 일색이었다.

“……노사께선 누구시기에 무림맹의 일에 끼어드시는 겁니까!”

“지금 사과하지 않으면 네놈과 용봉지회는 온전히 돌아가지 못한다. 그것을 모르겠느냐?”

“우리 용봉지회는…….”

“쯔쯧. 말이 안 통하는 녀석이군.”

모용강이 종벽기를 향해 손을 뻗어 뒤틀었다.

빠각.

놀랍게도 일명의 뒤에 섰던 종벽기의 팔이 꺾이지 말아야 할 방향으로 꺾였다.

“끄아아악!”

단순한 허공섭물이라기엔 파괴력이 너무 강하고, 격공을 이용했다기엔 금강불괴신공이라는 희대의 신공을 쓴 일명이 그를 가리고 있었다.

이 자리의 그 누구도 모용강이 무슨 수를 썼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감히 이따위 짓을 하고도…….”

펑.

분명 종벽기는 용봉지회의 가운데 서 있었다.

허나 기이하게도 혼자만 끈에 묶여 끌려가는 것처럼 벽면에 날아가 꽂혔다.

퍽.

“크흑.”

“이 정도면 되었느냐?”

나를 돌아보는 모용강.

“아니면, 내가 직접 죽여주랴?”

“…….”

“나는 네가 재미있다. 네놈이 죽거나 무공을 전폐당하는 꼬라지는 보고 싶지 않아. 네가 쓰는 검법도, 너도 모두 궁금하거든.”

인피면구 안으로 보이는 그의 눈이 먹이를 노리듯 번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소름이 끼쳐 말문이 멎었다.

“…….”

“네놈이 원한다면 점창과 전쟁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녀석을 죽여주마. 점창의 말코 도사 놈이랑 오래간만에 붙는 것도 나쁘지 않지.”

“!”

“!”

용봉지회 인원의 얼굴이 샐쭉하게 변했다.

정체를 알 수 없지만, 평이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더 실제같이 느껴져 소름 끼치게 들린 까닭이다.

난 종벽기가 빠진 용봉지회를 보며 말했다.

“용봉지회는 종벽기가 이야기하는 동안, 모용설 소저를 제외하곤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용봉지회 또한 종벽기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일명이 억울한 듯 이야기했다.

“……아니! 그것은…….”

“조용하거라!”

모용강이 나를 보며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다.

“내 평생 별의별 놈들을 만나봤지만, 네놈처럼 질긴 놈은 처음이구나.”

“…….”

“짧게 동행한 것치곤 대가를 너무 크게 받아 가는 것 아니냐?”

“일이 끝난 후에도 제가 멀쩡하다면 갚겠습니다.”

“좋다. 그 말 기억해 두거라.”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모용강이 용봉지회에게 말했다.

“어이 지렁이와 병아리 나부랭이들, 너희들에게 진정 무공의 연원을 조사해야 하는 감찰 권한까지 있더냐?”

“…….”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무림맹의 용봉지회라는 무서울 것 없는 지위에 있었지만, 천외천의 경지를 본 이상 함부로 입을 놀릴 수는 없었던 것.

“화산의 먼지. 네가 이야기해 보거라.”

화정산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희는 무림맹의 감찰사자로서…… 무림의 질서와…….”

“권한이 있냐 물었다. 썩을놈아.”

“…….”

모용강의 모욕에 화정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결국 일명이 끼어들었다.

“실례합니다만, 노사께선 누구신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왜? 재보고 만만하면 소림의 힘으로 눌러보게?”

“…….”

일명은 소림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는 모용강의 태도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 중놈아, 소림의 장경각을 모두 독파한 네놈이라면 알겠지? 저 아이의 무공이 오래전 태을검제에 대한 기록과 비슷하다는 걸?”

“…….”

일명이 쓰러진 종벽기를 바라봤다.

“모른다고 말할 셈이더냐? 우리 가문에 있는 기록을 보여주랴?”

일명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모용강의 말들 속에서 무언가를 단서를 얻은 눈치.

“혹시……. 모……!”

그리고 이내 뭔가 기억 난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봤던 기록에 따르면 저 아이의 무공은 태을검제의 무공이 맞다. 또한 태을문이 태을검제의 전통을 이었다는 것도 강호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지.”

주로 조롱의 대상으로서 천하를 울렸던 태을검제와 태을문의 이야기였기에, 강호인들 중에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내 의견에 반론이 있느냐?”

사람들의 시선이 일명에게 모였다.

“……없습니다.”

일명의 말을 끝으로 태을문 전체가 웅성대기 시작했다.

벽에 처박혔던 종벽기가 덜렁이는 팔을 부여잡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두 눈엔 상대에 대한 원한이 가득 담겨 있었다.

“대체 노사께선 누구시기에 이런 짓을 벌이시는 겁니까!”

“그건 왜 궁금한 것이냐?”

“점창은 원한을 잊지 않습니다.”

“끌끌, 고작 한다는 게 우문이 그 똥강아지 같은 놈 뒤에 숨겠다는 것이냐?”

종벽기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백우문은 당대 점창파의 문주였다. 그런 이를 함부로 똥강아지라고 칭한다고?

“후회하지 않는다 했지.”

모용강의 손이 목 부근으로 향했다.

“그게 무슨…….”

모용강의 얼굴이 드러나자, 종벽기와 용봉지회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푸, 풍백파검……!”

모용강이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감히 내 기행을 방해했다. 그것에 대한 대가는 각오하고 한 것이렸다?”

그리고 모용설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하, 할아버님!”

모용강은 모용설이 부르건 말건 단상 위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모용세가의 당대 가주이자 강호 동도들이 풍백파검이라 부르는 나 모용강이 보증하겠소. 진소운 저 아이가 사용한 무공은 전설로 내려오던 태을검제의 무공이 확실하오.”

단상 곳곳에서 앓는 소리 같은 울음이 튀어나왔다.

“으허허헉!”

“흑흑 진정…….”

“……이런 일이.”

어른 중에 대성통곡을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심지어 홍문기는 자신이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모용강이 앞에 있음에도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세우고 있었다.

“이제 되었지?”

모용강은 다시 나를 바라보며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고.

나는 조심조심 무공을 모두 거둬들였다.

“선천지기가 깨지거나 하진 않았겠지?”

“……네, 덕분에 단전도 멀쩡합니다.”

“그래그래. 정말 다행이다.”

모든 희망을 포기하던 나를 다잡아 준 것은 일면식밖에 없는 모용강이었다.

“…….”

전생에서도 인연이 없던 그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에 나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장난기도 많고 꼬장도 부리지만 진정 중요한 순간엔 나의 편이 되어주는…….

“그럼 이제 나랑도 계산을 마저 해야지?”

“네?”

순식간에 날아온 주먹이 피할 세도 없이 복부와 목을 강타한다.

“커흑…….”

나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잡아 눈을 부릅뜨며 그를 바라봤다.

“대체……왜?”

“자고로 미친놈에겐 매가 약이다. 어디 함부로 선천지기를 건드려?”

“아니…… 그건…….”

그 말을 끝으로 눈이 감겼다.

#

대현전에 태을문의 장로들을 비롯한 당주들이 모두 모였다.

‘진소운이 태을검제의 무공을 익혔다!’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졌지만, 정작 이들이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모용강이었다.

풍백파검 모용강.

강호의 절대자임은 물론이고 검을 쓰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만나고 싶어 하는 강호 명숙.

여전히 약초꾼 복장의 모용강이 들어서자, 태을문의 사람들이 자리에서 모두 일어났다.

홍문기는 모용강에게 상석을 양보했지만 모용강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시오. 강호의 배분을 떠나 지금은 각 문파의 수장으로 만나는 것 아니오. 문주께선 너무 겸양하지 마시오.”

그의 말에 홍문기가 상석에 자리하고 그 옆으로 모용강이 앉았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태을검제 무공의 연원으로 무림맹과 시비가 붙을 뻔했던 것을, 모용강은 자신과 가문의 이름으로 보증하여 중재했다.

태을문은 그에게 큰 빚을 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본래 태을문의 것을 태을문의 것이라 말한 것뿐이외다. 그래도 태을문에 도움이 되었다니 나도 마음의 짐을 조금 더는 기분이요.”

“……네? 그게 무슨…….”

“응? 모르셨소? 귀 문의 진소운이가 내 아들의 생명을 구했다오.”

“네?!”

“!”

홍문기의 시선이 절로 진태산에게 쏠렸지만, 진태산도 전혀 모르는 바였다.

‘이 빌어먹을 놈의 자식이, 뭔 일을 하면 이야기를 해주면 안 되나.’

약초꾼 노인의 정체가 모용강이라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식겁했던가.

“죄송합니다. 미리 알지 못했습니다. 교육을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그런 큰일을 해냈으면서도 사문에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는 건, 누군가 도왔다는 걸 크게 생각하지 않았단 의미 아니겠소. 오히려 기특한 생각으로 느껴지니 문주께선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가, 감사합니다.”

장내의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특히 진태산이 어안이 벙벙했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이쁘다고 자신에게야 둘도 없이 소중한 아들이고 대제자인 진소운이지만, 어째서 모용강과 같은 대단한 사람이 진소운에게 호의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사실 내 못난 자식놈이 손자를 위한 영약을 구하러 갔다가 위험에 빠졌던 건데. 그 목숨을 구해주고 보답으로 화후의 내단을 건넸지만, 아들을 생각하는 아비의 마음을 어찌 가로챌 수 있겠냐면서 거절했다 하오. 그런 생각을 하는 이라니 내 어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있겠소.”

“?!”

“?!”

‘화후의 내단’이라는 소리에 사람들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남의 것을 탐내지 않은 담대함에 칭찬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생에 다시 없을 기회를 왜 놓쳤냐고 탓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을 알았던 걸까.

모용강이 끌끌 웃으며 말했다.

“대신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감사의 의미로 내 아들놈이 청명환 세 알을 태을문에 주기로 약속했소.”

“아……!”

“허어!”

“이 어찌…… 감사를 드려야!”

조금씩 편안한 표정이 되어가는 태을문의 사람들.

“그러지 않아도 되오. 나 또한 화후의 내단이 청명환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란 점을 잘 알고 있소. 해서 내 직접 태을문에 와서 감사의 인사를 하려 한 것이오.”

“…….”

삶이란 참으로 묘하다.

진소운이 화후의 내단을 받았다면.

그래서 모용강이 태을문에 오지 않았다면.

용봉지회와의 마찰로 인해 무림맹과 척을 졌다면.

태을문은 지금 순수하게 태을검제의 무공이 돌아온 것을 기뻐할 수 있었을까?

“더불어 문주께 제안 드리고 싶은 것이 있소.”

“무엇입니까?”

“이참에 두 문파의 교류를 기념할 겸 교환제자를 한번 해보는 것은 어떻소?”

“…….”

교환제자란 각기 다른 두 문파가 무공 교류를 위해 서로의 제자를 파견하여 가르침을 주고받는 것이다.

대체로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들과 같이, 이미 강맹한 무공을 가지고 있음에도 한쪽으로만 치우친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거나 제자들에게 더 많은 경험을 주기 위해 시행하는 제도였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비슷한 규모와 실력을 가진 문파들끼리나 가능한 일이고.

모용세가와 태을문 간에는 교환제자를 한다 해서 모용세가가 얻을 것은 없었다.

이는 모용강이 교환제자란 말로 태을문에 은혜를 베풀려는 의도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얼 말이오?”

“저희 태을문에선…… 배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만……. 아직 태을검제님의 무공도 저흰 보지 못한 상태이고…….”

“허허, 무슨 소리오 문주. 내가 아이들에게 배우게 하고 싶은 것은 태을문의 무공이 아니오. 무공이라면 모용세가에도 차고 넘치오.”

광오한 말이었지만, 모용강이 하는 말이기에 딱히 거만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럼 어떤 걸?”

“바로 태을문의 정신이오.”

“네?”

모용강은 특유의 장난기를 지우고 인자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전에도 철검문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들었소.”

진태산과 강채석이 그날을 떠올리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문이 모욕받는 것은 누구나 분개할 만한 상황이요. 허나, 상대가 자신보다 강맹함에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분개하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소.”

홍문기는 자신도 모르게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뒤를 생각하지 않고 선천지기까지 끌어올린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나, 진소운 그 아이가 이번에 둔 한 번의 수로 인해, 앞으론 용봉지회를 비롯한 무림맹의 그 누구도 태을문을 모욕할 때 목숨을 걸게 될 것 아니겠소.”

“아…….”

“모용세가는 그런 모욕을 받아본 적이 없소. 허나 이는 우리가 강맹하기에 가능한 것이었소. 나는 우리 아이들이 모용세가보다 더 강한 자들 앞에서도 언제나 진소운처럼 당당하기를 바라오.”

“…….”

장로들도 당주들도 입을 꾸욱 다물었다. 모용강의 칭찬에 복받혀 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웠던 것이다.

홍문기 또한 진소운의 생각에 울컥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아 얼른 진태산을 가리켰다.

“크흠, 그런 것이라면 저기 외당의 당주인 저 친구가 잘 알 것입니다. 저 친구가 바로 진소운의 부친 되는 사람입니다.”

홍문기의 말에 모용강이 묘한 눈으로 진태산을 바라봤다.

“흐흐, 알고 있소.”

모용강의 입가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어렸다.

“대체 어떤 방식으로 교육을 해야 그런 아이로 자라는 것이오?”

“……선배님께서 너무 과찬하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진정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오. 내 우연히 그 아이와 동행하면서 장난을 좀 쳤는데. 이 풍백파검에게 무사의 정권 맛을 보고 싶냐는 말을 하는 것 아니겠소? 그처럼 겁 없이 키운 비결 좀 알려주시오.”

“네엣?!”

진태산이 경악했다.

다른 이들의 표정도 진태산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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