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태풍을 기다리는 대붕(2)>
선천지기에 따른 신체의 과부화와 모용강의 일격으로 인해 긴 휴식을 취해야 했음에도, 나는 사제들에 의해 강제로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예요. 생각이 있으신 거예요. 없으신 거예요!”
사련이를 무림학관에 보내놓고, 더 이상 이런 잔소리를 듣지 않을 줄 알았는데.
“선천지기라니……. 정말 기가 막혀서. 그러다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무공을 조금 배웠다고 이제 선천지기를 쓰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된 왕소소의 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뭐, 무공을 전폐 당한다 해도 저희 상단에 와서 일하면 되니 그것도 나쁘진 않았겠지만…… 어쨌든 그런 위험한 행동을 하신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아쉬워하는 것이든, 걱정하는 것이든 하나만 해주련?”
“어쨌든! 이번 용봉지회가 끝나고 나면 아버님께 말씀드릴 생각이었다고요. 물론 화산파에 더불어 점창파가 추가되긴 했지만. 왕가장의 금력이 얼마나 독한지 반드시 보여줄 것이에요.”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천하 4대 거상의 금지옥엽 딸내미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화산파와 점창파가 한동안 곤란을 겪을 것은 분명해 보였다.
“대사형. 이번엔 조금 지나쳤습니다. 제정신이십니까?”
금·은·동 형제 중 나랑 나이 차도 별로 나지 않은 금표가 대표로 나섰다.
“그런 말은…… 대사형에게 하기엔 조금 불경스러운 말이 아니더냐.”
“사람이 같은 잘못을 세 번 이상 하면 그건 버릇이 든 것이라 합니다. 다시 이런 짓을 하시면 태을문의 기둥에 꽁꽁 묶어두고 세끼 밥만 챙겨드리겠습니다.”
금표의 살벌한 말에, 모여있던 사제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인다.
나 없는 사이 언제 이렇게 단합력이 좋아진 거지?
“형님. 진짜 진심입니다.”
한쪽에 선 강유성과 제갈천기.
제갈천기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부리부리하게 떠져 있었다.
“농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시면 무량불괴멸혼진을 넘어서는 기관진식을 만들어 그 안에 형님을 넣어둘 것입니다.”
“…….”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을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렇게 내가 시달리고 있을 때.
누군가 기감을 무시하고 갑자기 들어왔다.
나는 반쯤 면사로 가려진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 누군지 알아차렸다.
‘확실히 무리하긴 했나 보군. 그녀가 오기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다니.’
“…….”
사제들은 재잘거리던 말을 멈추고 그녀를 적대감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용봉지회의 모용설이었다.
본래 밖에서 지내기로 했던 용봉지회는 종벽기와 화중산의 부상으로 결국 태을문에서 머물기로 했다.
바로 움직이기엔 모용강의 눈치가 보였고, 특히나 종벽기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괜찮으신가요?”
“…….”
과거보다 조금 더 앳된 목소리. 기억의 중첩으로 머리가 혼란스러워진 내가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왕소소가 표독스런 눈으로 나섰다.
“이런 사태를 만든 사람이 할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요?”
왕소소의 말에 사제들이 일제히 적대감을 표하기 시작했다.
사제들이 소소를 대장처럼 따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선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모용설이 면사를 벗고 정중하게 포권을 쥐었다.
“…….”
모용설을 적대하던 남자아이들이 그녀의 외모를 보곤 움찔거리더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들을 보며 피식 웃고는 말했다.
“잠시 자리 좀 비켜주련?”
“오라버니!”
“태을문에 온 손님이시다.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는 것이 맞지 않더냐?”
“하지만!”
“분노하는 것은 좋다만, 그나마 모용설 소저는 우리를 두둔해 주셨던 분이다.”
“……알겠습니다.”
내가 왕소소의 머리를 쓰다듬자, 입을 오물거리던 왕소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설을 노려보던 왕소소가 홱하니 돌아섰다.
왕소소를 시작으로 사제들이 모두 나갔다.
“사제들이 실례를 범한 점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만약 저였어도 똑같이 했을 거예요.”
정작 용봉지회에서 종벽기와 화정산을 말렸던 것은 모용설이었건만, 그녀는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미 다 정리된 일이지 않습니까. 저 또한 실례를 범했으니, 더 이상 서로 미안한 마음은 가지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녀의 슬픈 표정을 보는 것은 나에게 곤욕이다.
다행히 그녀도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한마디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말씀하시지요.”
“화정산과의 비무에서 어찌하여 그렇게 억지로 이어가신 건가요?”
“…….”
“제가 보기엔 분명 화정산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제가 잘못 본 건가요?”
나는 그리운 기억을 되살려 투사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사람이었지.’
정의롭고, 공정한 사람이다. 자신이 속한 용봉지회와 사건이 있었기에, 이렇게 쫓아와서 이야기하는 일이 불편할 것이 분명함에도 잘못된 부분을 따짐에 거침이 없다.
전생에서도 그녀가 용봉지회를 나오게 된 계기는, 홍문기가 주화입마에 빠짐으로 인해 화정산과 대립한 덕분이었으니까.
“잘 보셨습니다.”
“제가 잘못 본 거라면…… 네?”
“화정산 대협께서 ‘태을검제의 검식을 보고 싶다.’ 하셨고, 그분의 의견에 부흥하려 했던 겁니다.”
“…….”
“종 대협이 끼어들었을 때도 적당히 끝낼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은 것도 일부러 그런 것입니다.”
나의 뻔뻔한 말에 모용설의 얼굴에 당황이 어린다.
아직은 그녀도 어린 이십 대 초반의 여성일 뿐이다.
“어째서…….”
“사제들이 보고 있었습니다.”
“…….”
“문의 어른들이 보고 있었고요. 그런 자리에서 공공연하게 태을검제를 들먹이며 태을문을 모욕했습니다.”
“…….”
“지금에 와선 그 조롱이 현실이 되긴 했지만, 화정산 대협이 태을검제님을 들먹인 건 태을문을 조롱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모용설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한다.
“전 어린 시절에 태을문 소속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태을문 소속이라는 것이 부끄러웠거든요.”
“……아니 저, 잠시…….”
모용설은 잠시 문 쪽을 바라보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듯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그녀가 왜 이러는지 몰랐기에 나는 그냥 말을 이었다.
“부끄러워 숨기다 보니, 싫어지고, 사문이 싫어지니 사제들과 어른들마저도 싫어하게 되더군요. 저에겐 모두 가족 같은 사람들인데 말이죠.”
이건 내 전생을 빗댄 나의 이야기. 전생의 그녀가 듣고 싶어 했지만 차마 하지 못했던 이야기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제가, 제 사제들이, 제 사문의 어른들이, 태을문을 싫어하지 않게 하려고. 태을문의 소속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도록. 태을문의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
모용설은 혼란스러운지 연신 눈을 깜박였다. 아직은 그녀에게 너무도 생소한 이야기일 것이다.
모든 것을 잃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일 테니.
“무리한 것은 맞습니다. 용봉지회 전부와 대립하려 했던 것도 잘못된 일이었죠. 이 점에 대해선 모용설 소저에게도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전 또 같은 행동을 할 겁니다. 저의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제 목숨이 달렸다 하더라도.”
“…….”
모용설은 얼굴이 붉게 물든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너무 몰아붙였나?
그래도 그토록 그리웠던 사람인데. 그런 이에게 이런 안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조금 가벼운 주제로 이야기를 더 이어가려는 찰나.
“우아아아앙.”
“엉엉엉.”
“흑흑!”
돌아갔다고 생각한 사제들이 울면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대사형! 절대 태을문을 원망하지 않을게요!”
“대사형! 저 또한 대사형과 똑같이 행동하겠습니다.”
“오라버니! 저도 오라버니를 지킬게요!”
“형님!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완벽한 기관진식을 만들어 내도록 하겠습니다.”
우르르 몰려드는 사제들에 밀린 모용설이 이내 신색을 회복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돌아갔다.
“아, 아니…… 모용 소저…… 대화를 좀 더…….”
“대사형!!”
“대사형!!”
“오라버니!”
“형님!”
벗어나고 싶은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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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을 나온 모용설은 격하게 뛰는 심장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했다.
‘왜 이러지.’
이게 처음이 아니었기에 모용설은 더욱 당황하고 있었다.
진소운이 비무에 난입한 종벽기에 맞서 검을 휘두르는 순간부터, 모용설의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었다.
그 눈빛이, 그 입매가, 그 행동이,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는다.
아주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따라 기행을 다니다 맞닥뜨렸던 흑도 고수들과의 일전.
당시의 할아버지는 패배를 직감하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그 모습은 모용설의 머릿속에 무사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낙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무공을 익히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할아버지의 그 모습이 자신을 비롯해 아무나 할 수 없는 행동임을 알게 되면서 그런 모습을 찾는 건 포기했었다.
한데, 다른 곳도 아니고 태을문에서 그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래도 화정산을 상대하던 방식엔 분명 잘못된 점이 있었다.
그것에 대해 따지려 했지만, 뻔뻔하게 모든 걸 인정하는 그.
그리고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
그의 말에 다시금 이성이 멈추고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대체 뭐지?’
이해할 수 없었음에도 한편으로 이해가 될 것 같았던 그의 말을 되짚어 보는 와중에.
“누님!”
생각이 끊김과 동시에 모용설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너!”
“어! 어!”
모용설이 추혼보법을 밟는 것을 보곤 모용재화도 기겁하며 보법을 밟아 뒤로 물러난다.
하지만, 이미 별호에 철검이 들어갈 정도로 높은 성취를 이룬 모용설의 발재간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모용재화의 목에 모용설의 팔이 감긴다.
“할아버님이랑 올 거였으면 미리 말을 했어야 할 거 아냐!”
“아아……! 아파! 나라고 누님이 여기 올 줄 알았겠어!”
겨우 모용설의 팔에서 벗어난 모용재화가 목을 어루만지며 말한다.
“아으…… 진짜 얼른 내단을 복용하든지 해야지 진짜…… 근데 어디서 오는 길이야? 이쪽은 진소운 대협의 집이라고 하던데.”
“……맞아. 그 사람 잠시 만나고 오던 길이야.”
“응? 벌써? 알고 있었어?”
“뭘?”
“진소운 대협이 아버지를 구해줬던 거.”
“……? 그게 무슨 소리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용재화.
모용재화가 그간에 있었던 일들, 모용강과 자신이 태을문에 오게 된 것까지의 일을 이야기할 때마다 모용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설마, 그사이에 진소운 대협에게 뭔가 실수한 건 아니지?”
“…….”
모용설은 특유의 하얀 피부가 더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사이에 진소운 대협에게 뭔가 실수한 건 아니지?”
거듭된 질문에도 대답이 없는 모용설.
결국 모용재화는 스스로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에이…… 아니겠지. 아무렴 아버님을 위해 목숨을 걸어준 사람한테 누님이 실수하거나 그럴 사람은 아니잖아?”
“…….”
모용설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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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들은 한참이나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게 뭔 난리냐?”
강채석이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쓰며 들어섰다.
“누가 죽기라도 했어?”
“아, 아니 그게 당주님!”
“오라버니가요! 오라버니가요!”
“흑흑.”
두서없이 말을 하다 말다 울음을 터트리는 사제들.
이야기의 전말을 몰라 짜증이 치솟는 강채석의 얼굴.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다.
다시 들어가 잠이나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소운. 나오거라. 문주님께서 부르신다.”
“……네.”
하지만 그럴 순 없다.
“……다녀오세요. 대사형.”
이번엔 사제들도 그 분위기를 짐작하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드디어 태을문의 역사에 가장 오랜 약속이 이뤄지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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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현전으로 향하는 길. 강채석은 굳은 얼굴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의 심정을 알 수 있다.
그가 태을문 내에선 최강자였지만, 그랬기에 태을문의 대표로서 무림의 높은 벽을 항상 마주해 왔을 테니.
그 어떤 말도 쉽게 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대현전에 모여있는 태을문의 모든 어른들.
“제자 진소운 어른들께 인사드립니다.”
“…….”
홍문기 문주를 비롯해 연로한 장로들과 태을문을 떠받드는 당주들까지.
그들의 표정 모두 강채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
엄숙하고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었다.
과연 어떤 말을 누가 먼저 해야 하는가?
태을검제의 약속을 전달하는 나도. 그 약속을 받을 태을문의 사람들도 처음 경험하는 사건에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
나는 그저 고요히, 침묵 속에 그들의 생각이 정리되길 기다렸다.
양손을 모아 입을 가린 홍문기는 내 정면 가장 먼 곳에서 가장 복잡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진소운.”
무거웠던 그의 입이 떨어지는 순간.
나 또한 예상되는 그 질문에 대답을 준비했다.
“네.”
“풍백파검 어르신께 무사의 정권 맛을 보고 싶냐는 협박을 한 게 사실이냐?”
“맞습니다. 바로 태을검제님의……응?”
대답하다 이상함을 느껴 고개를 갸웃거렸다.
“풍백파검 어르신께 무사의 정권 맛을 보고 싶냐는 협박을 한 게 사실이라고? 내가 너를 그리 가르쳤더냐!”
홍문기 문주도, 장로들도 당주들도 당최 어디 이런 미친놈이 있나 경악하는 눈빛이었다.
특히 아버지는 저 먼 곳에서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선 이들이 하는 행동의 원인 제공을 한 사람의 얼굴이 금방 떠올랐다.
‘이 양반이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