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지옥 정시 제 '一'관문(3)>
“그게 무슨 소리죠?”
여미미의 얼굴이 처음으로 차갑게 변했다.
“저는 ‘식객’의 자격을 원한다 말씀드렸습니다. 단순히 정보를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요.”
“지금 내 말을 믿지 않는 건가요?”
“문주님이라 이야기하시는 분의 입에선 ‘식객’이란 단어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충분히 전달했다 생각하는데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거죠.”
“지금 내 이야기 아직 안 끝났어요!”
무사들이 주르륵 넓혀 서며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다.
그때.
내가 바라보던 노파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되었다. 그만하거라.”
“…….”
여미미가 입을 꾹 다물고 한쪽으로 물러섰다.
“넌 충분히 했다. 이 아이가 보통내기가 아니었던 것이지.”
흰 머리카락 몇 올이 살짝 내려온 얼굴엔 부드러운 주름들이 차 있다.
조금 구부정한 자세로 위·아래를 쓸어 보는 모습은, 숫제 손녀딸이 데려온 사위감을 보는 마음씨 따뜻한 할머니의 모습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내공 한 줌 가지지 않은 노파가 바로 하오문의 당대 문주 여미미였다.
“죄송합니다. 문주님.”
여미미 역할을 했던 여인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다.
“그래도 궁금하긴 하구나. 어찌 알았느냐?”
전생에 그녀를 본 적은 없었다.
다만 그녀에 관한 정보는 알고 있었다.
“방에 들어올 때, 노사들께서 저를 한 번씩 보셨는데. 문주님은 저를 보지 않으시더군요.”
“!”
미동도 없던 고용인들이 다들 움찔댄다.
난 내가 받은 자료를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진정 식객이 되었다면 이런 쓸데없는 정보 따윈 받지 않았을 겁니다.”
“쓸데없다니. 그런 무례한 말이 어딨죠?”
여미미 역할을 했던 여인이 입술을 깨문다.
나는 그녀와 여미미를 번갈아 보며 그녀를 어떻게 호명해야 하는지 물었고, 여미미는 금방 눈치를 채고 이름을 알려주었다.
“내 첫 번째 제자 해령이네.”
“네, 해령 선배께서 주신 정보는 주요 인물들만 나열되어 있을 뿐입니다. 진정 제게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면 인물들에 대한 것이 아닌, 제가 노려야 할 산채들과 그 산채를 누가 노리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
해령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아마도 이 정보는 해령 본인이 직접 준비한 것이겠지.
여미미가 무공 한 자락 익히지 않았음에도 하오문의 문주가 된 것은, 단지 그녀의 인망이 훌륭해서만은 아니었다.
다른 정보 단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속성과 정확성, 그리고 자체 분석을 통한 훌륭한 예측 등의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하오문의 진정한 저력이었다면 ‘식객’ 자격 검증 따윈 치르지도 않았을 겁니다.”
“…….”
“…….”
내 한마디에 방 안의 사람들 모두에게서 적개심이 풍겨 나왔다.
하오문도들에게 하오문은 단순히 자신들이 속한 방파의 수준이 아니다. 자신들의 친구이자 가족이고, 혈육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다.
이 끈끈한 유대가 천하에서 유일하게 개방과 맞먹는 정보력을 갖추게 된 저력이었다.
“우리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다면, 우리가 ‘식객’의 자격에 대해서 높은 검증을 하는 이유도 알고 있겠지?”
역대로 하오문의 식객들은 강호의 절대자들뿐이었다. 그리고 하오문의 긴 역사 동안 그 숫자는 열 손가락을 넘지 않았다.
자신의 세력을 만들지 않고, 심산유곡을 터전 삼아 유유자적 살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하오문의 정체성과 관련 있다.
하오문의 이익과 식객의 이익이 서로 상충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되기 때문.
하오문은 언제나 하오문의 문도들을 보호하는 데 제일 목표가 있었으니까.
“자네는 태을문에 적을 두고 있고, 그 태을문은 지금 비상하기 위해 때를 기다리고 있지. 단지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식객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충분하지 않겠나?”
“강호에 적을 두고 살아가면서 강호와 인연을 끊어 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애당초 강호의 정보 따위는 팔아먹지 말았어야죠.”
“…….”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마령고원의 사태는, 하오문의 폐쇄성이 불러온 비극이었습니다. 만약 이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면, 개방과 하오문, 둘 중 누가 더 큰 손해를 입겠습니까?”
전생에선 하오문은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당하였다.
양군백의 능력이 없었다면 하오문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전 하오문의 정신을 좋아합니다. 힘없는 자를 보호하기 위한 단체. 제가 만약 점소이였다면 든든하기 이를 데 없었겠지요. 하지만 이미 하오문은 강호 전체의 규모로 커졌고, 기존의 방식대로라면 언젠가 두 번째 마령고원의 사태, 세 번째 마령고원의 사태가 또 일어날 겁니다. 이제 그만 우물에서 나올 때가 되었습니다.”
여미미는 주름진 얼굴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자네에게 그 해결책이 있단 말인가?”
개방은 최종적으로 마교의 재림을 예측하지 못했다.
경쟁자가 없는 정보 단체는 결국 자가당착에 빠져버리고, 객관적 사실 분석보단 주관적 이익에 의한 정보처리에 치중하게 되었다.
어쩌면 하오문이 끝까지 존재했다면 마교의 재림에 대한 정보는 다른 방향으로 풀렸을지도 모를 이야기.
“방금 말씀하셨다시피 장차 태을문은 날아오를 겁니다. 그때 함께하시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온갖 감언이설을 다 동원하는구나. 순간적으로 동의할 뻔했다.”
이런 여미미의 의심이 기분 나쁘지 않다. 그런 그녀의 결벽증에 가까운 성격이 지금의 하오문을 만든 것이니까.
“역시나 넘어오시지 않는군요.”
내 넉살에 여미미가 웃음을 짓는다.
“흘흘…… 뻔뻔한 놈이구나. 그렇다 해도 언변에 동화되었으니 기회를 주지 않을 수는 없지.”
“문주님!”
해령의 얼굴이 처음으로 사색이 되었다.
“저 아이가 지적한 문제는 우리 또한 생각한 바 아니더냐. 넌 자존심 때문에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을 무시하고 싶은 것이냐?”
“…….”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자격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세 번째의 자격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겠지?”
“하오문에 도움이 되는 사람일 것.”
“흘흘…… 그것 아느냐? 이건 대외적으로 한 번도 발표된 적 없는 기준이다. 식객이 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언제 검증을 마쳤는지도 몰랐지.”
“그렇습니까?”
나 또한 심현각의 기밀 사이에서 얻은 정보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너로선 당장 식객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 무의미한 일이겠지?”
여미미는 이미 내가 하오문의 정보를 어떻게 쓸지까지도 예상하는 듯했다.
“자네에게 기회를 주겠네. 물론 자네에게도 쉽지 않을 것이지만.”
“무엇입니까?”
“네가 왕가장주와 친분이 있다 들었다.”
“…뭐 그런 편입니다.”
“왕가장의 왕금산이 가진 가장 귀한 것 중 하나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것을 줄 수 있겠느냐?”
해령이 갑자기 여미미를 막아섰다.
“문주님…… 괜찮습니다.”
“가만히 있거라.”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서는 해령.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난 알 수 없었다.
“줄 수 있겠는가?”
“뭔지 알아야 장주님께 달라 이야기하지 않겠습니까?”
여미미는 해령을 한번 본 뒤 나에게 말했다.
“그것은 내가 직접 이야기할 것이다.”
여미미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오문주 여미미는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얼마나 중요한 일이기에 하오문주가 직접 얼굴을 보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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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소운이 지적한 지점은 여미미와 해령이 과거 늘상 해왔던 고민이었다.
특히 해령은 문주인 자신보다 더욱 진취적으로 하오문을 개방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왔다.
하지만 해령의 남편이자 자신의 둘째 제자였던 태공이 정체가 알려져 죽은 뒤로, 해령은 여미미 자신보다 더욱 보수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진소운 말대로 이제 한계가 다다랐다.
지부 곳곳에서 문제가 생겨나고, 내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다.
그런 현실을 알면서도 해령은 태공의 기억 때문인지,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여미미는 한편으론 진소운에게 기대하고 있는것이다.
그가 해령의 생각을 바꿔줄 수 있기를.
자신의 불쌍한 딸이 제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벗어던질 수 있기를 말이다.
그런 생각 속에 여미미는 왕 장주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다시 시간을 잡으려 했으나, 진소운은 곧장 왕 장주를 만나러 가자 했다.
“전 시간이 없습니다.”
진소운이 그리 말했지만, 그것이 가능할 거라 생각지 않았다.
애초에 왕금산이 동네 약방 노인네처럼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헌데…….
“으하하하. 바빠서 그냥 갈 줄 알았더만, 결국 나를 보고 가는군.”
왕금산의 말에 여미미와 여미미 역할을 하고있는 해령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관대작과 무림의 유명인사들도 만나기 위해선 몇 주 전부터 약속을 잡고, 심하면 몇 달 전에 약속을 잡기도 한다.
그럼에도 당일에 왕금산에게 바쁜 일이 생기면 못 만나는 일이 부지기수.
헌데 지금은 되려 왕금산이 진소운을 만나기 위해 몇 주 전부터 기다린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가.
“갑작스레 찾아와 장주님의 시간을 빼앗은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업무를 잔뜩 쌓아놓았던 왕금산은 일을 한쪽으로 미뤄두고 진소운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저따위 일쯤이야 하루 이틀 늦어진다고 대수인가? 그래. 결국 무림학관 시험을 본다고?”
“네.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장주님의 도움을 받고자 이분들과 함께했습니다. 하오문에서 오셨습니다.”
자연스럽게 하오문을 소개하는 진소운.
해령은 앞서 나섰다.
“반갑습니다. 하오문주 여미미라고 합니다.”
왕금산을 만나는 자리이기에 본래의 모습으로 나가고자 했지만, 해령은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가여운 아이에게 모질지 못한 여미미는 결국 해령의 뜻대로 하도록 두었다.
해령의 포권에 왕금산은 그저 고개를 까딱할 뿐이었다.
“반갑소이다. 왕 모라고 하오.”
일문의 문주에게 하기엔 과히 무례한 행위.
여미미가 아는 왕금산의 모습과는 분명 달라 보였다.
“이번 시험에서 하오문이 필요한 건가?”
“네.”
“음…… 그렇군. 어떤 정보가 필요한지 물어봐도 되겠나?”
이상하게도 하오문의 정보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왕금산이었다.
하오문 문주에게는 무례하게 대하고, 진소운에게는 상인의 언어가 아닌 부모의 언어를 쓰고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시험의 모든 정보가 필요합니다.”
“하긴 그런 정보라면 개방과 하오문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
왕금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해령이 나섰다.
“저희 하오문에선…….”
헌데, 왕금산이 해령의 말을 또 끊어버리는 것 아닌가.
“아니면, 왕가장이 도와주는 건 어떤가?”
“…….”
해령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이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기도 전에 약속이 끝날 위기였다.
“어떻게 말입니까?”
“전국의 있는 왕가장에 연관된 사람들을 동원해 자네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주겠네. 어차피 자네를 중심으로 정보가 필요한 일일 테니. 강호 전체의 규모가 필요한 것도 아니지 않나.”
“흠…….”
그의 말마따나 크게 틀린 이야기도 아니다.
어차피 강호 전체에서 사람을 고용한 왕가장주라면 하오문만큼은 아니겠지만, 그에 못지않은 정보망을 개설할 수 있을 것이다.
분석력과 신속함은 별도의 이야기겠지만.
여미미가 타는 속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을 때.
다행히도 진소운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저를 돕겠다고 장주님이 피해를 보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크하하하! 이 사람아! 무슨 그런 걸 신경 쓰나! 자네가 원한다면 내 왕가장도 다 넘겨줄 수 있는데.”
진소운과 왕금산이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해령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오문도 출신이지만, 문주라는 이름을 내뱉었을 때. 강호에서 그녀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모욕을 겪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무례하시군요.”
“응?”
“그렇게 하오문이 우습나요?”
왕금산이 표정을 바꾸었다.
엄숙하고 딱딱한 표정.
여미미와 마찬가지로 내공 한 줌 없었지만, 천하를 오시할 것 같은 위엄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의 입이 차갑게 열렸다.
“나야말로 묻고 싶군. 얼마나 이 내가 우습기에 하오문주를 사칭하는 것이지?”
“?!”
왕금산의 말에 여미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역시나 이런 연극은 함부로 해선 아니 되었다.
그가 처음부터 하오문에게만 유독 냉대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오문주의 정체가 안개에 싸여 있긴 하지만, 그에게 열셋의 제자가 있다고 들었지. 첫 번째 제자를 들인 것이 십 오 년 전이니. 그대가 하오문주라면 하오문은 정보 단체가 아니라 애들 소꿉장난 같은 단체겠지.”
“…….”
해령의 얼굴이 흙빛이 됐다.
가뜩이나 쉽지 않은 부탁을 하는 마당에 날 선 비판까지 받게 되자, 더욱 어려운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자네도 관두게나, 정보라는 건 신뢰가 가장 중요한 법. 저리 믿을 수 없는 이들과 함께 큰일을 도모할 수 있겠나.”
결국 여미미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여미미는 어깨가 축 처진 해령을 뒤로 물리고 정중하게 포권을 쥐었다.
“사죄드리겠습니다. 제자가 이 힘없는 사부를 걱정하여 한 짓이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태공을 잃은 해령의 정신적 충격은 너무 크다.
거기에 더불어 둘 사이에 하나 남은 아들까지 죽을병에 걸려, 해령은 언제라도 미쳐버릴 수 있는 상태였다.
여미미는 그런 해령에게 더 이상의 비극이 없길 바라며 그녀가 하자는 대로 해왔지만, 지금에 와선 되려 그것이 악수로 작용한 것이다.
“…….”
왕금산은 말없이 한참이나 자신을 보았다.
그러더니 대뜸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되었소. 그만 일어나시오. 일문의 문주가 그리 고개를 숙이는 것도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니.”
과연 왕금산은 단박에 자신이 문주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과연 무엇으로 자신을 구분한 것일까? 진소운 때처럼 하인들도 없었는데.
4개 거상 중 왕금산이 가장 까다롭고 지혜롭다더니, 그 말이 과연 소문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대들에게 실망했으나, 내 소운이의 얼굴을 봐서 한 번은 넘어가겠소.”
여미미는 멍하니 진소운과 왕금산을 보았다.
대체 진소운에게 무엇이 있었기에 왕금산이 저토록 신뢰하는 것일까? 단지 딸을 구해주었다는 것만으로 저런 신뢰가 가능한 것인가?
“내게 어떤 것이 필요한 것이오.”
따른 생각을 할 시간도 없이 여미미는 정신을 다잡았다.
여기까지 온 이유는 해령의 비극을 막아줄 단서를 찾기 위함이니까.
여미미는 해령을 한번 본 뒤 말했다.
“따님께서 태양지체를 앓았다 들었습니다.”
“호오. 과연 하오문이오.”
왕가장이 왕소소에 관해선 워낙에 비밀로 해왔기에, 왕가장 내에서도 왕소소의 체질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하오문도 최근에서야 왕가장에서 팔려고 내놓은 기물들의 연원을 따지고 올라가서야 알게 되었던 정보.
“그 치료법이 필요합니다.”
여미미의 말에 진소운과 왕금산이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왕금산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이 움찔거리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뭐지?’
이상함을 느꼈으나 여미미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하오문 전체를 다 동원하여 봤지만, 도저히 알아낼 방법이 없더군요. 부디 그 체질을 치료한 사람과 치료법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해령의 아들 또한 왕소소와 비슷한 질병을 앓고 있다.
천하의 그 누구도 치료할 수 없다는 구음절맥.
해령에게 그 아이마저 없다면 해령이 정말 어찌 될지, 여미미는 예측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왕소소를 치료한 그 치료법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다.
태양지체의 체질을 벗어던지고 태을문에서 무공을 익힐 정도로 건강하게 바꿀 수 있다면, 구음절맥도 가능할 것이니까.
“……허허.”
“그것을 알려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간청드립니다.”
여미미와 해령이 고개를 숙였다.
왕금산은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진소운을 보았다.
진소운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고, 왕금산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그 사람을 알려주겠소.”
“……진정 알려주실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소.”
여미미와 해령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귀한 치료법이라면 억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있는 법이었으니까. 진정 진소운의 부탁만으로도 그것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대신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조언 하나 하겠소.”
무언가 커다란 보상을 바랄 줄 알았건만, 왕금산이 조언을 하겠다는 말에 여미미와 해령은 기꺼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직을 운영함에 있어서 의심과 확인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 맞소. 허나, 진정 큰일을 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신뢰가 중요하오.”
여미미와 해령은 왕금산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어떤 의미인지 말씀해 주신다면 더욱 귀담아듣겠습니다.”
“그대들이 애당초 소운이에게 신뢰를 보였다면 이곳까지 올 일이 없을 것이란 이야기였소.”
“……?”
“그 치료법을 가지고 있는 건 소운이였으니까.”
여미미와 해령의 고개가 휙 하니 돌아갔다.
그들의 상식으론 진소운이 그 치료법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신뢰라는 것은 쌓기 매우 어려운 것이오. 첫 시작이 틀어졌다면 그것은 더더욱 힘든 것이지. 그렇기에 처음 신뢰를 보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오. 상대가 나를 배신하면 더욱 크게 갚아주면 되는 것 아니오. 하오문이 이미 그 정도의 규모가 되는 문파라는 것은 알고 있소. 그러니 먼저 신뢰를 보이시오. 이것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그 조직이라는 것이 얼마나 빠르게 무너지는지 볼 수 있을 것이오.”
무려 천하 4대 상인 중 한 명이 자신의 경영지침을 알려준 것이었다.
여미미는 감읍하며 고개를 숙였다.
“오늘 들은 말을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되었소. 애당초 소운이가 그대들의 힘이 필요하다 이야기 하여 한 것에 불가하외다. 인제 그만하고 편하게 이야기나 좀 나눕시다.”
왕금산은 딱딱한 표정을 풀고 시비에게 저녁을 준비하라는 이야기를 했다.
“자네, 나에게 이런 상황을 겪게 하고 그냥 갈 생각은 아니지?”
왕금산은 종전의 엄숙한 표정을 풀고 익살스런 표정으로 진소운에게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전 장주님과 저녁을 먹으러 온 김에 이분들을 소개해 드린 겁니다.”
왕금산이 진소운을 사위로 낙점하고 있다더니 그것이 사실이었나 보다.
“크하하. 나중에 상인이 되려면 거짓말하는 법 좀 배워야겠군.”
“무슨 말씀을. 제가 태을검제님의 진전을 찾았다는 이야길 듣지 못하신 겁니까? 저 조금 있으면 무림의 고수가 될 겁니다.”
“대신 자네가 선천지기를 쓰다가 내공을 잃을 뻔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
“끙…….”
“일단 가세! 내 자네가 마령고원에서 활약한 이야기부터 좀 들어야겠으니. 그 이야기의 끝이 무려 창궁상단을 받아낸 거라면서?”
왕금산은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기뻐하며 진소운을 이끌고 나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여미미와 해령이 어찌해야 하나 갈팡질팡하는 사이, 왕금산이 말했다.
“함께 안 가실 겁니까? 저희 왕가장의 특급 요리사 실력이 아주 출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