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관문을 뛰어넘는 흑염룡>
안휘성을 넘어, 천목산이 보이기 시작하자 은호의 얼굴이 사색이 되기 시작했다.
“사형, 진심 쌍막채로 일관 시험을 치실 생각이십니까?”
“응.”
“……혹시 태을진경 속에 이지를 상실케 하는 부작용이…….”
결국 은호는 뒤통수를 한 대 맞았다.
“이 자식이 가면 갈수록 대사형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아니, 솔직히 그렇잖아요. 무림맹에서도 굳이 가지 말라는 데를 왜 목숨 걸고 들어가려고 하십니까.”
이번 지옥 정시에서 무림맹이 지목한 산채들은 산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반면, 녹림칠십이채는 강호 주요 지역에 자리를 잡기에 지역 패자의 성향이 짙다. 그렇기에 일(一)관문의 시험으로 녹림칠십이채를 토벌하겠다고 나서는 이는 없다.
더구나 쌍막채는 이름 그대로, 천목산을 중심으로 두 개의 각기 다른 산채가 터를 잡고 있다.
한 마디로 한번에 두 개의 산채를 상대해야 한다는 말.
“그러니까요. 왜 굳이 벌통을 건드리려 하냐 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내가 쌍막채를 목표로 한 건, 이 쌍막채가 다른 사천 개의 산채보다 처리하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내가 챙기는 거지.’
은호는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때론 어려워 보이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어찌 한낱 참새가 대붕의 깊은 뜻을 알리오. 투덜거리는 은호의 말을 무시하고 달리니, 목적지인 목기현에 다다랐다.
“사형, 어디 전쟁이라도 났나 본데요…….”
목기현의 상태는 전생에 봤던 보고서 속 내용보다 처참했다.
“생각보다 심각하군.”
곳곳에 쓰러져 가는 집들이 즐비했고, 장사하던 흔적이 있던 곳 대부분은 문이 닫힌 상태.
길가에는 해를 쬐며 짚을 삼는 깡마른 노인과, 꾀죄죄한 꼴로 돌아다니는 아이들만 있을 뿐이었다.
“…….”
“…….”
“…….”
마을 초입까지 재잘대던 세 형제는 마을의 기이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입을 꾹 다물었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겨우 찾은 객잔에 들어서니, 점원은커녕 오직 카랑한 생김새의 노인만이 주방에서 손을 닦으며 나올 뿐이었다.
“주문.”
“저희가 며칠 노숙을 해서 말입니다. 당장 되는 음식 종류가 있습니까?”
“음식을 먹고 싶으면 서호로 가든 항주로 가시오. 우린 국수밖에 안 되니까.”
“……그럼 그걸로 주십쇼.”
주문받은 노인은 대답 없이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나는 주변을 돌아보며 내가 찾는 인물이 왔는지를 살폈지만, 객잔 내부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모두 나이 든 노인들뿐이었다.
‘분명 오늘 목기현에 도착해 있을 텐데.’
분위기에 압도되어 침묵으로 일관하던 세 형제.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은호가 뭔갈 깨달은 듯 말했다.
“사형,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없네요. 다들 도시로 돈을 벌러 나간 걸까요?”
국수와 물을 가지고 나오던 노인이 거칠게 음식들을 내려놓았다.
“이 마을에서 함부로 그런 소리 말게.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이들에겐 무인의 검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
노인의 날 선 반응에 은호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나는 노인의 반응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만통부의 기록에 따르면 목기현이라 불리던 이 마을은, 항주와 서호로 향하는 물자와 사람들 덕에 늘상 풍족한 곳이었다.
하지만 쌍막채의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새로운 채주들이 들어서면서, 인근 마을에 대한 수탈이 말도 못 하게 심해졌다.
그로 인해 마을의 젊은 남녀들이 모두 죽고, 노인과 아이만 남은 상태. 거기에 더불어 기존 통행료보다 세배나 오른 천목산의 통행료 때문에 더 이상 상인들도 이 길을 오가지 않았다.
삶의 의욕과 희망마저 잃은 마을 사람들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것을 막고 쌍막채를 접수하는 인물이 있지.’
덜컥!
낡은 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린다.
나는 등 뒤에 느껴지는 강대한 기파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보게, 주인장!”
한 남자가 무리를 이끌고 들어섰다. 호탕한 목소리가 썰렁한 객잔을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기록대로 정확한 날짜, 정확한 시간에 도착했다.
“여기 오향장육과 백화주를 내오게나!”
거대한 풍채, 평범한 여자 허리만큼 거대한 팔뚝을 가진 산적처럼 험한 얼굴의 남자.
“가가, 이런 곳에서 오향장육을 먹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품에 안긴 미모의 여인.
바로 미래의 녹림맹 맹주 산왕 방두칠과 녹림맹의 지모 백소령이었다.
주방에서 나온 노인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오향장육? 그딴 걸 먹고 싶다면 서호나 항주로 가시오.”
노인의 멈춤 없는 질주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정말이지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노인이지 싶다.
우리야 약관 전후의 얼굴이니 그렇다 쳐도, 방두칠은 외적으로 보이는 모습부터 위압감이 장난이 아닐 텐데. 노인은 진정 죽음 따윈 두려워하지 않는 듯 모두에게 공평하게 꼬장꼬장하게 대하고 있었다.
방두칠이 누구인가?
역발산기개세.
항우의 재림이라 불리는 이 남자는 천강무극체(天罡無極體)를 타고나 별다른 수련 없이 초절정에 이르는 천외천 적인 존재.
사문도 없이 연인과 동료들만으로 무림학관 정시를 치르는, 와중에 한 아이의 ‘은전 한 냥’짜리 의뢰를 받고 쌍막채를 토벌했다.
이 와중에 단전에 손상이 가면서 결국 무림학관 정시는 치르지 못했지만, 그 손상입은 단전으로도 훗날에 녹림칠십이채를 모두 통일하여 녹림맹을 만들고 산왕의 자리에 오르는 인물이었다.
참으로 겁 없는 노인네였다.
“크하하하하하! 고약한 노인네구려. 그래. 그럼 뭘 먹을 수 있소?”
“국수.”
“그래? 그럼 국수를 있는 대로 다 가져오시오.”
“……기다리시오.”
전생에 나는 그와 몇 번이나 함께 협력하여 마교를 상대로 싸웠었다. 그는 최초로 녹림을 지배한 진정한 녹림왕이었지만, ‘은전 한 냥짜리 의뢰’의 일화가 보여주듯 의기 넘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쌍막채와의 전투에서 겪은 상처가 악화되어 젊은 나이에 단명하지만 않았다면, 그리고 무림맹이 녹림맹과 제대로 협력하기만 했다면, 마교를 강남에 묶어둘 수 있었으리란 것이 소정대의 군사였던 제갈천기의 생각이었다.
물론 의문은 있었다.
천강무극체를 가진 그가 어찌하여 단전에 복구가 불가능한 손상을 입었는가 하는 의문.
그와의 술자리에서 몇 번 물어 보았지만, 그는 그저 미숙했기 때문이었다고 이야기할 뿐이었다.
“주인장, 이게 단가?”
노인이 탁자를 가득 채울 만큼 국수를 가득 내왔지만, 방두칠과 그의 부하들은 썩 내켜 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게 다요. 그보단 돈은 있소?”
노인이 의심스런 표정으로 방두칠을 바라보자, 백소령이 웃으며 은전 한 개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술이 있으면 함께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러시오.”
백소령의 웃는 얼굴에는 아무리 고약한 심보도 별수 없는지, 노인이 헛기침하고 식당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여기 잘 먹었습니다.”
내가 국숫값을 내밀었다.
“…….”
내가 건넨 은전 하나를 멀뚱히 쳐다보다 인상을 쓰는 노인.
“국수 네 그릇 먹고 은전을 내는 경우가 어디 있소?”
“잔돈은 괜찮습니다.”
“…….”
노인은 어쩐지 죄책감이 드는 얼굴이었다.
“형편이 몹시 어려우신 듯 보이는데, 괜찮으신 겁니까?”
난 방두칠과 노인을 이어주기 위해 슬쩍 운을 뗐다.
“……올해 가뭄이 계속되었지, 겨울엔 눈이 좀 와야 보릿고개라도 넘길 텐데.”
아쉽게도 이번 겨울에 절강성에 눈은 오지 않는다. 서호와 항주의 무림맹 지부 보고서에 따르면 재작년부터 시작한 가뭄이 겨울까지 계속되어 절강성 전체가 기근을 겪었고, 천목산 일대는 특히나 아사자가 너무 많이 나와 부패한 현령조차 자신의 곳간을 열 정도였다.
“혹시 쌍막채 때문입니까?!”
은호가 불쑥한 말에 노인의 눈썹이 번쩍 올라갔다.
“뭐?”
“혹시 쌍막채의 수탈 때문에 마을이 이렇게 힘든 거 아니냐 여쭙는 겁니다.”
노인의 눈이 침잠한다.
“내 아까도 말했지만, 이 마을에서 함부로 그런 이야기 하지 말게.”
“제가 알기로 목기현은 서호와 항주를 갈 때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마을이라, 항상 물자와 사람들로 넘쳐난다 들었습니다.”
“……그건 다 옛날 말이네.”
“그렇게 수탈이 심하다면, 무림맹에 도움을 요청해 보지 않은 겁니까?”
은호는 자신이 겪은 듯 분노하며 외쳤고, 노인의 얼굴도 서서히 붉게 달아올랐다.
“해봤네! 해봤어! 하지만 무림맹이 언제 우리 같은 힘 없고 돈 없는 자들을 위해 나서준 적이 있던가?”
“……어찌, 그런…….”
세 형제가 현실에 경악하며 입을 쩍 벌리고 있을 때.
시끌벅적하게 국수를 먹던 방두칠 일행도 조용히 이편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 자네들은 이 마을에 있으면 안 되겠군. 어서 갈 길 가시게.”
노인은 받은 은전을 탁자에 두고, 채 먹다 만 국수 그릇을 모두 거둬갔다.
“어르신……! 잠시 조금 더 이야기를…….”
노인의 축객령에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은전은 그대로 두었다.
“잘 먹었습니다.”
“……하지만 사형!”
“어르신 말이 맞다. 일어나자.”
“하지만 사형이 분명…….”
은호가 뭔가 이야기하려는 모습을 보며 나는 얼른 전음을 보냈다.
-지금 이야기할 건 아니다. 다 해결할 방법이 있으니 일단 일어나라.
금·은·동 형제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일어나려는 찰나, 식당 한구석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주인장! 내 그 이야기가 좀 더 궁금하군. 이야기해 보게.”
방두칠과 그의 일행들이 노인의 사연을 궁금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내가 할 일은 다 끝냈다.’
노인은 홱 하니 돌아서더니 쌍심지가 켜진 눈으로 방두칠에게 쏘아댔다.
“방금 한 말 못 들었나? 무림맹도 포기한 일이라고! 그리고 자네들이 신경 쓸 일도 아니고! 당장 꺼지든지 아니면 조용히 국수 처먹든지 하나만 하게.”
“아니! 난 이야기를 들어야겠어!”
방두칠이 그 커다란 몸뚱이를 일으켰다.
“가자.”
그사이 나는 세 형제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사형! 아까 하신 말이랑 다르잖아요.”
쌍막채를 토벌하겠다는 말에 사색이 되었던 아침과 달리, 은호는 마을의 상태를 보고 분개를 참지 못했다.
“다 방법이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라.”
사실상 우리 넷이서 쌍막채를 상대한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하던가, 하지만 방두칠과 백소령이 나서고 그의 부하들이 쌍막채를 토벌하려 할 때 한쪽 팔 거드는 일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내 생각.
천강무극체를 타고 난 사람들의 특성이 본래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방두칠은 의리와 정의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치는 사람이다.
전생과 같이 녹림왕이 되든, 바뀌어서 무림맹에 오든 마교를 적대할 것은 확실한 운명.
그렇게 내 행동에 만족하며 객잔을 나간 순간.
웬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흑염룡 대협 맞아요?”
부모의 손길을 전혀 받지 못한 듯 꾀죄죄한 꼬마의 상태.
내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것과는 다르게, 동룡이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대신 답했다.
“어떻게 알았어?”
꼬마가 내 검을 가리켰다.
“온통 검정색의 검과 옷, 그리고 비열한 얼굴을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
뭐지? 방금 마지막에 이상한 단어가 들어가지 않았나?
“아저씨 흑염룡 대협 맞아요?”
“아무래도 이상한 소문이 난 것 같구나. 내가 흑…… 그걸로 불리긴 한단다.”
꼬마는 갑자기 양손에 꼭 쥐고 있던 걸 내밀었다.
“그럼 우리 엄마 아빠 좀 구해주세요. 할아버지는 엄마, 아빠가 곤륜산에 돈 벌러 간다고 했는데. 그거 다 거짓말이에요. 엄마, 아빠는 쌍막채에 잡혀있어요.”
꼬마가 내민 것은 꼬질꼬질 때가 묻은 은전 한 냥이었다.
“어라?”
왜 이걸 나한테 주지? 그리고 부모가 살아있다는 건 당최 무슨 소린가?
“엄청 많은 사람들을 구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저희 엄마 아빠 좀 구해주세요.”
“…….”
뭔가 단단히 엉킨 것 같다.
“꼬마야, 부모님이 살아 계신 게 확실하니?”
“……헐.”
“어떻게 그런 질문을…….”
“……와.”
금·은·동 세 형제가 실망스런 눈빛을 보냈다.
어쩔 수 없다.
분명 무림맹 항주 지부의 보고서에선 ‘은전 한 냥’을 대가로 복수를 부탁하자, 자신의 힘을 과신하고 싶었던 방두칠이 이를 빌미로 나선 거라 했었으니까.
‘설마…… 이 새끼들…….’
정마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흑도와 백도 사이의 감정의 골은 상당히 깊었다.
녹림칠십이채가 녹림맹이란 이름 아래 뭉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니, 상대를 깎아내리기 위해 보고서를 썼다고 생각하면…….
“망할…… 새끼들…….”
아무리 상대를 평가 절하하고 싶어도 해야 할 짓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이 있지.
“네?”
내가 잠시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꼬마가 내 얼굴을 보고 덜덜 떨고 있었다.
“아, 미안하다. 근데 부모님은 납치당한 게 확실하니?”
“와…… 사형 진짜…….”
“가만히 있어 봐.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봐야 할 거 아냐.”
부모 생각에 눈물을 글썽거리던 꼬마가 말했다.
“천목산에서 본 적 있어요. 아빠는 땅을 파고 있었고, 엄마는 그릇을 닦고 있었어요. 일성이네 부모님도 정정이네 아빠도 다 거기 있어요.”
“흠…….”
전면적인 계획의 수정이 필요하다.
산왕이 인간 같지 않은 체질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인질을 앞에 두고 맘대로 활보할 수는 없다.
‘더구나 내가 전생에 보았던 그의 인성을 생각해 봤을 때. 인질이 잡혀 있었다고 한다면…….’
이제야 과거 몰랐던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애당초 부상을 당할래야 당할 수 없는 천외천의 존재가 복구할 수 없는 피해를 당한 이유.
“인질 때문이었구나.”
난 잠시 꼬마를 바라봤다.
인질이 잡혀있다면, 전생과 같이진행되면 안 된다.
“넌 혼자 사니?”
“여기 할아버지랑요.”
조금 전 고약한 노인이 바로 꼬마의 할아버지였다.
난 꼬마의 손을 잡고 객잔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저 이거 받으세요.”
꼬마는 한사코 은전을 내게 주려 했다.
“아니다. 이 돈을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야.”
“그럼요?”
“이 안에 있는 사람 중에…….”
난 문을 열고 들어가 방두칠을 가리켰다.
“네가 돈을 줄 사람은 저기 무섭게 생긴…….”
나는 말을 끝내 이을 수 없었다.
방두칠은 노인에게 엎어치기를 시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