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관문을 뛰어넘는 흑염룡(2)>
“…….”
“……커흠.”
장내에 기이한 정적이 감돈다.
꼬마와 함께 들어온 우리는 물론이고, 왁자지껄 떠들던 방두칠의 패거리도 위·아래 없는 행동에 하나같이 백안시하는 눈빛으로 방두칠을 보고 있었다.
“거, 그러니까 순순히 이야기해 보라 하지 않았……나.”
노인은 말을 하려 하지 않고 방두칠은 이야기를 들으려 하다 이 사달이 났다.
내가 만났을 당시에는, 호탕한 면은 있어도 이렇게 무식한 면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남이사 어떻게 살다 죽든 그게 네놈과 무슨 상관……윽.”
노인은 흥분하여 열변을 토하다 허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
“역시 쌍막채 때문이지요?”
“…….”
노인의 얼굴엔 수심이 깊어졌다.
“혹시 쌍막채가 마을 사람들을 모두 끌고 간 겁니까?”
“…….”
노인은 여전히 말이 없다.
다시금 방두칠이 콧김을 팡팡 뿜으며 노인의 멱살을 잡아채려 할 때.
백소령이 청아한 목소리로 노인에게 다가갔다.
“어르신, 전 소령이라 해요. 갑자기 이런 말 하는 것이 조금 부끄럽지만, 가가께선 최근 두 개의 산채를 토벌하고 무림학관 일(一)관문패를 두 개나 확보하셨어요. 그러니 너무 두려워 않고 이야기하셔도 되어요.”
백소령의 말에 노인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린다. 그러다 꼬마와 눈이 마주치고 길게 한숨을 내뿜는다.
“쌍막채의 패악질이 도가 심해지면서, 항주의 상인 연합에서 낭인들을 이용해 쌍막채를 토벌하려 했지.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그때마다 자신들이 부리고 있던 마을 사람들을 죽여 마을에 걸어두었다네.”
생각보다 더 심각한 사태에 우리 중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다.
“굶주리고 배고픈 건 한두 해 겪어본 것이 아니네. 충분히 견딜 수 있어. 허나, 내 자식이, 내 친구의 자식이 죽은 채로 장대에 매달려 돌아오는 꼴은 더 이상 못 보겠네.”
토벌대가 나타날 때마다 최종적으로 피해를 받는 것은 마을 사람들이었다. 아무도 보호해 주지 않는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원수를 두둔해야 하는, 심장이 썩어 문드러지는 사태를 겪어야 했다.
“이런 썩어 뒈질 놈들!”
방두칠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난 차분하게 물었다.
“마을 사람들을 데려가선 뭘 하는 겁니까? 농부들을 데려다 녹림을 시킬 것도 아니고.”
“일부는 녹림도로 포함시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가서 갖은 잡일을 한다더군.”
천에 가까운 인원이 산에 퍼져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하루에 소모되는 식사량만 따져도 천목산 주변의 마을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흉폭하고 거친 녹림도들이 직접 밥을 지어 먹을 일은 없을 터, 끌려간 이들은 수발을 들면서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도망치면 안 되는 건가?”
방두칠의 부하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고,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말을 듣지 않거나 도망치는 놈이 있으면 본보기로 그가 끌려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네. 식구들이 모두 이곳에 있는 그들이 감히 무슨 반항을 할 수 있겠나.”
한마디로 양쪽에 모두 인질을 잡고 있는 셈이다.
“녹림칠십이채가 일반 산채보다 거칠다 이야긴 들었지만, 이건 정도를 넘어서네요.”
백소령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
방두칠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들아, 무기 챙겨라.”
착 가라앉은 방두칠의 엄숙한 음성에, 함께했던 이들 또한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무기를 챙겨 들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란 이야기 듣지 못했나!”
방두칠은 무감한 눈동자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장, 거 옆에 꼬마가 남은 유일한 식구요?”
“…….”
“아이가 크면 쌍막채에서 탐낼 거 같은데, 괜찮겠소?”
노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가만히 있으면 계속 당하는 것이 약자의 삶이오. 최소한 건들면 만만치 않다는 생각을 심어줘야 하는 법이지.”
“어찌하려 하는 건가!”
“내 부하들과 함께 쌍막채와 담판을 짓겠소!”
“안 돼!”
“가가! 그건 무리예요!”
노인과 백소령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당연한 반응.
“자네가 함부로 나섰다간 산채에 잡혀 있는 가족도, 마을 사람들도 모두 죽어! 그걸 책임질 수 있겠나?”
“가가! 쌍막채의 인원은 각기 오백씩, 총 천명에 이르러요. 우리만으론 불가능해요.”
방두칠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소령, 난 누구에게도 지지 않소. 그리고 노인장 걱정하지 마시오. 가족들도 모두 안전하게 데려올 테니.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소.”
이미 방두칠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있었다. 백소령은 그런 방두칠의 성격을 아는지 고개를 저을 뿐이었고, 노인은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저도 반대입니다.”
“응?”
문을 나서려던 방두칠과 그의 부하들이 돌아보았다.
“넌 누구지?”
“저 말입니까?”
난 꼬마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고, 꼬마는 멍하니 보다 내 손 위에 은전 한 냥을 내려놓았다.
“이 꼬마에게 의뢰를 받은 태을문의 진소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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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을문의 진소운……? 네가?”
요즘 들어 알아보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두칠의 부하들도 내 이름을 듣자마자 저들끼리 수근거린다.
“진소운이라면…… 흑염룡 진소운?”
“흑도 무림의 신성?!”
“가장 비열한 잠룡?”
소문이란 것이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 날 수는 없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난 거슬리는 이야기들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소수로 쌍막채를 토벌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상대는 인질까지 붙들고 있는 상황.”
내 말을 들은 방두칠이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흑도 무림의 신성답게 쌍막채 편을 드는 것인가?”
“…….”
아니라고!
애당초 자신의 무력에 완벽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설득하기란 불가능한 일.
나는 백소령을 보고 말했다.
“잠시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제가요?”
“저분을 설득하지 못하면 이대로 쌍막채에 가버릴 것 같거든요. 그럼 저분도, 그곳에 잡혀있는 인질도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좋아요.”
백소령이 고개를 끄덕인 후, 나는 그녀를 한 손으로 당겨 내 쪽으로 끌었다.
“어멋!”
그녀의 몸에선 전생과 같은 제비꽃 향기가 났다.
그러자 방두칠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 하는 짓이지?”
“이분을 한번 구해보시지요.”
“뭐?”
난 흑룡검을 검갑째로 들어 올려 백소령의 목에 대었다.
“구해보시라 했습니다.”
“…….”
방두칠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한 발 디디는 순간.
나는 백소령의 목을 그었다.
“엇!”
“한 번 죽었습니다.”
“…….”
방두칠의 눈이 차갑게 변하더니 공력을 끌어올린다.
고오오.
그의 몸 주위로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방두칠이 익힌 질풍공은 선도계열의 수련임에도, 광대한 내공을 억지로 모으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빠지거나 실어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천강무극체라는 저세상 체질로 주화입마의 단점을 완벽하게 보완할 수 있는 방두칠에겐, 그 어떤 무공보다 빠르게 내공을 모으고 발산할 수 있는 최고의 무공이 된다.
뻐엉!
질풍광마권의 흡입력이 나와 백소령의 몸을 끌어당긴다.
나는 태을팔만신보를 밟아 허상을 남기고 질풍광마권을 피하며 백소령의 목을 다시 그었다.
“두 번 죽었습니다.”
“……놈!!”
질풍공에서 파생된 질풍권과 질풍각을 자신만의 독문무공으로 발전시킨 방두칠.
아직은 완성에 이르지 못한 질풍회련각이 작렬한다.
퍼퍼퍼퍼퍼퍽!
낡은 가구들이 마구 터져나가며 사방으로 방두칠의 발이 작렬했지만, 허상에만 닿을 뿐. 나와 백소령의 몸에 닿는 것은 없었다.
“세 번 죽었습니다.”
“……망할!”
서서히 흥분하기 시작한 방두칠이 양손에 진기를 가득 모은다.
방두칠의 내공을 가장 파괴적으로 쓸 수 있는 질풍신장을 쏘려는 것이다.
“……그걸 쏘면 이 소저께서도 맞을 텐데.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은 겁니까?”
“…….”
바닥에 부서진 잔해들이 공명하며 덜덜 떨리다가 이내 잦아든다.
그의 주위로 휘몰아치던 바람도 이내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자신이 틀렸음에도, 틀렸다는 것을 쉬이 인정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
방두칠의 일행들 사이에서도 침묵이 감돌았다.
“인질이 잡혀있는 상황에서는 함부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백소령 또한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가, 진 공자의 말이 맞아요.”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볼 순 없는 노릇 아니오.”
“그냥 두고 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른 작전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다른 작전이 있나?”
방두칠의 일행도, 금·은·동 세 형제도 기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네. 물론 있습니다.”
“그게 뭐지?”
콰장창!
내가 말을 이어 가려는 찰나, 문밖에서 건물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방두칠을 비롯한 우리 모두가 일제히 식당 밖으로 향했다.
“캬하하하하!”
“부숴! 부서버려!”
“네놈! 네놈은 우리 화막채로 간다.”
스무 명 남짓한 산적들이 가옥 하나를 둘러쌓고 가족들을 끌어내며 건물을 부수고 불을 지르고 있었다.
방두칠과 그의 일행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가려 했다.
“지금 나서면 인질들을 제대로 구할 수 없습니다.”
내 말에 방두칠이 움찔거리며 나를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았다.
“저들도 죽지만 않으면 살려서 데려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나서면 우린 인질을 잡힌 채로 싸워야 합니다.”
“…….”
빠드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 놈들의 머리통을 때려 부수고 싶어 하는 방두칠.
그런 기색이 읽혔는지 산적들 무리 일부가 이편으로 다가왔다.
“뭐냐? 네놈들은? 뭔데 노려보고 있는 것이냐?”
난 얼른 방두칠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전 태을문의 진소운이라고 합니다.”
“태을문의 진소운?”
“오호…… 흑염룡…….”
산채에 머무는 산적들이었음에도 무림 일에 꽤나 사리가 밝은지, 신기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 마을엔 무슨 볼일이 있어 온 것이지?”
“아, 혹시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저희 태을문이 창궁상단을 인수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표국과 연계하여 상행해 볼까 해서 우선 가까운 항주로의 길을 확인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흠…… 항주로 가려면 천목산을 거쳐 가야 할 텐데. 왜 우린 들은 바가 없는 거지?”
태감도를 어깨에 들쳐멘 산적이 살기를 은은하게 뿌리며 노려보고 있었다. 왜 자신들에게 신고식을 치르지 않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아, 물론 인사를 드리려던 찰나였습니다. 하하.”
나는 은전 몇 개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흔들면서 그들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주머니를 건넸다.
“본래 표국이나 상단이 처음 그 길을 지나가기 위해선 신고식을 제대로 치러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채주님께 저희가 곧 찾아뵙겠다고 전해주십시오.”
“오, 네놈은 눈치가 좋아 장사를 잘할 듯싶구나.”
“별말씀을요. 감사합니다.”
“헌데 저놈은 뭔데 우릴 저렇게 노려보는 것이냐?”
태감도를 든 산적이 검으로 방두칠을 가리켰다.
“아, 저희 표사들인데, 낭인에서 표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렇습니다.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흥! 감히 화막채에게 저따위 눈빛이라니.”
태감도를 든 산적이 방두칠에게 척척 다가갔다.
그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방두칠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눈 깔아 새끼야!”
“…….”
방두칠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붉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지금 일을 내면 인질은 못 구할 겁니다.
내 전음에 방두칠은 나를 원수 보듯 보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흥! 별것도 아닌 게.”
돌아서는 산적은 뒤에서 방두칠이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화막채의 산적들이 돌아가고, 방두칠이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와 한쪽 어깨를 부러질 듯 쥐었다.
“넌 네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그러지 못할 시엔.”
방두칠이 원한 깊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넌 쌍막채뿐만 아니라 나도 감당해야 할 것이야.”
“책임지겠습니다.”
“…….”
방두칠이 일행과 함께 다시금 식당으로 들어가고, 백소령만이 남아있었다.
“고마워요. 진 공자. 덕분에 가가를 막을 수 있었어요.”
“저야말로 아까 실례가 많았습니다.”
“어멋, 무슨 말씀을! 오랜만에 낯선 남자의 품에 안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답니다.”
백소령이 유채꽃같이 환한 웃음과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