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78화 (78/357)

#078. <관문을 뛰어넘는 흑염룡(6)>

금표는 이가네 방앗간집 장자다.

평생 부모님이 방앗간에서 일하는 걸 봐왔고, 언젠가 자신이 그 일을 하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방앗간의 일이 멋있어서라거나, 자신을 흥분시키는 일이라서가 아니었다.

방앗간 집 아들로 태어나 방앗간을 하면 최소한 굶어 죽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태을문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달리 없었다.

태을문에 입문하면 하루 두 끼를 제공한다.

방앗간이 잘되지 않을 때 잘 먹는 아들 셋을 키워야 했던 부모님은 별생각 없이 그를 태을문에 보냈다.

훗날에 무림맹에서 2년 정도 의무복무를 해야 하지만, 그 전에 하루 두 끼를 주는 것이 어딘가.

더구나 태을문에 가면 소운 사형도 있고 사련 사저도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두 사람 덕분에, 금표는 태을문에 있는 동안만은 자신이 장자라는 부담감에서 해방되어 마음껏 응석 부릴 수 있었다.

계철영이 입문했다고 했을 때도 별반 생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하루 두 끼만 먹던 식사가 세 끼로 늘어난 것에 좋아했다.

가끔 고기반찬도 나오고 더러운 성격만 맞춰주면 당과도 주니, 금표에겐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진소운 사형과 사련 사저가 계철영과 반목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태을문에서 태어난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래 봐야 태을문의 무사로 끝나는 삶 아닌가.

계철영은 집도 부자고, 아버지가 돈도 많아 무림의 고수들을 모셔서 무공을 따로 배운다고 한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과연 태을문의 무공만 배운 이들이 과연 이길 수 있을까?

그런데 그걸 해냈다.

진소운 사형이.

자신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재능에 계철영의 패악질을 혼자 다 받아내고, 정작 자신이 먹어야 할 과자나 음식은 사제들에게 양보하던 착한 사형.

머리가 좋아 차후에 외당의 당주로 일하게 될 거라 이야기하던 그 사형이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형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자신에게 정해진 운명에 저항하고 맞서 싸우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대단한 것 없는 태을문을 위해 목숨을 걸고 선천진기를 뿌리며 철검문의 문주를 윽박질렀던 이야기는, 사련에게 반복해서 듣고 또 들어도 들을 때마다 가슴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쩌면 사형은 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다.

어쩌면 사형은 계철영 대신 무림학관에 가서 자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보고 싶은 것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지.’

견성사자의 시험 마지막에 가서 사련에게 양보하는 것을 보며, 사형은 그대로의 사형이었다고 느꼈다.

어린 시절 우릴 위해 계철영의 패악질을 대신 받고 당과를 나눠준 거라면.

커서는 무림의 패악질을 대신 받고 자신들에게 날 수 있는 기회를 또 양보하려는 것이었다.

그것도 무림맹의 의무복무가 끝나면 방앗간에서 일할 자신들을 위해.

그때 처음 금표와 은호와 동룡은 자신들에게도 새로운 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정 꿈꿔도 되는 겁니까? 사형?’

어쩌면 가질 수 없기에 미리 포기했던 것일 수도 있다.

애당초 닿을 수 없기에 가보려 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소운 사형은 그런 자신들을 위해 언제나 목숨을 걸고 검을 들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희생하고 있는지, 모두 다 너희를 위해서라든지 같은 소리를 하지 않았기에 그만두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사형에게 진 빚을 갚아보기로 했다.

이제 더 이상 속도 모르고 당과를 얻어먹던 아이들이 아니니까.

어떻게든 사형을 무림학관에 넣고 나면, 그간의 진 빚은 좀 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야 하는데 뭐 하는 것이냐! 동룡!!”

한창 검진을 갖춘 채 쌍막채의 산적들을 상대하고 있어야 할 금표는 홀로 동룡을 막아서는 중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죽창과 낫을 들고 싸움에 끼어들면서 기세는 완전히 이편으로 넘어왔다.

치열했던 전투에 여력이 생기고, 조금은 숨 돌릴 틈도 마련되었지만, 문제는 마을 사람들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연기를 잔뜩 흡입하여 혼란스런 상태의 산적들이라 할지라도, 무공을 익힌 무인인 것은 자명한 사실.

그들이 마구 휘두른 눈먼 검에 마을 사람들이 피를 뿌리는 순간, 동룡이 검진을 뛰쳐 나가버렸다.

천살성(天殺星).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별 걱정하지 말라는 대사형의 말이 아니었다면 간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을 것이다.

‘사형! 사형이 틀린 것 같습니다!’

천살성은 그저 살기가 지독한 것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건 하늘이 인간을 죽이기 위해 만든 악마적 재능이었다.

과거 수많은 천살성들이 무공 한 자락 익히지 않은 평범한 이였음에도 무림의 고수들을 마구 죽이고 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이 재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금표는 지금 그 무시무시한 재능을 두 눈으로 목도하고 있다.

살기를 마구 뿌려대며 산적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동룡.

자신의 귀여운 막냇동생이 분명함에도, 두 눈에서 붉은빛을 뿜어내는 모습은 이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특히나 자신보다 몇 배나 강력해 보이는 무인을 상대할 때마다, 그 순간순간의 경험을 먹고 가파르게 성장하는 모습은 인세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눈 한번 깜짝이면 소천검법의 검식이 달라져 있고, 눈 한번 깜짝하면 대천검법의 성취가 달라져 있다.

동룡이 사용하는 검법에서 수세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공세만을 흩뿌리며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동룡에게 자신들이 모르는 부모님의 원수 같은게 있었나 싶을 정도.

이제는 산적들도 동룡의 미친 움직임에 기가 질려, 하나둘 도망치고 있었다.

그리고 동룡은 그들을 하나도 남겨놓지 않겠다는 듯 필사적으로 태을팔만신보를 밟아 집요하게 목숨을 거둬들였다.

피를 옴팡 뒤집어쓴 그 악귀 같은 모습에 마을 사람들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전투는 없었다.

산적들은 이미 도망치거나 목숨을 구걸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럼에도 동룡은 끝까지 피를 갈구하고 있었다.

결국 금표는 동룡을 향해 검을 날렸다.

“정신 차려라! 동룡아!”

“……죽일 거야! 지킬 거야… 지키기 위해 죽일 거야!! 내가… 다! …죽일 거야!”

자신이 형이었던 것도 잊어버렸는지 동룡은 검은 날카롭기 그지없다.

언젠가 보았던 진소운의 검식을 그대로 따라 하는 동룡을 금표가 상대하기는 버거웠다.

“제발 정신 차려!”

진소운에게 소식을 전하려 은호를 보냈지만, 그 찰나와 같은 시간이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이대로 동생을 악귀로 만들 수 없다는 생각과 이대로라면 동생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

“이동룡!! 정신 차려! 진소운 사형과 무림맹에 가고 싶지 않은 거냐!”

“……!”

찰나의 순간이지만 동룡의 움직임이 움찔 멈추었다.

금표는 더욱 큰 목소리를 냈다.

“이대로 악귀가 되면 태을문에서도 함께 지낼 수 없을 거다! 정녕 그리하고 싶은 거냐!”

“……!”

움찔움찔.

멈추었던 몸은 다시 움직인다.

금표 외에 산적들을 향하던 살기가 금표에게 직사된다.

자신의 살성을 제거하려는 원수를 상대하듯 더욱 매서운 공격이 들어온다.

금표의 손과 발이 엉키기 시작했다.

“크흑! 이동룡 너…….”

결국 동룡의 검이 급소를 찔러 들어오는 것을 멍하니 봐야 하는 순간.

“잘했다.”

챙!

검병부터 검신까지 모두 검정 일색의 검이 동룡의 검을 막아섰다.

“대사형!”

진소운은 능숙하게 동룡의 검을 막아섰지만, 평소보다 날카로움은 덜했다. 행색을 보니 이미 한껏 지쳐있는 상황. 아마 쌍막채의 채주들을 상대하느라 진력이 다 빠진 것이겠지.

“얼마나 됐냐?”

“이각이 다 되어갑니다.”

“늦지 않았다.”

“정말입니까?”

“……그래.”

진소운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금·은·동 세 형제에게 행공을 가르치고 더욱 매진하게 한 이유는 동룡이에게 천살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태을진경의 구결은 나 자신을 삼자의 시선으로 보게 하고 내면의 모습을 더욱 자세히 바라보게 만든다.

천살성이라면 몸이 지치지 않게 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행공을 운용할 것이고, 태을진경을 외고 있는 한 정신을 차릴 가능성은 훨씬 컸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뭘 어떻게 할 건 없다. 동룡이가 스스로 깨어나게 하는 수밖에.”

“못 깨어나면요?”

“……깨어날 거다.”

금표는 진소운의 말에 격하게 눈동자가 흔들렸다.

진소운이 저렇게 자신 없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던가.

쌍막채를 칠 때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 했던 양반이…….

시간은 어찌 물어본 것인가? 시간이 너무 흘러버리면 깨어날 수 없는 것인가? 그럼 동룡이는 이대로 악귀가 되어버리는 것인가?

금표는 가슴이 쿵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허헉, 허헉, 허헉. 형, 어떻게 됐어?”

온몸에 김을 모락모락 피워내며 달려온 은호. 숨을 몰아쉬며 묻는 은호에 금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건 아니야. 이건…… 이건 아니야.’

진소운을 돕는 일엔 금표와 은호만 나서려 했다.

하지만 진소운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동룡이 이를 악물고 고집을 피웠다.

그럼 수련이라도 따라와 보라고 자신들의 한계를 훌쩍 넘을 정도의 수련을 일부러 했는데, 동룡이는 기절하는 순간까지 버티며 수련을 따라왔다.

그렇게 노력한 동룡이를 여기다 두고 갈 순 없었다.

“형! 뭐 해!”

“동룡이를 여기다 두고 갈 순 없어!”

“뭐? 무슨 소리야?”

“은호야! 가자. 동룡이 데리고 가야지!”

“…….”

은호는 금표가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말을 따르는 것이 차후에 후회하지 않을 일이란 걸 느꼈다.

“비켜있어라!”

동룡이를 상대하는 진소운이 손을 뻗으며 다가오지 말라 했지만, 금표는 검을 들고 동룡에게 짓쳐들었다.

“동룡이는 제가 데리고 갈 겁니다!”

“금표야.”

“동룡이는 저희가 데려갈 거예요!”

채채채채채챙.

금표 때문에 진소운이 검을 휘두르지 못하자, 동룡의 미간이 확 펴졌다. 천살성이 자신보다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동룡! 정신 차려! 이대로 악귀가 될 셈이냐!”

“…….”

“대사형 같은 협객이 되고 싶다며! 그럼 살성 따위에 취하지 마!”

“……!”

금표의 급소를 노리던 동룡의 검이 순간 우뚝 멈추었고, 금표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동룡은 기이하게 팔을 꺾더니 순식간에 금표의 목에 검을 찔러넣으려 했다.

챙!

“이동룡! 아무리 큰 형이 싫어도 이건 아니지!”

동룡의 검을 쳐낸 은호. 두 사람은 합격으로 동룡의 검을 겨우 막아내기 시작했다.

“이동룡! 너 자꾸 말 안 들으면 놓고 간다!”

“……!”

또다시 우뚝 멈춰서는 동룡.

“이동룡! 너도 같이 가고 싶다고 해서 데려온 거잖아!”

“너 때문에 대사형을 무림학관에 못 넣으면 어떻게 할 거야!”

“……!!”

금표와 은호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를 때마다 동룡의 움직임이 서서히 굼떠지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진짜 놓고 가기 전에!”

목이 다 쉴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지르는 금표와 은호.

절박한 두 사람의 외침과 다르게 몇 번이나 동룡의 검이 두 사람의 요혈에 짓쳐들었지만, 두 사람은 외침을 멈추지 않았다.

“너 자꾸 말 안 들으면 집으로 보낸다!”

우뚝.

동룡의 몸이 처음으로 멈췄다.

그러더니 경련이 일 듯 온몸을 부르르 떤다.

금표와 은호는 놀라 진소운을 바라보자 진소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너 집으로 돌려보낼 거야! 너 혼자 집에 가!”

“가서 아버지 어머니 도와드리고 있어! 대사형은 우리랑 함께 무림학관까지 갈 거니까!”

눈꺼풀을 뒤집어 까고, 입에 거품까지 뿜어낸다.

그러더니 돌연 피를 토해낸다.

“부악. 커흑-.”

손에 착 달라붙은 듯 보였던 검마저 바닥에 떨구고 한참을 토악질을 하던 동룡이 고개를 든다.

붉은빛을 내는 눈동자를 번뜩이며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 나도 데려가…….”

동룡의 모습에 금표와 은호가 한숨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하아. 이 망할 놈.”

“하하, 하하. 하하하.”

세 형제의 모습을 보며 진소운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다행이다.’

천살성의 살성은 잠재우기 힘든 욕망이지만, 반대로 한 번만 정신을 차릴 수 있으면 그다음부턴 살성에 먹히는 일은 없었다.

설사 살성에 먹히더라도 깨어난 경험으로 다시금 이지를 되찾을 수 있을 테니.

동룡은 무림 역사상 단 3명밖에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냄으로써 천고의 재능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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