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79화 (79/357)

#79. <관문을 뛰어넘는 흑염룡(7)>

무림맹 항주 지부 지부장은 보고를 듣는 와중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쌍막채가 제거됐다고?”

이번 무림학관 1관문은 전국의 지부들에게 지옥 같은 시험이었다.

무려 사천 개가 넘는 산채들을 일일이 다 관찰하며 누가 산채를 토벌하고, 그 과정에서 일류 이상의 고수나 무림학관을 졸업한 자들이 들어있지 않는지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절강성 일대에는 녹림칠십이채의 산채 중 세 개를 제외하곤 중·소 규모의 산채들이 별로 없어, 다른 지부들에 비해 느긋하게 업무를 처리할 수 있었다.

물론 이변도 조금 있었다. 사천 개의 산채 중 가장 약한 산채라고 파악된 봉짐채가 인근에 위치한 산채인 구웅채와 협력하여 계룡상단에 역공을 가해서 맹원들의 놀람을 자아내긴 했다.

그런데 요식행위로나마 관찰하고 있던 쌍막채가 갑자기 토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절정 고수가 숨어있었던 것은 아닌가?”

“보고에 따르면 시험 응시자들의 무공 수준이 높긴 하지만, 무림맹에 등록될 수준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 무림맹이나 화산파가 합공해서 쌍막채를 토벌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강맹한 세력들은 자파의 제자들을 한데 묶어 수백 명의 숫자를 동원하기도 한다.

1인당 동원할 수 있는 숫자인 백명이라는 한계를 역이용한 방법이었다.

그렇다 해도 쌍막채는 두 개의 산채가 합쳐져 천 명의 인원이다.

어지간한 문파가 제자 열 명을 보내야 숫자가 맞는다.

“그것도 아니랍니다. 인원은 스무 명이 채 안 되는 인원이랍니다.”

“…….”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건 알고 있습니다. 해서 지부장께서 직접 가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천목산에 직접 당도한 지부장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거대하고 울창했던 천목산이 새까맣게 다 타버리고, 산 중간중간에 수백의 시체들이 쌓여있으며 마을 어귀에도 시체들이 흘린 피로 작은 냇물이 형성될 정도였다.

“이게 무슨…….”

말을 잇지 못하는 지부장에게 천목산을 관리하던 맹원이 다가왔다.

“시험 응시자라 밝힌 사내들이 천목산에서 인질을 데려온 후에 화공을 펼쳤습니다.”

“그건 말이 안 된다. 수풀 때문에 샘이 많아 불이 번지기 힘들지 않나.”

“그렇습니다. 헌데 응시자들이 화공을 실시하는 순간 엄청난 바람이 불었고, 미리 산 곳곳에 설치해 둔 기름통들이 폭발하며 천목산 전체에 급하게 산불이 피어올랐습니다.”

“…….”

그러고 보니 이틀 전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 때문에 마른 산에서 산불이 발화했다는 보고가 기억났다.

“바람을 이용했다고? 천재지변을?”

그때 응시생으로 보이는 이들이 다가왔다.

한 명은 태산처럼 거대한 몸을 가진 이었고, 한 명은 평범해 보이는 이였다.

태산같이 거대한 이는 가만히 서서 팔짱을 끼고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 반면, 평범한 이는 정중하게 포권을 쥐어 온다.

“무림맹 항주 지부에서 오셨다 들었습니다.”

“그렇네. 자네들이 쌍막채를 토벌한 이들인가?”

평범한 이가 대답 대신 뒤쪽을 바라보자, 태산 같은 이의 뒤에 섰던 이들이 거적으로 덮인 사체 두 구를 가져왔다.

“금면불도와 독안혈부라는 악독한 자들입니다.”

“…….”

맹원이 급하게 다가가 거적을 들쳐본 후 이곳저곳을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쌍막채의 채주들이 맞다는 소리.

“진정 자네들이 쌍막채를 토벌한 것이 맞다는 건가?”

“보시는 바 그대로입니다.”

“쌍막채는 절강성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녹림 세력이네. 당최 자네들만으로 이 일을 해냈다는 것이 믿어지지는 않는군.”

지부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산 같은 자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내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닌가.

“……허업.”

“큭.”

“뭔 놈의 내공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무복과 함께 강대한 기파가 숨통을 죄어오듯 뻗어 나왔다.

살기도 담기지 않은 단순한 투기에 불과했지만, 마치 거대한 바위에 짓눌리는 것처럼 답답함을 느끼기 충분했다.

“천하의 무림맹도라는 것들이 쌍막채를 토벌할 생각은 하기는커녕 민생을 위해 노력한 자를 의심해?”

태산 같은 자는 성큼성큼 걸어 나와 단숨에 목을 뽑아낼 기세로 손을 뻗었다.

지부장은 자신 또한 평생 무공을 익혀왔지만, 아직 앳돼 보이는 이에게 처절하게 밀린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전력을 다해 내력을 끌어올려 보았지만, 마음과 달리 몸은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만하십쇼. 놀라시겠습니다.”

그때 평범한 이가 흑색의 검을 검집째로 들어 태산 같은 사내의 손을 막았다.

“이런 썩어 빠진 놈들은 모가지를 꺾어놓는 것이 무림맹에도 좋을 일이다.”

“그랬다간 무림맹엔 발도 들이지 못할 겁니다.”

“…….”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태산 같은 사내가 평범한 사내의 말을 듣더니 이내 기세를 천천히 거둬들였다.

하지만 모두 거둬들인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자리로 돌아가 팔짱을 끼고 노려보고 있을 뿐.

여차하면 언제라도 튀어나갈 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분께서 워낙 광대한 내력을 가지신 덕분에 어렵지 않게 쌍막채를 토벌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하늘이 도와준 것도 있고요.”

“…….”

지부장은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태산 같은 사내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사문 또한 어디 가서 밀리진 않는 대단한 사문이긴 했지만, 지금 당장 태산 같은 사내의 손에 죽는다면 사문의 힘이고 나발이고 다 소용없는 거 아닐까? 하는 공포심이 든 것이다.

“혹시 필요하시다면 더 조사하셔도 됩니다. 저희도 며칠 더 묶어야 할 일정이라서요.”

태산 같은 사내가 끼어들었다.

“물론 그렇게 했다간 결코 제 발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아…… 쫌 가만히 좀 계시라고요. 왜 자꾸 끼어듭니까!”

“……저 개새끼들이 우리를 의심하지 않나.”

“아니, 지금 무림맹원 분들께 무슨 망발입니까! 당장 사과하세요.”

“흥! 본래 팔 하나씩을 부러뜨리고 시작하려고 했으니, 그걸 퉁친 걸로 하지.”

맹원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자신의 손을 매만졌다.

“……크흠, 어, 어쨌든 자네들 정체부터 알려주게. 그, 그래야 조사든 뭐든 하겠지.”

태산 같은 사내가 삐딱하게 고개를 꺾으며 부리부리하게 쳐다봤다.

결국 평범한 사내가 그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이분께선 방두칠이라는 분이십니다.”

“항우재림!”

“여포신화!”

무림맹원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방두칠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탓이다.

“끄…… 그, 그렇군. 그럼 자네는?”

“아, 저는 태을문의 진소운입니다.”

“…….”

“…….”

방두칠을 소개했을 때와는 달리 장내에 찬물을 끼얹은 듯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겨우 입을 연 지부장이 힘들게 말을 이었다.

“자네가…… 그, 흑염룡 진소운 맞는가?”

“……네, 그렇게들 불리고 있더군요.”

진소운이라는 사내가 탐탁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고 지부장이 당장 뒤를 바라보며 외쳤다.

“야! 관문패 가져와! 당장!”

“네넷! 가져왔습니다.”

“눈으로 봤으면 그냥 관문패를 내어주면 되지, 뭐 대단한 일이라고 나까지 불러! 미안하네 진 소협! 아랫것들이 아직 교육이 덜 되어있어.”

진소운과 방두칠은 갑작스런 변화에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

빌어먹을. 빌어먹을.

어째서 난 하지도 않은 악행이 점점 소문 나는 것일까?

갑자기 바뀐 항주 지부장의 태도에 의아한 마음이 들어 관문패를 받는 와중에 슬쩍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이야기가 가관이었다.

[어휴, 저희는 공석찬 같은 등신짓은 하지 않습니다요.]

공석찬은 무림맹 악양 지부장이었다. 마령고원에서 내가 사람들을 구해낼 때. 홀로 도망친 용소아의 명예가 땅에 처박힌 일로 앙심을 품고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그땐 남궁진명과 사황봉주 차석두가 나섬으로 인해서 일이 잘 해결된 줄 알았다.

그랬는데, 이게 웬걸.

일이 모두 끝나고 남궁진명과 차석두를 중심으로 백도와 흑도의 문파 인원들이 무림맹에 정식으로 이의제기를 했다는 것이다.

흑도문파들의 이의제기였다면 무림맹에선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남궁세가를 비롯한 형산파와 모산파 등 관련된 문파 전부가 무림맹 악양 지부의 행태와 대응.

그리고 나아가 무림맹이 보인 대처 등에 문제를 제기하자 무림맹으로서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

이로 인해 무림맹 악양 지부장을 비롯한 지부에 속해있던 맹원 모두가 직위해제 및 파면을 당해 사문이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무림맹 내에서도 관련된 이들이 줄줄이 징계를 받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사건으로 인해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났다는 것이다.

백도무림과 흑도무림의 공동전인이라느니, 남궁세가의 사생아가 사황봉에서 무공을 익혔다느니, 무림맹을 무너뜨리기 위해 세외문파들이 연합하여 만든 괴물이라느니 하는 괴랄한 소문 말이다.

“자네의 실력이 심상치 않았다더니, 그런 내력이 있었던 것이군.”

옆에서 함께 이야기를 들었던 방두칠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말 같잖은 소리 하지 마십쇼. 공동전인은 무슨 공동전인이란 말입니까.”

“아니면, 아니지 왜 화를 내나? 그렇게 화를 내는 걸 보니 뭔가 찔리는 것이 있나 보군. 그럼 혹 남궁세가의 사생아로서 사황봉에…….”

“아닙니다!”

“난 사생아를 백안시하지 않네. 그건 자신이 원해서…….”

“아니라고!”

옆에서 쿡쿡거리며 웃던 백소령이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이제 천목산에 산채가 없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렇게 되진 않을 겁니다.”

“네? 왜죠?”

“천목산은 안휘성과 절강성을 잇는 가장 편하고 안전한 길입니다. 더구나 절강성의 항주를 통하기 위해선 반드시 천목산을 거쳐야 하지요. 모르긴 몰라도 녹림칠십이채에 몸담고 있는 자들 중 자신의 산채를 세우고 싶어 하는 자가 또 나타날 겁니다.”

“아…….”

“…….”

백소령이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방두칠은 무겁게 침묵을 이어나갔다.

“일단 이거 받으십쇼.”

나는 항주 지부장에게 받은 관문패 8개 중 4개를 방두칠에게 넘겼다.

방두칠은 관문패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백소령에게 물었다.

“소령.”

“네. 가가.”

“내가 무림맹의 맹원이 되지 않아도 되겠소?”

“네?”

“이번 일을 하며 느꼈소. 무림맹은 나의 길이 아닌 것 같소.”

그도 아직은 약관을 겨우 넘은 청년에 불과하니 세상만사에 모두 통달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그의 눈에 보인 무림맹의 정의는 그다지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그럼…….”

“녹림의 도를 추구해 보려 하오.”

방두칠이 발가벗겨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천목산을 바라보았다.

“무림맹의 도는 민초들에게 뻗지 않소. 하지만 녹림의 도는 민초들에게 직접 와닿지. 녹림의 도를 세우면 훨씬 더 많은 이들이 평안하게 살 수 있지 않겠소.”

“……가가.”

“대신 약속하겠소. 녹림의 왕이 되어 그대를 왕후로 만들어 주겠소.”

방두칠의 결연한 발표에 백소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가, 전 이미 가가를 왕으로 생각하고 있답니다. 가가께서 어디 가시든 전 함께할 것이어요.”

백소령과 방두칠이 서로를 깊게 껴안았다.

마치 커다란 곰이 생선을 품에 안은 듯한 모양새였다.

결국 이리 될 운명이었나 보다.

어쩌면 녹림맹주가 되는 것이 방두칠에겐 훨씬 더 어울려 보인다.

무림맹이란 복잡한 계략과 정치가 오가는 곳이 어울릴 사람은 아니었으니.

적당히 자리를 비켜주려는 찰나 방두칠이 내게 말했다.

“자네.”

“……?”

“자네도 나와 함께 녹림의 도를 걷자.”

“네?”

“쌍막채는 두 개의 산채가 아닌가. 나와 함께 녹림의 도를…….”

“말 같잖은 소리 하십쇼. 명문정파의 제자에게 무슨 소리입니까.”

“……태을문이 명문정파라는 소리는…….”

“한번 붙어 보자는 겁니까?”

잠시 고민하던 방두칠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럼 나와 의형제를 맺자.”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녹림맹주와 형제인 백도인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요.”

“호오, 내가 녹림맹주가 될 상인가?”

“…….”

너무 얼토당토않은 말에 나답지 않게 이성까지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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