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사냥의 시간(6)>
“기억력 좋은 놈의 꿈은 어떠냐?”
무신(戊申)월 계미(癸未)일 저녁. 겨우 마인들을 따돌리고 한숨 돌리는 자리에서 좌대기가 물었다.
“뭐?”
군부 명문가로 유명한 남경육가장의 창식을 익혔다며, 스스로를 육식랑(六式狼)이라 칭하던 놈이었다.
사실은 육가장 노비였는데 도련님의 무공을 몰래 훔쳐보다 걸려, 맞아 죽을 뻔하다 도망친 놈이었다.
그놈의 입이 하도 거칠어 우린 놈을 부를 때 육시랄 좌대기라고 불러주었다.
“그렇잖아. 기억력 좋으면 꿈도 다 기억날 거 아냐? 꿈속에서 미녀도 만나고 이렇고(?) 저렇고(?)도 기억나고…….”
금세 딴 놈이 끼어든다.
“야, 그럼 꿈에서 조절도 가능하냐? 앵앵이도 봤다가 연두도 봤다가?”
생사를 오가는 낮시간이 지나면, 몰려드는 피곤 사이로 내일의 절망이 덮쳐든다.
“시벌! 그럼 저 새끼만 밤마다 좋은 경험(?) 하고 있는 거야?”
우린 당장 내일 눈앞에 기다리고 있을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기 위해, 이렇게 밤마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곤 했다.
사실 육시랄이 생각한 거치곤 꽤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내 꿈은 정확하고 생생하다.
어린 시절엔 육시랄의 말처럼 즐거운(?) 때도 있었고, 밤이 기다려지는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소정대를 나온 이후엔, 남은 평생 내내 잠을 피했다.
“헉… 헉… 헉… 헉….”
“시벌, 시벌.”
“젠장, 살려줘!”
내 옆으로 소정대원들이 달리고 있다.
나는 내가 보는 그들이 나의 꿈속 존재임을 알고 있다.
나는 이미 소정대에서 나와 심산유곡으로 숨어버렸으니.
그렇기에 이 생생한 모습에, 확실히 고통스러워 보이는 장면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왜 이렇게 뛰고 있는 거냐?”
“시발! 마교 새끼들이 쫓아오잖아!”
그저 내 기억에 의한 꿈이기에 안심하며 그들에게 말한다.
“이건 단지 꿈이잖아. 이제 그만 멈춰.”
“……!”
“……!!”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그들은 나를 죽일 듯 바라본다.
“““너한테나 꿈이지!”””
#
“헉……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쉰다.
회귀한 이후엔 한동안 꾸지 않았던 꿈이 떠올랐다.
“괘…… 괜찮으십니까?”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강서표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본 후에야 꿈에서 깨어났음을 깨닫는다.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아. 악몽…….”
악몽인가…….
그리워서 보인 건가…….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답에 입을 다문다.
“…….”
그도 더 이상 묻지 않는다. 그는 내 몫으로 보이는 음식들을 내려두며 말한다.
“……다행히 순항 중입니다. 조금 더 쉬셔도 될 것 같습니다.”
“추격자는 더 없습니까?”
“그들도 잠은 자겠지요.”
창문 밖을 보니 사위는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간만에 쓴 광천신장에, 며칠간의 피로가 누적되어 죽은 듯이 잤나 보다.
“다행이군요.”
“……감사합니다.”
“?”
난 강서표의 갑작스런 말에 고개를 들었다.
“제가 오히려 감사하지요. 덕분에 금은동 형제들이 안전하게 왔습니다.”
그들과 합류한 이후 금은동 형제는 더욱 심리적 안정을 찾았다. 남궁세가와 철검문의 무사들은 금은동 형제를 타 문파의 제자가 아닌 자신들의 동생처럼 돌봐주었다.
그 모든 건 대주인 강서표와 초무빈이 신경 써 준 덕분이었지.
“괜히 저희 때문에 더욱 힘든 과정을 겪고 계시지 않습니까.”
강서표는 고개를 저었다.
“되려 감사는 저희가 드려야지요…….”
강서표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감돈다. 마령고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상상할 수 없었을 표정이었다.
“공자님이 합류하신 후에, 저희들 중엔 낙오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
나는 왠지 머쓱해져 뒷머리를 긁었다. 전생엔 누군가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을 일이 없었으니까.
소정대 그 새끼들이야 되려 욕지거리를 하면 했지 감사하다는 말을 할 놈들도 아니었고.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 네.”
“조금 더 주무십시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알려드릴 겁니다.”
“그래도…….”
“지금 저희를 이끄는 건 공자님이시지 않습니까. 공자님이 지치시면 자연히 저희들의 피해가 더 커집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 강서표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몽을 꾸고 잠에서 깨었지만, 어쩐지 다시 잠자리에 들어도 악몽을 꾸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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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신가요?”
문을 닫자마자 들리는 목소리에 강서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리 걱정되시면 직접 가져다주시라니까요.”
“……아, 그, 그래도 남자 혼자 있는 방에…….”
남궁선화의 성격이 여성스럽긴 하지만, 이 정도로 남자와 내외하지는 않았다.
강호의 여성들이 남·녀 간에 내외하지 않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니까. 그런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고 자란 남궁선화가 이렇게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건.
‘좋은 때구나…….’
강서표의 올라간 입꼬리가 떨어질 줄 모른다. 그 어린 아가씨가 어느새 이렇게 커서 마음을 준 사내가 생기다니.
“그러고 보니, 좀 걱정되는군요.”
“네?! 뭐, 뭐가요?”
겨우 이십 명의 인원으로 정시 시험을 치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보여주지 않았던 깜짝 놀라는 표정.
“악몽을 꾸신 듯해서 말입니다. 잠자리가 뒤숭숭하지는 않을지…….”
“네……에?”
“별일 없다는 이야깁니다.”
“…….”
남궁선화는 그제야 강서표가 자신을 놀리고 있음을 깨닫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죄송하지만, 내일 아침엔 제가 좀 피곤할 거 같으니 공자님 식사를 좀 챙겨다 주십시오.”
“……피곤할 거 같으시다고요?”
“네……. 그리고 남자 방에 불쑥 들어갔다 옷 갈아입는 모습이라도 보면 하루종일 기분이 좋지 않거든요…….”
“…….”
남궁선화의 얼굴이 결국 홍시처럼 붉게 달아오른다.
저렇게 좋을까?
“그, 그만하세요!”
결국 자신이 놀림당하고 있다는 것을 안 남궁선화의 반응에, 강서표가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강서표의 웃음에 남궁선화는 부끄러운지 얼른 말을 돌린다.
“그런데 창궁대 무사들은 금은동 형제들과 뭐 하는 건가요?”
배 위에 올라선 뒤에 잠시간 널브러져 쉬던 무사들은, 하나둘 갑판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검을 뽑아 동작을 보여주거나, 시연하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주체는 주로 금은동 형제들이고, 청자들은 창궁대의 무사들과 철검문의 무사들이다.
“태을문의 제자들에게 검진을 배우고 있다고 합니다.”
“검진……이라고요?”
남궁선화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태을문에 유명한 검진이 있었던가?
아니 애당초 남궁세가와 철검문의 무사들이 다른 검진을 배울 이유가 있었나?
“태을문의 제자들이 익힌 검진이 백호검진과 비슷하다고 하더군요.”
백호검진이라면 자신도 안다.
무림맹의 공식 무공인 백호검법과 연동되는 백호검진.
이름이야 그럴싸하지만 무림맹도들이 쉽게 익혀 적용할 수 있도록 삼재진과 팔괘진을 조잡하게 섞은 검진에 불과하지 않던가.
“백호진을 굳이 왜……?”
“완전 똑같진 않습니다. 듣기로는 진 공자가 알려준 거라 하는데. 본인이 변형시켜서 익히게 했답니다.”
진소운의 이야기가 나오자 잠시간 남궁선화의 반응이 재밌다. 강서표는 갑판에 모인 무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쉽고 간단한 데 활용성이 큰 게 특징입니다.”
남궁선화는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쨌든 쉽고 간단하다는 건 파괴력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그걸 굳이 쉬는 시간 쪼개서 익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게…… 백호검진의 호위진이라고 하더군요.”
“……뭐가요?”
“금은동 형제가 밥을 보호하는 검진 말입니다.”
“…….”
남궁선화의 시선이 갑판으로 향했다.
금은동 형제가 무사들로 둘러싸인 중심에서 백호검진을 펼치고 있었다.
어째 눈이 익는다고 했더니, 식사 중 습격받을 때마다 펼쳤던 검진이다.
금·은·동 형제는 다른 무사들이 습격에 질려 더 이상 밥을 짓지 않을 때도 꾸역꾸역 밥을 지어 먹었다.
“다들 어떻게든 익히고 싶어 했는데…… 선뜻 가르쳐 주겠다고 하여…….”
“…….”
이번엔 강서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무사들의 심정은 알지만 그걸 자신의 아가씨에게 직접 전달하는 건 좀 부끄러운 일이니까.
“육포만 먹는 생활에 지쳤다고……. 세가의 무공은 강력한 데 반해 활용성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백호검진은 셋이서도 펼칠 수 있으니까……. ”
“……저도 좀 배울 수 있을까요?”
“네?”
“아니, 저도 익혀놔야겠어요. 모란 언니랑 죽을 지어 먹고 싶거든요.”
“아……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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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사홍 포구에 닿기 전 배를 강 중간에 세운 채 물살을 가로질렀다.
사홍 포구에 이미 먼저 와서 기다릴 자들을 대비한 것이다.
“어째 조용하네요.”
내기를 일으켜 젖은 무복을 말리는 성모란의 이야기.
그녀의 말마따나 사위는 그간의 여정이 무색할 만큼 불안하리만치 조용했다.
“일단 이동하죠.”
삼관문의 시험은 강호의 네 곳에서 시행된다.
하남의 남악.
섬서의 동천.
사천의 성도.
호남의 악북산.
무림맹이 위치한 무한에서 각기 성 두 개 만큼의 거리가 떨어진 곳에 설치된 시험장은, 강호 전체에서 시험을 보는 이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동서남북에 각각 설치된다.
이 덕분에 시험 응시생들의 이동 경로가 일정하게 정해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응시자들은 자신보다 약한 경쟁자를 물리치기 위해 경로 위에서 기다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가 그간 점창과 화양표국뿐 아니라 여타 다른 경쟁자들의 견제를 받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밤을 새워서 달리자, 날이 밝을 때쯤엔 본래 목적지였던 사홍 포구에 다다랐다.
멀리 보이는 사홍 포구에선 응시생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
남궁선화가 나직이 말했다.
“생각보다…… 숫자는 얼마 없네요. 이걸 좋다고 해야 하나?”
“저라면 사홍 포구가 아니라 풍현으로 가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저라도 그러겠어요.”
우린 사홍 포구를 그대로 지나쳐 숙천 방향으로 향했다.
아직까지 따라붙는 인원은 없었다.
삐육-
아침을 대신해 육포를 뜯고 있는 동안, 전서응이 울음소리를 내며 내게 다가왔다.
-무당파 현정 외 이(二)명과 그의 무사들.
-화산파 연우문 외 삼(三)명과 그의 무사들.
※현재 풍현으로 가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음.
하오문이 전해준 소식지에는 현재 우리를 쫓고 있다는 무당파와 화산파의 제자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기이한 점은 무당파와 화산파의 제자들이 내가 기억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이었다.
‘누구지?’
이번 기수에 무림학관에 들어간 인물들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 머릿속에 기억되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신기했다.
잠시 머릿속 장서고를 뒤지고 있는 찰나, 성모란과 남궁선화가 다가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 이름이 낯익어서 말입니다.”
난 전서를 두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전서를 받아 든 성모란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현정이면 용소아의 사제로 유명하잖아요.”
“용소아의 사제로 유명하다고요?”
“네. 그 용소아가 무당산에 있을 때 늘상 끼고 돌아다니던 사제요. 현정 자신도 재능이 심상치 않아 무당에서 무척이나 장래를 기대하는 유망주죠.”
“연우문은요?”
“연씨세가 장자고요. 화산파의 속가제자로 들어갔다더니, 이번 무림학관 시험을 치르는 중인가 보네요.”
연씨세가라면 권법으로 유명한 가문이다.
독문 권법과 각법이 천하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단한 문파.
그런데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 장자가 굳이 검을 배우기 위해 화산파로 들어갔다면, 그의 검에 대한 재능 또한 현정에 못지않다고 봐야 했다.
“단지 그뿐입니까?”
하지만 나는 아직 해소되지 않는 기분에 재차 물었지만, 성모란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단지 그것뿐이라고 하기엔 대단한 상대들이에요. 우습게 볼 수 없는 상대들.”
“흠…….”
이어 장서고의 심현각 자료들을 찾아보려는 찰나. 금은동 형제가 눈에 들어왔다.
“뭐 하냐, 너희들?”
세 형제는 걷는 와중에 손을 뻗으며 서로의 소매를 잡는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 그게요. 남궁세가 무사님들께 금나수를 좀 배웠습니다.”
“금나수?”
“네. 무사라면 간단한 금나수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하셔서.”
세 형제가 펼치는 금나수는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십삼금나수다.
삼재검법처럼 대중적이진 않지만, 어느 정도 무공을 익힌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거쳐가는 금나수.
금은동 세 형제는 태을문과 태을검제의 진전에 없는 무공을 스스로 채우고 있었다.
“……역시 익히면 안 되는 건가요?”
금표가 슬쩍 눈치를 본다.
보통 사문에선 타 문파의 무공이나 저잣거리에 있는 무공 같은 것은 익히지 못하게 하곤 했으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다. 아니, 되려 열심히 익혀두어라.”
“정말요? 한데 무사님들이 하시는 말씀이 너무 열심히 하면 본래 무공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너희가 그렇게 열심히 할 일은 없지 않으냐?”
“……사형…….”
“농담이다. 태을검제님의 무공 중 가장 위대한 것이 뭔지 아느냐?”
“……음, 만해천지검결이죠.”
금표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고, 은호와 동룡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그저 가장 강한 무공일 뿐. 가장 위대한 무공은 아니다.”
“그럼요?”
“태을진경.”
태을검제의 무공 중 가장 대단한 공부를 꼽자면 단연 태을진경이다.
“태을진경의 요체는 삼라만상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다.”
“……네?”
“그리고 여타 다른 무공들은 태을진경을 통한 태을검제님의 해석일 뿐이다.”
금은동 형제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태을진경만 있다면 여타 다른 무공 모두가 없어도 태을문의 무공이 이어질 것이라는 거다.”
“이해가 안 됩니다.”
“만해천지검결도 소천검법과 대천검법도 만화무적권도, 모두 형과 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형과 식이 없다면 그건 무공이 아니지 않습니까.”
“쯧. 강호의 절대 고수들이 대단한 형과 식으로 상대를 제압하더냐?”
“…….”
“형과 식은 깨달음의 과정을 좀 더 쉽게 익히기 위한 사다리에 불과하다. 결국 그 위에 올라선다면 형과 식이 모두 필요 없을 뿐이지.”
그제야 조금씩 이해가 가는 표정의 세 형제.
“무엇보다 태을진경의 수련에 노력해라. 그리고 여러 무공들을 열심히 익혀라. 그러다 보면 언젠가 너희 스스로 너희만의 형과 식을 만들 날이 올 수 있을 것이다.”
“저희가요?”
평소 무공의 깊이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은호가 반색하며 되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바로 태을진경이 대단한 무공인 이유다.”
내 말과 함께 세 형제는 행공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아! 그렇다고 달리는 속도가 느려지면 시험은 어떻게 치를 것이냐!”
그제야 다시금 제 속도가 올라오는 세 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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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도 별일이 없군요.”
서주를 지나칠 때 우리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서주의 창궁상단 지부가 있었기에 긴장을 풀 겸 쉬긴 했지만, 그렇게 된 이상 추격자들의 이목을 더 이상 숨길 순 없게 되었으니.
하지만 서주를 떠나 풍현에 다 와 감에도 응시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평화가 불안한 적은 첨이네요.”
우린 일부러 자취를 남기기도 하고, 저녁에 공터에서 불을 피워 밥을 먹기도 했다.
그럼에도 추격은 없었다.
풍현으로 가는 길목 은신해 있을 만한 곳을 직접 수색하기도 했지만, 인적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화산과 무당만이 뭔갈 꾸미고 있다면 통일된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경쟁자들은 그들뿐만이 아니다.
화양표국이 우릴 쫓을 때 수없이 많은 응시생들이 우리의 틈을 노린 것처럼, 무당과 화산이 우릴 노리는 틈바구니로 나타나는 다른 경쟁자들이 있어야 했다.
삐육-
매의 울음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매일 아침 도착하던 전서가 정오가 되도록 소식이 없기에 기다리던 참이었다.
내 어깨에 다다라 속도를 천천히 줄인 전서응은 자신의 오른발을 내밀었고, 난 육포 하나를 입에 넣어주며 전서를 열었다.
-무당파 현정 외 이(二) 명과 무사들.
-화산파 연우문 외 삼(三) 명과 무사들.
※현재 추적 불가.
“…….”
“…….”
“…….”
전서를 함께 보던 남궁선화와 성모란도 말을 잇지 못한다. 가장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최소 오백 단위의 단체일 텐데.”
“이렇게 한 번에 자취를 감출 수 있다고요?”
우리도 그렇지만, 많은 인원을 데리고 몸을 숨긴다는 것은 결코 여의치 않은 일이다.
암살이나 도적질을 하는 이들이 동시에 움직이는 숫자가 열을 넘지 않는 것을 생각해 보면 너무나 이치상 당연한 일.
한데 정보력만으론 개방과 수위를 다투는 하오문의 눈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확실히 어딘가 숨어있는 것으로 봐야겠지요?”
“초 대주님, 강 대주님, 경계를 강화해 주세요.”
“…….”
남궁선화와 성모란이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며 긴장의 끈을 당겨가고 있을 때.
나는 드디어 머릿속 장서고 가장 깊은 곳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발견했다.
“!”
나는 해가 있는 위치를 바라봤다.
서산에 걸린 해가 뉘엿뉘엿 지려 한다.
나는 서둘러 두 사람을 돌아봤다.
“지금부터, 전력으로 달리겠습니다.”
“네?”
“언제 습격이 올 줄 알고요?”
나는 금은동 형제에게도 말했다.
“지금부터 행공을 멈추고 전력으로 달려라.”
“……?”
“…….”
“……네.”
다급한 내 목소리에 남궁세가와 철검문의 무사들도 바짝 긴장을 끌어올린다.
“어쩌면 무당 화산보다 더 무서운 상대가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네?”
“그게 무슨…….”
어쩌면 늦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서주에서 풍현으로 오는 동안 인적이라곤 하나도 없었으니.
“진 공자 설명 좀 해주세요!”
“일단 움직이세요.”
“…….”
내가 설명 없이 급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금은동 형제를 필두로 남궁세가와 철검문의 무사들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최대한 빨리 마을로 들어가야 한다. 내 예상이 맞다면 어둠과 밤은 그들의 것이기에.
두근-
두근-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한다.
내 의도에 의한,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다.
난 이미 한 번의 생을 경험했고, 이번 생에선 태을진경까지 익혀 그 누구보다 명경지수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니.
“……진 공자 뭐라고 설명 좀 해줘요. 괜히 긴장되잖아요.”
고로 이 심장의 격동은 외부에 의한 것이었다.
“…….”
상대를 파악했다 한들,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애당초 믿을 수 있기나 할까? 무림맹 또한 그들이 세상에 나왔을 때 아무도 믿지 않았는데.
“적입니다.”
“적이요?”
“네.”
머릿속 장서고 가장 깊숙한 곳.
심현각의 자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도 관심이 없어 한 번도 뒤져보지 못한 곳.
그곳에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미제사건 보고서]
-무당파 현정
-화산파 연우문
※사제들과 함께 전멸.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자들에 의한 기습으로 추정.
※특징 : 발굴된 사체의 뼈 일부가 검게 변색된 것이 보임.
정보의 조각이 서로 너무 떨어져 있었다.
더불어 설마 그들이 지금 이곳에서 활동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암습과 기습에 특화된 단체입니다.”
사방으로 확장시킨 기감에 무언가 걸려든다.
“엎드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인 무사들. 하지만 조금 늦게 반응한 무사들의 복부에는 검은색의 비검이 꽂혀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태을진경을 익힌 내게도 미약하게 느껴졌던 기감이다.
저들에게는 더욱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남궁선화와 성모란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숲을 바라본다.
이윽고, 숲의 그림자가 길쭉하게 길어지더니 스물에 달하는 검은 인영들이 하나, 둘 나타난다.
“…….”
처음 보는 기괴한 장면에 다들 입만 벌릴 뿐, 아무 말 하지 못한다.
“뭐죠…… 저들은……?”
암흑절혼단.
천마신교의 가장 무서운 칼이라 불리는 존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