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암흑 속 가장 날카로운 칼(4)>
“저들은…… 우릴 죽이려 했던 이들입니다.”
날이 밝았다.
평원을 비추는 빛과 함께, 암흑절혼단은 쫓기듯 어둠과 함께 사라졌다.
개벽의 아침과 함께 맞이한 장면은 처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살아남은 응시생들은 자신들이 간밤에 얼마나 무서운 현장에 있었는지를 깨닫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알고 있습니다.”
자연히 현장에 남은 이들은 고용인에게 버려진 무사들이 대부분.
나는 위급한 환자들을 먼저 구하자는 이야기를 했지만, 무사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알면서도 도와주겠다고요? 진 공자님…… 부처님이십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또한 저를 노린 자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움직인 이들 아니겠습니까.”
동원할 수 있는 무사의 수준이 절정으로 제한되어 있다지만, 고용되는 무사들 전부가 절정의 수준일 순 없다.
특히나 세가 약하거나 돈이 없는 집안에서는 일류나 이류 무사, 심할 경우 삼류 무사들도 고용을 하곤 한다.
그리고 평원에서 죽은 이들은 고용주들보다 고용인이, 고수보다 할 수들이 더 많았다.
“고용주들에게 버림받은 자들은 이곳에서 죽어가기만 기다려야 할 겁니다.”
“…….”
“…….”
안전을 위해 따로 호위무사를 대동하는 응시생은 위급한 상황에 모두 도망갔다. 이들은 도구처럼 쓰인 것이다. 전생의 우리 소정대처럼.
“더불어 저희들도 챙겨야 할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분들을 챙기시면 제가 이들을 보겠습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성모란과 남궁선화가 나섰다.
“그래요. 그렇게 하기로 해요.”
“대주님, 그렇게 해주세요.”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하던 강서표와 초무빈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세가와 철검문의 무사들 스물이 죽었다.
처음 시작 인원이 육십 명이었던 걸 생각하면 대단히 적은 숫자이지만, 그렇다 해서 피붙이처럼 가까웠던 이의 죽음이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사체라도 찾아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는 것이 남은 자들의 의무.
나는 금은동 형제를 대동하여 위급한 부상자들의 응급치료를 시작했다.
응급치료받는 자들은 대부분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제대로 된 치료가 아니라 꽤 아플 텐데도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던 이들은, 치료가 대충 끝나고 자리를 뜰쯤에야 한마디를 내뱉었다.
“……고, 고맙소.”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정오가 다가올 즘, 남궁선화와 성모란이 돌아왔다.
“도울게요.”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들을 향한 나의 행동은 내 전생에 대한 안타까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의 짐을 남궁선화와 성모란에게까지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시간이 걸렸다간 삼관문에 통과하지 못할 거 같아 그래요. 기껏 살아 놓고 제시간에 못 맞추면 그것만큼 억울한 게 어딨어요.”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무슨 방법이 있어요?”
그때 평원 쪽으로 일단의 수레가 거칠게 밀려 들어왔다.
“소운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양 점주님!”
양군백이 하오문도들과 의원들을 이끌고 도착했다.
“……?”
“……?”
남궁선화와 성모란은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묻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제 전서를 보냈습니다. 이쯤에서 전투가 일어날 것 같으니, 사후 처리를 부탁한다고요.”
“하…….”
남궁선화와 성모란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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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오백?”
제갈소명은 천목각의 보고서를 보고선 잠시 멍해 있다가 다른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사망자 : 사백팔십(四百八十) 명.
조금 줄었지만, 여전히 많은 숫자다.
정신을 차리고 세 번째 보고서를 집어 들었지만 숫자의 변화는 미비하다.
“이게 무슨…….”
대단위 전투에서 일백에 가까운 숫자가 죽어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지만, 이번 전투는 대단위 전투도 아니다.
남궁세가와 철검문, 태을문이 소유한 관문패를 빼앗기 위해 벌어진 일방적인 전투.
관문패를 확보하고 나면 저들끼리의 싸움이 또 벌어지겠지만, 힘의 역학관계를 누구보다 빠르게 파악하는 무림인들은 이 정도의 처절한 전투까지 이어지게 만들지 않는다.
더구나 문제는…….
이번 전투의 제1 목표물이었던 조. 남궁세가, 철검문, 태을문이 대부분 생존했다는 것.
“그게 왜 문제입니까. 천만다행이지요.”
“…….”
제갈소명은 물색없이 끼어드는 맹주원을 한 번 보고는, 주위의 다른 만통부원들을 보았다.
방금의 보고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여 한바탕 드잡이했던 참이다. 자연히 만통부원들은 혹여나 작은 흠이라도 잡힐까 두려워하며 눈을 피하고 긴장을 숨기지 못하는데, 맹주원 이 자식은 겁도 없이 끼어들었다.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맹 부장, 무림맹 체계 변환에 대한 기획안 다 작성했나?”
“네. 군사님 책상 위에 뒀습니다.”
“……정도회에서 각으로의 승격 기안을 올렸다던데. 그건 어떻게 거절했지?”
“안 되는 이유와 만약 정도회가 각으로서 승격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 더불어 백도회와 12봉성 또한 각으로 승격을 바라는 점을 정리하여 정도회 회주와 회원들에게 보냈습니다. 견본은 역시 군사님 책상 위에 있고요.”
“……이번에 맹주님께서 집행각에 대한 감사를 하시겠다고…….”
“집행각이 워낙에 뻣뻣한 집단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를 상대하려면 만통부나 심현각이 나서야죠. 학관 정시가 끝나고 감사에 나설 후보들을 뽑아 정리해서 군사님 책상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
맹주원이 뻔뻔하게 웃으며 제갈소명을 본다.
“더 트집 잡으실 거 없지요?”
“…………너 왜 눈깔을 그렇게 뜨냐?”
“…….”
제갈소명은 자신이 너무 했다 생각하며 은근슬쩍 보고서로 말을 돌렸다.
“어떻게 생각하지?”
“확실히 기묘하긴 합니다. 우리 소운이 조는 겨우 60명밖에 안 됐는데, 천명을 상대하고도 살아남았으니까요.”
“이게 단순히 기묘한 사건으로 끝날 일이라 생각하나?”
“그건 아니겠지요.”
“그럼 문제가 뭐라 생각하나.”
맹주원은 잠시 천정을 멍하니 본다. 생각에 잠길 때마다 그가 버릇처럼 하는 행동이다.
“너무 많이 죽었습니다.”
“그건 나도 보고서를 봐서 알지.”
“아뇨. 그게 아니라 전투로 인해 죽을 수 있는 인원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자세히.”
“제가 우리 소운이와 함께 하택에서부터 움직였다고 생각해 봤을 때.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소운이처럼 정면승부를 선택한다고 한다면…….”
맹주원의 손가락이 허공의 무언가를 만지듯 꼼지락거린다. 머릿속의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백 명. 그게 제 한계입니다.”
제갈소명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또한 같은 상황에서 비슷한 계산이 나왔다.
“하지만 문제는 저 상황에서 전 살아남을 자신이 없다는 거겠죠.”
이백 명까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살아남는 것까지는 장담할 수 없다.
천하의 맹주원이 그리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어려운 걸 해냈다.
그것도 오백 명이라는 사망자를 만들고.
이것은 상식을 넘어 인과를 한참 벗어난 숫자다.
“단순히 태을문의 저력을 우리가 몰랐던 거라고 한다면?”
예상할 수 있는 바는 몇 가지 없다.
태을문이 여태껏 무공을 꼭꼭 숨겨놨다든지.
진소운이 사실은 반로환동한 고수였다든지 그것이 아니고선 설명이 되지 않는다.
맹주원은 고개를 젓는다.
“태을문의 사정이 변한 지점은 뚜렷하게 있습니다. 우리 소운이의 무공이 발전한 시기도 뚜렷하고요. 그 속도를 계산해 보면 애당초 반로환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고요.”
“그럼?”
“전에 군사님과 제가 시답잖게 나눴던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맹주원이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는 게 뭐 하루 이틀인가? 하지만 제갈소명은 금세 알아들었다.
“무림맹의 멸망?”
“네.”
“…….”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흑수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 때문이시지요?”
가장 큰 문제.
암막 뒤에 선 존재들이 있다면 그들이 작은 흔적이라도 남겼어야 하건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저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또 사라진 조각인가.”
하지만 이번엔 주위에 맞출 조각이 없다. 주위의 조각이 없으면 빈자리에 무엇이 들어가야 할지 알 수 없다.
“결국 관건은 지부에서 어떤 보고가 올라오느냐군.”
머리가 지끈거린다.
맹에서 아무리 정보를 잘 처리해도 지부에서 올라오는 정보가 막혀버리면 말짱 꽝이다.
각 지역의 지부장 자리는 실력으로만 오를 수가 없는 자리다.
각 문파에선 어떻게 해서든 지부장의 자리에 자신의 사문의 제자를 넣으려 온갖 술수를 다 부리고, 손을 쓴다.
자연히 사문의 도움으로 지부장의 자리에 앉은 이들은 무림맹의 명령보다 사문의 입김에 더 빠릿하게 움직인다.
이들은 사문을 위해 때때로 정보를 구별하여 올리고 사건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처분한다.
더구나 이번 사태의 피해자를 지목하자면 구파일방의 2진들과 백팔봉 유수 문파의 자제들.
정보가 오염될 가능성을 넘어서, 문제의 해결 방안이 완전히 다른 곳으로 틀어질 수도 있었다.
“집행각이 나설 때는 너무 늦는데.”
그들의 잘못을 다잡을 수 있는 체계란 결국 그들이 잘못한 이후의 일.
지금 같이 한시 바쁜 시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뭐?”
“제가 가서 사태를 파악하고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
“더불어 간 김에 우리 소운이가 괜찮은지도 좀 보고 싶고요.”
잠시 고민하던 제갈소명은 고개를 저으며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맹주원을 향해 적엽비화의 수법으로 던졌다.
보고서는 일직선으로 날아가 맹주원의 미간을 때리려 했으나 맹주원이 재빨리 고개를 숙여 가까스로 피했다.
“헙! 저 맞으면 어쩌시려고! 저 없으면 지금 만통부 정지되는 거 모르십니까?”
“그걸 아는 놈이 하남성까지 가겠다고 말해?”
“우리 소운이가 걱정되는 걸 어떻게 합니까.”
“그놈의 ‘우리 소운이’, ‘우리 소운이!’ 네놈은 그놈을 본 적도 없다니까!”
“그러니 더욱 애틋한 것 아니겠습니까으아아악.”
제갈소명이 던진 보고서는 결국 맹주원의 안면에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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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운님께서 사람들에게 위치를 알려주라는 말을 듣고는 고민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양군백은 내가 인파에 숨기 위해 펼친 작전을 듣고선 전서가 진짜 인지 아닌지를 고민했던 듯하다.
“태을문의 깃발을 올렸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는 진짜 놀랐고요.”
지금 생각해도 제정신으로 펼칠 수 있는 작전이 아니었지만, 이 작전이 아니었다면, 남궁선화와 성모란을 비롯해 우리 모두는 암흑절혼단에게 죽었을 것이다.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정체불명의 존재들에게 습격받았습니다.”
“정체불명이라고요? 저희 쪽에서 무당파와 화산파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결국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나는 암흑절혼단원의 한쪽 팔을 꺼내놓았다.
“힉.”
검은색 피부에 하얀 골검이 뽑혀 있는 기괴한 팔을 본 양군백이 대경했다.
“이, 이게 뭡니까?”
“저희를 습격한 이들입니다.”
“이, 이게 사람 팔이라고요?”
“네.”
“…….”
양군백은 차분한 표정으로 팔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피부를 눌러보기도 하고, 골검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이건 사람 뼈가 맞군요.”
“네.”
“근데 피부는 사람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데요?”
유체골검의 시술을 받은 자의 특성이 바로 그 피부에 있었다.
“이걸 보십쇼.”
나는 피부의 한 면을 잡고 쭉 당겼다. 그러자 피부가 마치 옷가지처럼 쭈욱 늘어나며 그 안의 근육과 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양군백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요.”
“이런 신체를 가진 자들이 스물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럼 시체가 더 남아있습니까?”
“아쉽게도 이것뿐입니다. 다른 이들은 죽자마자 뼈와 피부가 삭아 없어지더군요.”
양군백은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사체를 보았다.
“아쉽군요. 사체가 더 있었다면…….”
양군백은 말하지 않아도 이 사체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흑룡검을 꺼내어 팔의 윗부분을 잘라 양군백에게 넘겨주었다.
“소운님…….”
“어차피 아랫부분은 남지 않았습니까. 전 아직 무림맹도가 아니기에 사체를 줘야 할 의무도 없고요.”
“아…….”
“이것이 개방과 하오문의 격차를 만들어 낼 겁니다.”
내 말에 사체를 멍하니 바라보던 양군백의 두 눈이 부릅떠진다.
그러더니 사체와 나를 반복해서 보다가 뭔가를 깨닫고는 나를 초롱한 눈으로 바라본다.
“일부러 저를 부르신 거군요.”
“……네, 뭐. 겸사겸사.”
“이 어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저희의 식객이시면서 누구보다 많은 도움을 주시니.”
하오문이 마교에 존재를 먼저 알아차린다면, 그 존재의 흔적을 통해 마교의 출몰을 예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되면 무림 전체에 전쟁에 대한 긴장감도 더 빨리 형성이 될 것이고, 동시에 마교의 존재에 대한 조사를 가장 먼저 시작했던 하오문은 개방을 단숨에 제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강호에서 가장 정확하고 빠른 정보기관이 나의 확실한 뒷배가 되는 것이다.
“이 또한 다 우리 모두를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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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양에서 남악까지 별다른 습격은 없었다.
소문이 난 탓인지, 전날에 올 사람들은 다 왔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남악에 들어선 뒤로는 다들 완전하게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삼관문이 펼쳐지는 남악지부의 일대에선 관문패를 서로 빼앗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린 남악에 도착하자마자 부상자들을 의원에 넣고 미뤘던 잠을 잤다.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각 지역에 두고 온 무사들에게 먼저 연락을 보내어 안전하게 남악까지 도착했다는 것을 알렸고, 그 이후론 무림맹 남악지부로 가기 전에 각기 해야 할 일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그 깃발은 왜 계속 들고 있는 것이냐?”
아침 일찍 성모란과 함께 어딘갈 다녀왔던 은호는, 아직도 예의 그 태을문 문기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다.
“태을문의 문기는 함부로 꺾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하! 또 내가?”
“아니요. 문주님이요.”
“…….”
“어쨌든 그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이건 자신감의 표식이지요. 우린 꺾이지 않는다 덤빌 테면 덤벼봐라 그런.”
“그런 말을 하고 싶으면 그 입에 물고 있는 당과나 좀 빼고 말해라……. 아니 근데 돈이 어디서 나서 그런 군것질거리를 사 온 거냐?”
우리 일행의 돈은 내가 관리한다. 사제들에게 인색하게 굴진 않지만, 그렇다고 저 한 손에 든 한 보따리의 군것질거리를 살 정도로 여윳돈을 주진 않는다.
“아, 이거 말입니까? 성 누님께서 사주신 겁니다.”
“성 소저가? 왜?”
은호는 당과를 먹다 말고 말없이 나를 뚱하니 쳐다보았다.
“대사형, 근데 대사형 이상형이 어떻게 되십니까? 무공이 강한 여성도 좋아하십니까?”
“자기 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라면 괜찮겠지. 근데 그건 왜?”
“그럼 됐습니다.”
“뭐야.”
그렇게 말을 돌리고선 혼잣말로 ‘어쨋든 비슷하니까.’라고 중얼거린다. 나는 당최 이해가 안 되어 고개를 저었다.
“일단 대장간에 들르자.”
동룡의 검식이 하루하루 바뀌어 가면서 검이 많이 상했다. 견성사자 시험을 치루며 받은 좋은 검이었지만, 그 검도 결국 동룡의 검식을 모두 받아내진 못했다.
검날의 이빨이 다 빠진 것은 물론이고 바뀐 검식에 비해 검이 너무 가벼웠다.
“동룡이 검을 바꿔줘야 한다.”
“그거 안 그래도 될 것 같은데요.”
금표가 뒤를 가리킨다.
그곳엔 남궁선화와 함께 움직였던 동룡이 웬 기다란 천을 가슴에 푹 껴안고 있었다.
“안 가도 돼요. 대사형.”
“……그건 또 뭐냐?”
대답은 금표에게서 나왔다.
“남궁선화 누님께서 창궁검을 주셨답니다.”
“…….”
창궁검은 남궁세가의 정식 무사가 되어야만 받을 수 있는 검이다. 명검이나 보검은 아니지만, 검에 한철이 조금 섞여 있는 만큼 일반 무사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검은 아니었다.
“선화 누이랑 의남매 하기로 했어요. 예전부터 동생을 가지고 싶었다고요. 이건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선물로 주신 거고요.”
“…….”
남궁선화랑 동룡이랑 그렇게 친했던가? 하는 의문과 함께 금표에게 시선이 간다.
“금표 넌 왜 혼자 빈손이냐?”
혼자 뚱한 표정을 짓던 금표가 나를 바라본다.
“사형.”
“왜?”
“혹시 또 아는 여자분 없으십니까? 돈이 많고 집안이 대단하면서 나이가 조금 많은.”
한 사람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지만,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대로 중앙에 거대한 사람들의 행렬이 나타났다.
“뭐지?”
행렬은 특이하기 그지없었다.
선두에 선 사람들 대부분 어느 곳 하나 멀쩡한 경우가 없었고, 그나마 행렬 뒤에는 거대한 관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계룡상단의 행렬에서 비슷한 것을 보았지만, 이 행렬은 그 규모가 계룡상단이랑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말과 나귀를 이끄는 표사들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
은호가 당과를 씹으며 말했다.
“성 누님 말씀이 호북에선 참가자 절반이 저런 상태랍니다.”
“여기도 대접전이 일어났다더냐?”
“아뇨, 무당파가 호북성 전체를 돌며 응시생들을 탈락시켰답니다.”
“…….”
“삼관 이후엔 다들 경쟁자로 돌변할 이들이니까. 미리 정리한 거라고 하네요.”
“응시생 중에 어중이떠중이는 보이지도 않는데.”
부상자들 대부분이 백팔봉의 상위에 이름을 올린 자들이었다.
“그건 아니겠죠. 사문의 사람을 챙길 수 있는 문파가 저 정도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은호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복양 평원에서도 그렇지만, 단지 돈으로 잠시 고용된 사람들의 사후를 챙기는 고용주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아무튼, 무당이나 소림과는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은호는 관이 잔뜩 쌓인 마차를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무당과의 악연은 용소아 하나로 충분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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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지도 모르겠군요.”
의원을 나선 성모란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평원에서 괜찮아 보였던 무사들은 남악에 들어서자 긴장이 풀린 듯 기절해 버렸다.
남은 철검문의 무사 수는 이제 스무 명.
삼관문의 결과와 상관없이 마지막 시험을 겪어내기엔 턱없이 적은 숫자다.
“그래도 그 전쟁터에서 이렇게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입니다.”
“……그렇지요.”
간밤에 수백의 사람들이 죽었다.
아니 애당초 진소운이 없었다면 자신들도 분명 그들과 함께 그 평원에서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천만다행이에요.”
“아마 앞으로도 진 공자님과 함께하시면 큰일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초무빈의 말에 성모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초 대주는 진 공자를 싫어하지 않았었나요?”
초무빈이 얼굴을 붉힌다.
“아가씨도 참 언제 적 이야기를, 그땐 저희 문파의 정적 아니었습니까.”
“지금은 뭔가 다르고요?”
“장차 부마가 될…….”
“네?”
“으흠, 아, 아닙니다. 그보다 아가씨 이거…….”
초무빈이 얼른 말을 돌리며 품속에서 손바닥만 한 작은 장식을 꺼내었다.
“이거 분통 아닌가요?”
“네.”
“저 씻고 왔는데. 아직도 더러워 보여요?”
“그게 아닙니다. 아까 봤는데 강서표 그 작자가 치사하게 아가씨가 씻고 있는 틈을 타 남궁 소저와 장신구 점에 방문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장신구 점에요?”
“네.”
“왜요?”
초무빈은 성모란의 반응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도 눈치가 없어서야 연애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남궁선화와 성모란 두 사람의 관계를 애정 때문에 망쳐놓을 수 없는 일.
“어쨌든 하지 않는 것보단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어차피 삼관문에서 다시 흠뻑 흙먼지를 뒤집어서 쓸 텐데 굳이 화장을 왜 하냐고요.”
초무빈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니, 전 그냥 진 공자가 보기에 아가씨가 너무 선머슴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네? 아, 아우, 그게 무슨…….”
성모란은 자신이 진소운을 좋아한다는 티가 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평소 워낙 괄괄하고 화통한 성격에 철검문 내에서도 사내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지만, 좋아하는 사내에 대해서 슬쩍 찔러보니 금세 얼굴을 붉히는 걸 보며 또 소녀 같은 모습이 금방 드러난다.
“아가씨 뜻이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이건 그냥 제 아내에게나 가져다…….”
“잠깐만요.”
“네?”
성모란이 양 검지를 모아 꼼지락거린다.
“……진 공자는 분명 강한 여자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초무빈은 반색하며 분을 내밀었다.
“똑같이 강한 여자라면 더 아름다운 쪽을 선택하지 않겠습니까?”
“……믿어도 돼요?”
“아가씨, 아가씨도 제 아내를 보셨지요?”
초무빈의 부인은 철검문 내에서도 유명한 미인이다.
“제가 이 면상에 어찌 그런 이쁜 부인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저를 믿으십쇼.”
“아, 알았어요.”
성모란이 얼른 뒤로 돌아 얼굴에 가볍게 분칠을 했다.
“어, 어때요? 괜찮아 보여요?”
“자연스럽게 딱 좋습니다. 그다음은 이거.”
또다시 초무빈에서 작은 자기함이 나온다.
“머릿기름입니다. 남자들은 이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에 눈이 더욱 갑니다.”
“…….”
“여기 연지입니다.”
“아니, 초 대주. 왜 여자 분칠에 대해 이렇게 잘 알아요?”
“제가 아내 심부름을 얼마나 많이 하는 줄 아십니까? 전 다음 생에 여자로 태어나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얼추 치장이 끝난 후, 초무빈의 허락이 떨어진 후에 그들은 무림맹 남악지부로 향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네요.”
“삼관문은 본래 참가자보다 구경꾼들이 많은 법이지요.”
“그런 것치고는 분위기가 너무 흉흉하지 않아요?”
인파를 뚫고 안으로 들어가자 진소운과 남궁선화가 보였다.
남궁선화 또한 성모란처럼 전날 전쟁을 겪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화사한 모습이었다.
“거 보십…….”
초무빈이 자화자찬을 하려는 순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성모란과 초무빈이 다가가자 진소운이 돌아봤다.
“오셨습니까.”
“네. 근데 이분들은……?”
일행의 앞에는 가지각색의 무복을 입은 중년인들이 검을 패용한 채 주르륵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그들 사문의 제자로 보이는 청년들이 수십이 몰려온 것이다.
“무당과 화산을 비롯해 이번 복양 평원에서 죽은 사람들의 사문 어른들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