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아비규환(阿鼻叫喚) 대여정(大旅程)(4)>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왕금산의 말에 진태산이 화들짝 놀라 자신의 얼굴을 매만진다. 그 정도로 안 좋았나?
“꼭 대웅묘(팬더곰) 같습니다.”
“…….”
그러고 보니 눈 밑의 검은 빛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상단이 조금씩 정리가 되고, 들어오는 돈이 많아진 것은 기쁘나, 그만큼 자신이 갈려 나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근데……. 장주님도 썩…….”
진태산의 눈에도 왕금산의 몰골이 들어온다. 자신과 다르게 비단옷을 걸치고 금빛 혁대를 맸지만, 피골이 상접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 둘 다 훌륭한 자식 때문에 여간 고생이 아니군요.”
왕금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돈다.
왕소소의 상재가 그리 뛰어나다 했던가?
들리는 소문으론 섬서와 감숙, 청해를 비롯한 왕가장의 세력이 두 배는 늘었다고 한다.
최근엔 서역과의 새로운 교역처가 생겨 북경에 납품하는 공납품의 양도 크게 늘어 금으로 건물을 지어도 될 정도라 하던데.
“혹시 내가 방해한 겁니까?”
왕금산의 말에 진태산이 고개가 갸웃거린다.
왕금산은 무림에 몸을 담근 사람이든, 관직에 발을 담근 사람이든 누구나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한낱 작은 방파의 외당주에게 눈치를 보는 듯한 말투라니, 사뭇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안 그래도 저도 장주님께 조언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바쁘실 거 같아 차일피일 미루던 중이었습니다.”
“하하, 마음이 통했다더니 다행이군요.”
“예, 언제든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먼 길 오시지 마시고 불러주십쇼. 제가 언제든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막대한 후원금을 내고도 생색 한번 내지 않던 사람이다.
철광석 광산을 개발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고, 상단 일은 말할 것도 없다.
최근엔 태을문의 제자가 삼관문을 통과했다고 조촐한 잔치까지 벌여주지 않았던가. 진태산의 입장에선 버선발로 맞이해도 모자랄 상대.
“다름이 아니라, 소소 때문에 왔습니다.”
“음? 태을문에서 어려운 점이 있답니까?”
자신이 알기론 왕소소는 이미 태을문의 아이들을 꽉 잡고 있었다. 어찌 그럴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계철영 때와는 달리 누구 하나 왕소소를 따르지 않는 아이들이 없다.
더구나 최근에 속가제자로 들어온 제갈천기와 모용세가에 교환제자로 다녀온 유성이도 왕소소 모시기를 당주 따르듯 하고 있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 아이의 움직임에서 무공을 익힌 듯한 흔적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
“뭔가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아마도 태을진경 때문인 것 같군요.”
“태을진경이라면…… 최근에 찾은 태을검제님의 진전 말입니까?”
“네.”
“괜찮은 겁니까?”
왕소소는 병환 때문에 태을심법 외의 무공은 익힐 수 없다. 내기가 혼탁해지면 태양지체의 성질이 다시금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태을진경은 태을심법의 심화편이라 보시면 됩니다. 더구나 공부가 심오한 만큼 단전의 내기는 더욱 정순해질 겁니다.”
“허허…….”
왕금산의 표정은 복잡했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
진태산은 송구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사문 내의 누구도 신경을 쓰지 못했군요.”
“아니, 괜찮습니다. 이야기하는 것을 까먹을 정도로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근데, 그 무공 중에 허상이 남는 보법이 있습니까?”
“허상…… 이라면……?”
“아이가 움직이는데, 그 발자취가 남더군요.”
태을팔만신보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벌써 허상을 남길 정도로 성취가 올랐다고?
“허…….”
“왜, 왜 그러십니까?”
왕금산의 놀란 모습에 진태산이 얼른 표정을 감추었다.
“따님이 가진 건 상재만이 아니었군요.”
태광당의 당주인 강채석만이 태을팔만신보를 밟을 때 허상을 남긴다고 했다. 아직 문주인 홍문기가 보법을 밟을 때 허상이 남지 않는 걸 생각하면, 홍문기보다 왕소소의 성취가 더 높다 봐야 했다.
“축하드립니다. 정말 대단한 따님을 두셨습니다.”
“허허…… 이거 참…….”
왕금산은 입술을 씰룩거리며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다 태을문의 가르침이 뛰어난 덕분이겠지요.”
진태산은 ‘사실 아직 저희들도 다 못 익혔습니다.’라는 말을 꾸욱 삼켰다.
“외당주께선 저를 어찌 보고자 하셨습니까?”
“아! 참. 상단을 본격적으로 운용하면서 행단을 어떻게 꾸려야 할지 고민이 많아서 말입니다. 직접 표행을 하기엔 현재 태을문은 봉문 중이고 말입니다.”
“흠…… 일단 표국에 의뢰를 하되 무사 한두 명과 깃발을 세워 태을문의 행단임을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도 차후에 태을문임을 알리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만, 지금 깃발을 세우는 것은 조금 이르지 않을까요?”
왕금산이 무슨 소릴 하냐는 표정이었다.
“굳이 차후에 알릴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지금 깃발을 세운다면 표국에서도 표행비를 더 저렴하게 해줄 텐데요?”
“네?”
대관절 태을문이 뭐라고 표행비를 저렴하게 해준다는 말인가?
“진소운이 사제들과 삼관문을 통과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렇지요.”
사실 진태산으로선 소문을 듣고도 진위가 궁금해지는 이야기였다. 시험을 치르겠다며 떠나보낼 때 이런저런 각오를 보이긴 했지만, 그냥 말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사실 태을문 같은 보잘것없는 문파의 제자가 사문의 지원도 없이 무림정시를 치른다는 게 말이나 된다는 말인가.
아무튼 어찌 된 일인지 삼관문을 통과했고, 지금은 대여정만 남겨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삼관문을 통과한 게 표행비를 깎아주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지?
“설마…… 모르셨습니까?”
“뭐가 말입니까?”
“그…… 아드님이 가는 곳마다 방해자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바다처럼 흐른다고 해서 시산혈해 흑염룡……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
시산혈해? 시이산혈해애 흑염룡?
끝났다.
이건 누가 봐도 피에 미친 흑도 아닌가? 이제 겨우 사문을 키우고 정통성을 인정받으려 했더니 시작도 전에 그 뿌리부터 의심받게 생겼다.
“아, 물론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살을 덧붙이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무당파가 반파된 일로 강호의 인물들이 태을문을 두려워하는 걸 생각하면, 깃발을 세우는 게 충분히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진태산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에 대해 왕금산은 의문이었다.
솔직히 무림 방파라면 상대에게 만만하게 보이는 것보다 두려움을 주는 것이 좋은 것 아니던가?
아니면 혹시 아들인 진소운에게만 태을문의 짐을 짊어지게 할까 부담이 돼서 그런 것인가? 하긴 생각해 보면 진소운이 그간 태을문에 한 일이 너무 많긴 했다.
“그 태을문은 단 네 명만이 참가하지 않았습니까. 그 덕분에 금은동 형제들은 흑혈삼룡이란 별호도 생겼답니다.”
“어억! 커흑!”
수습하기 위해 말을 내뱉었는데, 진태산의 얼굴은 점점 사색이 된다.
조금만 더 말을 꺼냈다간 졸도할 기색.
왕금산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 얼른 말을 돌렸다.
“어, 어쨌든 표행비가 굳은 건 좋은 일 아닙니까.”
“…….”
호의 가득하던 진태산의 눈초리가 어쩐지 싸늘하게 변하는 것 같다.
‘이건 뭐 말을 꺼내 보지도 못하겠군.’
데릴사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슬쩍 물어볼 참으로 직접 합비까지 왔건만, 본전도 못 찾고 돌아가게 된 왕금산이었다.
#
“흑혈삼룡의 대사형 되시는 흑염룡 대협이시군요. 반갑습니다.”
“…….”
호의적인 미소와 반대로, 악의가 가득 느껴지는 별호에 고개가 갸웃거린다.
흑혈삼룡?
뭔 놈의 별호가 이따위로 소름 끼친단 말인가?
‘룡’자 대신 ‘견’자만 딱 가져다 붙이면 피에 미친 흑도 광인들이 절로 떠오르는데.
“아, 금은동 형제들을 부르는 별호래요.”
남궁선화가 작게 전달하는 이야기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아직 약관도 안 된 애들한테 ‘흑혈’이라니, 미친 거 아닌가? 어떤 새끼가 일부러 태을문 제자들한테만 이런 악의적인 별호를 붙여주는 건가?
“하하하, 흑염룡 대협께선 시험에 매진하시느라 세상의 이야기엔 무감하셨군요.”
“하하하하.”
“호호호호.”
금빛 장포를 입은 훤앙한 청년의 웃음을 따라 그와 함께 동석한 다양한 복색의 일곱 남·녀가 함께 웃음 짓는다.
12봉성.
그중 8개의 문파의 제자들이 나를 찾아 창궁상단에 왔다.
“…….”
내 속도 모르고 웃는 모습에 멀거니 쳐다보니, 이내 신색을 회복한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죽현방 철순직.”
“!”
내가 툭 하고 내뱉자 눈가에 이채가 어린다.
내 손가락이 등 뒤의 거한부터 차례로 가리킨다.
“삼원문의 남화성, 천검방의 하영영, 서천문의 상무혼…….”
그렇게 8명을 모두 지목하자 장내에 있는 이들 모두가 놀람을 금치 못했다.
“허…… 어찌 저희를 다…….”
12봉성의 정예 제자들이라 한들 그간 강호의 활동이 없었으니, 자신들의 존재를 아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다.
“이때부터 함께였었군…….”
“네?”
“아닙니다. 어떤 일로 절 만나자고 하신 겁니까?”
철순직은 물론이고, 남궁선화와 성모란도 궁금해 죽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물론 이야기해 준들 믿을 일도 없겠지만.
“험험…… 어쨌든 이들 외에도 비풍문과 귀궁문의 제자들도 함께 합류하여 무한으로 갈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12봉성 정예 제자 열 명이 모이면 움직이는 인원이 못해도 팔백은 될 터.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건드릴 생각도 해보지 못할 정도의 규모다.
부대가 반파 직전인 우리 입장에선 부럽기 그지없는 상황.
자기네들은 시험에 합격한거나 마찬가지이니, 교분이나 나누자고 온 것이면 대가리 깨도 괜찮은 거겠지?
철순직이 남궁선화와 성모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분 소저께는 죄송하지만, 저희끼리 이야기를 조금 해도 되겠습니까?”
어쩐지 불안한 예상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시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온 것이라면 남궁선화와 성모란을 내보내야 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네? 아…….”
“…….”
남궁선화와 성모란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내가 말했다.
“이 두 분은 저와 함께하셨고, 앞으로도 하실 분들이십니다. 개인적인 사담이 아닌 시험에 관계된 이야기라면 이분들과 함께 듣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
“진 공자님, 저희는 괜찮아요.”
“우리는 나가 있을게요.”
나는 평소와 다르게 그녀들의 의견을 묵살했다. 지금은 그것이 옳은 행동이니.
“앉으시지요. 아마 시험 관련해서 이야기하러 오셨을 테니.”
아니면 진짜 대가리 깬다.
난 일주일 동안 다섯 시진도 못 잤다.
“……무림맹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왜 백팔봉이라는 체제로 줄 세우기를 한다 생각하십니까?”
그가 하는 이야기는, 성모란은 몰라도 남궁선화는 불편해할 만한 이야기다.
“무림맹의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함이지요.”
나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역시나 범상치 않은 분이시군요.”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지 않습니까? 12봉성이 만들어진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12봉성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주축으로 돌아가는 무림 정세에 반발하는 백팔봉의 문파 열두 곳이 모여 만든 협의체이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와는 일절 선을 대지 않기에 쭉정이들 아닐까 싶지만, 나름 강호에서 방귀깨나 뀌는 놈들 조합이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도 쉽사리 무시하지 못한다.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입으로 내뱉을 수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르지 않습니까.”
“…….”
“진 대협의 말씀처럼 백팔봉의 체제는 물론이고, 무림학관의 시험과 무림맹의 구성 체제 모두 일부만을 위해 만들어졌지요. 그리고 그 외에 우리는 그들 앞에 줄을 서 그들이 남긴 음식 쪼가리나 먹어야 하고요.”
철순직이 이야기 중간중간 남궁선화를 바라본다.
오대세가의 자제이면서도 시험에 탈락할 위기에 처한 것을 비꼬는 것이 분명하다.
“…….”
남궁선화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고 철순직은 이내 관심 없다는 듯 다시금 나를 본다.
“우린 그 구태의연한 체제를 타파하고자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금껏 무림맹이 강호에 저질러 온 병폐를 개선하고 건설적인 신무림을 건설하기 위함이지요.”
“그렇군요.”
일부 그의 말은 나도 늘 생각해 왔던 것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철순직은 더욱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태을문이 짧은 시간 동안 이룩한 것들은 저희를 놀라게 하기 충분합니다. 물론 그 과정이 매우 어려웠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철순직은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말을 잇는다.
“그래서 이제는 저희가 도움을 조금 드리고 싶어서 이리 찾아왔습니다. 저희와 함께 무림학관까지 동행하시지요.”
“!!”
“!!!”
12봉성의 정예들과 그들이 이끈 팔백여 명의 무사들. 아무리 태을문의 관문패가 탐난다 한들 누구도 쉽사리 접근하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입장에선 처음으로 시험을 편안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난 긍정적인 대답 대신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왜 그러시지요?”
“달콤한 제안엔 당연히 조건이 있겠지요?”
내가 아는 철순직은 정치적 뜻이 통한다고 하여 관용을 베풀거나 인정에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하하, 흑염룡이란 별호가 속된 것이 아니었군요. 이리 뜻이 척척 통하는 분을 만나 뵙게 되니 즐겁기 그지없습니다.”
그는 알까? 전생에 그가 내놓는 전략에 내가 번번이 맞선 탓에 그가 지지리도 나를 싫어했다는 것을.
“물론 있습니다만, 별건 아닙니다. 지금 함께하시는 분들과는 이제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가는 겁니다.”
“…….”
“…….”
남궁선화와 성모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애당초 태을문과 함께하실 분들도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각자 사정으로 태을문에 큰 도움이 되고 있지도 못하지요. 안 그렇습니까?”
여타 다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커다란 세력을 일구어 움직이는 것을 꼬집는 것이리라.
남궁세가는 방계의 득세로 인해 남궁선화가 무사 백 명을 채우는 것도 힘들었고, 철검문은 성모현이 금옥에 갇히면서 사문 내에서 출전할 이가 없었다.
“듣기로는 진 대협께서 여타 다른 응시생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입관패를 가지고 있다 들었습니다. 진 대협께서 무림학관에 수석으로 입학하여 백팔봉의 위상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못지않음을 천하에 보여주는 겁니다.”
철순직은 마치 혼자서 학관의 입학식을 보고 있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진 공자님.
그때, 남궁선화의 전음이 들렸다.
-……저흰 괜찮아요. 지금으로선 저분들과 함께 가시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성모란도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철순직은 남궁선화가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이틀 뒤 비풍문과 귀궁문이 정주에 도착하면 출발할 생각입니다. 일단 먼저 숙소를 옮기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자세한 이야기도 나누고요.”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철순직을 바라봤다.
“거절하겠습니다.”
“그럼 일단…… 네?”
“!!!”
“진 공자!”
“공자님!”
철순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전생에 그렇게 잘난 척하던 얼굴이 저리 변하는 것을 보니 속이 시원하다.
“거절한다 말씀드렸습니다만. 문제라도 있습니까?”
“하지만…… 아니, 어째서?”
“거절하겠다는 이유도 밝혀야 하는 겁니까?”
그렇게 궁금해할 것도 아닌 게, 나에겐 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할지가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무공의 근본적 차이로 인해 시험에 제대로 응시하지 않는 문파가 있다.
대표적인 문파가 방금 말한 비풍문과 귀궁문.
각기 비검술과 궁술이 주 무공인 이들은 자신에게 불리할 무림정시 시험을 애당초 제대로 치르지 않는다.
삼관문의 시험이 끝날 때까지 탱자탱자 유랑이나 다니다 마지막 대여정에 모든 걸 거는 것이다.
아마 이들과 합류한 이후엔 온갖 감언이설을 해대며, 입관패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을 할 것이다.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향인 양.
왜 이렇게 잘 아냐면.
‘소정대를 최전방으로 몰아넣을 때 그렇게 했었으니까.’
정치적 분위기를 만들어 사람을 몰아치는 건 철순직의 최고 특기다. 팔백 명 가운데 단 네 명? 나는 몰라도 금은동 형제들은 제 스스로 품에서 입관패를 꺼내 바칠지도 모른다.
아무튼 전생에 악연이 있던 철순직을 이리 우연스럽게 만났으니 그냥 보내줄 생각은 없었다. 최소한 녀석의 기분은 불쾌하게 만들고 싶었다.
어떤 이유를 대야 철순직한테 엿을 먹일 수 있을까.
최대한 비이성적이고, 몰상식적인…….
“칙칙한 분들이랑 다니는 것보다 이 두 분과 다니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
믿기지 않는 듯 철순직의 눈가가 처음으로 파르르 떨린다.
“진심…… 이십니까?”
“네. 제가 미학적인 것들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서 말이지요. 이분들도 함께 갈 수 있겠습니까?”
“…….”
“안 되겠지요?”
철순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면상을 한 대 후려쳐 주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말 몇 마디로 처맞은 것 같은 표정을 봤으니 오늘은 이걸로 만족을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