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06화 (106/357)

#106. <아비규환(阿鼻叫喚) 대여정(大旅程)(5)>

“빌어먹을 겨우 미명 좀 얻었다고 으스대는 꼬라지라니!”

삼원문의 남화성이 씩씩거렸다.

분명 상대가 어리석고 멍청한 선택을 한 것이 분명했지만, 왜인지 모르게 분함이 가시지 않는 것이다.

“…….”

“…….”

이런 감정은 다른 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특히나 흑염룡을 미색으로 꼬셔보겠다며 화려하게 치장하고 나타났던 하영영보다, 누가 봐도 자다 일어난 듯 보이는 남궁선화와 성모란의 빛나는 외모에 눈을 떼지 못했던 자들이었기에 분함은 더욱 컸다.

“철형, 미색에 허우적대는 꼴을 보니 머리가 좋다는 소문도 다 거짓인 것 같소.”

남화성의 물음에도 철순직은 대답이 없었다.

“…….”

“철형?”

“응?”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오?”

“아니네.”

철순직은 방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해서 되짚어 보았다.

자신이 제안을 했고 남궁선화와 성모란은 포기한 듯 진소운에게 전음을 보내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자신들 대신 12봉성을 선택하라는 이야기였을 터.

그런 상황이라면 마지 못해 못 이기는 척 12봉성을 택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거지.’

주저하는 모습도 없었다.

당연한 선택인 양 거절당했다.

의협심이 너무 강해서 자신과 함께했던 이들을 포기 못 하는 것 아니냐 하기엔, 지금 태을문이 가진 입관패가 너무 많았다.

예상 입관 인원 4명.

백팔봉의 하위 문파 중엔 태을문만큼 제자를 입관시킬 수 없는 문파도 많다.

그런 기회를 포기하고 의리를 선택한다고?

소림사 방장이 비웃을 소리다.

‘설마 눈치챈 건가?’

생각의 꼬리는 자연스레 말도 안 되는 의심으로 이어진다. 자신이 태을문을 포섭한 후에 하고자 예정했던 일들.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며 백팔봉의 균형을 잡을 일들 말이다.

당장 태을문에서 4명이나 되는 인원이 무림학관에 들어가면, 백팔봉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게 된다.

이는 곧 혼란을 야기하고, 혼란은 백팔봉의 결속을 약화한다.

적당히 대가를 주고 입관 인원을 줄이는 것이 장차 백팔봉의 결속을 다지는 데에도 더 좋을 일.

대신 흑염룡을 백팔봉의 영웅으로 추대하여 태을문의 위상을 높임과 동시에, 백팔봉이 진정 무림을 이끌어 간다는 여론을 만든다.

물론 그 과정 중에 비풍문과 귀궁문에게 입관패를 나눠주어야 하는 자신들의 의무도 줄이게 되니, 이것이야말로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

그런데 그 모든 예정이 진소운의 말 한마디에 다 헝클어진 것이다.

“문제군.”

“뭐가 말이오?”

“태을문 말이야.”

“나도 그리 생각하오. 참으로 오만방자하지 않소?”

“내 말은 그게 아니네. 백팔봉이 어쩌다 잡은 기회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빼앗을까 걱정인 것이지.”

진소운이 있건 없건 크게 상관없는 일이다.

영웅이야 없으면 새로이 만들면 그만.

하지만 12봉성은 처음으로 구파일방을 제치고 수석 입학의 기회를 가졌다.

여기서 혹여나 진소운과 그 위태한 동행들이 구파일방에 입관패를 빼앗기기라도 한다면 또다시 지루한 세월을 기다려야 할 것이었다.

“허나, 어떡하오. 제 스스로 복을 차버리는데.”

“싫다 한들, 의무를 내팽개칠 수 있는가. 백팔봉의 일봉으로서 책임을 지게끔 만들어야지.”

“어떻게 말이오?”

“비풍문과 귀궁문에게 전서를 날리게, 정주까지 올라올 필요 없다고.”

#

“……왜 그런 거예요?”

접객실을 나온 성모란의 두 볼은 어째선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잘못한 건가?

난 나름 의리를 지켰다고 생각한 건데.

“자꾸 흑염룡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게 뭐 좋은 별호라고.”

“……진 공자.”

“당연히 두 분과 함께하고 싶어서지요.”

“…….”

“…….”

엄숙한 분위기를 날리고자 농담 좀 했는데, 분위기는 더 어색해지고 두 사람은 썰렁한 농담에 분노한 건지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다.

“……저 때문에 이런 상황이 되신 분을 나 몰라라 할 정도로 비양심적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상황으로 봤을 때…….”

“더구나 두 분은 제가 무림학관과 바꿔야 할 정도로 하찮은 분들도 아니고요.”

장차 정마대전에서 남궁세가 철검문 모용세가를 빠르게 설득할 수 있다면 어떨까?

전생에 느려터진 대응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무림학관에 입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과의 관계를 단단하게 가져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

“……!”

성모란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남궁선화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잠시간 정적이 감돌고.

“저, 절대 포기 안 할게요.”

남궁선화가 갑자기 두 주먹을 움켜쥐고 말한다.

“네? 그거 당연한 거 아닙니까?”

“앞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힘들다 얘기 안 할게요. 아니 힘들다고 생각도 안 할게요.”

뭔가 저들의 무례한 행동 때문에 동기 부여라도 된 것일까?

성모란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한다.

“진짜 진 공자는 남다르다니까요. 저도 앞으로 힘들다고 불평 안 할게요.”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마침 더 힘들어질 것 같거든요.”

“네?”

열정에 불타오르던 남궁선화와 성모란의 얼굴이 불안한 듯 찡그려진다.

방금 전에 열심히 한다 하지 않았나?

“방금 이야기 듣지 못했습니까? 비풍문과 귀궁문이 이틀거리에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렇죠? 근데 그게 힘들어지는 거란 무슨 상관이죠?”

“두 문파는 대표적인 관문패 강탈자들 아닙니까.”

“…….”

“그럼 그들이 노리기에 가장 맛 좋은 먹잇감이 누구겠습니까?”

“음…… 태을문?”

남궁선화가 현실 도피를 하고 있다.

“아니죠. 남궁세가, 모용세가 철검문이 함께하는 태을문이죠.”

이야기를 듣던 성모란이 뜨악하며 입을 벌리고 중얼거린다.

“망했네.”

#

대여정(大旅程).

일관문과 이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이동한 거리에 비하면, 삼관문의 행로는 짧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 길을 대여정이라 부르는 것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그 가혹함이 문제였다.

대부분 대가리가 깨져나가니 대가리 여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치열한 대여정에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비롯한 유수의 문파들도 공격의 대상이 되곤 한다.

평생을 무림학관만 바라보며 살아온 응시생들에겐 이 대여정은 학관에 들어갈 수 있는 최후의 기회.

다음이란 없는 응시생들은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예비 합격자들에게 끈질기게 매달린다.

“응?”

내 눈에 묘한 모습이 들어왔다. 각기 다른 사문의 무사들이 서로 혼재되어 진형을 이루고 있었다.

“……진형이 어째…….”

내 의문에 강서표가 답했다.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아직은 백호검진에 익숙지 않아서, 서로 섞어놨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철검문은 물론이고 모용세가, 남궁세가는 자파 무공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이들이다.

더구나 대부분이 무림맹에서 백호검진이 얼마나 하찮게 취급받고 있는지 알고 있을 텐데도 그걸 익히기 위해 서로 섞여들었다고?

“지들이 밥 먹고 싶으면 해야죠.”

천재 제갈천기가 만든 백호검진이 겨우 밥그릇 지키기 위해 쓰이고 있다는 말에 쓴 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저기, 진 공자님…….”

강서표가 평소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한다.

“앞으로 저희에게 직접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네?”

난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에 다시 한번 물었지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무한에 갈 때까지 다른 사람을 거치지 않고 직접 말씀하셔도 된다는 말입니다.”

“…….”

우리의 명령 체계는, 내가 남궁선화와 성모란, 최근에 합류한 모용재화에게까지 이야기를 하면 그들이 직접 사문의 무사들에게 전달하는 형식이었다.

“이야기를 전달받으면 대응이 늦어지지 않습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나야 상관은 없으나, 과연 무사들이 제대로 받아들일지 의문이다.

“만약 말을 안 듣는 녀석이 있으면 제가 골통을 부숴놓겠습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는…….”

“이미 아가씨들과 도련님, 초 대주와 백 대주까지 모두 동의한 사항입니다.”

내가 주변을 둘러보자, 강서표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들이 저마다 하나씩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그 책임을 제가 지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되려 제가 드릴 말씀이지요.”

“아뇨. 그거 말고…… 정말 감사드립니다.”

“응?”

그러더니 옆에 함께 달리던 초무빈도 말한다.

“저도 감사드립니다.”

뭐가 감사하다는 건지 모르겠어서 성모란을 보았지만, 성모란은 금세 말을 돌린다.

“그, 그보단 어디로 갈 거죠? 당연히 소실봉 쪽으로 갈 거죠?”

정주를 나서 호북으로 넘어가기 위해선 숭산을 지나야 한다. 바로 태실봉으로 나 있는 길과 소실봉으로 나 있는 길.

태실봉은 오악이라 불리는 숭산에서도 길이 험준하고 고되기로 유명하다.

난 대답 대신 모용재화에게 물었다.

“너라면 어디로 가겠니?”

“……네?”

“태실봉과 소실봉 둘 중 어느 길로 가겠느냐 이 말이다.”

“어…….”

당황한 모용재화를 보고 남궁선화가 씨익 웃는다.

“재화는 어린 시절부터 놀러 다니기 좋아해서 병법이나 책략은 하나도 공부 안 했대요.”

“서, 선화 누님!”

얼굴을 붉힌 모용재화가 잠시 생각하더니 더듬더듬 대답했다.

“저, 저라면 태실봉으로 가겠습니다.”

“저 바보가…….”

“어휴…….”

당연한 반응이겠지. 우리에겐 어쨌든 속도가 가장 중요하니까.

“해서 태실봉으로 가겠습니다.”

“네?”

“진 공자님!”

“혀, 형님!”

의견을 낸 모용재화마저도 사색이 되어 나를 말린다.

“우린 이제부터 뒤에서 쫓아오는 이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앞에서 기다리는 자들도 생각해야죠.”

“아…….”

“그래도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좀 편한 길이 좋지 않을까요? 태실봉은 우리에게도 불리하잖아요.”

“제가 걱정하는 건 강탈자들 중에서도 귀궁문과 비풍문입니다.”

강탈자.

입관패를 노리는 승냥이들 중에서도 아예 시험을 포기하고 처음부터 대여정만을 노린 채 오랜 시간 기다린 자들. 그들은 힘을 아껴왔기에 자신들의 무공이 활약할 지형만 만난다면 그 어떤 적들이라도 상대할 수 있을 터.

“그들이 갑자기 왜 나오죠?”

“철순직이 말하길 이틀 뒤에 합류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정주에서 딱 이틀거리에 마침 숭산이 있고요. 그리고 소실봉은 궁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지형입니다. 맞지?”

“네? 네넷.”

“저거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대답한 거 같은데.”

“모, 모란 누님. 저도 다 알고 대답한 겁니다.”

숭산이 가까워지자 뒤로 추격자들이 붙었다.

“12봉성이에요.”

“말까지 타고 온 걸 보면, 진 공자의 말대로 단기 결전을 내려고 하겠군요.”

“속도를 높일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소실봉에 들어서기 전까지 우리에게 접근하지 않으려 할 테니까요.”

수가 적다 하더라도 오대세가는 오대세가.

괜스레 우리와 맞붙었다가 피해를 입게 되면 다른 승냥이들에게 물어뜯기는 것을 걱정할 것이다. 그들에게 최선의 선택은 우리가 소실봉에 들어설 때까지 기다리는 것.

“자 가죠.”

평탄하고 넓은 길과 가파르고 좁은 길이 나올 때 우린 지체없이 가파르고 좁은 길로 들어섰다.

그러자 뒤쪽에서 쫓아오던 12봉성의 무리가 주춤거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진 공자님! 저들이 멈췄어요.”

“이제부터 속도를 올립니다.”

“네? 마차가 속도를 못 쫓아갈 건데요?”

“마차는 여기 두고 갑니다. 이대로 곧장 태실봉을 가로질러 비풍문과 귀궁문의 뒤를 치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음에 언제 만날지 모르니 이번에 철순직을 만난김에 면상 한 대 정도는 후려쳐 주고 가야겠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