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흑도야행(黑徒夜行)(3)>
“뭐라고?”
용소아의 두 눈썹이 번쩍 치켜 떠진다.
소제호의 보고를 함께 듣던 용봉지회의 인원들은, 보고 내용보다 용소아의 표정에 더 놀란 심경이다.
학관에서부터 용소아와 함께였던 용봉지회에게 용소아는 감정이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진소운이 일행을 끌고 사황봉에 들어갔네. 미친놈이지.”
어쩐지 눈탱이 밤탱이가 된 상태로 보고하는 소제호.
“…….”
“그는 어지간히도 그대가 싫은 모양이야.”
더구나 말 없기론 용소아 못지 않은 당서희도 말문이 트인 사람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해가 안 되는군.”
“뭐가?”
“사황봉은 애당초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다. 아니, 되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이겠지.”
용소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에겐 분명 좋은 선택지들이 있었다.
-홀로 우수한 성적으로 무림학관에 입학한다.
-일행과 함께 시험에서 탈락한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답안은 시험 탈락은 물론이고 목숨의 위험까지 생겨나는 선택지이다.
“흑염룡에겐 뭔가 생각이 있다 생각되는 것이야.”
“…….”
용소아의 시선이 당서희를 응시한다.
소제호는 물론이고 용봉지회의 인원들은 용소아의 시선이 주는 압박감을 잘 알기에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아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흑염룡에겐 마령고원에서 얻은 명패가 있다는 소문이 있는 것이야. 그건 용소아 덕분에 얻은 것이기도 한 것이야.”
“…….”
싸늘한 공기가 맴돈다.
알 수 없는 미증유의 압력이 일대에 내려앉아, 용봉지회들은 저도 모르게 내기를 끌어올려 심력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흑도가 무림맹의 행사에 나서지 않는 이유가 뭔지 알고 있나?”
“정시에서 생긴 일을 묻어두는 건 백도에 한하기 때문인 것이야.”
“그래. 정시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보복이나 복수를 금하는 것은 백도에 한한다. ……반대로 정시를 이용하려던 흑도는 그런 백도의 분풀이 대상이 되지.”
황사문, 마향방, 조극방, 한호문 등등 지난 정시에 멸문한 흑도문파의 이름이 나열된다.
“사황봉이 흑도 최강의 세력 중 하나라 하지만, 실제 구파일방 문파만도 못한 세력을 가졌지. 더구나 명분을 가진 백도 문파는 흑도를 처벌할 당위성을 가지게 되고. 사황봉은 절대 움직일 수 없다.”
용소아의 말에 당서희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럼 더 이상 신경 쓸 일 없는 것이야.”
“……그렇다.”
“그럼 왜 아직 여기 있는 것이야?”
용소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서희는 말을 이어나간다.
“용봉지회는 할 일이 많은 것이야. ”
당서희가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고 있는 모습에 소제호가 꿀꺽 침을 삼켰다.
“……그렇군.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뭐지?”
소제호는 얼른 두루마리를 건넸다.
“화양표국의 송백이 이번 정시에서 지원하던 무관들의 무사를 동원했다는 정황이 보고됐어. 송백은 죽었어도 화양표국에 대해 조사하라는 맹의 지침이야.”
“왕가장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화양표국마저 빠져버리면 구멍이 커질 거다. 그래도 일단 확인은 해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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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진소운은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사황봉의 대막각으로 향했다.
부상으로 거동이 불편한 그를 부축한 것은 남궁선화였다.
평소라면 몰라도 사황봉 내에선 일가의 대표로 와있는 신분이었기에 강서표는 얼른 그녀를 말렸다.
“아가씨, 아가씨도 남궁세가의 대표로서…….”
“강 대주님, 아무 말 하지 말아주세요. 저 또한 다 알아요.”
흔들림 없는 표정에 강서표는 결국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진소운이 중한 부상을 입은 것은 어디까지나 남궁선화를 구하다 그런 것이었기에.
더구나 대막각으로 다가갈수록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터라 더 이상 실랑이를 할 수도 없었다.
“기강이 훌륭하군.”
대막각으로 향하는 길목에 선 흑도무사들을 본 초무빈의 감상에 강서표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동안 알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야.”
흔히 흑도라고 하면 약육강식의 법칙 안에서 피를 갈구하는 광인들의 모습이 강했었다.
허나 제대로 본 그들의 진면목은 하나하나가 잘 훈련된 맹수를 보는 느낌이었다.
더구나 사황봉의 가장 중심에 선 건물인 대막각으로 향할수록 무사들의 수준은 급격히 좋아지고 있었다.
“시험은 차지하고…… 부디 살아 나갈 수 있길 바라야겠군.”
“…….”
애당초 진소운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최악의 경우 탈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의견에 따랐던 자신들의 판단을 후회하는 중이다.
대막각 안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전각의 크기만큼이나 압도적인 대전이 눈에 들어왔다.
양옆으론 사황봉의 정예 무사로 보이는 이들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고, 높은 단상 위엔 은색의 화려한 갑주를 패용한 거한의 사내가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태을문의 진소운 외, 일행들이라고 합니다.”
황부식은 간단한 설명만을 마친 채, 봉주의 왼편에 시립했다.
“흑염룡의 이름이 천하를 울린다고 하더니만, 지금 꼴을 보니. 그 이름이 아깝구만.”
사황봉주 차석두.
흑도 제일 거두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쩌렁한 음성이 대전을 울린다.
“…….”
진소운은 남궁선화의 손을 벗어나 앞으로 두어 걸음 나섰다.
“…….”
그가 한 발자국씩 움직일 때마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몸이 그 상태를 짐작게 해주었다.
진소운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그 빌어먹을 별호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곤란을 겪었는지 아십니까?”
“…….”
강서표와 초무빈, 백원각의 머리엔 동시에 ‘조옷땠다’라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대전 내에 살기가 엄습한다.
대전에 양립한 이들은 하나하나가 흑도 내에서 최강을 자처하는 자들.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봉주 차석두에게 욕지기를 내뱉었으니, 그야말로 진소운은 오늘 제삿날을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크흣.”
진소운이 살기를 견디지 못하고 울컥 핏물을 내뱉는다.
남궁선화가 사색이 되며 달려가려 하자, 진소운이 손을 들어 막는다.
“저 살기들 좀 치워주십시오. 대체 흑도 무사들은 눈이 없답니까? 환자를 앞에 두고 살기를 뿌리다니.”
“…….”
대전에 묘한 정적이 감돈다.
진소운의 일행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사황봉의 무사들은 고까운 시선으로 진소운을 응시한다.
“크흐흐.”
“…….”
“크하하하하하핫!”
차석두의 웃음소리가 터져나오자, 대전 내의 무사들도 하나둘 살기를 거두고 따라 웃기 시작했다.
뜬금없는 웃음에 어안이 벙벙하던 강서표와 초무빈, 백원각은 얼른 그 웃음에 편승해 분위기를 좋게 풀어보려 더욱 크게 웃었다.
“여전히 재밌군, 그대는. 그래도 별호는 잘 지어주었다고 생각하네. 덕분에 강호에서 자네 이름이 울려 퍼질 때마다 내 이름도 함께 퍼지고 있거든.”
“당최 백도 정예 무사에게 흑염룡이 뭡니까? 흑염룡이.”
“솔직히 말해서 태을문이 정통명문 백도 문파는 아니지 않은가?”
“허. 지금 봉주님 앞마당이라고 말이 심하십니다.”
“흐흐. 그래서? 한판 붙어보겠나?”
“몸 상태가 이래서 이번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 혼란을 겪는 것은 진소운의 일행뿐만이 아니었다. 사황봉의 무사들도 평소 엄숙하고 진중하기 그지없던 차석두가, 마치 제 손자를 대하는 듯한 모습에 쉼 없이 곁눈질하고 있었다.
“그래, 듣자 하니 정시를 치르는 데 고난이 많았다지?”
“개뿔 없는 놈이 출세하려니 힘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흑도문파로 전향하는 게 어떤가? 우린 아직 무림맹의 구파일방이나 백팔봉같이 적폐가 굳어지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그러자면 제가 지금껏 고생한 것들이 다 무용지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소운의 말에 차석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때문에 부탁도 드릴 겸 이렇게 급작스럽게 찾아뵜습니다. 혹 결례가 있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진소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석두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자네가 말을 하기 전에 내 미리 말을 하지. 정시를 포기하거나, 저 밖에 있는 이들과 적당한 거래를 하게나.”
“…….”
“역대로 많은 입관패를 가지고 있다지? 자네나 자네 일행들 중 한둘 정도는 거래를 통해 입관시킬 수 있을 거네. 원한다면 내가 중재를 해주지.”
진소운이 어떤 부탁을 할지 모두 알고 있는 듯한 모습에, 일행은 진이 빠진 모습이었다.
당장 이곳에서의 거래가 불발되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었으니.
“명패를 사용하겠다 해도 말입니까?”
“…….”
진소운의 말에 차석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대전의 압력이 올라갔다.
“명패는 노력하겠다는 보증일 뿐. 사문과 자신의 목숨이 걸릴 정도의 중차대한 일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쯤은 자네도 알 텐데.”
“…….”
“사황봉이 무림학관의 정시에 관여하는 것은 사문에 아주 중차대한 위협이 될 만한 일이지. 그런 일을 부탁받는다 하여, 받아줄 수 있을 리 만무하니. 명패는 소중히 잘 가지고 있게나. 훗날에 쓸 필요가 있을 테니.”
제 손자처럼 진소운을 바라보던 차석두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이었다.
“어차피 시험을 포기할 생각이라면 이곳에서 지내도 좋네. 좋은 방과 시녀들을 붙여 편히 지낼 수 있게 해주지.”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차석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때, 여태껏 입을 다물고 있던 진소운이 입을 열었다.
“제가 바라는 일은 그것이 아닙니다.”
고개를 돌린 차석두의 두 눈엔 실망에 더해 분노까지 감돌았다.
“나를 가지고 놀릴 셈인가?”
“전 아직 어떤 일을 부탁드린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차석두가 다시금 단상에 앉았다.
“부디 이 자리가 자네에게 실망하지 않는 자리였으면 좋겠군. 이미 그대가 구파일방을 피해 사황봉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실망했거든.”
평이한 목소리에 불과했지만, 옆에서 그 이야길 듣는 이들은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몸서리 치고 있었다.
“제가 부탁드릴 일은 사황봉이 흑도무림의 중심이 되어주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
뜬금없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저마다 고개를 갸웃거린다.
“흑도 무림은 이전부터 무림맹처럼 구심점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 때문에 대단위 재난이 발생했을 때도 달리 대응할 방법이 마땅히 존재하지 않죠.”
흑도 무림에서 항시 해왔던 이야기.
누구나 구심점을 필요로 했지만 그것을 이룬 이들은 없었다.
“마령고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피해는 흑도 측에서 더 많이 났지만, 결국 사람들을 움직인 건 무림맹이었고, 흑도 무림은 그저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지요.”
“……잠깐, 잠깐, 난 이해가 안 가는군. 여기서 왜 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지? 아니, 그 전에 구심점이 되어 달라 한들 그걸 어떻게 하란 말인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별로 어렵지 않다고?”
그간 숱한 흑도 문파들이 연맹창설을 시도했지만 그에 성공한 적은 없었다. 무림맹처럼 계기도 없었고,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곳도 없었으니까.
“마령고원에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며 비폭력 행진을 한번 해주십시오. 이곳 대별산에서 무림맹이 있는 무한까지. 시위를 계기로 사람들의 의견을 이끌어 내고, 최후엔 맹을 창설하는 겁니다.”
“…….”
차석두의 입이 쩍 벌어졌다.
대전에 모여있는 정예 무사들은 물론이고 진소운의 일행들까지.
백도문파의 제자가 흑도무림의 구심점을 만드는 일을 하려 한단 말인가?
정적에 감긴 대전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미친놈’이라 소근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