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14화 (114/357)

#114. <흑도야행(黑徒夜行)(4)>

“미친 새끼…….”

역시나 차석두는 흑도의 거두답게 욕지기를 입에 달고 산다. 하지만 어쩐지 뒤에 선 성모란에게서도 비슷한 욕지기가 내뱉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내 몸 상태가 별로이기 때문이겠지.

아무리 좋게 봐도 지금의 몸 상태는 더 이상 정시를 치를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어거지로 치른다면 어찌어찌 시험을 완수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랬다간 녹림투왕처럼 단전에 깊은 손상을 입어 결국 제대로 된 삶도 살지 못할 것이다.

결국 지금 최선의 방법은 사황봉을 움직이는 것밖에 없다.

“……허…….”

여지껏 근엄함을 유지하던 차석두는 제 부하들이 사방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입을 헤- 벌리고 석상이 되어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가장 바라던 일이 내 입에서 튀어나올 줄은 몰랐을 테니까.

흑도무림은 예전부터 무림맹과 같은 연맹을 맺길 바라왔다.

하지만 누군가 하나의 구심점을 가지기엔 힘의 세력이 비슷비슷하고.

연맹의 이점을 생각하기엔 당장에 잃는 것이 많으니, 손해를 싫어하는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진 놈들 머리에선 연맹은 쓸데없는 손해라는 것이다.

결국 흑도무림의 연맹이 창설되는 것은 마교의 침공이 본격화된 후, 대부분의 흑도 무림이 반파된 이후에나 가능했지만, 이미 반쪽이 되어버린 연맹은 무림맹보다도 존속 기간이 짧았던 걸 생각해 보면 단지 시간 끌기의 임시방편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없는 이상, 연맹을 창설하는 최상의 방법은 바로 공론화와 명분입니다. 그 옛날 무림맹이 창설될 당시 공적이었던 마교 퇴치를 명분으로 지난 오백 년간 무림맹이 존속했던 걸 생각하면 쉬우실 겁니다.”

한참이나 멍하니 있던 차석두가 입을 오물거리다 말을 이었다.

“우리는 마령고원의 일을 공론화한다?”

“그렇습니다. 이미 무림맹에 의한 강호의 지배에, 많은 흑도무림의 인원들이 피로를 강하게 느끼고 있지요. 당금 무림정시가 치러질 때마다 흑도무림의 대부분 문파들이 몸을 사리기 위해 휴식기를 가지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마령고원의 일은 이미 반년이나 지난 일이네.”

“본래 공론화와 명분은 어떤 것이든 가져다 대기 마련입니다. 당금 무림맹의 명분이 여전히 마교를 척결을 위함입니까?”

“……나 또한 그것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야. 허나, 진정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네. 흑도연맹을 만든다 한들, 무림맹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어 힘이 생긴다 보장 할 수 없으니.”

흑도연맹이 무너진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무림맹은 스스로 사람이 모여들고, 그 안에서 서로 경쟁하고, 다시금 천하에 퍼진다.

이미 만들어진 체계가 계속해서 무림맹을 강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반해, 흑도연맹에겐 그런 체계가 없다. 더구나 흑도인들 대가리 속에 가장 깊숙하게 박혀있는 사고 체계가 바로 ‘약육강식’.

이것이 있는 한, 흑도인들은 애써 만든 체계와 직급 따위는 절대 신경 쓰지 않는다.

사황봉주 차석두의 고민도 이것이 가장 클 것이다.

사람들을 모으는 것. 그리고 직급과 체계에 따르게 하는 것.

“그건 되려 어렵지 않습니다.”

“……어렵지 않다?”

차석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반치나 앞으로 수그린다.

“실력본위주의로 가는 겁니다.”

“……그게 난장판이랑 뭐가 다르지?”

“엄연히 다릅니다. 누구에게나 출세의 길을 보장해 주는 겁니다. 그들의 출신이 어디건, 어디에 소속되어 있건, 그들이 실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는 길을 완전히 자유롭게 열어주는 것이죠.”

“…….”

“무림맹에 가장 큰 병폐가 무엇입니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비롯한 백팔봉의 출신에 따라 출세가 달라지고, 이익이 달라지는 것 아닙니까. 흑도연맹은 그런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겁니다. 무한히 경쟁하고 무한히 발전하는 사람들 안에서 흑도연맹의 체계는 단단히 굳어질 겁니다.”

“…….”

차석두는 물론이고 사황봉의 고수들 마저도 복잡한 눈동자로 고심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차석두가 입을 연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걸 위한 시위인가?”

“네.”

“하지만 비폭력시위라는 건 뭔지 모르겠군.”

“모든 무사들이 무기를 해제하고 검은 무복만 입은 체, 검은 깃발을 드는 겁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상여를 이고 무한까지 행진하는 겁니다. 이 행진은 마령고원에서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한 행진이 되겠지요.”

“……기이하겠군.”

“그렇기에 천하의 시선이 모이겠지요.”

“……그리고 그 안에 자네들도 함께 가겠다?”

“저 또한 마령고원에서 죽은 이를 기리는 마음을 참을 수 없으니까요.”

“…….”

옆에서 황부식이 입을 열었다.

“봉주님. 어찌 되었든, 그 행진을 하면 백도 놈들의 얼빠진 얼굴은 한번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황부식을 시작으로 양립한 고수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그때 놈들이 나서지 않은 것에 대한 규탄으론 이만한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때 돕기는커녕 방해만 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그렇습니다. 이건 해볼 만 합니다.”

긍정적인 말들이 터져 나오자 우리 일행들의 얼굴에도 안도의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한참을 고개를 끄덕이던 차석두가 손을 휘젓자 말들이 모두 멎었다.

“좋은 생각이다. 역시나 흑도신성 흑염룡다운 생각이군. 하지만, 굳이 그 일을 지금 해야 할 이유가 뭐가 있지? 자네들이 끼어듦으로 인해서 우리의 명분에 문제가 생길 거 아닌가.”

“…….”

“차라리, 무림정시가 끝난 후, 일주기에 맞춰서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역시나 흑도 거두답게 제 이익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방법을 안다. 하지만 애당초 생각만 빼앗기고 말거였음 여기 오지도 않았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지금 당장 하는 것보단 그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아니, 제 말씀은 무식한 흑도놈들에게 이 말을 설득할 자신이 있으시냐 이 말입니다.”

“…….”

조금 전까지 내 말에 호응했던 고수들이 다시금 냉랭한 눈으로 나를 쏘아본다.

“최소한 공론화와 명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동조할 녀석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더구나 명분을 봉주님이 독점하는 것에 대해 다른 이들이 동조하겠습니까?”

그간 차석두에게 명분이 없어서 연맹을 창설하지 못했겠는가?

그의 거대한 큰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놈이 없어서, 혹은 그 뜻보단 제 욕심이 더 커서 대부분 그에게 동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하실 수 있다면 다행이군요. 어차피 제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으니, 이만 나가서 투항하고 시험을 포기하겠습니다.”

“…….”

“며칠간 신세를 졌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내가 곧장 뒤돌아서서 어벙한 표정의 우리 일행들을 이끌고 세 걸음쯤 걸었을 때였다.

“자, 잠깐!”

“…….”

그 근엄한 차석두가 한 걸음이나 앞으로 나와 있었다.

“자네에겐 방법이 있다는 말인가?”

“명분을 이해시키고 공론화를 설득할 순 없겠지만, 그들을 움직이겐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나는 손에 쥔 보따리를 풀어내었다.

투두둑, 투두두둑.

마령고원에서 차석두와 마찬가지로 내게 명패를 주었던 흑도무림의 명숙들. 그들의 명패가 사황봉 대전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

“허허, 진 공자님께서 얼른 일어나셔야 할 텐데.”

말을 하는 강서표는 입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초무빈은 꽤나 고까웠다.

차석두와 이야기를 나눈 진소운은 대전을 나오자마자 다시금 쓰러졌다.

그리고 그 간호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 남궁선화.

사황봉의 시녀들과 하인들이 있고, 상주 의원이 있는 상황에서 나서는 것이 부끄러울 수 있었음에도, 남궁선화는 지금 주변이 보이지 않는 듯 진소운에게 찰싹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던 탓이다.

초무빈은 당장 진소운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것도 맞지만, 강서표가 실실 웃을 때마다 빈정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좋아할 일인가?”

“뭐가 말인가?”

“진 공자님이 사황봉의 도움을 받아 시험을 완수하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문제가 생기지 않겠냐 이 말이야.”

옆에서 함께 이야기를 듣던 백원각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 결과 자체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생길지 모르네. 어찌 되었든 백도의 주적은 흑도. 사황봉은 흑도 무림에서 제일가는 세력 아닌가. 더구나 이번 일로 진짜 흑도연맹이 창설되기라도 하면…….”

“그것도 그렇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강서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자네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뭐?”

“지금 당장이야 시험이 중요해 보이겠지만, 길게 본다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말이지.”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강서표가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찼다.

“자네들 그래서야 만년 대주 자리에서 언제 벗어날 건가?”

“…….”

“…….”

“어제 보기론 사황봉주의 의중이 진 공자님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건 자네들도 느꼈지?”

흑도무림 연맹의 필요성이야 늘상 나오던 말이었기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정말로 이번 일을 계기로 흑도연맹이 생겨난다면 어찌 되겠는가.”

“무림맹에 난리가 나겠지.”

“그렇지. 어쩌면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말이야. 하지만 종국엔 연맹이 만들어질 걸세. 이미 강호의 정세가 그래. 그간 무림맹에 핍박받아 온 흑도무림의 이들은 어떤 계기든 생기기만을 바라고 있지.”

“……자네는 어째 흑도 연맹이 생기는 게 꽤 기뻐 보이네?”

“끝까지 들어봐. 흑도연맹이 생기고, 그 주축이 사황봉이 되는 것은 자명하지. 그럼 묻겠네. 무림맹에서 흑도연맹과 연락을 하고 싶을 땐 어떤 방법을 쓰는 것이 가장 좋겠나?”

“……!”

“……!”

강서표가 말을 이었다.

“그간 무림맹이 흑도무림의 세력들을 억압한 걸 생각하면, 처음부터 연락망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그럼 흑도연맹과 무림맹에 동시에 연이 닿아있는 사람이 필요할 텐데…….”

“그게 바로 태을문이겠군.”

“그것도 진 공자.”

“그렇지.”

강서표의 말에 초무빈과 백원각은 더욱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정시 와중에 사황봉에 들른 것이 그저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 지경.

“제일 큰 문제는 사황봉이 움직이는 것을 결단하느냐 마냐인데….”

무림맹의 행사 중에 사황봉이 움직이는 것은 도통 위험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검과 무장을 모두 해제하고 해야 하는 시위는, 잘못하면 흑도무림의 토벌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사황봉에선 계속 논의를 하고 있는 거겠지.”

벌써 나흘째. 사황봉에선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이제 그만 우리도 결단을 내리고 어찌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할 때가 다가왔는데 말이지.”

시험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다간 죽도 밥도 안 되는 상황이 될지도 몰랐다.

터벅- 터벅- 터벅-

마당에 쭈그려 앉아 그림을 그려가며 이야기 하던 세 사람이 동시에 일어나 입구를 바라보았다.

크기가 너무도 커서 문 안으로 고개를 잔뜩 숙여야 하는 장한이 들어섰다.

거패 황부식.

그는 예의 부리부리한 눈으로 세 사람을 바라봤다.

“흑염룡은 어디 있지?”

“아직…….”

그때, 내전의 문이 열리며 남궁선화가 나왔다.

“진 공자님이 기다리고 있어요.”

“일어났나?”

“예.”

“다행이군.”

거패 황부식이 내전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세 사람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봤다.

#

하남성 대별산 인근에 모여든 수천의 무사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사황봉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안에 사문의 영광을 가져다줄 입관패가 뭉텅이로 들어있기 때문.

사문의 존장들은 여타 다른 문파들과 협력하여 입관패를 회수하라 명했지만, 더불어 경쟁에서 지지 말라는 사족을 덧붙여 알게 모르게 신경전을 부리고 있는 중이었다.

허나, 그것도 하루이틀.

오 일이 되어가는 지금, 대별산에 모여든 이들은 하루하루 피로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장 노숙에 대해 전혀 준비를 해오지 않은 탓에, 대별산 인근에 위치한 몇 안 되는 여곽에 방이 꽉 차도록 들어가 자야 했으며, 물자가 급격하게 소진되는 탓에 상인들이 가격을 올려도 주변 마을에서 물자를 가져올 여유가 없어 별수 없이 비싼 값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슬슬 정시 시험 마감이 다가온다는 압박감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지?”

“이러다간 우리도 시험에서 탈락하겠군.”

“되려 우리가 그러길 기다리는 것 아닐까?”

대저 백도문파의 제자가 사황봉 내부에 들어가서 뭘 하려고 하는 것일까?

“차라리 사황봉을 치는 게 어떤가?”

“자네 미쳤나?”

“그렇지 않은가. 사황봉이 이미 무림맹의 행사를 방해한 것이니, 이는 엄연히 협정 위반 아닌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화살은 자연히 태을문과 철검문, 남궁세가로 향했다.

“어디 근본도 없는 놈이 정시를 치르겠다고 나대서는, 이래서야 시험의 의미도 퇴색되는 게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야. 진짜 문제는 남궁세가와 모용세가가 그치들과 함께한다는 것이지.”

“구파일방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오대세가의 이름이 아깝군.”

육 일 째 되는 날.

구파일방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향후 계획에 대해서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진소운의 일행들도 탈락이 확정되는 것이니 조금 더 기다려 보지.”

“사황봉이 움직인다!”

“결국 사황봉이 진소운을 내보냈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대별산 인근에 모여있던 모든 이들이 동시에 검을 빼어 들었다.

대별산의 팔방을 모두 빽빽하게 메운 검날들은 하나의 숲을 이루어 내었다.

혹여 사황봉이 정시에 개입할 것을 대비한 상황.

“전투 준비!”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수천의 무사들이 동시에 내공을 끌어올리고 사황봉을 향해 살기를 쏘아내었다.

끼이익. 쿵.

사황봉 안에서 수백의 인파가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저, 저건…….”

“아니, 대체…….”

당장에 전투를 준비하던 이들이 툭 하니 검을 내려놓고, 사황봉을 바라보았다.

“……상여?”

검은 무복을 입은 수백의 인원들이 거대한 상여를 가운데로 두고, 긴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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