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15화 (115/357)

#115. <흑도야행(黑徒夜行)(5)>

“그게 대체 무슨 개소리인가?”

명현 도장은 이곳이 장로전이라는 것도 잊은 채 그렇게 말했다.

“…….”

정기 입법 회의에 참석한 장로 인원만 28명. 정족수를 한참 넘는 이 회의에서 통과시켜야 할 맹법만 11개, 예산안 심사가 4개, 차년 대계가 2개인 걸 생각하면 다른 보고엔 눈도 돌아가지 않아야 할 것이 정상이었지만, 급박하게 들려온 보고에 명현 도장은 자신도 모르게 욕지기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진소운이 흑도인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고?”

“……예, 그렇습니다.”

마치 자신이 죄라도 지은 듯 말하는 맹원의 태도에, 명현 도장은 시덥지 않다는 듯 반응했다.

“그럼, 그냥 탈락시키면 되겠군. 그만 나가보게.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아는가?”

그렇게 축객령을 내렸음에도 맹원은 좌불안석인 상태였다.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어허. 지금 정기 입법 회의가 얼마나 중요한 줄 모르고 계속 말을 이어가는 건가?”

“크흠…….”

맹원은 이 일에 제 목줄이라도 달린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상태. 그러는 와중 모용청이 말을 했다.

“일단 좀 들어보시죠. 명현 도장.”

“별일 아닙니다. 아무리 무림정시가 중요하다 한들 입법 회의만 하겠습니까?”

“이 중요한 회의를 중단시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그렇게 모용청의 말과 명현 도장의 탐탁지 않은 허락이 떨어지자, 맹원이 조심스레 말했다.

“진소운 일행이 학관으로 향하고 있는데, 사황봉을 비롯한 마도문과 흑사방의 대단위 인원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어서. 다른 응시생들이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황봉은 그렇다 치고, 마도문과 흑사방은 또 왜? 아니, 애당초 그들이 감히 무림맹의 행사에 끼어들었다고?”

“그게, 그들 말로는 자신들은 진소운 일행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

명현 도장은 현 사태에 일어나는 일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자신들은 마령고원에서 억울하게 죽은 무사들을 기리는 비폭력 시위를 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비, 비폭력 시위?”

흑도의 무리가 그냥 시위도 아니고 비폭력 시위를 한다고?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네. 그래서 그들 모두가 무장을 해제하고 검은 무복을 입은 뒤 커다란 상여를 메고 남하하고 있습니다.”

“아니, 마령고원에 들어가라고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누구한테 시위를 하겠다는 거지?”

“그게…… 강호의 안녕을 책임지고 있는 무림맹이 제때 움직이지 않아 피해가 커진 거라고…….”

명현 도장은 물론이고 장로전에 있는 이들 대부분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심경이었다.

애당초 흑도무리들은 마교가 사라진 이래로 무림맹의 주적이 아니었던가.

“아, 아무튼 그럼 진소운 일행은?”

“그들은 무리의 정중앙에서 함께 움직이고 있어 응시생들이 접근할 수 없다고 합니다.”

“…….”

“벌써 하남성을 넘어 호북성에 들어섰다고 합니다. 심사관들은 이 사건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어찌 처리하다니, 당연히 탈락이지!”

“내 생각은 좀 다릅니다.”

명현 도장의 고개가 훽 돌았다. 예의 회의를 중단시킨 모용청이었다.

“그가 흑도 무리에게 도움을 청한 건가?”

“사황봉 측에선 진소운 일행과 일절 상관없는 일이라고…….”

“그럼 그가 돈을 주고 흑도들을 고용한 건가?”

“사황봉은 이건 순전히 흑도 무림의 행사라고 했습니다.”

“그럼……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거로군. 그저 우연히 진소운 일행이 거기 자리한 것 아닌가?”

모용청의 말에 명현 도장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 되었다.

“지금 제 정신이시오?”

“뭐가 말이오? 진소운이라는 아이가 규칙을 어긴 게 있소?”

“그걸 지금 말이라고…….”

“그나저나 사황봉과 마도문 흑사방이 움직였다면, 다른 흑도 문파들의 움직임은 어떤가?”

“조금씩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 와중입니다.”

“이거 꽤 큰일이 되겠군.”

모용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정기 회의는 무산하도록 합시다. 당장에 처리해야 할 일이 생긴 것 같으니.”

그 말과 함께 모용청을 위시한 열 명의 인원이 장로전을 나가고, 장로전에는 정도회에 소속된 인원과 백팔봉의 대표로 와 있는 인원들만이 남게 되었다.

#

대별산에서 처음 팔백의 인원으로 시작된 상여 행렬은, 융중산을 넘어 의성에 들어섰을 때는 그 세 배의 인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명패를 받아 움직인 문파들뿐만 아니라, 마령고원 사태 때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던 자들과 평소 무림맹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이들.

이참에 자시의 이름을 널리 알리겠다며 쫓아온 얼치기들과, 수천의 사람들의 이동을 통해 장사라도 해보겠다며 쫓아다니는 인원들까지 더해져, 이건 추모 행렬이 아니라 난장판이나 다름이 없었다.

“마! 너! 좀 치나?! 니 내 누군 줄 아나?”

“맛 좋은 죽엽청! 죽엽청 팔아요!”

“이 새끼들아! 이 행렬에 의복은 검정밖에 해당되는 거 몰라? 어디서 장례 행렬에 노란 옷을 입고 나타나? 이놈 아주 싹수가 노오란 놈이로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본래 나를 노렸다가 이제는 지붕 위에 올라간 나를 바라보는 개가 된 응시생들은, 점점 불어나는 흑도들의 숫자에 질려하며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아니, 잠깐만 지나가겠다니까! 그 안에 있는 놈 중에 우리 물건을 가진 놈이 있다고. 실제로 도둑이야 도둑!”

“도둑을 잡을 거면 관청엘 가야지, 못 지나간다!”

“아니, 니미럴! 왜 흑도 나부랭이가 관청을 운운하고 난리야!”

“이놈이? 네놈 우리가 비폭력 시위 중만 아니었어도 단매에 목을 쳤을 것이다!”

“애당초 흑도 놈들한테 비폭력 시위가 말이나 되나!”

그렇게 크고 작은 실랑이가 계속 되었고 몇 번은 큰 싸움으로 번질 뻔도 하였지만, 그때마다 흑도무림의 초고수들이 그들의 앞을 막아서며 큰 싸움으로 번지진 않았다.

애당초 무기가 없다 해서 ‘비폭력’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 무인들 아닌가.

더구나 흑도무림엔 비열한 술책을 가지지 않은 자가 없었기에, 정시의 응시생들은 물론이고 그들과 함께 움직이는 무사들도 섣불리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진짜 저 무식한 놈들이 제 발로 찾아오는군.”

내 옆에서 사황봉주는 만면에 드러난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최대 비원이었던 흑도연맹에 대해 공론화할 수 있는 장이 생겨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사황봉과 마도문 흑사방은 흑도연맹의 중심이 될 수 있는 명분을 얻었고, 장차 흑도연맹을 이끌 수 있는 계기까지 더불어 얻게 되었으니, 그로서는 만족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

“이 모든 것이 사황봉주님의 평소 호방함을 듣고 따라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적절하게 아첨을 섞어주며 부디 이 흑도 거두가 중간에 빈정이 상해, 우릴 저 승냥이 같은 백도 무리에 던지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아니지. 아니지. 이건 다 흑염룡 덕분이지.”

“아니! 봉주님, 그런 말씀 하시면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이 양반이 창창한 백도신성의 앞날에 벌써부터 초를 치려고 작정을 했나.

“그래 그래, 자네가 무림맹에 들어가 높은 자리에 오른 뒤, 무림맹을 통째로 우리에게 넘기기 전까지 내 비밀로 해줌세.”

“…….”

이 미친 흑도 거두가 뭐라는 거지?

“자네가 흑도연맹의 백년대계를 이야기할 때부터 알아봤네. 신분 에 상관없이 능력만으로 평가받는 곳. 결국 자네가 건설하고자 하는 건 무림의 지상낙원 같은 것 아닌가. 그간 무림과 강호로부터 핍박 받아 온 태을문의 설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 내 잘 알았네.”

이 양반이 점점 위험한 소릴 내뱉고 있다.

“저기요. 적당히 좀 하십쇼. 제가 지금껏 봉주님이 지어준 별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오해를 받고 사는지 아십니까?”

“크하하하하.”

한참이나 호방하게 웃던 차석두가 우뚝 웃음기를 지우고 말한다.

“앞으론 더 심해질 걸세.”

“네?”

“방금 내가 한 이야기. 그 이야기를 직접 입 밖에 내뱉는 사람이 있을 거라 이 말이네.”

“…….”

알고 있다.

차석두가 한 이야기가 근시일 내에 가장 먼저 시작될 곳은 흑도무림이 아니라, 백도무림. 그것도 무림맹 내부일 것이 분명하다.

중상모략과 계략, 모함으로 경험치가 두껍게 다져진 무림맹의 위정자들에게 나 같은 건 감칠맛 나는 맛 좋은 먹잇감에 불과할 테니.

“그러니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는 것이 좋을 걸세. 최악의 경우엔 자네는 흑도연맹의 간자로 낙인 찍힐 수도 있음이야.”

“…….”

차석두와의 만남은 이번이 두 번째다.

두 번 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고, 그가 원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만났었다.

그럼에도 그가 내게 해준 조언은 내가 전생에서 숱하게 만났던 무림맹의 인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들이었다.

이념과 신념을 뛰어넘어 그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쯤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혹여나 간자로 찍히게 되면 개의치 말고 흑도 연맹에 투신하게. 내 자네와 자네 사문을 위해 좋은 자리를 비워두지.”

“…….”

“아 참, 흑도 연맹을 창설하게 되면 창설 축하 초대 명단에 자네를 넣을 테니, 그땐 무림맹의 대표로 볼 수도 있겠구만.”

걱정하고 있다는 말 취소.

이 자는 흑도의 거두답게 어떻게 해서든 백도의 신성을 타락시킬 흑심만 가득한 인간이다.

#

딸랑. 딸랑. 딸랑.

종소리가 울리며 검은 무복의 사내들이 천천히 걷고 있다.

그들 중앙엔 수 개의 관이 담겨있음을 상징하는 거대한 상여가 있었고, 그 뒤로 검은 무복의 인원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대체 누구 장례식이길래 이리 거창하댜?”

“어디 마령고원인가 거기 들어갔다 죽은 인원들을 기린다는데?”

“거서 죽은 인원들은 다들 나쁜 짓을 하는 흑도놈들이라 안 했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앞을 지나가는 이 특이한 행렬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그들이 대부분 흑도 인원이라는 것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흑도인의 전형이란, 결국 산적이나 해적과 같이 배운 것 없이 노략질이나 일삼는 도적놈들.

하지만 격식을 차리고, 복색을 맞춰 경건하게 이동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도적의 모습을 생각하지 못한 까닭이다.

대별산에서 시작된 행렬이 의성과 천문을 지나 무한에 다다랐다.

이 거대한 행렬의 끝이 무림학관에 닿자, 잠시 검은 무복의 인원들이 무림학관의 입구를 빙그르르 둘러싸기 시작했다.

정시 시험의 마지막 날, 마지막 합격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학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심사관들은 갑작스런 흑도 무리의 방문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요.”

“…….”

“…….”

일행들은 물론이고, 금은동 형제들도 감회가 새로운지 말문을 잇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대별산에서 학관까지 오는 내내 말수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하아, 할아버지가 뭐라 하실지.”

“애당초 우릴 들여보내 주기나 할까요?”

“이대로 입구에서 망신을 당하느니 그냥 세가로 돌아가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주위엔 행렬을 따라붙었던 구파일방의 응시생과 무사들이 백안시한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저런 불만 어린 말들이 튀어 나오는 사이. 성모란이 앞섰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은 법이죠.”

성모란이 심사관에게 자신이 얻은 입관패들을 후두둑 떨어뜨려 주었다.

심사관은 입관패를 이리저리 정리한 뒤, 말했다.

“철검문 성모란 합격!”

“오오!”

“와아!”

철검문의 무사들이 동시에 만세 삼창을 하는 동안, 금은동 형제가 동시에 심사관에게 입관패를 내밀었다.

“태을문 금표 합격!”

“태을문 은호 합격!”

“태을문 동룡 합격!”

세 형제는 감격에 젖어 서로를 부등켜 안고 울기 시작했고, 그사이 남궁선화가 합격 통보를 받았다.

이제 모용재화와 나만 들어가면 되는 순간.

“형님, 항시 응원하겠습니다.”

“……응?”

모용재화가 세가의 무사들과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형님과 학관에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형님과의 여정 덕분에 제가 가야 할 길을 깨달았습니다.”

모용재화가 활을 선보이며 자랑스레 웃었고, 백원각이 걱정스럽다는 듯 머리를 쥐어짰다.

“괜찮은 거냐?”

“뭐가 말입니까?”

“할아버지가 궁을 든 너를 용서하실까?”

“……으흠, 그래서 사실 곧장 세가로 돌아가지 않고 유랑을 좀 할까…….”

“한시가 아까운 젊은 나이에 유랑이라니, 너도 참 태평하다. 그러지 말고 나와 함께 학관에 들어가자.”

“네? 아니. 그게 무슨…….”

나는 품 안에서 제갈소명에게 받았던 입관패를 던져주었다.

처음 아리송한 표정으로 입관패를 보던 모용재화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혀, 형님, 이건…….”

“삼관문의 패가 없어도 그것이면 통과이지 않느냐?”

“아…… 아…….”

모용재화는 당최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그가 들고 있는 입관패는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귀한 보물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

내가 선뜻 그것을 넘겼음에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용재화를 답답한 심경으로 보던 백원각이 당장 말했다.

“진 공자님,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니, 백 대주님 그냥 그렇게 말하기엔 이건 너무 큰…….”

“도련님, 이건 진 공자님이 도련님께 주신 일생일대의 기회입니다. 이대로 기회를 놓치실 겁니까?”

백원각의 간절한 표정에 갈팡질팡하던 모용재화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알겠습니다. 대주님, 형님, 나 모용세가의 재화. 이 자리에서 반드시 궁으로써 일가를 이루겠다 선언하겠습니다.”

“……아니, 도련님 자신의 진로를 그리 급하게…….”

이대로 모용세가의 대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나도 말렸다.

“그래, 그건 찬찬히 들어가서…….”

“아닙니다. 형님이 길을 밝혀주시고 길까지 알려주셨는데. 제가 어찌 그걸 배신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반드시! 궁도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곤 모용재화가 심사관에게 입관패를 넘겼다.

“모용세가 모용재화 합격!”

그리고 내 차례.

“그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는 그간 함께했던 무사들에게 한차례 인사를 했고, 그들 또한 포권을 쥐며 답했다.

“진 공자님의 앞날에 무운이 있길 바라겠습니다.”

나는 심사관 앞에 보따리를 거꾸로 쏟아냈다.

촤르르르르.

작은 보따리 앞에서 관문패가 주르륵 떨어지면, 주변에서 지켜보던 구파일방의 제자들의 눈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심사관 두 명이 붙어 관문패의 개수를 세기 시작하곤 명단의 이름과 대조한 후에 이름을 호명했다.

“태을문 진소운…… 불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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