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19화 (119/357)

#119. <황금 옷을 입은 흑염룡(4)>

입가에 미소를 짓고 살의를 숨기지 않는다.

그 뒤에 선 덩치 역시, 자신의 몸을 몇 배는 더 부풀려 위압감을 주려 하고 있었다.

바로 12봉성의 철순직과 남화성이었다.

“그건…… 뭐라고 합니까? 환시 속에 숨겨진 그 대창 같은 화살 말입니다.”

“글쎄요. 그건 직접 물어보시죠.”

내가 모용재화를 바라보자 모용재화가 잠시 눈을 굴리더니 대답했다.

“토, 통마시입니다.”

이름을 들은 철순직은 작게 감탄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어울리는 이름이군요. 모용 공자가 그 화살의 주인공이셨군요. 덕분에 하마터면 학관에 들어오지 못 할 뻔했습니다.”

“…….”

숭산에서 철순직과 남화성을 막아서면서 그들의 입관패 몇 개를 슬쩍한 일을 계속 물고 늘어지는 중이었다.

“뺏을 생각을 했으면 빼앗길 각오도 되어있었던 것 아닙니까?”

내 말에 철순직과 그의 일행. 12봉성들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진다.

철순직은 잠시 내 얼굴을 보더니 의문을 가득 담아 묻는다.

“괜찮으신 겁니까?”

“뭐가 말입니까?”

“학관대표단을 꾸리기 위해선 12봉성의 힘이 반드시 필요할 텐데요.”

“…….”

“전 당연히 그 생각쯤은 하고 계실 줄 알았는데. 역시나 제 예상을 번번이 벗어나시는 분이군요.”

그 말을 끝으로 철순직과 12봉성이 안내를 받아 연회장 안으로 입장했다.

내가 잠시 그의 말을 곱씹는 사이, 우리에게도 시비가 달려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바로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무림학관 관장의 개회사로 연회는 시작되었다.

교관과 교두들이 차례로 나와 자신이 담당하는 교과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고, 마지막엔 최고 성적으로 입관을 한 나에 대한 짧은 소개가 이어진 뒤, 바로 악공들의 가무 무대가 이어졌다.

갖가지 음식들이 줄지어 나오고 사람들은 저마다 탁자를 오가며 인사를 나눈다.

부관장과 행정원, 교관과 교두들이 이곳저곳을 다니며 인사하는 모습에 금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저들끼리 원래 안면이 있는 것이라 봐야겠지요?”

금표의 말에 은호가 비아냥거린다.

“원래 안면이 있다고 하기엔 서로들 너무 낯설어 보이는데.”

우리의 탁자가 위치한 곳은 단상과 가장 가까운 정가운데였다.

그럼에도 교두들은 우리 탁자를 지나 다른 탁자들에만 다가가 인사를 나누고 술잔을 나누며 이야기를 꽃피우고 있었다.

“하지만, 저쪽도 가지 않잖아?”

단상과 가장 먼 위치에 있는 탁자를 가리키는 금표.

은호는 그쪽을 슬쩍 본 후, 말했다.

“공교롭게도 구파일방, 오대세가, 12봉성 그 어디에도 속한 사람들이 아니네. 아마 상계나 관에 소속된 이들이겠지.”

“…….”

금표의 표정이 구겨지건 말건 은호가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대사형. 저희가 먼저 다가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미처 답하기도 전에 금표가 내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가 주인공이잖아. 이렇게 떡하니 수석이라고 붙어있는데.”

은호는 그런 금표를 보며 한숨을 내쉰다.

“형, 대사형은 학관 대표로서 대표단 간부들을 꾸려야 해. 이대로 고립되었다간, 학사 과정도 못 꾸리고, 최악의 경우엔 대표직을 잃을 수도 있대.”

은호가 주위를 둘러본다.

“듣기로는 대표가 되면 서로 간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한다던데.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네.”

“아마 태을문이기에 그런 것이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다가가실 겁니까?”

“그래. 어쨌든 간부진은 꾸려야 하니까. 저들이 없다면 결국 학관생들도 움직이지 않을 거다.”

철저히 분리된 세력들을 하나로 통솔하지 못하면 대표직을 잃는다. 어처구니 없는 일로 어렵게 얻은 대표직을 잃을 필요는 없었다.

“같이 가겠습니다.”

은호가 그렇게 일어나자 금표와 동룡, 모용재화까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는 우리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맨 먼저 구파일방에 다가가 인사를 건넸지만,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거나 신경을 쓰는 이들은 없었다.

되려 몇몇의 인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안녕하십니까!”

내가 목소리를 조금 크게 높여 인사를 먼저 건넸지만, 내 쪽을 돌아본 이들은 몇 없었다.

그나마도 그저 내 옷을 한번 쓰윽 보곤 다시 고개를 돌려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다.

“…….”

금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은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동룡은 어쩔 줄 몰라하는 반면, 모용재화는 당장 탁자를 뒤집어엎어 버릴 표정으로 날뛰려는 것을 내가 막아섰다.

“되었다.”

“하지만 형님…….”

“바빠 보이는 것 같으니 다른 곳에 먼저 가자.”

나는 오대세가의 탁자 쪽으로 가려다가 슬쩍 구파일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자리를 옮기자마자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은 모두 우리 쪽을 지그시 보고 있었다.

“어험…… 내부에만 오래 있었더니 답답하구만, 잠시 바람이나 쐬러 나갔다 올까?”

“나도 같이 가지.”

오대세가의 인원들이 앉아있는 탁자 쪽으로 다가가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후.”

“의도적인 것이라고 봐야겠군요.”

참담한 표정의 은호.

금표가 코에서 김을 팡팡 쏟아내며 말했다.

“사형, 그냥 적당히 간부들을 임명하면 안 되는 겁니까?”

“……학관 대표는 학사 일정 절반을 짠다. 그리고 그 학사 일정에 학관생들을 참관시키지 못하는 만큼 감점을 받게 된다.”

학관 대표가 짜는 학사 일정에 참석하고 말고는 학관생들의 의지로 결정된다.

결국 많은 학관생을 움직일 수 있는 간부진을 가지고 있어야, 대표가 짠 학사 일정에 학관생들이 참석하는 것이다.

본래는 수석을 차지한 대표에게 그해 기수들을 아우를 수 있는 교류의 장을 만들어 준 것인데, 이것이 태을문 출신에겐 고스란히 약점이 되어버렸다.

“만약 감점을 받게 되면요?”

“……대표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최소 절반 이상의 학관생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하지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이미 등 돌린 상태에서 벌써 절반 이상 감점이 되었다고 봐도 무관했다.

“……만약 일부러 대표직에서 밀어내려고 한다면…….”

“후…… 그럼 대사형은 대표 자리에서 나와야 하지. 거기다 최악의 경우, 학관생들 전부가 대사형을 탄핵하면…… 학관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고 했어.”

“……시발 그런 게 어딨어!”

불과 몇 시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좋은 옷은 난생처음 입어본다며 즐거워하기만 했던 금표의 얼굴은 더 말할 수 없이 찡그려진 상태였다.

“진짜 이딴 식으로 행동한다고?”

금표의 목소리가 꽤 컸기에 연회장 전체에 울려퍼졌다.

다른 탁자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교관과 교두들이 금표의 큰 소리에 이편을 쳐다보았고, 학관생들도 한 번씩 시선을 주었지만, 크게 반응하는 이들은 없었다.

“하아…….”

연회장 내부엔 밤이라고 느낄 수 없을 정도의 밝은 빛이 사방에 자리했고, 흥겨운 음악과 맛깔난 음식들이 곳곳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즐거운 분위기를 만끽할 수 없었다.

“이번엔 제 예상이 맞았군요.”

한껏 날이 서 있던 금·은·동 형제와 모용재화가, 목소리가 들린 곳을 노려보았다.

그곳엔 입구에서 만났던 철순직이 여유를 부리며 앉아있었다.

“이제 조금 현실 파악이 되셨습니까?”

“…….”

“애당초 저희와 함께하셨으면 이런 걱정 따윈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쪽과 함께했다면 이곳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겠지요.”

철순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애당초 태을문이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12봉성은 담을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군요.”

12봉성의 문파와 그들을 따르는 인물들의 합격 숫자가 대략 이백 오십 명.

절반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숫자.

철순직은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소문으로 듣기론, 진 공자께선 특별전형을 일부러 포기하셨다지요?”

철순직이 모용재화를 한번 본다.

“거기다 총군사께서 받은 입관패도 일면식 없는 이에게 주었고요.”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요?”

“무사도 없이 달랑 사제 셋만을 데리고 무림학관 정시에 뛰어들었고요.”

점점 의도를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고개가 갸웃거릴 때쯤.

“진 공자는 너무도 뛰어납니다.”

“…….”

“너무도 뛰어나고 너무도 광채를 빛내기에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는 겁니다.”

금·은·동 형제와 모용재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또한 특별전형을 포기했습니다. 제가 가장 아끼는 사제에게 제 자리를 양보했지요. 하지만 그렇다 한들 무사 백 명을 동원하는 것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딱 그 정도까지 인 것이죠. 12봉성의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 하지만 반대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게 견제를 받지 않을 정도.”

철순직은 처음으로 개운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12봉성이 담을 수 있었냐고요? 물론 담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12봉성 임을 증명할 수 있었겠지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적당한 양보를 받아낸 후. 조화를 이뤘을 겁니다.”

철순직이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

“진 공자는 위협이 됩니다. 그러기에 증명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 진 공자와 협력하는 것보단 퇴출을 시키는 것이 저들에겐 더 편한 방법이겠지요.”

“……그렇게 되면 무림학관은 다시금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이끌어 가게 될 텐데요. 그 일을 또 반복하고 싶은 겁니까?”

철순직이 빙긋 미소 짓는다.

“그게 하루 이틀 있었던 일입니까? 이백 년을 기다렸습니다. 앞으로 오십 년, 백 년을 기다리는 게 힘들까요? 그리고 그렇게까지 걸릴까요?”

전생에도 느낀 것이지만, 철순직은 참으로 뱀과 같은 자다.

“…….”

그의 말 몇 마디에 날이 서 있던 금·은·동 형제와 모용재화의 어깨가 축 처진다.

“이 연회장 그 누구도 진 공자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겁니다. 아마 진 공자가 쫓겨날 때까지 진 공자가 무슨 말을 하든 듣지 않겠지요.”

철순직이 금은동 형제와 모용재화를 한번 쓱 쓸어본 후 말했다.

“제일 좋은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

철순직은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스스로 대표직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일개 학관생의 자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럼 최소한 강제적 퇴출은 면할 수 있을 겁니다.”

“…….”

“그럼 남은 연회를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철순직이 포권을 쥐곤 자신의 탁자로 돌아갔다.

우리들은 연회 중앙에 우뚝 선 채 자리로 되돌아갈 생각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리로 돌아가자.”

“사형…… 죄송하지만 먼저 숙소로 가도 될까요?”

금표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그렇게 말했다. 녀석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순간.

웅성웅성.

장내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우리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던 소음들과 연주 음이 일순 우뚝 멈췄다.

연주자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은 듯 다시금 연주를 시작했지만, 장내의 소란스레 대화를 나누던 이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연회장 입구를 바라볼 뿐. 그리고 그곳엔 빛이 비추는 것과 같이 아름다운 자태의 세 여인이 들어서고 있었다.

“……응?”

“……허, 학관에서 예기를 부르기라도 한 건가?”

“그럴 리 없는데 저런 미모라면…… 호남에서 내가 모를 리 없는데.”

남자와 여자, 교관과 교두들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의 시선이 연회장을 들어서는 세 여인에게 고정된다.

움직일 때마다 하늘거리는 옷가지는 묘한 기운을 풍기고, 그림으로 그린 듯 얼굴엔 현실성이 없다.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어려있고, 입가에 지은 미소를 본 후에야 그녀들이 실존의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연회장 안에 들어선 여인들이 장내를 주욱 둘러본다.

그녀들의 시선이 오갈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도 함께 따른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던 세 여인이 연회장 중앙에 선 우리를 보고 천천히 다가온다.

“꿀꺽.”

조금 전까지 낙담하여 기숙사로 돌아가겠다던 금표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정도로 일행 모두가 긴장하고 있는 상황.

그때, 여인들의 맨 앞에 선 이가 붉은 입술을 열어 말했다.

“진 공자님.”

이제껏 외면하고 무시하던 시선들이 나에게 모두 쏠린다.

금·은·동 형제는 물론이고, 모용재화마저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

목소리를 들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움직이는 행동이나 목소리가 누군가와 똑같이 닮았다.

“남궁…… 소저?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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