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기회를 빼앗는 흑염룡(3)>
진소운의 실패에 모든 것을 걸었던 정도회의 인원들은, 이번 일로 이탈하려는 사람들을 다잡기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니기 바빴다.
안 그래도 멸혼진 행사의 참여로 인해 소외 받던 이들이 이미 이탈한 상황에서, 더 많은 이들이 이탈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
이번 사태에서 정작 멸혼진 안에 들어간 구파일방의 제자들이 한 명도 들어가지 않은 것은 더 큰 분노를 일으켰다.
“정도회를 따르면 당연히 저들과 같은 대우를 받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같은 대우는 안 바라지, 어차피 우리가 구파일방 급도 아니고, 그래도 죽어가는 학관생들 앞에서 손 놓고 있었던 건 도가 지나친 거 아닌가?”
“정도회는 우리의 출세는커녕, 목숨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로 인해 명현 도장을 비롯한 정도회 소속 장로들은 장로전 문지방 대신 무림학관의 문지방을 닳도록 오가며 학관생들을 만나기 바빴다.
구파일방의 제자들이야 정도회의 가장 큰 수혜를 받는 이들이었고 정도회를 이끄는 입장이었으니 동요가 없다.
하지만 정도회를 따르는 입장에 있는 이들의 수가 정도회의 7할의 달하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번 학관생들의 동요는 자칫 세력의 축소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
더구나 이번에 일어난 일들이 학관생들의 사문이나 가문에 알려질 경우, 학관에 제자를 보내기 위해 기둥 뿌리까지 뽑았던 문파들의 분노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전 재산을 털어 자식 하나를 겨우 학관에 보냈는데, 그 자식이 소모품으로 쓰이다 버려질 뻔 하였다?
출세고 나발이고 당장 정도회를 탈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물론, 정도회 출신의 인물이 학관 대표직을 맡고 있었다면, 이런 내부 잡음에 일절 신경 따윈 쓰지 않았으리라.
권력이란 본래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기에, 불만을 품어 누군가 나가더라도 그 빈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채우곤 하니까.
하지만 대표는 어디 길바닥 출신인지 모를 녀석이 자치하고 있고, 구파일방은 학관 규칙을 어기고 몰래 멸혼진을 익히려던 졸렬한 모습을 보인 바람에, 무림맹 대표라는 상징성까지 잃기 직전이었다.
그렇다고 백도회와 12봉성은 이 일에서 완전 제3자의 입장에서 정도회에서 떨어져 나오는 이를 포섭할 기회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인간의 사고란 다 고만고만하고, 있는 놈들의 소갈머리란 다 비슷한 법.
정도회 다음으로 멸혼진에 들어가려 했던 그들은, 그저 먼저 나대다가 매 맞는 친구를 보고 한 걸음 물러서서 안도의 숨을 쉬며 추이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 일에서 가장 큰 날벼락을 맞은 건 정도회였으니까.
명현 도장은 어떻게든 학관생들이 싸지른 똥을 치우기 위해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너희들의 학관 퇴학은 이미 결정된바, 번복할 수 없는 상황이다. 허나, 이번 일에 대해 정도회는 반드시 충분한 보상을 해줄 것이다.”
무림맹 최고 권관의 소속이자, 현재 정도회의 회주 자리에 앉은 명현도장이 말하고 있었음에도, 생존자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였다.
평소라면 어떻게든 눈에 한번 들어보려고 자신의 부모님과 할아버님 사돈의 팔촌까지 팔아가며 연이 있었음을 부각하던 태도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너희들의 퇴학이 당금 너희들만의 잘못은 아니지 않느냐? 애당초 무리한 행사 일정과 편협한 인원 구성으로 사고를 유발한 자의 책임이 큰 것 아니겠느냐.”
“…….”
“이는 분명 학관 대표로선 절대 해선 안 될 짓을 벌인 자의 죄가 크다 할 수 있다. 안 그러느냐?”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분노를 꾸욱꾸욱 담아두고 있는 듯한 생존자의 모습에 명현도장은 서서히 얼굴이 풀렸다.
“당연히 죗값을 제대로 치르게 해야겠지. 이번 일을 통해 학관 대표를 경질하고, 새로운 학관 대표를 뽑을 것이다.”
정도회를 단속 했다 생각한 명현 도장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정치를 아는 사람이었고, 그의 다음 행보는 무척이나 정치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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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정도회의 수장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백도회와 정도회를 떠나 우리는 이미 ‘협의’로 뭉친 하나의 몸 아니겠습니까? 누가 어디 소속인 것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가증스러운 명현 도장의 이야기를 들은 백도회주는, 속으로 그를 비웃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래서 무얼 원하시는 겁니까?”
“지금 정도회가 혼란한 틈을 타 정도회원들을 포섭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알고 있습니다.”
“본래 한 몸인 우리가 거처를 조금 옮기는 것이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걸 ‘도의가 없다.’라고 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글쎄요. 애당초 백도회 산하의 문파들을 포섭하는 건 그쪽이 많이 하던 일 아닙니까.”
“설사 지금 우리의 세가 약해진다 하더라도 백도회가 전권을 잡을 자신이 있습니까?”
“…….”
명현의 촌철살인에 백도회주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금번 우리의 위기가 되려 기회라 생각합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 가당찮은 행사를 폐지하고, 학관 대표를 들어내야지요.”
“멸혼진이라면 맹 내부에서도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많습니다. 총군사가 직접 예산을 편성한 행사를 우리 마음대로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함께 힘을 합치자는 것이지요.”
“…….”
“백도회 또한 이번 학관 대표에 대해서 마뜩잖게 생각하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정도회는 물론이고 백도회도 이번 기수의 학관 대표 자리는 차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건의 책임자나 마찬가지인 진소운이 아직 깨어나지 않았으나, 명현은 되려 이것을 기회로 삼고 징벌위원회를 밀어붙였다.
“명현 도장, 아직 학관 대표가 깨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무슨 징벌위원회를 벌써 개최합니까.”
“학관 대표가 이미 자신이 이번 사건과 관련 없다 공표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깨어난다 한들 그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번 사건은 맹법을 어긴 일에 해당하지 않습니까. 신속하게 처리하지 않는다면 내부의 혼란이 가중될 것입니다.”
명현도장의 속셈이야 뻔했지만, 명현도장을 비롯한 장로전의 장로들 대부분이 매일같이 집행각을 들락거리며 어깃장을 놓은 덕분에, 결국 사건이 있은 지 이틀도 되지 않아 징벌위원회가 열렸다.
정도회 입김이 가득 풍긴 위원회 소속 인원들은 명현 도장이 써준 대본대로, 사건의 문제를 맹법을 어긴 생존자들뿐만 아니라 행사에 책임이 있는 진소운에게 까지 뻗치려 했다.
그 얼토당토않은 상황에 제갈소명이 위원회를 소집 해제하려 했지만, 생존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그는 행동을 멈추었다.
“이번 일은 순전히 개인의 욕심을 위해 맹법을 위반한 저희만의 잘못입니다.”
“응?”
위원회에 참석했던 명현도장이 이상함을 느끼고 뭐라 이야기하려 했지만, 생존자들은 그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학관 대표님은 자신의 비전을 훔치려던 저희를 위해 목숨을 걸고 멸혼진에 뛰어드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습니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생존자들은 마치 한마음이 된 듯 명현 도장의 의도와는 전혀 딴판인 이야기를 내뱉고 있었다.
“……이번 일을 계획하여 여러분들을 위험에 빠지게 한 학관 대표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은 없는 겁니까?”
명현 도장이 꽂아 넣은 위원이 대답을 유도하지만, 생존자들은 단호했다.
“멸혼진 안에서 몇 날 며칠이 흐르는 동안, 학관 대표님은 저희 때문에 벽곡단 한 알 드시지 못했습니다. 그런 분 앞에서 원망하는 마음이라뇨. 제가 도덕적으로만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면수심의 쓰레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맞습니다!”
“이번 일에 대한 원인을 굳이 따지자면 학관생들 사이에 있는 정도회의 간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등 떠밀지 않았다면 이런 위험한 행동 따윈 하지 않았을 겁니다.”
생존자들의 말에 장내의 소란이 가중되었다.
위원회들은 물론이고, 일을 기획하고 조율했던 명현 도장까지도 이 혼란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설마 그때의 그 표정이?’
명현은 생존자들을 설득할 때 그들이 지었던 분노를 억누르는 표정이 떠올랐다.
‘진소운 그놈이 아니라 나에게 향한 것이었어?’
“학관생들은 이번 사건과 관련 없는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위원회가 엄포를 놓았지만, 그 말들이 되려 생존자들의 역린을 건드렸다.
“다 들었습니다. 정도회 중 그 누구도 우릴 위해 나서려 했던 자들이 없었다지요! 학관생들은 몰라도 장로전의 장로님들까지 그러실 줄은 몰랐습니다.”
“정숙하세요! 정숙! 정숙하세요!”
“그간 우리 사문이 가져다 바친 것이 얼마입니까! 근데 사지로 등 떠밀어 놓고 정작 중요한 순간엔 나 몰라라 하는 것입니까!”
생존자들은 이제 더 이상 무서울 게 없다는 듯 마구 소리쳤다.
“우리 양검문이 비록 구파일방에 비해 비루한 문파일지 몰라도 다시는! 구파일방이 하는 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애당초 학관 대표를 충실히 따랐을 겁니다. 최소한 그는 우릴 위해 목숨을 걸었으니까요!”
“조용히 하세요! 징계, 징계를 내릴 겁니다.”
이미 퇴학이 결정된 학관생들에게 징계 따위가 뭐가 무서울까. 되려 화로에 장작을 들이붓는 효과만 가져올 뿐이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 이번 일에 대해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저희 사문 또한 잊지 않을 것입니다…….”
명현 도장은 난장판이 된 징벌위원회를 멍청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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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내리 잠만 자다 눈을 떴을 땐, 몸은 한층 가벼워져 있었다.
누가 갈아입혔는지 모르겠지만, 옷은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몸에선 칙칙한 땀 냄새 대신 뽀송뽀송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설마, 자고 있는 사이에 씻긴 것인가?’
눈을 떴음에도 주변이 너무 조용하여 한밤 중에 깬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금은동 형제들은 교대를 해가며 자리를 지키고 있거나, 남궁 소저나 성모란 소저 등이 옆에서 간호를 하다 깬 나를 보고 잔소리를 한참 내뱉을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짹- 짹-
창문 밖에선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고 산새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수업이라도 간 건가?
그런 것 때문에 옆에 있어 주지 못한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애써 서운한 맘을 지우고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
낯익은 등짝을 보고 몸을 움찔 떨었다.
‘저 사람이 왜 또?’
전생에는 먼 거리에서 얼굴 한번 보기도 힘들었던 이를 현생에선, 철검문에 이어 벌써 두 번째 독대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 두 번 다 비슷한 상황이라 기시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일어났느냐?”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자는 척을 했다.
그러자 그는 혼자 읊조리듯 말했다.
“무림맹 소속이나 마찬가지인 학관 대표가 총군사를 앞에 두고 누워있다니 불경스럽기 그지없군. 어떤 징계를 내려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