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기회를 빼앗는 흑염룡(5)>
‘괜히 꼴값은 떨어서는…….’
사실 그렇게까지 금식을 할 필요는 없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조금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나도 충분했을 것을, 극적인 연출을 한다고 무리하는 바람에 일이 이 지경이 되어버렸다.
“뭐 하나, 안 일어나고?”
제갈소명은 당장이라도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제가 왜 비무를 해야 한다는 겁니까?”
“방금 말하지 않았나, 자네 단전에…….”
“그러니까, 남의 단전을 살피시고 왜 이리 당당하신데요.”
내 말에 제갈소명은 잠시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도 자신의 행동이 왜 그런지 몰랐던 듯.
잠시 후 저 좋은 머릿속에서 결론이 난 듯 말했다.
“그래도 되니까?”
“하아…….”
도의적으로 해선 안 되는 일이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다 상식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닌 데다, 일개 태을문의 제자가 무림맹의 총군사이자 제갈세가의 태상가주를 처벌한다는 것 역시 말이 안 되긴 해도.
‘그래도 저렇게 당당한 건 좀 추하지 않나?’
내 얼굴을 보던 제갈소명이 말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썩 설득이 안 되는 모양이군.”
“그게 설득이 될 것 같습니까?”
“대부분 되던데?”
“…….”
명색이 천하제일뇌라고 불리는 제갈소명과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싸움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혹시 제갈소명의 인두겁을 쓴 마인이 아닐까?
“자네 혹시 여전히 내게서 얻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 무림맹의 총군사네. 자네는 무림학관의 학관생이고.
무림맹 내에서 나와 대화 한번 해보겠다고 기다리는 사람이 수만 명이고, 내 앞에서 무공 한번 선보이겠다고 대궐 같은 집을 팔아 뇌물을 뿌리는 사람이 수천 명이네.
지금 자네에게 그런 기회를 두 개나 주겠다는데 거절하는 건가?”
거야 출세에 미친 새끼들이나 하는 짓이고, 미래에 무림맹 초토화돼서 북해로 이사 가는 걸 뻔히 아는 내가 굳이 총군사에게 잘 보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네.”
“허허.”
내 단호한 거절에 제갈소명은 생각 못 했다는 듯 다시금 턱을 부여잡고 생각에 빠졌다.
나로선 제발 그냥 돌아가 주었으면 하는 심정이 가득이었다.
정기신이 멀쩡하다곤 하지만, 며칠간 음식을 먹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맛난 것 좀 먹다 늘어지게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 달리 제갈소명은…… 끈질겼다.
“그럼 이건 어떤가…… 자네가 귀궁문에 무공사부를 신청했지?”
모용재화가 검을 버리고 궁을 잡기로 마음먹은 이상, 어차피 혼자 갈 수 있는 길이라도 기본을 잡아줄 필요가 있다 생각하여 특별 수업 과정을 신설해 놓은 상태였다.
“그걸 취소해야겠군.”
“…….”
“아, 그리고 자네가 준비하는 두 번째 행사 말이야, 백호검진을 가르칠 특별 초빙 강사…… 그것도 취소해야겠어.”
“그게 무슨…… 백호검진은 이미 무림맹 공식 검진입니다.”
어차피 무림맹에 배속되면 배우게 될 것이지만, 나는 내가 아는 백호검진을 가르치기 위해 미리 무림맹의 백호검진을 전파할 생각이었다.
제갈소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만, 굳이 그 쓸모없는 검진을 학관생들에게 익히도록 하기 위해 예산을 쓴다는 건 낭비라는 생각이 드는군.”
“…….”
“그리고 자네가 계획한 세 번째 행사 말이야, 모산파와 형산파의 술사들을 초대하는…….”
“!”
이 행사는 만약 시산혈교와 대적하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준비한 행사였다.
그게 아니면 미래에 마인들과 대적하게 될 때, 무사 수천은 살릴 수 있는 중요한 행사.
단지 무림학관 학관생들의 목숨이 중요한 게 아니다.
대부분이 맹의 간부로 가는 학관생들이기에 그들이 사술에 대응을 못 하면, 죽어 나가는 건 그 밑의 하급 무사들이기에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준비한 행사였다.
“전 분명 격식에 맞게 규범을 지켜가며 예산을 신청했습니다. 이리 사적인 감정으로 정해진 예산을 폐지하는 건 부당한 행동입니다.”
“알고 있네.”
“네?”
“안다고. 그럼에도 그 부당한 걸 할 수 있는 게 나고, 그걸 따라야 하는 게 자네지.”
제갈소명은 제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가, 나를 가리킨다.
지금 이 순간 제갈소명이 마인이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그럼 저 빌어먹을 손가락을 부러뜨려도 태을문이 멸문되거나 사제들이 금옥에 갇히는 일은 없을 테니까.
“하아…… 좋습니다. 하겠습니다.”
“좋네. 나가지.”
“하지만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네.”
“자네는 조건을 내걸 위치가 아니라 방금 말하지 않았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것을 설명하듯 단호한 말투.
그렇다고 해도 계속 당해주기만 하는 건 내 체질에 영 안 맞는다.
“제 진정한 실력을 보고 싶은 것 아니십니까?”
“…….”
“말씀하셨다시피, 연기는 안 돼도 사기는 좀 칩니다. 제가 적당히 상대하다 패해도 납득이 되시겠습니까?”
“뭘 원하지?”
“만통부에서 복마신목을 가지고 있지요?”
“……응?”
“그걸 주십시오.”
“그게 무슨 물건인 줄 알고!”
“……어차피 쓰실 데도 없지 않습니까.”
복마신목은 영험한 사찰의 기둥이었던 나무다.
뇌성벽력에 의해 절이 몽땅 타버리고 났을 때,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목재에는 그 사찰의 영기가 모두 집약된다.
애당초 일부러 만들 수 없는 물건이었지만, 용도를 모르는 지금으로선 그리 귀한 것은 아니다.
“…….”
“기껏해야 현판을 만들거나 하는 데 쓰실 거 아닙니까?”
복마신목은 심령을 보호하는 호부의 효과가 탁월하다.
나무 자체가 그리 크지 않고 탄 부분을 제거하면 그리 많은 양이 되진 않겠지만.
형산파의 도사들에게 부탁해 제마 의식을 치러 호부로 만들어 놓으면, 차후 마인과의 대전에서 큰 효과를 발휘할 것이 분명하다.
“그걸 가져다 어디에 쓰려 하느냐?”
“……개인적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갈소명은 잠시 고민하는 척을 했다.
하지만 그게 뻔한 연기라고 느껴지는 건 복마신목이라는 거창한 이름에 비해, 그 물건이 현재 그리 귀한 물건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 예상대로 제갈소명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단, 상대에게 패한다면 주지 않겠다.”
지금 내 또래에선 누가 상대로 오든 자신이 있었기에 나 또한 답했다.
“알겠습니다.”
“가자.”
“잠시만요…….”
“……또 뭐냐?”
“밥 좀 먹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 조금 어지러운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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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표정이 왜 그러나? 뭔가 또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 같군?”
대충 예상하기로 학관생 중에서 한 명이 나올 거라 생각했다.
어중이떠중이는 안 되더라도 구파일방의 제자나 혹은 멸혼진 일로 내게 앙심을 품은 것처럼 보이는 일각 등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게 부당한 일이 아닙니까?”
기숙사에 붙어있는 연무장에 도착한 나는, 삼십 대 중반의 남자를 보고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뿜어져 나오는 기도에서는 특별할 게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자신의 기도를 갈무리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무사라는 이야기도 되었다.
“자넨 저 친구가 누군지 아나?”
“모릅니다.”
이게 진짜 문제였다.
얼굴도 그렇고 움직임도 그렇고, 난생처음 보는 이의 모습이었다.
움직임이 엇비슷한 사람을 골라보자면 무림맹주 정도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젊고 골격과 버릇 등이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손바닥에 박여있는 굳은살과 빈틈없는 기도만 봐도 제가 상대할 수 없는 존재란 건 알겠는데요.”
“머리 좋은 자네라면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겠지.”
제갈소명의 말에 복장이 터지는 심경으로 말했다.
“어떻게 머리를 쓰면 토끼가 범을 이길 수 있는 겁니까?”
내 말에 제갈소명은 별반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봐, 내 예상이 귀신같이 맞다니까.
“좋네. 비기기만 해도 복마신목은 주도록 하지.”
“방금 말씀드렸습니다만, 애당초 상대가 되는 이를 불러주십시오.”
“어서 시작하게나. 자꾸 구시렁대면 저 친구보고 혼쭐을 내주라 말할 테니.”
제갈소명은 그렇게 말한 뒤 손을 휘휘 저었다.
나는 결국 별수 없이 흑룡검을 뽑아 앞으로 나아간 뒤 포권을 쥐었다.
“한 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
사내는 대답 없이 고개만을 끄덕일 뿐이었다.
꽤나 과묵한 사람으로 보였다.
내가 소천검법의 기수식을 잡자, 그 또한 한 발을 뒤로 뺀 채 검을 아래로 추욱 내렸다.
사내의 기수식은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총군사의 명으로 이곳에 있으니 무림맹의 소속일 텐데, 그럼에도 내가 본 적 없는 무공이라는 것이 놀라웠다.
“오라.”
사내의 말과 함께 나는 잡념을 지우고 그와의 최단 거리를 좁혀 소천검법을 쏟아냈다.
쐐액.
칠성의 내공이 실린 소천검법은 극쾌(極快)의 묘리를 가지고 한 줄기 빛과 같이 쏘아져 나갔다.
챙.
사내는 아래로 추욱 내렸던 검을 들어 올리는 와중에 소천검법을 뿌리쳤다.
나는 흑룡검을 회수한 뒤, 다시금 소천검법을 쏘았다.
쐐액.
인중, 명치, 국부.
사람이 본능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세 곳을 동시에 공격하는 것처럼 쏟아냈지만, 사내는 그저 두 걸음 물러나며 한 호흡에 소천검법을 무력화시켰다.
“날카롭군.”
“그렇습니까? 그럼 계속 가겠습니다. 총군사께 받아야 할 게 있거든요.”
소천검법을 회수하는 힘을 이용해 몸을 한 바퀴 회전하여 대천검법을 흩뿌렸다.
흑룡검의 주위로 십여 개의 환검이 생겨나 사내의 팔방을 모조리 봉쇄했다.
채채채챙.
사내는 다시금 뒤로 다섯 걸음 물러나며 총 다섯 번의 검을 휘둘렀다.
환검 속에 숨겨진 진검의 숫자와 동일한 것이었다.
파르르륵.
금강무괴철로 만들어 단단하기 그지없는 흑룡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사내가 가지고 있는 검 또한 흑룡검에 비해 모자람이 없는 보검이라는 뜻.
“좋은 검을 가졌군.”
“과분하게도 말이죠. 헌데 대협께서도 그 못지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게…… 과분하게도 말이지.”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삼 초를 양보했으니, 이제 제대로 해도 되겠지?”
역시나 별 반응이 없기에 왜인가 했더니, 그사이 혼자 삼 초를 양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후배를 어여삐 여기신다면 십 초 정도는 접어주셔야지요.”
사내가 잠시 제갈소명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와의 비무를 두고 내기를 하다니, 참으로 용서할 수가 없군.”
“총군사께서 참으로 입이 가벼우시군요. 저래서 큰일을 어찌하실지-잇!”
채챙.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내의 모습이 퍽 하고 사라지더니, 어느새 코앞에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
나는 십 성의 소천검법을 끌어올려 필사적으로 방어를 함과 동시에, 사내의 검법의 내력을 파악하려 애썼다.
총군사가 불렀다면 분명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고수 중 하나일 것이 분명할 테니.
채채채채챙.
사내의 검은 무척이나 빠르다.
소천검법을 극한으로 휘둘렀을 때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히 쾌검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쾌검이라 하기엔 극단적으로 검로를 줄인 것도 아니다.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검법처럼 보이지만, 일초 일초가 급소를 노리고 들어와 벌써 몸 이곳저곳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쉭.
또다시 목을 베며 들어오는 검, 검으로 막아낸다 한들 다음 연계 동작이 이어질 것이 분명했기에, 태을팔만신보를 밟아 뒤로 물러났다.
환영을 남김과 동시에 다섯 걸음 물러나자, 그의 검에 의해 환영의 목과 오른팔이 댕강 잘려나갔다.
“신기한 보법이군.”
“오백 년 만에 되찾은 사문의 비전 보법입니다.”
“그런가?”
사내는 그다지 놀라 하지 않으며 다시금 움직였다.
느긋한 말투와 달리, 그의 몸은 이전보다 더욱 빨라진 상태였다.
그가 휘두르는 검을 향해 흑룡검을 휘두르자, 엄청난 반발력이 느껴졌다.
팡.
기력에 밀려, 나는 세 걸음이나 물러난 반면에 그는 제자리에 멀쩡히 선 채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당최 모르겠군.’
벌써 십여 합을 나누며 검법의 연원을 찾으려 애썼지만, 도저히 근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초식을 버리는 깨달음의 경지를 올랐다 하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마교인들 중에 그런 이들을 몇 명 보았지만, 그 정도의 수준에 올라간 이들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압도적인 무언가는커녕, 존재감도 흐릿했다.
‘존재감이 흐릿하다고?’
빠르지만 쾌검이 아니라는 것은 효율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섬전과도 같은 속도로 움직임에도 경쾌한 발걸음인 듯 소리가 작은 것은 평소 보법이 가볍다는 뜻이다.
쉬쉬쉭.
예의 날카로운 검이 이제는 일곱 개로 나뉘어 사혈을 찔러 들어온다.
여전히 연원을 알 수 없는 검법.
하지만, 짐작이나마 할 수 있는 단서들이 보였다.
‘대충 알겠군.’
내 손에선 쌍천검결이 흩뿌려진다.
내 앞으로 어지럽게 피어나는 수십 개의 검영은 곧장 사내의 검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사내는 단지 일곱 개에 불과한 것으로 대응함에도 두려움이 없었다.
채채채채채채챙-
순식간에 울려 퍼지는 일곱 번의 마찰음과 함께, 내가 다시금 다섯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내가 듣기론 흑염룡은 물러서는 것을 모른다고 하였는데.”
그가 다시금 검을 추욱 내리며 말했다.
“와전된 소문입니다. 저는 때때로 물러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물론, 상대에게 피해는 반드시 주고요.”
“응?”
팔랑.
사내가 의식하기도 전에 옷고름이 잘려나가며 사내의 무복이 쩌억 갈라졌다.
“…….”
사내는 제법 놀란 눈치였다. 그는 곧장 무릎을 굽히며 튀어 나가려는 듯 보였다.
여태껏 저런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진심으로 하겠다는 의지.
나는 얼른 손을 들어 보였다.
“잠시 한 가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비무가 끝난 후에 하면 안 되겠나?”
“비무와 관련된 일이기도 해서 말입니다.”
“……뭐지?”
그가 잠시 멈춰서자 내가 말했다.
“혹시 맹주전 소속이십니까?”
“…….”
미동도 없는 움직임과 변함없는 표정. 하지만 눈동자는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