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40화 (140/357)

#140. <만서고의 요괴를 만나는 흑염룡(4)>

“아, 아…….”

남궁선화의 발언에 말문이 막힌 성모란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

깜짝 발언을 내뱉은 남궁선화마저 입을 다물고 있자 내부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불편한 침묵 속에서 성모란의 시야에 남궁선화의 손이 들어왔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작고 여린 손.

마치 자신이 큰 죄를 지은 듯 두려워하는 모습에 성모란은 피식 웃음이 났다.

“……난 또 뭐라고. 알고 있어.”

“……에?”

“알고 있었다고.”

“저, 그, 그게.”

이제는 남궁선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터질 것 같았다.

성모란은 그런 남궁선화의 모습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내가 아무리 둔해도 그런 것도 모를 거 같아?”

“…….”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마령고원에서, 무림정시에서, 간간이 보이는 진소운을 향한 남궁선화의 시선은 다른 남자를 바라보는 것과 달랐으니까.

“그리고! 선화 네가 진 공자를 좋아한다고 하면 내가 너랑 거리를 둘 줄 알았어?”

“…….”

성모란은 손을 뻗어 남궁선화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넌 진 공자를 만나기 전부터, 나한테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었잖아.”

“……언니.”

“뭐, 그렇다고 양보하겠다 그런 이야기는 아니야. 나도 진 공자가 좋으니까.”

성모란은 남궁선화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그러니까, 어떤 결과가 나오든 우리 둘은 잘 지내자. 그리고 어차피 그 인간은 워낙에 바빠서 우릴 돌아볼 시간도 없잖아?”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일단은 우리가 얼른 한 명분의 무사가 돼서 그 인간이 좀 덜 바쁘게 만들자고.”

“맞아요. 얼른 더 강해져서 더 높이 올라가겠어요.”

성모란은 붉게 달아오른 남궁선화의 눈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너나 나나 어딜 가도 이런 처지가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니.”

“푸흣.”

“다 울었으면, 옷 사러 갈까? 지난번 연회 때처럼 이번에 놀러 갔을 때도 깜짝 놀라게 해줘야지.”

“네.”

성모란이 먼저 일어서고, 남궁선화가 짐을 챙겨 성모란을 따르려다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멈춰 섰다.

“언니, 근데 경쟁자가 더 생기면 어쩌죠?”

“……그건 그렇게 흘리고 다닌 그 남자 잘못이니, 그 남자를 단죄해야지.”

성모란이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응?”

갑자기 오싹한 기분에 주위를 둘러본 뒤 기감을 펼쳤다.

내가 기감을 펼치자 검마도 그걸 알아챘는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뭐 하냐?”

“아닙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잠시 살폈는데 아무것도 아니었네요.”

“쯔쯧. 얼마나 업을 쌓고 살았으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는 검마를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검마님만 하겠습니까?”

“뭬야?!”

그의 일화는 가히 상상을 불허한다.

자신의 검법을 완성했다며 소림사에 몰래 잠입하여 방장에게 비무 신청을 한 적도 있고, 무림맹의 공적이 되어 흑도인으로 전락한 주제에 흑사방에 쳐들어가 흑사방 전체와 생사 대적을 벌인 적도 있었다.

“나는 다 내 나름의 명분이 있기에 그리 행동한 거야!”

무슨 명분이 있어야 소림 방장의 처소를 기습할 수 있다는 거지?

“거기서 ‘내 나름의 명분’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십니까?”

“이 새끼가 근데, 자꾸 봐주니까!”

검마는 자신이 읽던 논문을 내게 던졌고, 나는 논문을 낚아챘다.

무작정 비무 신청을 하는 것도 벌써 열흘째.

그래도 제법 사이가 가까워졌는지, 내가 비무를 벌이다 기절해도 버리고 가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그의 움막에서 깨어나 그와 몇 가지 대화를 하다 집에 돌아가는 것이 요즘 일과.

물론 하루 두 번 덤벼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덤벼들면 어쩐 일인지 온종일 기절해 깨어날 수가 없었다.

아마도 하루 한 번 비무가 그가 정해놓은 선인 것이겠지.

나는 그 선을 아슬아슬 타는 중이었다.

“대체 이런 쓸데없는 논문은 왜 보고 있는 겁니까?”

“네놈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장보도나 비급을 찾으시는 겁니까? 여기엔 그런 건 없습니다.”

난 앞으로 나올 만서고의 모든 책까지 다 읽어봤기에 장담할 수 있었다. 만서고 자료 중 장보도나 비급과 관련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찾는 것은 그따위 것이 아니다.”

“오, 뭘 찾긴 찾으시는 겁니까?”

“…….”

검마는 대답 없이 논문만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천고의 비급을 읽는 듯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집중한 모습이다.

저 논문을 쓴 놈은 알까?

자신이 만든 쓰레기를 검마가 죽어라 읽고 있다는 걸?

“저에게 알려주시면, 저도 같이 찾아드리겠습니다. 대신 제 무공사부가 되어주십시오.”

한 번의 격돌만으로 만검의 실체를 알아냈다는 것은 그의 실력이 내 예상보다 훨씬 지고하다는 뜻.

태을진경은 경지가 올라갈수록 정형화되지 않는 형태로 발전한다.

훗날에는 스스로 무공을 창시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무공이기에, 독문무공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의 가르침이 필요했다.

지금 당장 눈앞의 이 성격 안 좋은 흑도인보다 훌륭한 무공사부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쯧, 말하지 않았더냐. 네겐 검강이 필요 없다고.”

“저도 알긴 하는데. 검마님 말씀대로라면 만검에 검강을 쓰면 더 대단한 무공이 되는 것 아닙니까.”

“…….”

“그리고 그간 검마님이 쌓아오신 경험도 나눠 가지고 싶고요.”

“내 제자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더냐?”

“전 태을문의 제자라 그건 불가합니다. 그러니 무공사부가 되어달라는 이야기죠.”

검마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얼마나 강해지고 싶은 것이냐?”

참으로 미묘한 질문이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항시 강해지고 싶다는 갈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얼마나 강해지고 싶은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정확한 무공 수위로 설명할 순 없지만.

그래도 당장, 떠오르는 대답은 있다.

“음…… 어떤 적을 앞에 두든, 내 사람을 지킬 수 있을 정도는 되게끔?”

“천하제일인이 그리 쉬운 줄 아느냐?”

“천하제일인이 되고 싶은 건 아닙니다.”

“그게 그 말이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다면 무(武)에 빠져있을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좋을 것이다.”

검마는 마치 그리운 누군가라도 떠올린 것처럼 깊은 소회에 빠진 얼굴이었다.

“그러다 정말 무서운 적이 나타나면 어찌합니까?”

“같이 도망치면 될 일이지, 닿지 못할 곳까지.”

회한이 담긴 듯한 목소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검마는 내가 그랬듯, 지나간 과거에 대해 깊이 후회하는 모습이었다.

“……그 소중한 사람을 찾기 위해, 만서고를 뒤지시는 겁니까?”

순식간에, 검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찌 안 것이냐?”

“그냥 던져본 겁니다. 하하하.”

검마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세 치 혀가 어지간한 흑도 놈들 전낭을 털 정도구나.”

“얘기 안 해 주실 겁니까?”

“…….”

검마는 고개를 돌린 채 쓸모없는 논문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사람을 찾고 있었단 말이지.’

나는 머릿속 장서고의 방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만서고의 쓸모없는 책들을 모아놓은 방.

이곳은 춘화나 야설과 같이 왜 만서고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책들을 잡다하게 모아놓은 곳이었다.

그중 한 권의 책을 꺼내었다.

한 여인이 일기처럼 써놓았던 책.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의 소속인지도 밝히지 않은 채, 그저 학관을 다니던 중 휴식기에 놀러 간 도시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일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솔직하게 이어 나간 책이었다.

전생에는 그저 애정 소설인가 하며 그냥 넘겼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 보니 뭔가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눈앞의 인물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 책을 읽다가 눈을 번쩍 떴다.

“딸이 있으셨습니까?”

“……!”

심히 놀란 듯, 검마의 눈이 커다래졌다.

“……네가 그걸 어떻게…….”

“…….”

가족은 물론이고 친분을 나눈 이조차 없다 알려진 검마.

몇몇 고수들과 교분을 나누긴 했지만, 실제 그는 바다 위의 외딴 섬이나 마찬가지인 인간이었다.

흑도인들과 친하게 지내기엔 성정이 너무 올곧았고, 백도인들과 교분을 나누기엔 악명이 높았기 때문.

나이가 들었어도 가족을 만들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업을 너무 많이 쌓아, 자신이 없는 동안 가족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웠기 때문이겠지.

“어찌 알았느냐 물었다!”

“……아, 사실 전 만서고의 책들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번 보면 잊어버리지 않는 것, 그게 제 저주이거든요.”

“…….”

“음…… 그분을 항주에서 만나신 게 맞습니까?”

검마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그곳에서 마음이 맞아 서로 정을 나누셨군요.”

“…….”

“허…… 그래도 놀랄 노 자군요. 검마님께 자제분이 있었다니.”

“그 책, 어디 있느냐?”

“아마 검마님께서 찾긴 힘드실 겁니다. 아무도 찾지 못하게 꼭꼭 숨겨져 있던 터라.”

“그것을 내게 주어라. 내 당장 확인해 봐야겠다.”

검마는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듯 버선발로 맨바닥을 딛고 있었다.

“아…… 그건 안 되겠습니다.”

“책을 가져다주면, 네가 원하는 대로 검강을 가르쳐 주마. 아니, 더 나아가 만검을 발전시킬 방법을 알려주마!”

그야말로 내가 검마에게 딱 바라던 모든 것.

하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되겠습니다.”

“……뭐라? 내게 더 원하는 게 있는 것이냐?”

지금 검마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그가 그간 딸을 얼마나 애타게 찾아 헤맸는지를 보여주는 단편.

하지만 서로 간의 이익이 맞아떨어진다 한들 책을 쓴 여인의 의중을 알 수 없는 이상, 쉬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제안이 아니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사람과 관련된 일 아닙니까. 더구나 정인께서 이리 책을 꼭꼭 숨겨놓으셨다면, 검마님이 찾길 원치 않으셨을 수도 있을 테고요. 제가 아무리 급하다 한들, 타인의 목숨과 관련된 정보를 함부로 넘길 순 없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책의 뒷부분엔, 자신이 소속된 곳을 떠나 어디에 기거할 것인지도 밝혀놓았다.

언제 써진 책인지 알 수 없지만, 사람을 찾고자 한다면 큰 단서가 될 수도 있는 정보.

이런 정보를 확인 없이 함부로 넘겨줄 수는 없었다.

“……내가 너에게 천고에 다시 없을 기연을 준다면 어떡하겠느냐?”

사람 목숨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놈들 때문에, 전생에 그 서럽고 비참한 삶을 살았다.

내겐 그들과 똑같은 인간이 되고 싶은 마음이 좁쌀만큼도 없었다.

“천하를 다 준다고 하여도 넘길 생각은 없습니다.”

검마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이윽고 자신의 더러워진 버선을 확인하곤 다시금 평상에 엉덩이를 대었다.

그러곤 복잡한 눈동자로 나를 직시했다.

“넌…… 참으로 내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나는 놈이구나.”

영문을 알 수 없는 검마의 말.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저자가 적혀 있느냐?”

“안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찾기 더 어려우실 겁니다.”

“그 책을 쓴 자는 아마도 섭소정일 것이다.”

“섭소정?”

섭씨 성이 그리 희귀한 것은 아니지만, 무림과 관련된 섭씨라 한다면 단연 백화궁을 꼽을 수 있을 터.

“그래, 네가 생각하는 백화궁의 섭소정이 맞다.”

“허…….”

백화궁이라 하면 아미와 같이 여인들이 주축인 무림세가다.

더구나 백팔봉 중에서도 명문으로 손꼽힐 만큼 대단한 곳인데.

“어째, 그런 명문가의 여식과 서자인 내가 정분을 나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것이냐?”

“……서자라는 말은 제가 안 했습니다. 그저 검마와 백화궁은 서로 안 어울리지 않습니까.”

“우리도 잘 알고 있다. 그랬기에 그때 당시 서로 헤어진 것이었지.”

섭소정은 백화궁 내에서 너무도 중요한 인물이었고, 검마는 자신의 가문과 백도 전체에 가진 원한이 너무도 컸다.

서로 간의 좁힐 수 없는 입장 차는, 뜨거운 사랑의 열기마저 차갑게 식혀버린 것이다.

“하지만 십 년 뒤, 갑작스레 연락을 받았다.”

당신과 자신 사이에 딸이 있노라고.

처음엔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왜 그때 바로 알리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인제 와서 딸의 존재를 알리는지.

검마는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찾고 싶다면 만서고에서 자신들의 흔적을 찾아보라 하더구나.”

“…….”

“별 웃기지도 않는 장난이라 생각했다. 애당초 딸이 있다는 것도 쉬이 믿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난 이곳에 와 있군.”

난 솔직히 표현하지 못했지만 속으로 놀람을 금치 못했다.

검마의 무한 비무행이 갑자기 멈춘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검마가 품에서 고이 접은 전서를 꺼내었다.

소중하게 잘 보관하고 있었지만,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걸레짝이나 다름없었다.

“이게 그 전서다.”

“대체 얼마나 된 겁니까?”

“오 년 정도 되었구나.”

“…….”

지난 오 년간 학관생들에게서 그 많은 수모를 겪으며 지내왔을 검마의 세월을 가늠하며 전서를 펼쳤다.

많이 흐릿해지긴 했지만, 필체를 구분할 정도는 되었다.

전서에는 검마의 말대로 자신을 찾길 바란다면 만서고로 가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나는 다시금 전서를 고이 접어 검마에게 건네주었다.

“어, 어떠냐…… 맞느냐?”

“그 책을 찾아서 어쩌고 싶으신 겁니까?”

“……응?”

검마는 뒤통수라도 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 서책엔 분명 자신이 어디에 머물 것인지 적혀 있었습니다. 그분들을 만난 후엔 뭘 어쩌고 싶으신 겁니까?”

“모르겠다.”

검마는 회한에 젖은 얼굴로 말했다.

“그저…… 보고 싶을 뿐이다.”

“누굴요?”

“……섭소정과 딸아이를…….”

무의 극의를 본 사람을 무림에선 초인이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검마는 분명 초인이 분명할진대. 그는 마치 며칠 전 그가 손에 쥐고 있던 가느다란 나뭇가지처럼 파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내 말 한마디에 자신의 인생 모든 것이 걸려있다는 듯.

“어, 어떠냐, 맞느냐?”

이것이 초인으로서의 검마가 아닌, 아버지로서의 검마인 것이겠지.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아…….”

그가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 무게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나는, 그저 그의 무거운 시간이 지나갈 수 있도록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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