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검은 가면을 쓴 자들(6)>
성모란에게 진소운은 불편한 존재다.
사문 간에 일을 제외하고 사람 대 사람의 측면에서 봐도 전혀 편하지 않은 존재였다.
타인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목숨을 걸어버리는 남자. 심지어 그 대상이 한때는 원수였을지라도, 그것이 마치 당연한 일이라는 듯 해버리는 남자.
그랬기에 성모란은 그의 행동에 늘 불만을 품으면서도 그를 밀어내거나 떠나지 못했다.
어쩌면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별명으로 그를 계속 부르는 것도, 조금은 그가 이기적으로 변하길 바랐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결국 이리되었네.’
애초에 그의 뜻에 동조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이 최악의 상황은 맞닥뜨리지 않았을 테니까.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듯 불쾌한 음성이 낮게 깔린다.
제법 포근해진 날씨임에도 온몸에서 수증기를 내뿜는다. 아마도 방금 전까지 마신 주기를 모두 발산하고 전투태세를 완비했다는 뜻.
비운신풍(飛雲新風) 종벽기.
최강의 세대라 불리던 용소아의 기수에서 용봉지회의 자리를 떡하니 차지한 풍운아.
용소아와 일명만 아니었다면 차세대를 이끌 신성으로 능히 꼽히고도 남았을 존재가 강렬한 살기를 팡팡 뿜어대고 있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종벽기의 검에 기가 어렸다.
성모란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살기에 질색하며 진소운에게 말했다.
-진 공자. 이제 어쩌죠?
종벽기가 당도했다는 것은 점창의 무사들도 거의 도착했다는 말.
더구나 자신들의 추악한 면을 숨기기 위해선 물불 가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제 모습을 드러냈으니 되려 좋아해야겠죠.
성모란은 입술을 질끈 물고 말한다.
-역시 흑도 신성이랑 함께 붙어 다니니 백도 문파랑 싸움이 잦아지네요.
성모란은 검을 고쳐 잡았다.
그에게 기대기만 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다. 그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 아니, 적어도 그를 믿어주는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마음의 방향이 그저 그럴 뿐이니까.
-놈들은 필사적일 겁니다.
-알아요. 그리고 철검문의 검은 그리 쉽게 꺾이지 않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최대한 빨리 승부를 보도록 하죠.
-설마 종벽기 선배와 맞붙을 생각이에요?
무림학관 전 기수의 용봉지회는 그야말로 별들의 전쟁이었다.
용소아와 일명이라는 존재만으로 평가의 기준이 극히 높아졌으며, 그로 인해 현 용봉지회는 그 어느 때보다 강자들로 가득 찼다.
종벽기는 그중에서도 차후 점창을 이끌 인물로 손꼽히는 고수.
재능의 급이 다르다 평가되는 후기지수였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저 시간이나 끌려 하는 거죠.
말과 달리 복면 안으로 보이는 진소운의 두 눈엔 은은하게 살기가 감돈다.
무림정시 때에도 저런 눈빛은 보지 못했는데. 대체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까.
-어쨌든 죽거나 다치지 말자고요. 남들 돕다가 다치면 무슨 창피예요.
성모란은 우려의 마음을 최대한 숨기며 괜히 핀잔을 줬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그녀다운 방법이었으니까.
-저도 드리고 싶은 말이군요. 남궁선화 소저에게 혼나고 싶지 않으시면 최대한 조심하십시오.
-웃겨 증말.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빌어먹을 것들이 감히…….”
비운신풍 종벽기의 검이 번개처럼 휘둘러지며 검기의 다발을 쏟아낸다.
사일검법 쾌검식.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검기의 다발이 진소운을 향해 쏘아져 나간다.
진소운은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계속 달려간다.
그러곤 검기에 몸을 내주는 순간.
“헛!”
진소운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부서져 사라지고 검기는 그저 허공을 향해 나아간다.
그 광경에 눈을 부릅뜬 종벽기가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돌린 순간. 눈앞에서 사라졌던 진소운이 낙뢰처럼 종벽기의 머리를 쪼개려 하고 있었다.
“미친…….”
채챙!
검과 검의 부딪침 속, 공간을 울리듯 거대한 충격음.
뒤로 다섯 걸음이나 물러난 종벽기는 웩하고 밤새 먹었던 음식물과 술들을 쏟아낸다.
그리고 진소운은 바로 그런 종벽기의 목을 찔러 들어간다.
“네놈…… 감히…….”
종벽기는 상대의 검이 예상보다 무겁다고 생각하며 화룡검법을 꺼내어 들었다.
진소운의 검과 종벽기의 검이 맞부딪치는 순간, 쇠들이 비틀리는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꾸어엉--
고막을 찔러 들어오는 소리에 유월문의 사람들은 귀를 막아보지만, 두 사람이 검을 나누는 동안 괴로운 소리는 연신 이어졌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종벽기가 이제 정신을 차리고 복면인을 몰아치고 있다는 정도.
유월문의 무사들이 희희낙락하는 것도 잠시.
화룡검법에 뒷걸음질 치던 복면인의 검이, 예의 그 환검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조심하십시오! 놈은 환검을 씁니다!”
유월문의 한 무사가 이미 수많은 동료를 죽인 검법에 대해 경고를 하자, 종벽기가 놀란 듯 입을 쩍 벌렸다.
“화, 환검?”
뭔가 안 좋은 기억이라도 떠오른 것일까?
그와 동시에 복면인에게서 터져 나오는 수십 개의 환검들.
“……너 설마-- 시발--!”
종벽기는 이내 이를 악물고 검기를 마구 흩뿌린다.
거대한 소용돌이와 함께 흩뿌려지는 점창의 절학 회풍무류검.
쿠콰카카카카.
수십 개의 환검과 만난 폭풍은 몸집을 거대하게 불려, 환검과 그 속에 숨겨진 진검 모두를 집어삼켰다.
휘이이잉.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자리는, 바닥에 마음대로 자라있던 잡풀마저 모두 제거된 황량한 상태.
하지만 복면인의 형체는 그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진소운…….”
종벽기가 짓씹듯 내뱉은 이름에 복면인의 신형이 나풀나풀 떨어지며 회풍무류검의 흔적 안에 내려앉는다.
“네놈이 미친 것이냐? 아니면 점창을 적으로 둘 만큼 태을문의 성세가 대단해진 것이냐?”
종벽기는 진소운임을 확신하듯 이야기하지만 복면인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종벽기가 답답한 듯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대답해라! 진소운! 인제 와서 네놈이 아니라 숨길 테냐!”
복면인은 그저 대답 없이 다시금 그 빌어먹을 보법을 밟을 뿐이었다.
종벽기는 이를 악물고 검을 들어 올렸다.
취기를 운공으로 모두 몰아냈지만, 몸에 녹은 숙취는 정신을 흐리게 만든다.
이런 상태에서라면 환(幻)과 진(眞)을 구분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정면 대결이다.’
이미 사일검법이 놈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용봉지회의 행사에서 깨달은바. 똑같은 걸음을 답보할 정도로 종벽기는 바보가 아니었다.
회풍무류검의 패도적인 장점만을 뽑아 만든 급풍쾌검을 쏘아낸다.
쐐애애애액-
거친 바람과 함께 쏘아진 검기들이 진소운을 집어삼키려는 찰나.
이전과 같이 환영을 남기고 사라진 진소운은 종벽기의 오른편에 나타났다.
“똑같은 수법을 언제까지 쓸 셈이냐!”
종벽기는 재차 검의 방향을 돌려 낙영비화검을 내려친다.
떨어지는 꽃들의 그림자처럼 공간마저 갈라버리는 검기가 진소운이 도망갈 곳까지 모두 막아선다.
무엇 하나 맞는 순간 손이든 발이든 내놓아야 하는 절초들.
검을 들어 올린 진소운은 느릿느릿하게 검을 빙그르르 돌린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환검을 피워내는 진소운.
승리를 확신하듯 득의양양한 종벽기의 눈이 차츰 커지기 시작했다.
“무, 무슨!”
허공을 수놓은 수많은 환검들에 검기가 하나씩 어리기 시작했다.
분명 환검에는 검기를 씌울 수 없음이 분명한데.
검기를 두른 환검들이 낙영비화검의 시작지점을 잘라내며 검기들을 막아낸다.
쾅, 쾅, 쾅, 쾅, 쾅, 쾅.
충격음이 터져나갈 때마다 꽃들이 사라져 간다.
낙영비화검을 모두 뚫고 종벽기에게 다가서는 진소운.
종벽기는 재빨리 사일검법의 후예만궁 초식을 내찌른다.
쐐액.
콰쾅.
번개처럼 날아들었던 종벽기가 화살처럼 떨어져 나간다.
퍽.
커흑.
입가에 붉은 피를 주르륵 흘린 종벽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차 전투를 이어가려는 찰나.
스걱.
종벽기의 뒤에서 나타난 진소운이 종벽기의 발뒤꿈치 힘줄을 잘라버린다.
“억! 으헉!”
끈이 떨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주저앉은 종벽기.
그 광경에 놀람을 금치 못하는 유월문의 무사들.
“종 공자! 종 공자!”
당장 점창의 신성인 종벽기가 이곳에서 죽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단지 자신들의 추행이 드러나는 정도로 끝난다면, 최소 자신들은 욕을 들어먹을지라도 점창의 비호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벽기가 죽는 날엔 그 점창이 자신들을 어찌할지 예상할 수 없었다.
“종 공자를 보호해라! 어서!”
유월문의 무사들이 초개같이 목숨을 내던지며 진소운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금·은·동 형제가 그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왜 두목 싸움에 끼어들고 난리야!”
금표가 앞서 나가며 유월문의 무사들을 막아선다.
은호와 동룡도 만검을 펼쳐내며 철저하게 그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유월문의 무사들은 차마 금·은·동 형제를 뚫고 안으로 파고들지 못했다.
진소운은 느긋하게 비명을 지르는 종벽기에게 다가갔다.
“이제야 사문을 모욕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군.”
“너……. 이러고도…….”
처절하게 이를 가는 종벽기를 보던 진소운은 검을 바꿔 쥐었다.
그러곤 몸이 뚫릴 만큼 강하게 단전을 내리쳤다.
퍽.
인간의 몸에서 나는 소리라 믿을 수 없는 기이한 뭔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종벽기가 기이한 비명을 내질렀다.
“꾸어어억--!”
살점이 가득 섞인 검은 핏물을 한가득 뿜어내는 종벽기.
그는 자신이 내뱉은 것을 확인하기도 전에 눈을 뒤집어 까며 뒤로 넘어갔다.
“미친…….”
“……지금 비운신풍이 진 거야?”
“뭣들 해! 당장 저 새끼 죽여!”
그때 굉음과 함께 커다란 대문이 나뭇가지처럼 날아가 버렸다.
콰쾅!!
“…….”
대문을 박살 내고 들어온 이들은 하나같이 흉흉한 기세의 점창파 무사들.
그리고 그 뒤로 유월문의 무사들이 우르르 쫓듯 몰려왔다.
백에 달하는 점창파의 고수들 중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종벽기를 한번 보곤 고개를 들어 진소운을 보았다.
“……네놈은 누구냐?”
짧은 단말마에 무월대원 하나가 손가락으로 진소운을 가리켰다.
“조, 종 공자가…… 지, 진소운이라 불렀습니다.”
“진소운?”
중년 사내는 서늘한 눈빛으로 진소운을 응시했다.
“태을문의 진소운이더냐?”
“…….”
“우리가 점창파이고, 저 아이가 점창의 종벽기인 것은 알고 있었겠지?”
“……알고 있소.”
“하, 알고 있다? 그렇담 어째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해명할 수 있겠느냐?”
“종벽기는 악양에서 벌어지는 납치 사건과 관련되어 있었소. 혹시 점창도 알고 있었소?”
“…….”
중년 남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하지만 금세 분노한 얼굴로 다시 바뀌었다.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 납치라니!”
“후후…… 그렇게 오리발 내밀 줄 알았지. 그래서 손을 쓴 것이오. 최소한 그대들도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미친놈이구나……. 네놈이 무슨 생각으로 이따위 짓을 벌였는지는 본산에서 알아보면 되겠지. 더불어 네놈의 문파는 더 이상 강호에 존재치 않게 될 터이니 다른 이에게 기댈 생각 따윈 하지 말거라.”
중년 남성이 살기를 뿜어내며 돌아서자, 점창의 무사들이 분광오귀검진을 펼치기 시작했다.
한번 들어간 자는 귀신이 되기 전까지 나올 수 없다는 희대의 살검진.
이 과정을 숨죽여 지켜보던 성모란은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이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선택도 마다하지 않는, 저 바보같이 올곧은 남자를 그저 바라볼 뿐.
그때 귓가로 진소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 소저, 절대 검진 밖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네?
성모란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진소운이 외쳤다.
“금·은·동!”
“““넷!”””
금·은·동 형제가 일제히 성모란 주위에 자리했다.
성모란의 눈에도 익은 백호필살검진.
“은호, 네가 맡아라. 난 사련의 자리를 채우겠다.”
“알겠습니다.”
“처음부터 만환으로 가라. 시간을 끌면 우리가 불리하니.”
“네!”
성모란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사이 가동되기 시작한 분광오귀검진.
오십 자루의 검이 동시에 뽑혀 태을문 일행의 팔방을 찌른다.
태을문 일행의 주위로 네 자루의 검이 나타나, 마치 춤을 추듯 스스로 공간을 휘젓기 시작한다.
촤르르르를.
쾅.
그러자 네 자루의 검에서 발현된 수십 자루의 환검들이 분광오귀검진을 시전하는 무사들의 눈을 현혹한다.
“무시해라! 환검일 뿐이다.”
중년 남성의 외침에 용기백배한 점창파의 인원이 환검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검을 찔러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촤르르르르륵.
채채채채채챙.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야 할 환검과의 격돌 속에서 마찰음 소리가 울리고 곳곳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크흑,
아악-
억!
분광오귀검진의 다섯 검수가 상처를 입고 일순간 검진이 흐트러졌다.
뒤에서 대기하던 다른 점창파의 검수가 그 공간을 채우려 했지만, 그 짧은 찰나를 진소운이 파고들었다.
“어딜!”
진소운이 분광오귀검진의 틈을 비집고 들어간 순간, 눈에 불을 켠 중년 사내의 손에서 냉염장이 마구 폭사 된다.
퍼퍼퍼퍼퍼펑.
바닥이 뒤집히고, 잡초가 흩날린다.
냉염장을 피해 다시금 백호필살검진으로 돌아간 진소운.
분광오귀검진은 더 이상 진소운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일순간 넓게 퍼졌다가 태을문의 인원 모두를 감싸 안는다.
백호필살검진을 완벽하게 둘러싼 분광오귀검진.
애당초 한 명의 절대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검진.
천하백대 고수라 한들 온전히 벗어날 방법 따윈 없었다.
“성환!”
은호의 외침과 동시에 네 사람의 손에서 뻗어 나온 쌍천검결이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크윽!”
“커흑!”
분광오귀검진을 이루는 무사들이 하나둘 쓰러져 가도, 분광오귀검진 자체는 무너지지 않는다.
“빈자리를 채워라!”
중년 사내의 말에 대기하고 있던 점창의 무사들이 쏜살같이 쏘아져 나가 빈자리를 채운다.
끝까지 해보자는 듯 계속해서 몰아친다.
“한 가닥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 같다만, 과연 점창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보자꾸나.”
넓게 퍼졌던 분광오귀검진이 점점 조여들기 시작한다.
피해는 계속해서 점창파에서만 났지만, 그 피해만큼 분광오귀검진은 백호필살검진을 옥죄었다.
끝내 태을문 사람들의 옷자락이 하나하나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검진을 이탈하지 않았다.
성모란은 목숨이 경각에 놓인 위급한 상황이었음에도 눈을 부릅떴다.
그들을, 그를 믿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멈춰라!!!”
장원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이백에 달하는 무사들이 장원의 담벼락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