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검은 가면을 쓴 자들(7)>
분광오귀검진은 진소운의 목덜미에서 한 치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고, 점창의 중년 사내는 이를 갈 듯 담벼락 위에 선 이들 중 대장을 찾았다.
“누구인가? 누가 감히 점창의 일을 방해한단 말인가!”
중년 사내의 일갈에 무사들이 한 점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분광일성 선배님.”
담벼락에서 살짝 내려앉으며 포권을 쥐는 여인의 모습에 분광일성이 이를 갈았다.
“남궁세가가 언제부터 점창의 위에 있었던 것이지?”
남궁세가.
그것도 창궁단의 표식이 박힌 무복의 사내들이 삼엄한 눈빛으로 장원 내부를 살피고 있었다.
“남궁세가는 점창의 위에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럼 지금의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텐가?”
“…….”
분광일성이 검으로 진소운을 가리켰다.
“진소운이 복면을 쓴 채 유월문의 장원에서 점창의 제자에게 복구할 수 없는 피해를 입혔다. 이를 두둔하기 위해 나선 것인가?”
진소운을 바라보던 남궁선화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전 단지 악양에서 일어나는 실종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을 뿐입니다.”
“…….”
남궁선화의 말에 분광일성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유월문의 무사들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
유월문의 무사 하나가 작게 고개를 흔들었고 이에 분광일성은 표정을 다잡으며 남궁선화를 쏘아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악양에서 일어나는 실종 사건이라니?”
“선배께서도 악양에 계셨다면 마교를 칭하며 살인과 납치를 저지르는 자들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겁니다. 저흰 그자들을 조사하기 위해 나선 겁니다.”
“그게 ……유월문이라는 건가?”
“현재로선 말입니다.”
“유월문이 점창의 속가무문이라는 것은 알고 하는 소리겠지?”
속가무문을 욕보인다는 말은 곧 점창을 욕보인다는 뜻.
분광일성은 지금 남궁선화에게 점창을 감당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
“악행을 벌이고, 마교를 칭하여 자신의 치부를 숨겼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점창의 속가무문인지 아닌지가 아닙니다.”
“대답하라! 유월문이 점창의 속가무문이라는 것을 알고 이리 행동하는가!”
추상같은 분광일성의 목소리에 남궁선화가 잠시 그를 노려보았다.
“…….”
지금 밀리면 거대한 역풍이 불 것이다.
절대 물러날 수는 없었다.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좋다. 이 일은 무림맹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리지. 당금의 사태는 물론이고, 점창의 제자를 불구로 만든 것에 대한 보상도 반드시 받아낼 것이다.”
분광일성의 말에 남궁선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이 일을 무림맹으로 가져갔다간 증거가 인멸될 것은 명약관화한 상황.
더구나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지만, 종벽기가 크게 다친 일까지 들먹이면 제대로 된 조사는 물 건너간다고 봐야 했다.
그때, 분광오귀검진에 둘러싸인 진소운이 복면을 벗으며 말했다.
“굳이 무림맹까지 갈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유가 넘치는 소운의 목소리에 분광일성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넌 닥치고 있어라. 이 일과 별개로 종 사제가 본 피해는 네놈 사문의 피로 돌려받을 것이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점창은 자신의 제자가 마교를 칭한 사건에 대해서 책임부터 져야 할 테니.”
“이놈이!”
분광일성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살기를 불태웠다.
“그러지 않는 게 좋으실 거예요.”
나직한 남궁선화의 목소리.
“뭐?”
“살인멸구를 하실 생각이라면 그만두시라는 말이에요. 저희 남궁세가는 그리 약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자인 줄로만 알았던 남궁선화의 얼굴에 서늘한 냉기가 어린다.
그 모습에 잠시 멈칫했던 분광일성은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문다.
“모두 저 녀석을…….”
하지만 분광일성은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어디선가 들려온 느긋한 음성이 그의 말을 끊어버린 것.
“자자, 그만합시다. 같은 무림맹의 식구끼리 이게 뭐 하는 겁니까?”
대문을 넘어오는 다섯 명의 사내들.
무림맹의 맹복을 입은 그 얼굴은 분광일성도 잘 알고 있는 이였다.
“악양 지부장…….”
“오랜만이오, 송 형. 악양에선 조용히 쉬었다 갈 거라고 하더니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나 보구려.”
“그대가 여긴 어찌…….”
“당연히 마교를 사칭하는 이들이 있다 하여 조사를 하러 나온 것 아니겠소.”
분광일성이 남궁선화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사태가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마령고원 사태 이후, 무당파 소속이었던 악양 지부장이 사퇴하고 새로 그 자리에 앉은 것은 사천당가의 인물.
무게추가 기운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오대세가 쪽일 것이 분명했다.
“지부장, 이런 중대한 사태에 대해서 본산의 허락도 맡지 않고 아무렇게나 조사에 응할 순 없소이다.”
“거야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조사 정도는 협조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건 혈맹인 유월문과 점창에 대한 모독이요.”
“아 참, 이걸 어쩐다…….”
악양 지부장이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때에.
“그거라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니, 분광오귀검진 속에 들어가 있던 진소운이었다.
“응? 자네는?”
“무림학관 대표 진소운이라 합니다.”
“아아, 자네가 진소운이었나? 내 자네 이야기는 서희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
진소운은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제 이야기 말입니까?”
“그래, 그 말 없던 아이가 조잘조잘거리기에 언제고 자네를 한번 봐야겠다 싶었는데. 이런 곳에서 만나는군……. 어쨌든 자네가 도와줄 수 있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일단…… 성모란 소저를 풀어주시면 이곳을 조사하지 않아도 사건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
처음엔 물러서지 않으려 하던 점창의 무사들은 이내 무림맹원들의 압박에 결국 하나둘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풀려나자마자 담벼락을 넘어 숲속으로 들어갔던 성모란이, 파리한 안색의 여자를 등에 업고 나타났다.
“이분은 장설연이라고 해요. 이곳 장원 지하실에 갇혀있었던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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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한참이나 감돌았다.
진소운이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종벽기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전, 장 소저를 찾기 위해 이곳에 왔고, 이곳에서 종벽기를 만나 그에게 사정을 설명했지만, 그는 마치 이 일을 꾸민 장본인임을 들키기라도 한 듯 저를 공격하기에 저 또한 대응한 것뿐입니다.”
소운의 주장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유월문의 무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 마라! 네놈은 아무 말 없이 종 공자를 공격하지 않았더냐!”
진소운이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저쪽 창고의 지하실을 살펴보시면 될 겁니다. 장 소저를 찾은 곳이 저곳이었으니까요.”
“아……!”
그제야 제 실수를 파악한 유월문의 무사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이쯤 되자 점창파의 무사들도, 분광일성도 행사를 방해할 수 없었다.
창궁단과 점창파가 대치하고 있는 사이, 무림맹원들이 재빨리 창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엇?”
“여기…….”
“사람…… 사람들이 갇혀있습니다!”
창고 지하실을 살피던 무림맹원들의 외침에 지부장이 분광일성을 바라보았다.
“…….”
점창 또한 관련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분광일성이 내공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퍼퍼펑.
그의 무복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고, 살기가 무사들의 긴장을 끌어냈다.
“모두 준비하세요!”
남궁선화의 외침에 창궁단의 무사들도 일제히 검을 들고 전투를 준비했다.
소운을 비롯한 태을문의 아이들도 다시금 백호필살검진을 펼치며 전투를 준비하는 순간.
분광일성이 화살처럼 유월문의 무사들에게 날아갔다.
“감히 점창의 이름으로 이따위 짓을 벌였다고!”
당황한 것은 유월문의 무사들…….
“대, 대협! 애당초 이 일은 점창에서…….”
“닥쳐라! 뭣들 하느냐! 감히 점창의 품 안에서 점창을 더럽힌 이들이다!”
분광일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점창의 무사들이 유월문의 무사들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크악!”
“사, 살려……!”
“살려줘!”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말릴 새도 없었다.
너무나 폭력적이고 과감한 손짓에 말릴 수도, 말릴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일방적이고 압도적인 살해의 현장.
죽어가는 유월문의 무사들이 하나같이 원망스런 눈길로 점창의 무사를 바라보았지만, 점창의 무사들은 그들을 벌레 보듯 바라보았다.
“쯧쯧쯧.”
어느새 진소운의 곁으로 다가온 악양 지부장이 말했다.
“참으로 잔인한 정의란 말이지.”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진소운은 어쩐지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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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원은 참으로 강한 사람이었다.
전생에 무림맹에 왔을 때.
그가 만들어 낸 십오(十五)신기에 눈이 돌아간 강호의 고수들이 그를 통해 자신만의 신기를 만들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목에 칼을 대는 이는 물론이고,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이까지 있었음에도 장도원은 굴하지 않았다.
내공 한 줌 없는 인간에게 이 정도의 강함이란 것이 있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을 모두가 가졌던 때였다.
“흑…… 흐흑…….”
지금 그런 장도원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 또한 그 존재를 알지 못했던, 자신의 손녀와 부둥켜안은 채 한참이나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자리를 비켜주죠.”
그간 서로를 잃을까 느꼈던 불안함을 풀고, 재회의 기쁨을 만끽할 시간이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잡혀있던 인질들은 짧은 조사를 받은 후에 귀가 조치 되었다.
불안해하는 그들을 위해 무림맹이 나서려 했지만, 그 전에 이미 점창이 나서서 극진하게 인질들을 귀가시켜 주었다.
“점창은 왜 굳이 나선 거지요? 결국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잖아요.”
“도둑놈이 제 발 저린 게 아니고 뭐겠습니까?”
꼬리 자르기로 유월문에 덤터기를 씌웠지만, 무림맹을 중심으로 모두가 점창의 썩은 본모습을 알게 되었다. 그 위상이 갈수록 알음알음 땅에 처박힐 것은 자명한 일.
점창이 돌아가는 길에, 나는 분광일성과 독대를 할 기회를 가졌다.
분광일성은 나를 보며 뿌드득 이를 갈았다.
“진소운, 오늘 일을 잊지 않겠다.”
“당연히 잊지 않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뭐?”
“점창 내에서 점창의 이름을 더럽힌 이를 잡아주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상을 내려야 할 상황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
분광일성의 두 눈이 격하게 떨렸다.
“설마 천하의 점창이 혈맹의 도움을 받고 그냥 넘어가는 겁니까? 믿을 수가 없군요. 거참, 쯧…….”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넘어 이제는 입술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는 분광일성.
그때 악양지부장이 지나가다 우리 두 사람을 보곤 멈춰 섰다.
“두 사람 아직도 싸우나?”
“아니, 분광일성 선배님이 제게 도움을 받고도 그냥 입을 싹 닦으려 하시기에, 좀 따졌습니다. 천하의 점창이 이리 쪼잔한 줄은 몰랐네요.”
“…….”
악양 지부장도 분광일성과 별다르지 않은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뭐, 많이 안 바랍니다. 이번 일에 기력을 많이 썼으니 영약이나 하나 보내주십시오. 괜히 독살을 시도한다고 독 같은 건 타지 마시고.”
악양 지부장의 시선이 내게서 분광일성에게로 향한다.
“보내줄 건가?”
“……점창은.”
분광일성이 들끓는 분노를 꾹꾹 눌러 삼키며 말했다.
“……은혜와 원한을 잊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며 훽하니 돌아서는 분광일성.
나는 그의 뒷모습에 조소를 남기고 돌아서려는 찰나.
“자네는 나 좀 보지.”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악양 지부장은 대답도 하지 않고 먼저 움직였다.
아니, 사람이 물으면 대답을 좀 할 수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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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막은 이러하다.
오랜 기간 무당의 인원이 지부장을 맡아왔던 악양.
그렇기에 악양은 점창의 속가문파가 있었음에도 무당의 입김이 강했다.
하지만 마령고원의 사태로 무당지부장이 힘을 잃고 사라지자, 점창이 다시금 악양을 차지하려고 한 것.
헌데 웬걸, 무당이 있는 동안 이빨 꽉 깨물고 숨죽이고 살았던 흑부궁을 비롯한 흑도무림이 활개를 치자, 단지 두 개의 문파만으로 악양을 차지하기 어려웠던 점창은 무려 ‘마교’를 언급하여 악양을 다시금 정리하려고 했다.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왜 그간 아무것도 안 하신 겁니까?”
내막을 들려주는 무림맹 지부장의 이야기에 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악양 지부장은 뭔 소리를 하냐는 듯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나라고 하고 싶지 않아서 하지 않았겠나?”
“그리고 왜 추가 조사를 안 하십니까?”
“조사? 그걸 우리가 하겠나?”
“…….”
“벌써 점창에서 움직였네. 이번 사건에 대한 흑막이 유월문이라 밝혔고, 유월문을 급습했지.”
사건이 있은 지 하루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빠르군요.”
“뭐, 언제든 도망갈 준비를 한 것 아니겠는가?”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대저 강호의 정의란 그렇게 유지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말한 지부장은 집무실 한쪽으로 걸어갔다.
지부장의 집무실에는 기이한 기구들이 잔뜩 있었다. 지부장이 기구 한쪽에 놓인 기름병에 불을 붙이자, 쇠와 나무로 만들어진 기구들이 태엽 감기는 소리와 함께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가동되었다.
기름병에서 밝힌 불은 그 위에 놓인 잔을 데우고, 잔에서 피어오른 수증기가 기계를 움직이는 원리인 듯했다.
종국엔 기계의 끝에서 쪼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향긋한 차가 흘러내렸다.
차 두 잔을 내미는 지부장.
조용히 차향을 맡고 한 모금 들이켜자 향긋한 차향이 입안에 감돌았다.
“맛있군요…… 특별한 차입니까?”
“그냥 흔한 용정차네. 차는 차의 질보단 어떻게 우리느냐가 더 중요한 법이거든.”
차를 반쯤 마시곤 차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유심히 보던 지부장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정의란 것도 비슷하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탁한 맛을 내느냐 맑은 맛을 내느냐가 되고 말이야.”
“…….”
“별로 동의하지 않는 표정이군.”
“탁한 정의는 이미 정의라 할 수 없지요.”
“그런가?”
지부장은 딱히 논쟁을 할 의도는 아니었는지 또다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무튼 이번 일은 수고했네. 덕분에 내 임기도 조금 더 늘겠어. 한동안 골치였는데 말이야.”
나는 조금 답답한 마음에 다시금 물었다.
“직접 해결할 생각은 없으셨습니까?”
마교라니, 마교를 사칭하다니.
이 정도면 간이 큰 게 아니라 그냥 두 개 달려있는 거다.
그리고 이 태연한 지부장은 그걸 알면서도 먼 산 보듯 방관하고 있었고.
“있었지.”
“그런데요?”
“금방 막혔거든. 점창에게.”
“…….”
“무림맹 지부장이란 자리가 이래서 묘해. 어떨 땐 무소불위의 권력이면서도 동시에 어떨 땐 허수아비에 불과하거든.”
“…….”
“세가의 힘을 끌어들인다면 맞붙어 볼 순 있었겠지만, 해결할 자신은 없었거든. 자네 같은 이가 아니었다면 애당초 해결될 사안도 아니었지.”
머리를 벅벅 긁은 그가 말했다.
“아무튼 자네 덕분에 한 번에 깔끔하게 해결했으니 한동안 악양도 조금은 조용해지겠지.”
“그래도 좀 나서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왜?”
“점창이 이 일로 저를 노리지 않겠습니까.”
내 불만 어린 음성에 지부장이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내 참, 스스로 탈출구를 마련해 놓고는 나더러 굳이 탈출구를 만들어 달라는 건 무슨 말인가?”
“…….”
“종벽기를 반 죽여놓은 건 개인적인 원한도 한몫한 것이었겠지? 안 그래도 점창이 이번 일의 원흉을 종벽기와 유월문의 밀월로 꾸며냈네.”
“…….”
“더구나 분광일성 그 친구를 통해 점창에게 보상까지 받는 마당에, 점창이 대체 자네를 어찌할 수 있다는 거지?”
흠, 거참 다 들켜버렸네.
이렇게 쉽게 들킬 작전이 아닌데.
나는 악양 지부장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이 정도로 머리 돌아가는 점이나 눈치를 보아하니 보통 사람은 분명 아니건만, 기억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하하, 서희 말대로 뻔뻔하기 그지없는 면도 있군.”
“근데 아까부터 뭔가 저랑 인연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전 쫌 불쾌합니다만.”
“불쾌해? 불쾌하면 안 되지 암. 불쾌하면 안 되고말고. 내가 죽을죄를 지었네. 아주 내가 죽을죄를 지었어.”
“…….”
한바탕 난리를 피웠던 그가 갑자기 우뚝 멈춰서더니 입을 벌리며 활짝 웃는다.
이제는 조금 무서운 기분까지 들었다.
“우리가 인연이 없긴 왜 없나?”
“네?”
“자네는 내가 만든 금용암기를 마음대로 쓰지 않았나. 그 정도 인연이면 대단한 인연 아닌가?”
미친.
그 이야기가 왜 갑자기 튀어나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