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검은 가면을 쓴 자들(9)>
일이 일단락되고, 우리는 약속대로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금·은·동 삼형제는 첫날 맞춰둔 옷을 차려입었다.
난생처음 고급스런 복장을 입은 아이들이 어색함 때문인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억지로 가슴을 편 채로 이동하는 바람에 사람들의 웃음을 샀다.
남궁선화와 성모란, 홍사련은 지난날 봤던 것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거리를 거닐었다.
화려한 악양의 밤거리보다 더 화려한 그녀들의 복장들은 뭇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화화공자 몇몇이 세 사람에게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기도 했다.
“괜찮으시다면 오늘 밤 제가 그대들을 모셔도 되겠습니까?”
“전 남가장의 장남입니다. 수상한 자는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자,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함께 가시지요.”
다들 한가락씩 하는 그들은, 자신의 신분이나 무공을 앞세워 그녀들을 억지로 데려가려 했던 것.
하지만 남궁선화와 성모란이 자신의 출신을 밝히거나 직접 손을 쓰기도 전에 금·은·동 형제가 그들을 막아섰다.
“꼬맹이들은 비켜 있어라!”
“어디 근본도 없는 것들이 감히.”
“내가 누군지 모르더냐!”
금·은·동 세 형제가 나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냐는 눈치.
나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언제 내가 상대를 가려가며 행동하던?”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세 사람이 동시에 쏘아낸 만화무적권에 상대들은 적당히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삼 장이나 날아가 가판대에 처박혔고.
한번 날파리를 쫓고 나자 더 이상 꼬여 드는 화화공자들은 없었다.
“악양이 평소와 달리 소란스럽네요.”
성모란의 말대로 악양의 분위기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달이 높이 떠올랐음에도 무복을 입은 무사들이 단체로 움직이고 있었고, 유흥가와 멀리 떨어진 곳에선 불이 나거나 비명이 들려오기도 했다.
“산중 호랑이가 사라졌으니, 주인의 자리를 놓고 싸울 일만 남은 거겠지요.”
유월문이 그간 악양에서 벌어졌던 납치 사건의 원흉임이 밝혀지면서, 점창의 위세가 삽시간에 위축되었다.
점창은 이번 일을 틈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이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이야기했지만, 사실상 악양 지배에 대한 명분을 잃은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이들은 없었다.
이어 흑부궁과 묵혈방을 중심으로 흑도 무림의 방파들이 들고 일어났고. 흑도 무림 방파들의 제 일 공격 대상은 당연하게도 유월문이었다.
그간 점창의 비호를 받아 어마어마한 재물을 쌓기도 했고, 사실상 점창의 악양 지부 역할을 했던 만큼 흑도 방파들로선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먹잇감이었다.
그러나 점창은 자신들의 숟가락을 남에게 빼앗길 이들이 아니었다.
사건이 벌어진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점창이 유월문을 습격했고, 유월문은 역사 속에 자취를 감췄다.
유월문이라는 맛나는 먹잇감을 놓친 흑도 방파들은 이어 다른 먹잇감을 찾기 시작했다.
무당도 쫓겨나고, 점창마저 물러났다면 악양은 사실상 무주공산인 상태.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은 흑도 방파는 없었다.
“그래도 아쉽네요. 유월문이 모아둔 재산도 그렇지만, 악양이라는 거대한 상권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인데.”
“철검문이 이번에 악양에 진출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그렇다.
삼킬 수 없는 먹이는 함부로 입에 넣는 게 아니다.
우린 주변에서 소란이 일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선착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들을 만났다.
“엥?”
“어?”
상대도 이곳에서 만난 것이 퍽이나 난감하다는 듯 당황스런 표정으로 이편을 바라봤다.
난 먼저 입을 열었다.
“스님이 계시기엔 어울리는 곳은 아니군요.”
“…….”
소림사의 일각.
무림맹의 정도회원들과 함께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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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내가 가장 즐거워했던 순간을 꼽자면, 상대방이 치부를 들켜 당황하는 순간이다.
이런 순간이 오면, 내가 얼마나 이죽거리고 비아냥거리든 상대방은 주먹을 불끈 쥔 채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 순간 주먹을 날리면 자신의 옹졸함을 들키는 것이고, 무시를 하면 치부를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힘이 없던 내가 상대를 놀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리고 이 즐거움은 내가 강해진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호오, 요즘 스님들은 유흥가에서도 설법을 전파합니까?”
“…….”
“하긴 부처님의 은혜가 뻗지 않는 곳이 없으니, 이런 곳이라고 오지 못 할 일은 아니겠지요. 제가 실례했습니다.”
“……그저 정기적인 회의차 방문한 것입니다.”
“그래도 스님이 포함되어 있으니 배려를 해줄 법도 한데……. 정도회는 소림사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아닙니까?”
이쯤 이야기하자 다른 정도회원들의 얼굴이 하나둘 굳기 시작했다.
나는 이 순간이 참으로 흥겹다.
손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저 표정을 보면, 늘 새롭고 짜릿하다.
“정도회가 이런 곳에서 무림의 미래를 걱정하는 회의를 하는 걸 보면, 정도회는 참으로 흥겨운 모임인 것 같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진작 정도회에 가입했을 텐데 말입니다.”
“…….”
일각의 얼굴이 시꺼멓게 변한다. 이러다 정말 지옥에 가버릴지도.
“스님, 제가 한 가지 정말 궁금한 것이 있는데 여쭤보겠습니다.”
내 일방적인 질문에 정도회원들의 시선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회의를 홍루 가서 열 땐 어떻게 참으십니까?”
“……이놈이 듣자 듣자 하니까.”
일각 옆에 선 정도회원 하나가 발끈하며 앞으로 나선다.
일각은 딱딱한 얼굴로 그를 말리며 애써 말을 돌렸다.
“학관 대표께선 이곳에 어떤 일이십니까?”
“저희는 정도회와 달리 휴가를 즐기러 왔습니다.”
“……그렇군요.”
슬쩍 고개를 돌리려는 일각.
이렇게 빠져나갈 생각이겠지만, 난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아까 여쭤본 질문에 대답을 안 해주시는군요. 홍루 가서 회의를 하시면 수련의 일환으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
정도회원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살기를 끌어올렸다.
우리 일행도 그에 발맞춰 투기를 일으켰고, 선착장 인근에는 금방이라도 전투가 벌어질 듯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참으로 사악한 입담을 가진 아이로구나.”
중후한 음성과 함께 정도회원들이 살기를 거두고 일제히 물러섰다.
맨 앞에서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일각도 옆으로 물러서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흑도 무림에서 키운 신성이라더니 그 소문이 사실이었더냐?”
일각과 같은 복장의 민머리 중년 사내.
현생에선 처음 보는 이였지만, 전생에서 봤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스님께선 그런 삿된 소문에 흔들리십니까?”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
금불 혜성.
현 방장의 사제이자, 금강대를 이끄는 수장.
무림맹 내에서도 영향력이 대단하여 정도회를 이끄는 주요 인원 중 하나였다.
“혜성 대사를 모른다면 무림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입담만큼이나 눈썰미도 좋은 아해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헌데 아직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구나. 흑도 무림과 관련이 깊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이더냐?”
“태을문은 지난 오백 년간 무림맹의 혈맹으로 단 한 번도 백팔봉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의심이 가는 것이지. 만약 간자를 키운다면 태을문만큼 좋은 곳이 어디 있더냐? 더구나 최근 태을문의 무공이 비약적으로 강해졌다지?”
은은한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말하는 혜성.
긴 세월 수련한 부동심은 물론이고 무림맹 생활을 하면서 정치력까지 더해지자, 어지간한 위정자는 상대도 안 될 만큼 대단한 심계를 보였다.
‘그래도 소정대에 비하면 약하지.’
그놈들은 그야말로 무사라기보단 범죄자에 가까운 놈들. 그놈들에게 비벼진 세월이 한두 해던가.
나는 정색하며 물었다.
“혹시 파검 어르신을 욕보이신 겁니까?”
“……응?”
“파검 어르신께서 분명 태을검제의 무공이 맞다 인정해 주셨는데…… 그걸 흑도 문파의 무공이라 이야기하시다니…… 모용세가가 가만히 있지 않겠군요.”
“…….”
혜성의 미소가 살짝 비틀렸다.
“당장에 전서를 올려야겠습니다. 파검 어르신께서 이를 과연 참고 넘어가실지 궁금하군요.”
“……소림이 모용세가를 무서워하리라 생각하는구나?”
“천하의 소림이 그러겠습니까? 하지만 혜성 대사께선 파검 어르신이 무섭게 느껴지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내 말에 내 일행들 사이에서 웃음이 삐져나왔다. 억지로 참으려 해도 도저히 참아지지 않는 그런 웃음.
혜성은 표정을 다잡으며 말했다.
“아주 맹랑한 놈이로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겨우 표정을 다잡았던 혜성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그래, 여기엔 배를 타러 온 것이더냐?”
“제가 일행들에게 최고의 휴가를 보내게 해주겠다 약속했거든요.”
“그렇다면 방금 이야기한 대로 우리 배에 타는 것이 어떠하냐, 정도회가 빌린 배에 자리가 많이 남는다.”
혜성이 자신들을 기다리는 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층짜리 지붕이 달린 커다란 배를 정도회가 통째로 빌린 것이다.
“역시나 정도회의 위세가 대단하군요. 제안은 감사하나 사양하겠습니다. 저희도 이미 배를 빌려놔서 말입니다.”
“작은 나룻배보단 이 배가 낫지 않겠느냐?”
“작은 나룻배가 아닙니다. 아, 마침 저기 오는군요.”
나는 선착장을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유람선을 가리켰다.
무려 사 층짜리.
“워낙 비싸게 주고 빌린 거라 아까워서 말입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정도회도 함께 승선하시겠습니까?”
혜성의 얼굴은 마치 똥이라도 맛본 듯 격하게 일그러졌다.
참으로 개운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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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선에 오른 일행들은 한동안 들뜬 마음을 달래지 못했다.
동정호의 그 어떤 배보다도 화려하게 빛나는 배 위에서, 이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은 우리뿐이었으니까.
“진 공자는 이걸로 괜찮아요?”
동정호의 야경에 한참이나 탄성을 지르던 성모란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결국 점창은 단죄당하지 않았잖아요. 정도회도 저렇게 버젓이 활동하고 있고.”
“아…… 그거 말이군요. 당연히 괜찮습니다.”
“네?”
“이번 사건에 관해 알 사람은 다들 알고 있습니다. 결국 점창이 이 일을 저질렀다는 걸.”
“그렇죠.”
“그리고 동시에 유월문이 희생당했다는 것 또한 알고 있겠지요. 앞으론 점창 산하의 문파들은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이기 시작할 겁니다. 점창에 남아 있어야 할지, 밖으로 나가야 할지.”
“그래도 점창의 이름이 있는데…….”
“물론 그렇죠. 지금 당장은 나가는 것보다 모른 척 머무는 것이 더 이득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의 일이 터지다 보면 더 이상 남아 있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겁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요?”
“왜 없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나는 동정호에 별처럼 떠 있는 수많은 배들을 보며 말했다.
“점창과 같이 거대한 존재는 한 두 사람의 부도덕으로 절대 쓰러지지 않습니다. 이미 점창이란 자체가 거대한 생명체이기 때문이죠.”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인데요?”
“간단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한 단계 한 단계 음미하듯 깨부수는 거죠.”
“점창을요?”
나는 성모란에게 시선을 돌렸다.
“점창을 비롯해 그 누구라도.”
“……진짜 모르겠어요. 진 공자는.”
성모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유월문이 모아놓은 재산이 한두 푼이 아닐 텐데. 그걸 점창이 홀랑 해 먹은 걸 생각하면 좀 아깝네요. 본래 그들 꺼이긴 했지만.”
대화가 마무리되는 틈을 타 남궁선화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어딘가 있어선 안 될 곳에 있는 듯 불안에 떠는 모습이었다.
“진 공자님. 이거…… 괜찮은 건가요?”
남궁선화는 바닥을 가리키며 말한다.
“이 배에 우리밖에 없는 거 같은데.”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놀 거면 거하게 놀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래도…… 그래도 이건 좀 심하잖아요. 이 큰 배에 우리밖에 없다니.”
천하의 남궁선화도 이 정도로 돈 지랄을 해 본 적은 없었나 보다.
그녀의 말대로 난 동정호에서 가장 큰 배를 빌렸다. 하지만 그녀의 말처럼 우리만 있는 건 아니었다.
“어머, 서운한데요? 저를 잊으신 건가요?”
말과 함께 등장하는 해령.
음식 주문에 제한이 없단 말에 미친 듯이 음식을 시켜 먹던 금은동 형제가 우뚝 멈춰서서 해령을 바라봤다.
화려한 금관에 나풀거리는 비단옷.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이 화려한 배에 잘 어울리는 복색이었다.
“해령님…….”
“만빈각주님…….”
“…….”
성모란과 남궁선화뿐 아니라, 해령을 처음 보는 사련도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리가 끝났습니다. 진 공자님.”
“역시나 훌륭하시군요.”
“그럼 연회는 일을 마저 끝낸 후에 즐기도록 할까요?”
“그러시죠.”
나와 해령의 대화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일행들.
나는 성모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점창이 유월문을 홀랑 해먹은게 아깝다고 하셨죠?”
“으응? 네…….”
“지금 함께 가시면 그런 생각은 별로 들지 않으실겁니다.”
“네?”
의문을 표하며 서로를 바라보는 성모란과 남궁선화.
우린 배의 하부로 향했다.
각종 물품을 쌓아놓는 창고들 사이로 해령이 안내하고 우린 그녀를 따랐다.
그리고 어지러운 길을 지나 어느 한 창고에 닿았을 때.
일행들이 입을 쩍 벌렸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