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54화 (154/357)

#154. <혼란 속의 흑염룡(4)>

“오라버니, 언젠가 우리 유장문도 강호에 우뚝 설 날이 오겠지요?”

유력가문에 시집가던 동생의 물음에 장우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 또한 누구보다 강호 활동에 꿈이 있다는 것을 자신만은 알고 있었으니까.

동생은 그래도 부잣집에 시집을 가서 앞으로 삶이 평탄하겠다며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곤 했었다.

그렇게 장우재는 동생의 희생으로 무림학관의 학관생이 될 수 있었다.

누구보다 자신의 합격에 대해서 기뻐해 줄 동생을 알고 있었기에 장우재는 유장문에 오자마자 동생을 만나려 했다.

하지만 그녀와는 도통 만날 수가 없었고, 어찌 지내는지도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가문에서 열어주는 커다란 연회.

학관에서 만난 친구들의 방문까지 그야말로 장우재는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보냈었다.

“어?”

그러다 만나게 된 여동생과 혼인한 남자.

연회의 한쪽에서 기생을 끼고 가락을 부르는 모습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술에 취해 사방에 횡패를 부리고, 학관생들에게 와서 주접을 떠는 모습들까지…….

안하무인적 행동에도 장우재는 인내심을 가지고 매제를 잘 대했다.

하지만.

“캬, 우리 안사람이 소저 정도만 되었어도 정말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학관생들 사이에서 아첨하듯 내뱉은 한마디에 시작된 의문감.

“우리 안사람은 능력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세서 말입니다. 제가 교육시키느라 아주 애를 먹고 있지요. 하하하.”

장우재는 연회의 주역이었고, 만나야 할 사람들이 수두룩했지만 곧장 여동생이 시집간 가문으로 달려갔다.

하인들과 하녀들이 말리는 말들을 무시하고 무작정 처소에 들이닥쳐 억지로 문을 열었을 때.

“허…….”

여동생은 처연한 웃음과 함께 장우재를 맞이했다.

“오라버니 잘 지냈어요?”

화장으로 자신의 얼굴에 생긴 멍을 지우려 했지만, 상흔이 얼마나 큰지 눈에 확 들어왔다.

“이번에 학관의 친구분들과 함께 오셨다면서요? 이제 우리 유장문도 번듯한 문파가 된 거나 마찬가지겠죠?”

장우재는 그날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서 있던 자리가 누구의 희생으로 마련된 곳인지 깨닫게 되어서, 너무 뼈저리게 느껴져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동정호로 향하는 그의 눈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

이대로 넘어질 수는 없었다.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

이미 자신은 너무 커다란 것들을 희생해 왔다.

여기서 유장문이 무너지면 자신은 물론이고 동생 또한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으리라.

“절대 쓰러지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것이다.”

유장문은 저 멀리 검은 동정호의 호수 위에 떠 있는 배들을 바라보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피곤하구나.’

일각은 그렇게 생각했다.

매일 고된 수련을 해왔던 학관의 시간에 비하면 악양에서의 일정은 나태하기 그지없었지만, 정신적인 피로는 더 많이 느끼고 있었다.

지금 바라는 하루라도 빨리 학관에 복귀하여 진소운과의 다음 비무를 대비하는 것.

‘그것도 이제 쉽지 않겠군.’

사천으로 가게 된다면 최소 몇 주의 시간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없는 성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이런저런 요식행위들을 할 테니까.

동맹의 문파들을 방문하고 관계를 다지며 연회를 겪고, 그것을 계속 반복한다.

그래도 한때는 이 또한 정신수양이라 생각한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번뇌가 너무 많이 쌓였다.

‘수련이 부족한 게야.’

사문의 수많은 선배와 사부들이 모두 거쳐왔던 길.

자신 또한 거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일각은 속으로 ‘아미타불’을 수천 번, 수만 번 외치며 인내를 삼키고 또 삼켰다.

“스님, 하선하실 시간입니다.”

선원의 말에 정신을 얼른 차리니 배는 어느새 선착장에 돌아와 있었다.

일각은 기꺼운 마음이 되어 배에서 내렸다.

숙소로 돌아가 전달받아야 할 이야기들이 또 있겠지만, 그것만 끝난다면 짬을 내어 수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대사님! 전 장우재라고 합니다! 무림학관의 학관생이자 유장문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낯익은 이름에 고개를 돌리자.

눈에 익은 이들이 사람들의 제지 속에서 목이 터지라 외치고 있었다.

“지금 사문이 흑도의 손에 의해 무너질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

장우재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리자, 혜성이 결국 손짓을 해 그들을 다가오게 했다.

“크흠.”

혜성 대사가 코를 가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인파 사이를 뛰쳐나온 그들에게서 눅진한 땀 냄새가 풍겨왔던 것.

“대사님! 정도회를 비롯한 백도 문파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단편적인 이야기만 들었지만 어떤 상황인지는 대략 짐작이 갔다.

점창파가 뒤로 물러나며, 악양의 지배권을 놓고 백도 무림과 흑도 무림이 맞붙기 시작했다는 말.

흑도에서 부는 폭풍으로 인해 백도 무림은 꽤나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타격은 큰 문파보다 작은 문파에 퍼지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

일각은 장우재의 사문이 그렇게 대단한 문파가 아님을 떠올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일각.”

설명을 바라는 듯한 혜성 대사의 부름에 일각이 조용히 다가가 말했다.

“학관생들이 맞습니다.”

“어느 문파의 자제이더냐?”

“유장문이라는 문파입니다.”

“유장문?”

고개를 갸웃거리는 혜성의 반응에 일각이 보태듯 얼른 말을 붙였다.

“악양에 뿌리를 둔 내실이 튼튼한 문파입니다.”

“무림맹에서 본 적이 없는 듯한데?”

“맹에서의 활동은 아직 미비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선 협의가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혜성의 시선이 장우재와 그의 친우들로 보이는 학관생들에게로 향한다.

그들이 입고 있는 의복이나, 들고 있는 무기, 행색, 무공의 척도를 면밀하게 관찰했다.

“흠…….”

혜성의 조용한 콧소리에 일각이 얼른 말을 이었다.

“특히 장우재 저 친구는 학관 내에서 소속이 없는 자들을 대표한다 평가되고 있습니다. 저희 정도회뿐만 아니라, 백도회와 12봉성도 저 친구를 노리고 있을 정도로 인망이 두텁습니다.”

이번 악양의 일로 어쩌면 그의 문파는 사라질지도 몰랐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일각은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아마 이번에 도움을 준다면 차후 학관대표 자리를 되찾는 데 많은 도움이 될 듯합니다.”

“그러하더냐?”

“네, 넷.”

혜성이 지그시 일각을 바라봤다.

“평소엔 정치나 인간관계에 무지하던 네가 오늘은 어쩐 일로 달변가가 되었구나.”

“…….”

혜성 대사는 고개를 휘적휘적 저었다.

“그 또한 번뇌다.”

“…….”

혜성 대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웅혼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린 시주께선 그만 일어나시지요.”

“대사님! 차후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습니다. 한 번만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장우재의 얼굴에 실낱같은 희망을 잡으려는 간절함이 서렸다.

“부처님께선 그대에게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혹여 맹의 악양 지부에 도움을 요청해 보았습니까?”

“네. 가장 먼저 달려가 부탁드렸습니다. 하지만 지부의 인원으론 악양의 흑도 전체를 상대할 수 없습니다.”

상주 인원이 한정된 지부의 인원이 아무리 나서봐야 흑도 무림이 움츠러들 리 없었다.

애당초 이번과 같이 자신들이 마음껏 활개 칠 수 있는 환경 앞에서 주저할 만큼 흑도 무림이 용의주도하지 않았고.

장우재는 다시 한번 간절히 빌었다.

“흑도들과의 전쟁이 일어난 다음은 너무 늦습니다. 즉각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대사님.”

일각이 자신도 모르게 거들었다.

“맞습니다. 스님. 아마 흑도 무림이 악양을 장악한 뒤에 무림맹이 나선다면 작은 문파들이…….”

혜성 대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일각을 바라봤다.

“…….”

그 무표정한 얼굴이 사천황의 얼굴과 같이 느껴져 일각은 저도 모르게 굵은 침을 삼켰다.

“……죄, 죄송합니다.”

혜성 대사는 다시금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흑도의 패악질이 세간을 혼란에 빠져들게 하는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은혜가 천하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은 이 소승이 갖는 안타까움이지요.”

학관생들뿐만 아니라, 구파일방의 사람들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부터 배를 타러 온 사람들까지 모두 혜성을 바라봤다.

“또한 구원을 바라는 중생을 부처님은 절대 외면하지 않습니다.”

혜성의 시선이 어느샌가 학관생들에게서 벗어나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언제 어디서든, 부처님의 도움을 바라는 자가 있으면, 그것이 구천지옥일지라도 부처님의 손길이 닿을 것입니다.”

혜성의 이야기를 듣던 이들이 일순간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잠시간의 흥분이 가라앉고 혜성은 자애로운 미소로 장우재를 바라봤다.

“그러니 시주께선 안심하고 돌아가 계십시오.”

“도, 도와주시는 겁니까?”

“방금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대가 어떤 곳에 있든 부처님의 은혜가 닿을 것입니다.”

모호한 혜성의 말에 장우재가 다시금 고개를 깊게 숙이며 말했다.

“묵혈방이 근시일 내에 저희 사문을 공격하려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무림맹에 돌아가는 즉시, 맹의 회의를 소집하여 이 일을 가장 선결로 처리하겠습니다.”

“네?”

장우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게 처리한다면 무림맹의 악양 지부가 처리하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대, 대사님! 저희 유장문의 위기가 백척간두 위에 서 있습니다. 그리해서는…….”

“시주.”

혜성 대사의 음성에 진한 내기가 실렸다.

듣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짐이 내려진 듯 심령을 옥죄는 금언령.

구경꾼들 또한 혜성 대사의 음성에 커다란 존재감을 느끼고, 깊은 침묵을 유지했다.

“소승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부처님의 손은 닿지 못하는 곳이 없노라고.”

“…….”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몸을 부르르 떨던 장우재가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 그렇다면…… 저희 문파에 방문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대사께서 방문해 주신 것만으로도 흑도 무림들이 크게 긴장할 것입니다.”

장우재의 모습을 보던 일각이 내심 놀람을 금치 못했다.

혜성의 금언령은 소림사 내에서도 일절로 손꼽히는데, 그걸 극복해 내다니.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지금 장우재가 처한 상황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각은 스스로에게 깊은 자괴감을 가졌다.

“……그러고 싶지만, 현재 촌각을 다투는 매우 위급한 일이 목전에 있어 방문하지 못함을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대, 대사님!”

“걱정 마십시오. 시주와 시주의 사문은 분명 부처님의 은혜 안에 보호받을 것입니다.”

혜성이 그렇게 말을 끝내고 돌아서려는 순간.

“뭐야 이 잡기는?”

침묵을 깨는 목소리가 선착장에 울려 퍼졌다.

“요즘도 이런 걸 쓰는 사람이 있나?”

선착장에서 걸어 나오는 약관의 나이로 보이는 남녀들.

그중 가장 앞선 사내가 손으로 허공을 휘휘 젓자,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을 옥죄고 있던 압박감이 해소되는 것을 느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혜성의 시선이 금언령을 해소한 사내에게로 향했다.

어딘가 비열해 보이기도 하고, 비웃는 듯한 표정. 거기에 더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운 태도.

그도 아는 사내였다.

사내는 혜성을 보며 물었다.

“그 부처님의 은혜 안에 보호받는다는 거 말입니다. 뭐, 기도 열심히 하면 묵혈방이 알아서 돌아간다. 그런 말입니까?”

“…….”

사내는 자연스레 혜성 일행과 장우재 일행 사이에 서며 말을 이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까. 애당초 아미타불 외치는 걸로 해결이 다 되면, 무림맹은 왜 존재하고 흑도 세력은 왜 아직까지 강호에 남아있답니까?”

사내의 시선이 좌중에게로 향했다.

“소림사의 기도가 부족했나?”

혜성의 일행은 물론이고, 구경꾼들도 사색이 되어 사내를 바라봤다.

“대체 누구야?”

“정신이 빠진 놈인가?”

“어디 감히 소림사의 고승이신 혜성 대사에게 저리 불경한 말을…….”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사내를 바라봤다.

과연 간이 붓다 못해 간을 통째로 집에 두고 온 듯한 발언을 내뱉는 그의 정체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 해답은 의외로 혜성 대사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진소운 시주…….”

진소운이라 불린 사내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전에도 말했는데 도가 무문의 제자한테 시주, 시주, 하는 것 좀 하지 마십시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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