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혼란을 잠재우는 흑염룡(2)>
‘빌어먹을’
왜 예상하지 못했을까.
흑도들에겐 시간이 금보다 중요하다.
명분이 생기기 전에.
더 강한 이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속전속결로 해결하는 것이 그들이 그릴 수 있는 가장 최상의 그림.
“진 공자님, 어떡하죠? 아직 창궁단이 오려면 한참 걸릴 텐데.”
남궁선화가 이곳에 합류한 것도 그들이 시간을 재촉하게 된 이유가 된 것일까?
남궁세가가 끼어드는 순간부터 흑도 무림의 부담이 가중될 테니까.
“모두 전투 준비하세요.”
나는 그리 말을 하고선 곧장 유장문의 전각을 밟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천하독행신을 펼쳐 십여 장을 뛰어오르자 악양의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안력을 돋우어 함성 소리가 울리는 곳을 바라본다.
“가자아아!”
“다 죽여!”
새까만 개미 떼 같은 인파가 골목 골목을 가득 메우고.
곧장 유장문으로 달려오고 있다.
대충 세어봐도 천은 훌쩍 넘는 인원.
애당초 묵혈방은 오늘 밤을 넘길 생각이 없었다.
다시금 바닥에 내려앉은 나는 일행들과 학관생들을 향해 말했다.
“태을문의 제자와 두 소저는 동쪽을 맡아 주세요. 학관생들은 서쪽에 지원을 가도록 해요.”
“진 공자는요?”
“저는 정문에서 저들을 상대하겠습니다.”
“네? 그게 무슨…….”
“시간이 없습니다. 놈들은 오늘 밤 안에 유장문을 멸문시킬 생각일 겁니다.”
“…….”
“절대 다치지 말고. 혹여나 위험한 상황이 된다면.”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일행들과 눈을 하나씩 마주쳤다.
“지체 말고 내가 있는 곳으로 오십시오.”
“네!”
마주한 그들의 시선에는, 불안감 대신 결연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은·동!”
뛰쳐나가려는 금은동 형제를 불러 세우며 당부했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마라.”
“……!”
이것은 금·은·동 형제에게 하는 말을 빌려 모두에게 하는 이야기.
지금의 전투에서 자비는 필요 없었다.
“넷!”
“대사형도 조심하세요!”
대답을 들은 나는 곧장 정문으로 발을 옮겼다.
유장문의 무사들은 대문을 단단히 잠근 것으로도 모자라 커다란 가구들을 문 앞에 가득 쌓아 두었다.
“…….”
“…….”
곧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이었지만, 누구도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되려 모두가 입을 꾹 다물고 대문만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
그때.
쿵.
정신을 일깨우듯 커다란 충격음이 대문을 울린다.
쿵.
잔잔한 호수에 파문이 일 듯 유장문 무사들의 얼굴에는 공포심이 어린다.
쿵쿵.
단단하게 잠근 대문이 들썩거리며 나무가 부서지려 했다.
쿠쿠쿵.
결국, 대문 앞에 쌓아둔 가구들마저 서서히 밀리기 시작하려는 찰나.
콰쾅!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대문이 산산이 조각나고 가구들이 폭격처럼 쏟아지기 시작한다.
“으아악!”
“피해라!”
나는 내기를 넓게 펼친 후, 유운신공의 연화 수법을 이용해 날카로운 나무 조각들을 한쪽으로 밀어냈다.
“열렸다!”
“쳐라!”
우지끈!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장력들로 인해 대문과 가구들이 부서지고, 수백의 인원들은 자비 없이 나무 잔해들을 치운 뒤 안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쏴라!”
유장문의 무사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 대문으로 들어오는 흑도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비겁한 새끼들이!”
“야! 활 쏜다 밀지 마!”
“밀지 말라고!”
얽히고설킨 묵혈방의 인원들이 화살 앞에 하나둘 넘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흑도인들이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쓰러지는 동료의 몸을 방패로 삼던 흑도인들이 하나둘 암기를 던져 반격했고, 그 숫자는 유장문의 무사들이 쏘는 화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슈슈슈슈숙
“커흑.”
“피해……!”
“암기다!”
눈먼 칼날과 암기들이 날아들며 유장문의 무사들을 공격한다.
잠시 주춤하는 사이. 대문을 모두 부순 묵혈방의 인원들이 유장문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검진 발동!”
서른 명의 유장문 무사들이 검진을 이룬다.
채채채채채채채챙
날카로운 칼날들이 물길을 틀어막듯 흑도들의 진입을 막아서지만, 흑도의 압도적인 숫자는 그 검진마저도 통째로 집어삼키기 충분한 규모였다.
“으아악!”
“크악!”
“살려줘!”
사방에서 묵혈방과 유장문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유장문은 한 사람이 쓰러질 때마다 두 발자국씩 밀리고, 묵혈방은 한 사람이 스러질 때마다 네 발짝씩 앞으로 전진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악! 뭐야, 이 잡스러운 것은!”
“이 새끼들 어쭙잖게 이딴 것을……!”
도자기를 박아놓은 담을 넘던 묵혈방의 무사들은 신경질적으로 담벼락을 때리기 시작했고, 내기가 실린 권력과 장력은 흙으로 쌓은 담벼락을 부수기에 충분했다.
쾅! 우르르르.
흙더미와 기와들이 한 번에 무너지며 또 다른 통로가 생겨나자, 묵혈방의 무인들이 그곳에서도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태을진경을 전력으로 끌어올렸다.
중과부적인 이런 싸움에선 어떤 피를 흘려도 적들은 물러나지 않는다.
확연하게 보이는 수적 우열은 공포심을 무디게 만들고, 반드시 승리한다는 맹목적인 목표를 느끼게 만들기에.
“으아아악!”
그리고 그들의 정신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더욱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허공에 떠오른 네 자루의 만검(萬劍).
만검은 천천히 움직이며 쌍천검결을 흩뿌리기 시작한다.
“뭐, 뭐야?”
“이 많은 숫자의 검은?”
“환검이야! 무시해!”
마치 양귀비의 열매에 취한 사람처럼 오로지 살생만을 바라며 마구 뛰어드는 묵혈방의 무사들.
나는 이어 검기를 덧씌우기 시작했다.
사 갑자에 달하는 단전에 한순간 푹 꺼지는 느낌이 듦과 동시에, 사방에 생성된 환검과 진검들에 검기가 덧씌워진다.
우우우우우웅.
공명하듯 잔진동을 사방에 퍼트리던 검들이 일제히 검극을 아래로 떨어뜨린다.
“야…… 야! 저, 저거 환검 맞아?”
“아, 이 새끼가 환검이 분명…… 어라?”
“어어!”
그리고 일제히 꿰뚫는다.
푹, 푹, 푹, 푹, 푹.
푸푸푸푸푸푸푸푹.
“젠장! 대응해!”
“비켜 이 새끼들아!”
소나기처럼 마구 쏟아지는 만검의 검기에 맞서 묵혈방의 무사들이 전력으로 검기를 휘두른다.
콰쾅, 콰쾅, 콰쾅, 콰콰콰콰쾅.
검기와 검기의 격돌은 공기라는 매질을 타고 사방으로 충격음을 발생시킨다.
정신없이 돌진을 반복하던 묵혈방들은 고막이 찢어질 것과 같은 고통에 귀를 틀어막았다.
쾅! 쾅! 쾅! 콰콰콰쾅!
땅거죽이 뒤집히고, 부서진 벽돌이 사방으로 흩뿌려진다.
주인을 잃은 칼날마저 사방으로 흩어지며 동료의 복부에 박혀들자, 묵혈방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대, 대체 뭐야?”
“유장문에 이런 고수가 있단 이야기는 없었잖아!”
“묵혈방! 네놈들! 우릴 속였겠다……!”
묵혈방은 자신들로도 모자라 더 많은 인원을 외부에서 데려왔었나 보다.
나는 결코 이 전투가 쉽게 끝나지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번 더 나가야 한다.’
다시 한번 단전에서 커다란 내기가 사라지며 손안에서 묵직한 진동음이 울린다.
쿠릉 쿠릉 쿠릉.
파괴력 하나만큼은 강호의 그 어떤 장법과도 비교 불가능한 광천신장.
우웅, 우웅, 우웅.
일 대 다의 싸움에서 언제나 최고의 효과를 보여줬던 그 광천신장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대문은 훌쩍 넘을 정도의 커다란 장법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며, 유장문 안으로 들이닥치려는 묵혈방의 무인들을 휩쓸어 버린다.
퍼퍼퍼퍼퍼퍼퍼퍼펑!!!
검기의 폭발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폭발음.
묵혈방의 무인들이 전력을 다해 도망쳐 보지만, 그들의 임기응변보다 광천신장이 훨씬 빨랐다.
“끄어어억!”
“꺄아아악!”
“커흐흑!”
뒤집어진 흙거죽 덕분에 사방에 퍼진 모래 먼지가 시야를 잔뜩 가렸다.
불투명한 대기 사이로 들려오던 처절한 비명과 괴로운 신음 소리가 모래 먼지와 함께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할 때.
그 안에 나타난 것은 수십에 달하는 묵혈방 인원들의 시체였다.
“…….”
“…….”
“…….”
흥분과 열기로 가득했던 장내가 한순간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양귀비에 취해 있던 놈들이 이제 정신을 차렸는지, 거친 숨소리마저 고르게 돌아오는 상태.
“누구냐! 누구길래 유장문과 묵혈방의 행사를 방해하는 것이냐!”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긴 낫을 든 사내가 시체들을 밟으며 앞으로 나섰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
이는 그가 계획한 모든 일이 틀어졌음을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나는 유장문 무사들을 슬쩍 보았다. 대부분 부상이 심했고 더 이상 싸우기 힘들어 보이는 이들도 많았다.
나는 장우재에게 슬쩍 눈치를 주어 사람들을 옮기게 한 후 앞으로 나섰다.
“난 태을문의 진소운이외다.”
“진소운? 흑염룡 진소운 말이더냐? 네놈이 어찌 이 싸움에 끼어든 것이지?”
“친구 집에 놀러 왔다가 우연히 합류하게 되었소.”
“문파 간의 일은 문파 내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을 모르는가? 당장 썩 꺼져라.”
“헌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묵혈방도 다른 곳에서 사람들을 많이 끌고 온 것 같소만.”
“어쨌든 이는 악양의 일이다. 네가 끼어들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끼어들 일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하오. 그보다 계속할 생각이시오?”
낫을 든 사내가 낫게 으르렁거렸다.
“오늘 유장문은 강호에서 이름을 지우게 될 것이다.”
“지금 이곳에는 태을문뿐만 아니라 철검문과 남궁세가의 사람도 함께 있소.”
낫을 든 사내가 흠칫 놀란 표정을 억지로 숨겼다.
“만약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저 악양의 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외다.”
“……천하의 묵혈방이 그것을 두려워할 것 같은가?”
“두려워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남궁세가가 나서면 곧 무림맹도 나설 것이고, 그 과정에서 옛 악양의 주인이었던 점창이 결국 돌아오게 될 것 같은데.”
“……지금 기회를 줄 터이니 친구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벗어나라.”
“그럴 생각 없소이다.”
“끝을 보겠다 이건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문은 이미 다 부서졌고, 담벼락도 많이 무너졌다.
유장문 내에는 묵혈방의 인원들이 차지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유장문의 인원들 중에 멀쩡해 보이는 이들은 드물었다.
“이미 양쪽의 피해가 크니 정비할 시간을 갖자는 말입니다.”
“훗, 흑염룡이 잔머리가 좋다더니……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이렇게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느냐?”
전혀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듯 단호한 말투.
역시나 놈들은 오늘 완전히 끝을 볼 생각이었다.
하긴 오늘을 넘긴다면 앞으로 남궁세가와 무림맹이 개입될 걱정까지 해야 할 테니.
“제법 괜찮은 한 수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만, 삼류들에게나 통하는 기술을 믿고 우릴 상대하겠다는 것이냐?”
“하고 안 하고는 어차피 당신들의 몫이오. 하지만 한 가지만 말하겠소.”
“……뭐냐?”
“싸움을 계속 이어간다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절반 이상을 죽일 것입니다.”
“네놈의 수는 이미 파악이 끝난…….”
화르륵.
나는 양손에 성화멸마수를 펼쳤다.
갑작스레 양손에서 타오르는 불길에 묵혈방은 물론이고 유장문의 인물들도 깜짝 놀란 모습이었다.
하긴 양강지공의 무공 중에 이토록 구현화가 잘되는 무공이란 드물었을 테니.
“그것도 가장 고통스럽게 태워 죽일 것이오.”
“……이놈!”
“여태껏 서로의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였기에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는 것만 알고 계시오.”
내 협박에 할 말을 잃어버린 듯 멈춰버린 사내.
“묵혈방이 원하는 최종 목표가 유장문은 아니지 않소.”
나는 소정대 놈들에게 사기를 치는 심정으로 필사적으로 허세를 부렸다.
“…….”
의외로 그것이 통했는지 낫을 든 사내는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우와아아아아!”””
그때 동쪽에서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낯익은 복장의 무사들이 이편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창궁단?”
“남궁세가가 참전한 건가?”
“분명 무림맹의 주요 문파들은 참전하지 않는다고……! 이 거짓말쟁이 새끼들!”
묵혈방 측으로 참전했던 흑도인들의 동요가 심해지자 낫을 든 사내의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백에 불과한 창궁단의 존재.
그 자체론 그리 위협적이지 않지만, 그 뒤에 있는 남궁세가는 충분히 부담스러운 상대일 테니까.
이 기세를 몰아 쐐기를 박아야 한다.
“오늘 밤에 흘릴 피는 서로 충분히 흘리지 않았소. 그러니까 그만하시지요.”
“…….”
내 말에 낫을 든 사내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진소운. 우리가 지금 물러나면 넌 이제 이번 일에서 발을 뗄 수 없을 것이다.”
사내는 나를 겨누는 듯 낫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 정도 각오가 되어 있느냐?”
“…….”
“유장문을 위해 네놈의 목숨을 걸 자신이 있느냐 묻는 것이다.”
장우재가 그러지 말라는 듯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장우재의 의견을 무시하고 그저 담담히 말했다.
“충분히 감내하겠소.”
장우재는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꽉 쥐었다.
낫을 든 사내는 죽일 듯 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모두 돌아간다.”
“…….”
“돌아가! 이 새끼들아!”
묵혈방의 무사들이 하나둘 유장문을 나서기 시작했다.
마치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그들 뒤에는 유장문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던 무사들의 시체만이 남았다.
털썩. 털썩.
겨우 버티고 있던 이들도 하나둘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는다.
천에 달하는 적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결국 견뎌냈지만, 그것에 환호하는 이들은 없었다.
“…….”
“…….”
“…….”
두 시진 전까지만 해도 대화를 나누고 밥을 나눠 먹던 이들이, 더 이상 숨을 쉬지 않고 있기에.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기에.
“흐흑…….”
전투 중에 왼손이 잘려 나간 무사는 잘려 나간 왼손을 찾는 대신 죽은 동료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흐흑흑…….”
오른쪽 눈에 암기가 박혀 핏물을 흘리고 있던 무사는, 자신보다 어린 남자의 시체를 부여잡고 오열했다.
“으아아아악!”
무자비한 흑도들의 손에서 살아남았지만, 그것을 기뻐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