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68화 (168/357)

#168. <사천에 번지는 혈해(4)>

형주 금각장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은 이후, 사천으로 향하는 이들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는 일은 없었다.

더러는 ‘이틀을 쉬지 않고 달리면 좀 더 좋은 곳에서 쉴 수 있나?’ 등을 물어 오는 당원들 때문에, 구정룡은 되려 진소운이 이 이야기를 듣지 않을까 걱정했을 정도였다.

어찌 되었든, 과분한 휴식과 음식이 제공된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승호당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말들도 매번 새로운 말로 바꿔주고, 객잔을 떠날 때마다 말 위에서 먹을 육포와 물을 잔뜩 채워주니 중간중간 잠시 휴식만 취하고도 속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어떤 출장도 이리 빠르게 움직이면서 편하게 가본 적이 없었다.

애당초 무림맹 지부에 들어갈 때부터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부분을 자신들이 감당할 각오를 했으니까.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진소운이 이끄는 이 행렬은 그 어느 행렬보다 편하게 움직이고 있다.

단지 왕가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다고 해서 편한 게 아니다.

진소운이 이끄는 행렬은 마치 천하의 모든 길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듯, 빨라야 할 곳에선 평소보다 더 빨리 달리고, 천천히 가야 할 곳에선 휴식까지 취하며 가고 있다.

더구나 진소운은 달리는 사람들의 위치를 매번 바꾸어, 누구 하나 과중하게 피곤을 느끼지 않도록 했다.

이는 말로써 장기간 거리를 다녀본 사람이 느끼게 될 피곤을 미연에 방지하는 처사.

약관의 나이에 불과한 진소운이 이 정도 수준으로 운용을 한다는 사실을, 구정룡은 두 눈으로 보고도 쉬이 믿기지 않았다.

‘아니, 애당초 학관 1년 차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부대 운용은 물론이고, 인맥을 동원한 보급까지.

무엇 하나 평범한 구석이 없다.

마치 노련한 행단주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잔뼈가 굵을 대로 굵은 전쟁터의 지휘관 같기도 하다.

이쯤 되자 궁금증이 일었다.

이 정도로 뛰어난 이가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사천으로 향하고자 하는 이유가 뭔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네.”

구정룡의 질문에 진소운이 돌아본다.

“정작 자네는 왜 이리 빨리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았네만.”

“…….”

“단지 행사를 막기 위해서 이리 빨리 가야 하는 건가?”

왕가장의 호의?

아무리 친분이 있다 한들 이 정도의 손해를 끼쳤다면 진소운도 뭔가 왕가장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 있을 터.

맹주원의 명령서?

이 또한 마찬가지, 만통부의 부장을 움직인 일이다. 제아무리 맹주원이라 한들 훗날 장로원이 문제를 제기하면 그 커다란 폭풍에 진소운도 갈기갈기 찢길 것이다.

그런 부분들을 모두 감안하고 밀어붙이는 일이 고작 사천에 가서 장로원 행사 방해하기라…….

말이 안 된다.

도대체 진정한 이유가…….

“……막을 수 있으면 좋지요.”

진소운의 말에 구정룡의 숨이 턱 막힌다.

“진짜 행사를 막으러 간다는 건가?”

진소운의 표정이 미묘하게 찡그려진다.

“실제로는 조금 더 복잡합니다.”

“얼마나 복잡하든 듣겠네.”

인상을 찡그리던 진소운이 전방 어딘가를 바라본다.

헌데, 그 순간 그의 두 눈에서 안광이 번쩍하고 튀어나온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살기는 아니지만, 좀 더 뭔가 끈적한?

만약 사위가 어둡고, 발 없는 무언가가 뿜어낸다면 딱 어울릴 만한 그런 분위기…….

‘원한?’

거기다 이까지 빠드득 가는데, 숫제 누가 보면 무림맹의 장로원을 쫓는 게 아니라 부모를 죽인 원수를 잡으러 가는 자의 표정이다.

“장로원이 찾으러 간 정체불명의 집단 말입니다.”

실제 행사의 목적은 사천의 조사이지만, 사실 외유성 행사인 걸 구정룡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생각보다 더 위험한 집단이란 정보를 받았습니다.”

“정보?”

“네, 그렇기에 그들을 막으러 가는 겁니다.”

여태 이해되지 않는다.

“……아무리 위험한 집단이라 한들, 학관생들도 있고, 맹의 장로님들도 함께이지 않은가. 굳이 이런 무리를 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정보에 의하면 위험한 사술을 쓰는 존재들이라 하더군요.”

“사술이라고?”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는데.

“저희가 제때 도착하지 못하면 큰 피해가 일어날 겁니다.”

“잠깐, 잠깐, 잠깐. 정시 때 사천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선 나도 들었네. 하지만 사술이라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 그 정보의 출처가 어딘가?”

“하오문입니다.”

“하오문? 그곳에서 구매한 건가?”

“아니오. 전달받은 겁니다. 그쪽하고 관계가 좀 있거든요.”

“…….”

하오문이라면 천하의 정보를 두고 개방과 다투는 집단이다.

최근 들어 개방의 신뢰도가 조금 떨어진 데 반해 하오문의 신뢰도가 급격히 오르고 있는 걸 생각해 보면, 완전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사술’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정작 구정룡의 의문은 다른 곳에 꽂혀 있었다.

“하오문하고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돈거래가 아닌?”

진소운은 그게 무슨 큰일이냐는 듯 대답했다.

“네.”

하오문이 어떤 문파인가.

돈에 관해서라면 철저하기가 사채업자 못지않게 지독한 곳인데, 그런 곳에서 돈도 주지 않고 정보를 받았다니.

‘대체 이 자식은 정체가 뭐야?’

더더욱 진소운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는 구정룡이었다.

#

‘등신짓만 하지 말아라!’

무림맹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를 꼽자면, 오만하다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자신감이 넘친다는 말도 되겠지.

오백 년간 적수가 없었던 이들답게 언제 어디서나 방심이 습관처럼 온몸에 장착되어 있다.

전생에 피해가 극심했던 것도 생각해 보면 인력을 분산 투자하듯 사방팔방에 흩뿌려 놓은 탓에, 시산혈교로선 쉽게 각개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나마 지금은 전생과 비교해 백도회와 12봉성의 인원들은 끌어들이지 못했으니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겠거니 생각했건만.

하오문을 통해 전달되어 온 전서를 보고 한숨을 길게 내쉴 수밖에 없었다.

-학관생들 사천 성도 입성. 다섯 개의 조로 나뉘어서 이동 시작.

역시나 놈들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고 전생의 과오를 그대로 실행하고 있었다.

“대사형, 괜찮은 겁니까?”

은호의 물음에 나는 전서를 전해주며 말했다.

“이미 늦은 것 같다.”

전서의 심각함을 아는지 은호도 얼굴을 굳힌다.

“……재화와 설란이는 어디 있다고 합니까?”

“성도 지부와 하오문 두 곳 다 어디 있는지 파악할 수 없다고 하더구나.”

모용재화와 은설란만이라도 어디 있는지 파악해 보려 했지만, 이 뿌리만 단단한 근본 없는 조직은 어떤 인원을 어떻게 나누는지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저 지들 마음대로 친한 사람끼리 삼삼오오 모였을 것이 눈에 뻔하다.

그리고 빈자리는 강제 차출한 학관생들로 인원수를 채우는 형식을 썼겠지.

“개 막장이네요.”

동감이다.

낭인 무리도 이렇게 근본 없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속도는 왜 이렇게 빠르답니까.”

제일 답답한 부분을 은호가 긁어냈다.

상대에 대해선 쥐뿔 예상도 못 하는 양반들이 자신감이 넘치니 이동에는 거침이 없다.

전생과 비슷하다.

전생에도 아미산을 거쳐 단박에 파당까지 진격을 했던 이들은 차례차례 주검이 되어버렸다.

“그 흉수들이 늦게 나타날 가능성은 없을까요?”

“나 또한 부디 그랬으면 소원이 없겠구나.”

애당초 정시 때 벌인 사건은 지금의 사건을 위한 것이었다.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는 사냥꾼은 사냥감이 다가올 때, 지체하지 않는다.

‘제발 뒷 조에 있어라…….’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나마 은설란과 모용재화가 뒷 조에 속해있길 바라는 것뿐.

아무리 빨리 달려도 앞 조가 파당에 도달하는 속도는 쫓지 못할 가능성이 컸으니까.

‘제발! 바보같이 앞에 나가 있지 마!’

나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 채찍을 내려치고 또 내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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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이 천하 제일가는 명승이라 하더니. 허허.”

명현의 허허로운 말에, 옆에서 보좌하고 있던 청년이 아미파에서 싸 온 찻물을 건네며 말했다.

“아미팔경 중에서도 성적만경, 나봉청운, 쌍교청음. 이 세 곳은 반드시 들러야 한다고 합니다. 이번 기회에 학관생들의 안계도 넓혀주심이 어떠십니까. 장로님.”

제자의 말에 명현 도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가 이곳에 놀러 온 것이더냐.”

“…….”

“우린 감히 무림맹의 지엄한 경고를 무시하고 정시를 방해한 이들을 적발하기 위해 온 것이야.”

제자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자가 큰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망스런 입을 놀렸습니다.”

제자가 마치 금방이라도 목숨을 던질 듯 이야기하자 혜성 대사가 자비롭게 말했다.

“사안이 급한 일이긴 하나, 사천까지 오는 길이 쉽지 않았던 만큼 일이 끝난 이후에 아해들에게 안계를 넓혀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세상의 넓음을 알려주는 것 또한 우리 선대의 본분이 아니겠습니까?”

혜성 대사의 말에 명현 도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사천의 일은 그리 급하지 않았다.

그리 급한 일이었다면 정시가 끝난 직후 사천을 뒤집어엎어서라도 조사를 끝냈겠지.

이제 와서 일이 급해진 건,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점창파의 속가무문이었던 유월문이 호남에서 마교를 사칭하여 범죄를 저질렀다는 의혹.

거기에 더해 점창의 제자까지 가담했다는 사실은 점창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이럴 때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기에 가장 좋은 화제는 탕마멸사 아니겠는가.

역대 황제들이 정권이 흔들릴 때마다 북진과 정벌을 행했던 걸 생각하면, 이것만큼 성공이 보장된 방법도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탕마멸사가 우리 무림맹에게 주어진 최우선의 과제다. 너희들은 오늘의 가르침을 잊지 말도록 하거라.”

명현 도장의 말에 제자들이 일시에 고개를 숙인다.

명현 도장이 보기에 썩 기꺼웠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성 대사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죽을 맛이겠지.’

명현이 사천의 조사에 박차를 가한 덴 다 이유가 있었을 테니.

그 검은 속내가 훤히 다 들여다보인다.

그럼에도 그의 장단에 맞춰준 연유는, 그가 발악할 대로 발악해 봐야 결국 회주 자리를 놓게 될 테니 그에게 판을 벌려준 것이었다.

이제 소림에게 다시금 회주 자리가 돌아올 날도 멀지 않았다.

무당과 소림이 회주 자리를 독점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 때문에 잠시 회주 자리를 맡겼더니만, 정도회 전체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다시금 본래 주인이 되찾아 강호의 정기를 다시 세워야 할 차례.

조금 아쉬운 것은 악양의 사태가 제법 빠르게 진정되었다는 점이다.

그간 힘을 숨겨온 묵혈방과 흑부궁을 비롯한 흑도 무리들이 악양을 전부 다 뒤집어엎으며 점창의 뿌리를 잘라내면 소림이 들어가려 했건만, 어째 한바탕 전쟁을 벌일 것 같았던 놈들이 대뜸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도 내막이 궁금하여 조사를 시켜놓은 참.

“악양에 대해선 알아보았느냐?”

옆에선 일각이 답했다.

“네. 묵혈방의 방주와 부방주가 모두 죽었고, 이로 인해 묵혈방이 사분오열되었으며, 덕분에 악양의 사태가 한풀 꺾인 것 같습니다.”

“묵혈방이?”

“어떻게 말이냐?”

일각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걸 이야기해야 옳은가, 하지 않아야 옳은가를 자신은 판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서 이야기하지 않고 뭘 하느냐?”

혜성의 일갈에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유장문에 섰던 진소운 대표가 묵혈방을 홀로 습격하여 묵혈방주를 죽였다 합니다.”

“허?”

“그 후에, 유장문과 묵혈방이 ‘비무결전’을 벌여 진소운 대표가 묵혈방의 부방주의 목까지 베었다고 합니다. 이 일로 묵혈방이 전쟁을 멈췄고, 이어 다른 흑도 문파들 사이에서도 더 이상의 전쟁을 벌이는 이는 없어졌다고 합니다.”

“뭐라!”

혜성이 두 눈을 부릅떴다.

“진소운 그놈이……? 아니, 그렇다 치고, 어찌하여 다른 문파들까지 전쟁을 멈췄다는 것이냐?”

“그건…… 자세히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

전서의 크기가 정해진 이상, 전달되는 정보에 한계는 있기 마련.

그렇다 해도 단편적으로 묵혈방이 무너져 악양의 사태가 잠재워졌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리라.

혜성은 단박에 느낌이 왔다.

“그놈이 껴있는 것이 분명하겠구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내막에 진소운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음을.

그리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묵혈방의 방주를 습격하거나, 부방주를 상대한다?

본 산의 정예 제자들도 충분히 할 수 있을 일이다.

하지만 단지 그 한 수로 혼란을 제어하는 건 불가능하다.

“무서운 놈이구나.”

“네?”

혼란을 제어한다는 말은 혼란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말.

이는 곧,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쩐지 심상치 않은 아해라 했다.”

분명 악양의 사태에 팔악(八惡) 중 오악(五惡)도 참전했었다.

혜성 자신도 그런 상황에선 양측 간의 전쟁을 끝낼 자신이 없다.

그런데 그걸 이제 막 학관에 들어간 놈이 해내다니.

“마(魔)로구나.”

“…….”

혜성의 말에 일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누굴 마(魔)라 칭하는지 알았기에.

“각아.”

“네. 스님.”

“이번에 내가 회주가 된다면, 너를 학관 대표의 자리에 올릴 것이다.”

“…….”

“그러니 너는 필히 그 마(魔)를 꺾어 다시는 자라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알겠느냐?”

일각은 그토록 바라던 자신의 자리를 돌려주겠다는 혜성 대사의 말을 들었음에도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았을 때 그가 늘 하던 말을 내뱉었다.

“아미타불…….”

같은 시각.

아미산 금정봉에 오른 모용재화가 곧 죽을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비, 빌어먹을…….”

검 대신 활을 들고 있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선발대 역할을 한 탓에 남들의 세 배 가까이 움직였던 모용재화였다.

“모용 공자 괜찮아요?”

모용재화를 안쓰럽게 보던 은설란이 손을 뻗어 찬 기운을 뿜어내 주었다.

“빌어먹을 아미산엔 아무것도 없다 했는데 왜 굳이 올라온 거랍니까?”

아미산을 이미 확인하고 먼저 앞으로 나아갔던 모용재화.

그러나 돌아오라는 신호에 아미산을 다시 올라왔던 참이었다.

모용재화의 질문에 머뭇거리던 은설란이 조심히 답했다.

“그게…… 우리가 선두 조인 만큼 정기를 받아야 하지 않겠냐고…….”

“네?”

모용재화는 제 두 귀를 의심했다. 뭔가 잘못 들었겠지…….

“저도 그냥 들은 거예요. 아미산의 정기를 받고 가면 일이 잘 풀릴 거라고…….”

겨우 그것 때문에 산을 먼저 내려갔던 사람을 다시 올라오라 했다고?

“…….”

모용재화는 당장이라도 장로들과 그의 제자들이 서 있는 봉우리에 벽력시를 한 방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짜 내가 완성만 했어도 날렸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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