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73화 (173/357)

#173. <혈해를 삼키는 흑염룡(3)>

“이봐! 정신이 드나?!”

철순직이 자신이 발견한 청관문도의 맥을 짚었다.

‘살아 있다.’

다행히 살아 있긴 하다.

하지만 눈알이 뒤집어진 채 거품을 계속 물고 있는 것을 보니,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여기 사람이 있어!”

“여기도 있어!”

“이쪽도!”

사건이 발생한 곳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서 발견된 사람들은 대부분 이지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론상으로만 배워왔던 사술에 정심이 오염된 상태.

이대로 시간을 더 끌었다간 평생 이지를 상실한 채로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단전에 손을 대고 내기를 불어넣는다.

하지만 성급한 응급처치는 상대의 상태만 더욱 위중하게 만들었다.

“크르륵, 크르륵, 크르륵.”

몸을 덜덜 떨며 피거품까지 뿜어내는 청관문도.

‘보통 사술이 아니다.’

이 정도로 깊이 심마에 빠졌다면 이건 더 이상 자신들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파사(破邪)와 제령(制靈)을 수련한 술사들이나 구제할 수 있을 터.

“잠깐 비켜봐요.”

성모란이 갑자기 철순직을 밀어내며 청관문도를 살핀다.

“이건 우리 능력 밖의…….”

철순직이 말을 잇건 말건, 성모란은 갑자기 품 안에서 부적을 꺼내어 청관문도의 가슴에 붙였다.

그러곤 부적 위에 손을 짚어 내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아니, 함부로 중단전을 건드렸다간-”

“가만있어요, 쫌!”

“…….”

중단전은 하단전과 비교해 더 위험한 곳이다.

그곳을 외부인이 잘못 건드렸다간 실어인이 되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한데 성모란은 그런 부분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내기를 주입하고 있는 것 아닌가.

철순직은 불신 가득한 눈빛으로 정면을 주시했다. 그런데.

“응?”

신기하게도 청관문도의 얼굴이 서서히 편안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혈색이 돌아오고, 숨소리가 고요해진다.

잠시 뒤, 천천히 눈까지 뜨기 시작했다.

“사, 살려…….”

“걱정 마요. 구하러 왔으니까.”

정신을 차린 청관문도는 다시금 픽 하고 기절했다.

성모란은 청관문도의 맥을 짚어 그가 안정적인 상태에 든 것을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순직이 엉거주춤 뒤로 물러서며 자리를 내주었다.

“어, 어떻게 한 겁니까? 파사와 제령에 대해서…….”

“아니에요. 이거예요.”

성모란이 부적을 보인다.

철순직은 한눈에 그 부적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형산파의 복마부입니까?”

“한 번에 알아보네요?”

“이 물건을 사는 사람은 없어도 이게 어떤 물건인지 모르는 사람도 없죠.”

“그건 그렇죠.”

“철검문은 이걸 항시 가지고 다니는 겁니까?”

“그건 아니에요.”

성모란이 고개를 젓는다.

“이건 진소운 공자가 챙겨준 거예요.”

“진…… 대표가 말입니까?”

또다.

또 진소운이다.

“맞아요. 어떤 이유에선지 이걸 가져가라 하더군요. 이렇게 쓰게 될지 몰랐지만.”

“…….”

철순직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진소운은 개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적부터 지금 벌어진 일까지, 모든 상황을 예견했단 말인가?

그가 무슨 미래에서 온 것도 아닐텐데?

결국 이리되었다.

예측되지 않았던 모든 행동들이 결국 그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고, 이 모든 일들이 결국엔…….

“철 공자!”

상념에 잠기던 철순직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넷?”

“지금 바쁜 거 안 보여요?”

성모란을 비롯한 12봉성의 인원들이 복마부를 한 장씩 받아 사람들의 정신을 일깨우고 있었다.

“일 안 할 거면 경계라도 제대로 서요! 언제 적이 기습할지 모르니까.”

“아, 알겠습니다.”

철순직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무 위로 올라섰다.

성모란은 그런 철순직을 보며 고개를 젓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들은 괜찮은지 모르겠네.”

#

“금표 형, 이제 어떻게 하지?”

은호와 동룡이 달리는 와중에 금표를 바라봤지만, 금표는 달리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

학관에선 상관에게 보고 시 유의해야 할 절차 세 가지에 대해서 알려준 적이 있었다.

일(一), 되도록 짧고 명료하게 보고한다.

이(二),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 대처는, 시간은, 결과는.에 대해서 요점을 정리하여 구체적으로 전달한다.

삼(三), 감정을 배제하고 논리적으로 이야기한다.

교관이 말하길.

이 세 가지에 맞춰 보고하면 상관은 반드시 부하의 이야기를 경청할 것이며, 그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 했다.

‘안 통하잖아!!’

곤륜파의 장로들과 제자들은 세 형제의 이야기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애당초 예상했던 바였다.

대사형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행사에 나선 인간들이, 대사형의 경고를 들어 처먹을 리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생각한다 한들, 하늘 같은 대사형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세 형제도 지금 사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대사형이 ‘위험’하다고 이야기하면 진짜 ‘위험’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애당초 상식의 기준이 우리랑 안 맞는 사람이 이야기한 거라고!!!’

정시도 물로 보고 혼자 뛰어들겠다 한 정신 나간 인간이 이토록 긴장할 정도라면, 상대는 복양 평원에서 만난 그 괴랄한 인간들에 버금가는 무서움을 가졌다는 말과 같은 것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헌데 저 멍청한 놈들은 지들이 개미지옥에 스스로 들어가는 개미들의 처지인지도 모르고 경고를 무시하고 있는 상황.

“은표, 동룡.”

숙고 끝에 금표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대사형의 명령이 뭐였지?”

“적들의 흔적이 보이면 일단 도망친 후 보고하고, 학관생들이 적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최대한 막으라고.”

“그래. 근데 아직 적들은 안 보이고, 학관생들은 적들을 만나지 않았지?”

“…….”

“그리고 이대로 놔두면 대사형이 ‘위험’하다는 적을 만날 거고.”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금표의 행동에 은호가 불안한 듯 물었다.

“형, 뭘 할 생각이야?”

“어차피 학관에서 배운 건 소용이 없잖아.”

“……설마.”

금표가 결연한 표정으로 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사형에게 배운 걸 써먹어야지.”

“……그게 뭔데.”

은호의 물음에 금표는 대답 하지 않는다.

하지만 금새 은호는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은호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미치겠네.”

금표가 은호와 동룡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기 싫으면 빠져도 된다.”

“…….”

“…….”

은호와 동룡이 동시에 금표를 노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형, 그거 대사형이랑 하나도 안 똑같아. 따라 하지 마.”

“큰형, 이상해. 그거 하지 마.”

금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따라 한 거 아냐!”

챙! 챙!

금표가 소리치거나 말거나 은호와 동룡이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같이 할 거냐?”

“……형이 죽으면 방앗간은 내가 이어야 하잖아. 난 강호를 질주하는 무사가 되기로 결심했거든. 그래서 형이 죽으면 좀 그래.”

“큰 형이 죽으면 엄마 아빠가 슬퍼하시잖아.”

“아주 저주를 해라, 저주를.”

금표가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은호와 동룡이 그에 발맞춰 속도를 내었고, 세 사람의 시야엔 금방 곤륜파의 장로를 위시한 제자들과 속가무문들의 학관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휘리리릭. 탁.

숲을 가로질러 곤륜파 앞에 내려 앉은 세 사람.

“크흠.”

그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찡그린 곤륜파 상원 장로가 일갈을 내질렀다.

“좋게 이야기했음에도 못 알아먹은 것이냐?”

“죄송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사지에 들어가시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어서 말입니다.”

금표가 정중하게 포권을 쥐며 고개를 숙였지만, 상원 장로의 분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겨우 학관 대표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태을문이 대단한 존재라도 된 줄 착각하는 모양이로구나……. 뭣들 하느냐. 곤륜의 제자가 겨우 태을문 때문에 걸음을 멈출 생각이더냐!”

“““옛!”””

우렁찬 구령과 함께 스물에 가까운 곤륜의 제자들이 동시에 세 형제를 둘러쌌다.

“하아…… 정시 이후에 같은 편하고 싸울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금표의 투덜거림에 은호가 검을 들어 올리며 소곤댔다.

“이 정도면 사람들 말대로 우리가 사실 흑도 였던 게 아닐까?”

은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동의 제자들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채채채챙!

이제는 손과 발처럼 자유롭게 펼치게 된 백호필살검진이 펼쳐지며, 곤륜파 제자들의 검 일곱 개를 막아내는 동룡.

진소운의 기량은 잘 알고 있었지만, 세 형제의 실력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던 곤륜파 제자의 눈썹이 치켜 떠진다.

“응?”

분명 내기가 실린 검임에도 홀로 일곱 자루를 막아 낸 동룡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우린…… 흑도가 아니야!”

“이 무슨!!”

채채채챙!

일곱 자루의 검이 마치 꽃봉우리가 펼쳐지듯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사이로 만화무적권이 작렬한다.

퍼퍼퍼퍼퍼퍽!

불의의 일격을 맞은 곤륜파의 제자는 숨이 턱 차오르는 고통과 함께 터져 나오는 말을 결국 삼킬 수 밖에 없었다.

누가 흑도라 했냐고!

#

남화성이 침을 꼴깍 삼켰다.

눈앞에 선 혈의인들은 환술진에서 봤던 이들과 다른 느낌이었다.

환술진에서 봤던 이들은 기이하게도 너무나 똑같은 움직임으로 동시에 움직였다.

반면, 이들은 마찬가지로 기강이 잡혀 있지만, 사람이라는 느낌이 확실히 났다.

‘이들은 진짜…….’

여태껏 철봉만으로 적을 상대했던 진소운이 검을 뽑는다.

스릉.

청명한 검날의 울림이 남화성을 더욱 긴장하게 만든다.

“남화성.”

“네, 넷!”

“싸움에 나서지 마라. 최대한 내공을 아끼고 있어.”

“으, 응? 그게 무슨?”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아, 알겠습니…….”

남화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소운이 혈의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채채채채챙.

동시에 등 뒤에서 중검을 뽑아 든 혈의인들도 몸을 날리며 사방에서 진소운을 압박한다.

챙, 챙, 챙, 챙, 챙.

진소운은 사방에서 찔러 드는 수십 자루의 검들은 흑룡검 한 자루로 막아선다.

파바바바박. 파바바바박.

진소운의 흑룡검이 한번 휘둘릴 때마다 십여 개의 환검들이 생겨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커흑.

큭.

끄악.

진소운을 따라 날아올랐던 혈의인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내린다.

쿵.

바닥에 내려앉은 진소운의 팔방으로 혈의인들이 개떼처럼 달려든다.

진소운은 물러서기는커녕 되려 앞서 나가며 한 손으론 검을, 한 손으론 주먹을 휘두른다.

채채채채채채챙.

환검과 진검이 우편을 휩쓸 때마다 피가 낭자하고 신체와 살점이 사방으로 날린다.

퍼퍼퍼퍼퍼퍼퍼펑.

권형이 좌편을 휩쓸면 마치 폭풍이라도 지나간 듯 혈의인들의 팔과 다리가 꺾이지 말아야 할 곳으로 꺾이며, 달려들었던 것보다 더욱 빠르게 날아가 버린다.

그야말로 전장을 홀로 누비는 항우와 같은 파죽지세(破竹之勢).

‘뭔 놈의 무공이…….’

환검이라 생각하고 무시하면 진검이 자리한다.

진검이라 생각하고 막아서면 환검이다.

혈의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노리는 수십 자루의 검과 권에서 어떤 것이 실제이고 어떤 것이 환영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이전에 견식했던 것보다 더욱 날카로워져 남화성 자신도 환검과 진검이 구분이 불가했다.

아니 애당초 이걸 환검이라 할 수 있을까?

그간 환검을 쓴다고 얕봤던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던 것인가.

환검에 이런 경지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구나 저 권법은 어떠한가.

일견 환영에만 힘을 쏟은 것 같지만, 타격되는 혈의인들 하나하나가 온전히 제 몸을 가누지 못한다.

파괴력 자체가 이미 무인의 방어력을 넘어섰다는 것.

권력(拳力)에 집중된 무공도 아니건만 파괴력 하나하나가 이미 녹각광명권에 비견된다.

거기에 환영까지 겹치니, 적들은 알아도 못 막고, 막아도 온전치 못하다.

콰직, 콰직, 콰직.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세 명의 혈의인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이내 부러진 다리로 다시금 일어나려 애를 쓴다.

“세상에…….”

그 독심에 기가 질려 눈살이 찌푸려진다.

분명 뼈가 부러진 고통은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할진대.

그 비상식적인 의지가 소름 끼쳐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

‘저것이 우리가 상대할 적…….’

벌써부터 기가 죽는 느낌이다.

“어라?”

헌데, 그때 진소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에게 재빠르게 달려간다.

그러더니 지체없이 흑룡검을 날려 세 사람의 머리를 잘라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바퀴벌레 같은 새끼들…….”

그렇게 말한 뒤 다시금 혈의인들 사이로 뛰어든다.

남화성은 그 광경을 입을 벌리며 헤-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리가 부러진 상태에서도 적을 죽이기 위해 일어나려는 혈의인들.

그리고 그런 자들의 목을 지체 없이 잘라내는 진소운.

대체 누가 더 독심을 가졌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군…….’

적으로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쪽은 혈의인보다…….

‘진소운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혈의인들이 더 달려들며 진소운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당최 몇 명의 인원들에게 싸여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인원이 진소운에게 달려든다.

마치 거미 한 마리를 잡기 위해 개미들이 몰려드는 것처럼, 검은 옷을 입은 진소운 주위를 수많은 혈의인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천하의 진소운이라 한들 위험천만한해 보이는 상황.

“지, 진소운! 도와주랴!”

남화성이 애써 용기를 내어 외쳤지만 진소운의 대답은 쌀쌀맞다.

“닥치고 내공이나 아끼고 있어 새끼야!”

“저, 저 새끼는 꼭 말을 씨불여도…….”

잠시 생겨났던 좋은 감정이 모래성 무너지듯 파사삭 바스라진다.

자신의 앞에 당도했던 혈의인까지 요상한 금빛 줄로 당겨 상대하는 진소운을 보며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순간. 진소운에게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남화성! 준비됐냐?”

갑작스런 진소운의 외침에 남화성이 어안이 벙벙한 사이.

“뛸 준비 됐냐고 새끼야!”

뛸 준비라니?

그 순간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진동하던 공기가 한쪽으로 급격히 쓸려가기 시작한다.

바람과는 다른, 마치 거대한 거인이 공기를 집어삼키는 듯한 느낌.

그리고 공기들이 빨려 들어가는 곳은 다름 아닌 진소운의 손안이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꺼지는 듯한 거대한 진동음과 함께, 진소운의 손에서 거대한 장력이 쏟아져 나온다.

개미 떼처럼 가득 몰려들었던 혈의인들이 낙엽처럼 바람에 휩쓸려 나가고 단단한 땅거죽마저 함께 몰아쳐 나간다.

‘뭔 놈의 장력이……!’

폭풍을 작게 축소한 듯한 파괴력에 정신을 살짝 놓고 있던 순간, 진소운의 목소리가 고막을 강하게 때린다.

“달려! 남화성!”

“이익!”

젖 먹던 힘까지 모두 끌어모아 녹각풍운종을 펼친다.

진소운을 따라 달리는 길엔 혈의인들의 시체가 가득하다.

어찌 보면 적진 한가운데로 달려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에도 진소운은 거침이 없다.

진소운의 장력 밖에서 충격파에 날아갔던 혈의인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러곤 포위망을 만들 듯 진소운과 남화성을 둘러쌓으려 한다.

“지, 진소운 괜찮은 거냐?”

앞뒤 좌우 어딜 봐도 혈의인들만 가득하다.

이대로 혈의인들을 뚫어낸다 해도 그들의 추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 당연한데.

진소운은 의연하다.

생각해 보면, 그는 언제나 지금처럼 의연했다.

“괜찮아. 지원군이 올 테니까.”

“지원군?”

승호당이 이곳까지 오려면 아직 멀었다. 언제 따로 지원군을 불렀단 말인가?

그때, 멀리서부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저기 있다! 저놈들을 잡아라!”

“우리 적화채를 우습게 보다니 육시를 내주마!”

“우리 화엄채가 먼저다 비켜!”

뒤쪽에서 수백의 녹림도들이 대도와 도끼를 들고 마구 달려오는 모습.

“……설마, 지원군이란 게…….”

방금 전까지 혈의인들과 치열한 혈투를 벌이느라 얼굴 이곳저곳에 핏물을 묻힌 진소운이 비열하게 웃는다.

“그럼 뭐 한다고 녹림채들을 달고 왔을까.”

남화성은 그제야 세 개의 녹림채에 쫓기던 지난 시간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여기까지 생각했던 거냐?”

진소운이 씨익 미소 지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라는 거다.”

“시부럴…….”

남화성은 자신도 모르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대체 심계가 얼마나 깊기에 여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

아니, 심계가 깊은 걸 떠나서 이런 작전을 직접 실행하려면 얼마나 배포가 대단해야 하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남화성은 새삼 진소운이 대단해 보이는 것을 넘어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꿀꺽.

굵은 침이 삼켜진다.

과연 정시 때부터 자신이 진소운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선을 넘나들었던가.

‘저승사자 앞에서 춤을 췄군.’

지금은 저승사자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이 과거의 행적보다는 덜 위험해 보였다.

“남화성! 지금부터 속도 올릴 거다. 그러니 죽어라 따라와! 귀찮으면 놓고 갈 테니까.”

“네, 넷!”

남화성은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을 하며 필사적으로 다리를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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