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혈해를 삼키는 흑염룡(4)>
어둠이 가시고, 새벽이 다가와 광명이 비추기 시작했지만, 일대의 공간에는 불온한 붉은색의 기운이 가득했다.
“……아미타불.”
불호를 외는 자애로운 목소리와 달리 매서운 눈으로 붉은 기운을 바라보던 일각.
합장을 한 그의 양손에서 강력한 기력이 응축된다.
한 손을 뻗어 공간을 밀어내듯 천천히 움직이자, 그의 손 모양에 맞춰 거대한 천수여래장이 펼쳐지며 사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분명 실체 없는 것들의 부딪침이었건만, 허공에는 황금색의 거대한 손과 붉은 공간이 경쟁하며 기이한 파육음을 낸다.
찌지지직──
꺄아아아아악───
정체불명의 붉은 공간이 찢겨 나가며 삐져나오는 비명들이 정심을 과하게 흔든다.
면벽(面壁)과 묵언(默言)의 깊은 수행을 통해 탈각(脫却)의 맛을 봤다고 생각했건만, 작은 삿됨에도 격하게 흔들리는 스스로에 일각은 깊이 실망하였다.
‘어찌 이리된 것인가…….’
평소에도 잘하지 않는 번뇌가 머릿속에 가득 차오른다. 그러나 저 삿된 소리가 원인은 아닐 터다.
오로지 자신이 묵과한 과거에 대한 깊은 후회.
아니, 괜찮을 거라 안도하며 진실을 목도하지 않은 스스로에 대한 경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라더니…….’
주변을 슬쩍 둘러보니, 수많은 소림의 제자와 속가문파의 제자들이 머리를 부여잡은 채, 불경을 외고 있다.
머릿속을 침투하는 저 기이한 소리와 환영을 밀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모습.
그나마 저들은 양호하다.
동행했던 점창과 그 속가문파의 제자들은 거품까지 물고 눈을 뒤집어 깐 채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혜성까지 명현과 함께 머리를 쥐고 있는 모습을 보자,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이 밀려왔다.
‘망종도 이런 망종이 있을 수 있던가.’
기회는 있었다.
진소운의 전서가 전달되었을 때.
최소한 그가 말하는 ‘위험한 존재’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봤어야 했다.
명현과 혜성이 멸시하며 분개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도 고려해 보았어야 했다.
그걸 거스를 수 없었다면 최소 경계라도 삼엄하게 유지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 모든 불안감들을 번뇌(煩惱)라 털어낸 대가가 지금 바로 현재.
“아미타불…….”
불호를 반복해서 외는 건 아무런 해결책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금 일각이 할 수 있는 건 모든 잡념을 털어내고 불호를 외는 것뿐이었다.
“아미타불.”
달마역근경의 힘을 끌어올려 천수여래장의 기운을 더욱 증폭시킨다.
광명과 같은 황금빛이 사방에 퍼지지만, 삿된 것들은 도통 밀려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천수여래장을 더욱 강하게 펼치기엔 이미 기력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고, 거둬버리기엔 뒤에 있는 이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척, 척, 척, 척.
갑자기 들려오는 군기 가득한 발자국 소리.
일각의 불안감이 증폭되었다.
‘설마…….’
붉은 공간들 사이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색의 혈의를 입은 이들이 일렬로 도열하여 나오기 시작한다.
붉은 공간이 장막처럼 가려져 당최 인원이 몇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
‘여기까지인가…….’
소림사의 제자로서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이런 천수를 예상하지 못했던 일각.
그의 마음에는 생존의 절박함보다는 깨달은 바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삶에 대한 후회가 가득했다.
채채채채채챙.
혈의인들이 일제히 중검을 꺼내어 든다.
자신의 죽음이냐, 다른 이들의 죽음이냐, 라는 저울질 속에서 일각이 전자를 선택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였다.
“아미타불…….”
혈의인들은 마치 덫에 걸려 버둥거리는 사냥감의 멱을 따려는 듯 서서히 다가왔다.
죽음이 느긋하게 다가오는 모습에 일각은 부동심(不動心)을 이뤘음에도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곧 차가운 칼날이 목덜미를 꿰뚫는 감각이 느껴지겠지…….
라고 생각한 순간.
펑! 투캉!
북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충격음이 들려온다.
눈을 뜬 일각의 시선에, 일렬로 다가오던 혈의인들의 진형이 완전히 부서진 것이 보였다.
‘대체 무슨…….’
쐐액──
일각의 귓가에 바람 찢는 소리가 울린다.
그의 커다란 귓불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며 무언가 그의 시선을 지나쳐 날아간다.
‘화살?’
혈의인들도 그것을 보았는지, 중검을 들고 내기를 끌어올려 화살을 쳐내려 했다.
펑! 투캉!
내기가 실린 검에 당연히 잘려나가야 할 화살은, 검을 휘두른 혈의인의 몸을 꿰뚫고 그대로 날아가 버린다.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정도의 투과력.
“스님, 괜찮으십니까?”
“…….”
고개를 돌리니 시뻘건 눈을 한 모용재화가 걱정스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화살을 날린 사람이 그인 듯 손엔 궁이 들려 있다.
대체, 환술진에 어찌 걸리지 않은 것이지?
멍하니 일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재화 시주…….”
“앗! 이런, 스님 귀가…….”
일각이 손으로 더듬어 보니, 귓불에 작은 상처가 생겨 피가 흐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급한 상황이라 조준을 제대로 못 했습니다.”
“괘, 괜찮습니다.”
재화는 혈의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제가 놈들을 뒤로 물리겠습니다. 스님께서 사람들을 깨워주십시오.”
“깨워? 깨워서 어쩔 생각입니까?”
상대는 삿된 사술을 쓰고, 그 숫자도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사술에 취해 정심이 흔들렸던 자들이 다시 일어나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피해서 버텨야죠.”
“버틴다니…….”
피로로 인해 두 눈의 실핏줄이 다 터지고, 입술을 갈라져 피까지 나오고 있는 모용재화의 얼굴을 보니, 새삼 자신의 어리석음이 느껴진다.
여기서 사람들을 수습한들, 도망칠 수 있을 리 없다.
저들의 숫자만 보아도 그건 이미 불가능한 이야기.
“……미안합니다. 재화 시주. 모두 제 잘못입니다.”
죄스러워하는 일각의 말에 모용재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스님! 정신 차리십쇼. 지금 이렇게 무너지시면 어찌합니까.”
헛된 희망이라도 이야기하는 모용재화의 모습에 일각은 더욱이 부끄러워진다.
“조금만 버티면 됩니다. 조금만 버티면 다 해결될 겁니다.”
“그게 무슨…….”
모용재화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한다.
“소운 형님이 오실 겁니다.”
“소운? 진소운 대표 말입니까?”
자신들은 이미 정체불명의 혈의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아마 제 이(二)선도, 삼(三)선도 마찬가지일 터.
이런 수라장을 뚫고 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모용재화의 눈빛은 굳건하다.
“전서에 분명 오시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이곳은 이미…….”
일각이 회의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재화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형님은 오시겠다 했습니다! 그럼 분명 오실 겁니다.”
모용재화는 마치 일각 자신이 불호를 외던 것처럼 반복적으로 이야기를 했다.
자신과 다른 점이라면 그것이 진리인 듯 자신이 한 말을 확실하게 믿고 있다는 것.
“…….”
흔들림 없는 두 눈으로 혈의인을 응시하며 시위를 당기는 모용재화의 모습에, 일각은 더 이상 불호를 욀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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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머릿속으로 전생에 시산혈교가 움직였던 경로들을 떠올렸다.
동시에 현생에 무림학관생들이 움직였던 경로를 겹쳐 그린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 그려진 두 지도가 맞물리자 비관적인 결과가 나왔다.
‘빌어먹을…….’
제 일(一)선은 시산혈교의 본대와 마주하고 있다.
지금 달려가고 있는 이 길 앞에도 이동하는 혈교의 부대가 막고 있을 터.
그 안으로 뛰어드는 건 온몸에 기름을 바르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머리가 한층 복잡해졌다.
‘더 이상 녹림의 도움(?)을 구할 수도 없고.’
이미 한 차례 녹림채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기에 더 이상 그들에게 무언갈 바라는 것은 도둑놈과 같은 심보다.
그리고 난 놈들처럼 도둑놈이 아니니까.
필사적으로 앞을 뚫을 방법을 구상하고 있을 때, 남화성이 말을 걸어왔다.
“궁금한 것이 있다.”
이 새끼는 진짜 가문에다 눈치를 두고 왔나?
“지금?”
“그래. 지금.”
“이 위급한 순간에 굳이 질문을 해야 하냐?”
“해야 한다.”
“빌어먹을 놈…….”
놈은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얘기해.”
“모용재화와 은설란은 네 사문의 사람도 아니다. 근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지?”
“뭔 개 같은 소리야 또.”
“너도 알고 있지 않냐. 이 정도의 적이라면 이미 그들은 적들에게…….”
“뭐? 죽었을 거라고?”
내가 이야기한 것이 맞는 듯 남화성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남들 같으면 이쯤 포기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근데, 죽은 거 아직 확인 안 됐잖아.”
“…….”
“어쩌면, 지금 필사적으로 저항하면서 구조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니냐?”
“……그건 너무 낙관적인 태도 아니냐?”
“시체 못 봤으면 나한텐 아직 죽은 게 아냐.”
나는 남화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죽은 게 아니라면 난 어느 때고 반드시 녀석들을 구하러 갈 거다.”
“…….”
남화성의 말이 이어진다.
“……그건, 네 사람이기에 그런 것이냐?”
“이 자식이 너 안 힘들지? 속도 더 낼까?”
“진소운!! 중요한 질문이다.”
“…….”
그렇게 고생을 시켰는데도 정신을 못 차린 걸 보면, 소정대의 고태만큼 깡다구 하나는 좋은 것 같네. 난 결국 백기를 들고 대답해 주었다.
“그래, 내 사람이기 때문이다.”
“…….”
남화성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얼굴.
이해가 가지 않겠지. 아니 이해하려야 할 수 없는 것이겠지.
이걸 이해할 수 있으려면 끔찍한 고독을 겪었어야 할 테니.
정마대전에서 소정대는 비빌 언덕이 없었다.
태을문이 멸문한 나 또한 마찬가지였고.
그렇기에 적진에 홀로 떨어져도 누군가 구하러 올 거란 희망조차 품지 못했다.
우리뿐이었던가.
모용재화도 그랬고,
은설란도 그랬다.
무림맹 뒤에서 무림맹을 위해 헌신했던 이들 모두가 홀로 외로웠다.
홀로 외롭게 죽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기에 그것들을 다시금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 사람이니까.”
그들을 외롭게 두지 않기 위해.
나 홀로 외롭지 않기 위해.
설사 다시 한번 마교에 의해 무림이 멸망하더라도 홀로 두렵지 않기 위해.
“난 내 사람을 홀로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잠시간의 정적.
남화성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그럼 난 왜 구한 거냐.”
이 새끼는 진짜…….
“다시 환술진에 처넣어 줘야 만족할 생각…….”
남화성이 버럭 외친다.
“대답해라! 진소운! 넌 날 두고 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날 구한 거냐.”
왜 갑자기 화를 내고 난리야. 어색해지게.
나는 녀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갈망하듯 나를 쳐다보는 녀석의 눈빛에 진실을 말해 줄 수밖에 없었다.
“내 명령을 따른다는 건 내게 목숨을 맡겼다는 의미 아니냐. 그럼 내 명령을 따르는 동안은 내 사람이다.”
“…….”
남화성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제야 입을 꾹 다문다.
그리고 전방에 혈교의 부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벌써 여기까지 온 건가?”
개중에는 이쪽을 알아차린 놈들도 있는 건지, 혈의인들 사이에서 소리가 울리고 무기를 빼어 드는 자들이 있었다.
제아무리 천하독행신이 용빼는 재주가 좋다고 한들, 저 포위망을 뚫는다는 건 칼에 찔려 고슴도치가 되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결국 한 명이 부대를 혼란하게 만들고 한 명이 저 사지를 건너가야 한다는 말인데…….
‘왜 태을진경에는 분신술 같은 게 없는거람.’
내가 그렇게 극단적 현실도피를 하고 있을 때.
남화성이 또 입을 열었다.
“그 짐 나한테 맡겨라.”
“……뭔 소리야, 힘도 다 빠진 놈이.”
“그걸 모용재화에게 넘겨주면 되는 거겠지?”
남화성은 내 등에 메여진 짐들을 자기가 짊어졌다.
“……뭐 하냐 너.”
“둘 중 한 명은 저길 뚫고 가야 하는 것 아니냐?”
남화성이 전방의 혈교 부대를 가리킨다.
“분하지만 난 지금 여기 남아 저 망할 놈들과 싸울 자신도 없고, 사술에 걸리지 않을 자신도 없다. ……대신 죽어라 달려서 그 물건들을 모용재화에게 넘겨주마.”
이 자식이 갑자기 약이라도 먹었나 왜 이러지?
“……혼자 가면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거의 죽는다고 봐야지. 괜찮겠냐?”
남화성이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귀신이 되어서라도 꼭 전해주마.”
결연한 다짐을 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남화성.
그가 갑자기 사지에 스스로 들어가겠다는 이유는 몰랐지만, 지금으로선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럴 땐 못 미더워도 믿고 가는 수밖에 없다.
사기 도박하던 소정대 새끼들도 믿었는데 남화성을 못 믿을 껀 또 뭐람.
“좋아. 최대한 요란하게 시선을 끌어주마.”
“알았다. 앞에서 보자.”
나는 기꺼이 나서는 녀석이 고마워 녀석에게 응원의 말을 건넸다.
“이번에도 살아남으면 부적 다섯 장을 주마.”
앞서 달리던 남화성이 나를 한번 쓱 보곤 다시 달리며 버럭 외친다.
“시부럴 새끼!”
꽤나 동기부여가 된 듯 욕지거리를 내뱉는 남화성.
복마부가 그렇게 가지고 싶었나?
나는 남화성과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혈마종의 사생아들아! 여기다! 여기 백도의 전도유망한 협객이 있다!!”
제대로 요란을 떨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