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75화 (175/357)

#175. <혈해를 삼키는 흑염룡(5)>

“괜찮아요? 재화 공자?”

모용재화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손과 발은 파들파들 떨린다.

얼굴을 비롯한 온몸의 핏줄이 터질 듯 바짝 서 있다.

내공을 한계까지 끌어다 썼다는 증거.

“은 소저, 죄송하지만 얼굴 좀 식혀 주시겠습니까?”

목소리마저도 쩍쩍 갈라져 울리는 모용재화를 보며 은설란은 대답 대신 소수신공을 끌어올려 그의 열기를 식혀주었다.

잠시 눈을 감는 모용재화는 금방이라도 쓰러져 자고 싶어 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쐐액.

공기를 가르는 화살 소리에 눈을 번쩍 뜬 모용재화가 은설란을 밀치며 쓰러졌다.

“괜찮습니까? 소저?”

은설란은 자신의 몸 위에 겹친 모용재화의 모습에 바짝 긴장하며 겨우 대답했다.

“네, 괘, 괜찮아요.”

“놈들이 다시 시작하려나 봅니다.”

모용재화는 얼른 일어나 활에 화살을 걸었다.

적들이 쏘았던 화살을 은설란이 직접 회수해 가져다준 것이다.

이미 한번 사용되었기에 날개의 축도 촉의 방향도 틀어졌지만, 최소한 나뭇가지를 꺾어 사용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쐐액.

모용재화의 손에서 쏘아진 화살이 주둔지를 가로질러 혈의를 걸친 이들에게 날아갔다.

자신들이 쏘아댄 수십 개의 화살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지만, 혈의인들은 모용재화의 화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퍼퍽. 쿵!

전방에서 방패 두 개를 겹쳐 들고 있던 이 하나가 화살을 막아 낸 후, 그 충격에 한참이나 뒤로 밀려나며 진형이 흐트러졌다.

“크흑!”

“커흑!”

전진하려던 혈의의 부대는 다시금 게 눈 감추듯 바위 뒤로 숨는다.

그 모습을 보고 모용재화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반나절.

환술에 걸려 쓰러진 학관생들을 뒤에 두고 혈의인들과 대적하며 보낸 시간이었다.

일각이 하나하나 사람들을 깨우고 있지만, 간신히 정신 차린 사람들은 내부가 진탕되어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

그나마 다행이라면, 술사들이 있는 곳으로 통마시 몇 대 날렸더니 더 이상 환술진이 펼쳐지지 않는다는 정도?

‘이걸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통마시로 혈의인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지만, 어느새 그들에게 넓게 포위당한 상태.

앞으로도 뒤로도 나아가지 못한다.

아니, 언젠가 저 포위망이 좁혀지는 걸 막지 못하는 순간.

이곳에 있는 모두가 죽을 것이 분명했다.

부스럭, 부스럭.

뒤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기 무섭게 은설란이 두 손에 냉기를 가득 모았다.

고산지대의 찬바람보다 더욱 시린 냉기가 그녀의 두 손에 어린다.

은설란은 곧장 소리가 들린 곳으로 양손을 내리찍는다.

촤아아아아악.

쩌저적, 쩌저적! 쩌저적!

가문 숲속에 날카로운 얼음송곳들이 바닥에서 튀어나오며 혈의인들의 발목을 노렸다.

모용재화는 잠시 궁을 내려놓은 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검을 들고 혈의인에게 달려들었다.

푹-.

채채챙.

둘은 단박에 죽였지만, 익숙지 못한 검법 때문에 나머지 둘은 접점을 이어간다.

그리고 서서히 밀리기 시작한다.

‘제길…… 치사하게 검으로 싸우기냐!’

‘활전으로 하자!’라는 이야기를 들어먹을 상대였다면 다짜고짜 사술을 쓰고 습격을 하지 않았겠지.

상대의 비겁함을 속으로 욕하던 모용재화는 서서히 혈의인들의 검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재화 공자! 숙여요!”

은설란의 말이 들림과 동시에 벼락같이 고개를 숙이자, 혈의인들의 가슴에 얼음송곳이 꿰뚫린다.

“커흑.”

“크륵.”

핏물을 내뿜으며 털썩 주저앉는 혈의인들.

그 뒤에 은설란이 파리한 안색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괜찮아요? 은 소저?”

“허억, 허억, 허억. 괘, 괜찮아요.”

본래도 핏줄이 보일 만큼 투명한 피부를 가진 그녀였건만, 지금은 아예 핏기가 가신 듯 얼굴이 새하얗다.

누가 보아도 한계의 한계까지 끌어온 상황.

‘제길’

애당초 소수로서 다수와 싸우는 법을 진소운에게 배워 놓고도 써먹지 못하고 있었다.

뒤틀린 화살은 빗나가기 일쑤고, 자신들이 쏜 화살이 자꾸 되돌아오는 걸 알게 된 적들은 이제 화살 대신 창이나 돌 따위를 던지고 있었다.

‘벽력시만 쓸 수 있었다면…….’

모용재화는 평생 자신의 무공이 강하지 못하단 사실이 억울했던 적이 없었건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강한 무공을 원하고 있었다.

자신이 벽력시만 완성했다면 학관생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벽력시만 있었다면 은설란을 탈출시킬 수 있었을 텐데.

새벽 해가 뜨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미완의 벽력시를 쓰고 싶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차마 시도하지 못했다.

끼기긱-

시위를 당길 때마다 뿔과 나무의 접합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멀쩡한 와중에도 각궁을 마구 부러뜨렸던 벽력시를 지금처럼 부러지기 직전에 시도한다는 건, 활을 버리겠다는 의미와 다를 바가 없었으니.

단 한 번의 실수에 자신의 목숨과 더불어 은설란의 목숨, 더 나아가 뒤에 있는 학관생들의 목숨까지 달려있는 상황에서 시도해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후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모용재화가 은설란을 바라본다.

단아한 눈꽃처럼 깨끗했던 얼굴엔 검댕이가 가득하고, 옷들엔 먼지와 얼룩이 잔뜩 묻었다.

사술의 후유증과 수면 부족으로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고, 무공을 한계까지 사용했던 탓에 손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최소한…… 은 소저만이라도…….’

잠시간 그런 계산을 하는 와중.

퍼퍼퍽! 쿵! 쿵!

일각이 혈의인들을 때려눕히며 다가왔다.

“재화 시주, 설란 시주……! 괜찮습니까?”

상대의 안위를 묻는 일각의 상태도 영 좋아 보이지 않는다.

무림학관의 손꼽히는 강자였던 일각의 완벽했던 모습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보다시피 완전 괜찮지는 않네요.”

모용재화가 애써 웃으며 대답하지만, 일각은 금세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다.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일각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분께선 운기행공을 하십시오.”

“응?”

“…….”

급박한 상황에 운기행공을 하라는 일각의 말은 엉뚱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일각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잇는다.

“딱 한 줌의 내공이라도 괜찮습니다. 신법을 쓸 수 있을 정도만 모으세요.”

그제야 일각의 의도가 뭔지 파악한 모용재화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하지만 모용재화의 말을 끊은 일각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은 말다툼을 할 때가 아닙니다. 당장 이 소식을 무림맹에 알려야 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모용재화가 은설란을 보며 말했다.

“은 소저, 운기행공을 하세요.”

“네? 그게 무슨……. 재화 공자는요?”

“전 남아있을 겁니다.”

“재화 시주!”

일각의 채근에도 모용재화가 흔들림 없이 말했다.

“소식을 전하는 것이 중요했다면 하루 전에 그렇게 했어야지요.”

“…….”

잘못을 꼬집는 말에 일각이 입을 꾸욱 다물었다.

“지금 우리가 빠지면 저기 있는 사람은 다 죽을 겁니다.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일각이 고개를 돌려 뒤를 본다.

사문의 사형제들, 속가무문의 사형제들, 정도회에서 관계를 나누었던 수십의 사람들.

그들 모두가 이곳에서 죽는다.

일각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꽈악 들어갔다. 절대 그런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았다.

“…….”

“저는 안 괜찮습니다.”

누군들 그런 광경을 보고 싶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누구 한 사람이라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살아야 할 사람은 이 일에 책임이 없는 자들이어야 했다.

그런 일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용재화가 말을 이었다.

“더구나 곧 도착하실 소운 형님을 생각하면 홀로 도망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고요.”

모용재화의 말에 일각은 당장 반박하고 싶었다.

아직도 그가 이곳에 오리라 믿느냐고.

“…….”

그는 이곳에 올 수 없을 거라고,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기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그러나, 일각은 그 마음을 억누르고 겨우 물었다.

“그 믿음이 배신당해도…… 그래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습니까?”

자신이 느꼈던 회의감을 담아 무겁게 물었다.

그리고.

“네.”

모용재화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답했다.

“……!”

일말의 의심도 없이.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일각을 똑바로 응시하며 재차 말했다.

“네.”

“…….”

아무런 조건 없는.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

순수한 믿음.

이쯤 되자 그 믿음의 근원이 일각은 궁금해졌다.

저 믿음의 바탕은.

모용재화의 순진함인가.

진소운이 보인 책임감의 산물인가.

“알겠습니다. 그럼 설란 소저만이라도…….”

일각과 모용재화가 은설란을 바라본다.

그러나 은설란이 뚱한 표정으로 답했다.

“진 오라버니가 오신다면서요. 제가 왜 굳이 위험한 짓을 해야 하나요.”

일각과 모용재화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렇군.’

일각은 자신도 모르게 모용재화처럼 믿어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동안, 은설란이 전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고 있어요!”

고개를 돌린 일각이 인상을 찌푸렸다.

“재화 시주의 화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했군요.”

이제 평범한 방패로 모용재화의 화살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혈의인들이, 솥뚜껑을 붙인 철판과 커다란 바위 같은 것들을 머리에 지고 오기 시작했다.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광경을 본 모용재화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더 이상 통마시가 통하지 않을 거란 걸 알기에 모용재화는 행공을 필사적으로 운용하며 한 줌의 진기를 모았다.

“백병전을 펼칠 수밖에 없겠군요.”

일각의 말에 모용재화가 뒤편을 바라본다.

아직 학관생들 중에 전투에 제대로 임할 수 있는 이들은 없다.

이곳이 장판파도 아닌데 단 세 명으로 수백 명을 막는다는 것도 어불성설.

‘별수 없군.’

그러곤 여태껏 최후의 최후까지 쓰지 않으려 했던 제대로 된 화살 하나를 꺼내어 들었다.

“아직 미완이긴 하지만, 이거 한 방이면 전방 부대에는 꽤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실패하면……. 그때…….”

모용재화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런 끔찍한 미래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모용재화가 간절한 마음으로 시위에 화살을 걸고 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익.

한계에 이른 각궁이 비명을 내지른다.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버텨다오!’

모용세가의 무공인 건곤파섬검의 힘이 화살촉에 실린다.

양손으로 고정한 화살이 격하게 흔들리고 그에 따라 각궁도 못지않게 떨린다.

끄그그그그극.

최소한의 건곤파섬검의 힘을 조심히 쏟아 화살을 시위에서 놓는 순간.

콰직.

결국 한계에 다다른 각궁이 서로 분리되었다.

팅.

끊어진 시위가 힘없이 늘어진다.

“젠장!!!!”

모용재화의 각궁이 부러진 걸 보자마자 혈의인들이 바위와 방패 등을 던져두고 달리기 시작했다.

일각과 은설란은 모용재화를 위로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간 재화의 화살을 피해 숨어 있었던 상황이 분했다는 듯 혈의인들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던 것.

“재화 시주, 뒤로 나오십시오.”

일각이 합장을 한 뒤, 황금빛이 일렁거리는 두 주먹을 전방에 폭사한다.

퍼퍼퍼퍼퍼퍽.

퍼퍼퍼퍼퍼퍽.

일 초에 삼십여 번 쏘아지는 용왕유권에 혈의인들이 나가떨어지지만, 그 빈자리는 다시금 뒤에서 달려드는 혈의인으로 금세 채워진다.

“하아앗!”

촤아아아악.

은설란이 흩뿌리는 소수신공이 혈의인들의 몸을 얼리지만, 내력이 다한 빙공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모용재화도 다시금 검을 들고 어설픈 검술을 펼친다.

더 이상 방비할 방법도 없이 혈의인들에게 모두 둘러싸여 최후를 예상하던 그때.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녹색의 광명이 사방에 떨어지며, 혈의인들의 머리를 뭉개고 가슴을 짓이긴다.

퍼퍼퍼퍼퍼퍼퍼펑.

퍼퍼펑! 퍼퍼퍼펑!

광폭한 폭발음에 모래 먼지가 사방에 흩뿌려지고, 이에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던 일각과 모용재화 등이 간신히 게슴츠레 눈을 떠 상대를 확인한다.

“허억, 허억, 허억!”

거구의 상대는 모든 심력과 신력을 다 소진한 듯 파리한 안색 그 자체다.

더구나 몸 구석구석엔 커다란 상처마저 품고 있었다.

당최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건지 궁금할 지경.

거구가 모용재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허억, 허억, 너, 너. 모용재화! 너 모용재화 맞지?”

지목당한 모용재화는 거구의 얼굴을 보고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나, 남화성? 당신이 여긴 왜……?”

“허억, 허억, 사,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마치 잃어버린 동생이라도 만난 듯 감격에 몸을 떠는 남화성.

정작 당사자인 모용재화는 이 상황이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화성이 왜 여기서 튀어나온단 말인가?

그리고 왜 자신의 생존에 안심한단 말인가?

남화성은 고통스런 표정으로 침을 삼키고 겨우 말을 이었다.

“……진소운, 진소운이 보내서 왔다.”

“아!!! 역시!!!”

남화성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짐들을 모용재화에게 던지듯 건넸다.

내막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혈의인들에게 둘러싸인 현 상황도, 남화성의 상태도, 도저히 이야기를 들을 상황은 아니다.

얼떨결에 짐들을 살피던 모용재화는 삐져나온 긴 철봉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이건…….’

양 끝에 난 작은 홈과 철봉 가운데 가죽으로 둘러싸인 줌통.

그리고 보따리 안에 가득 들어있는 화살 다발과 천잠사까지.

이걸 진소운이 왜 전하려 한 거지라는 의문이 절로 들 수밖에 없는 물품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뭔가가 그려진다.

“서, 설마…….”

천잠사와 철봉 사이로 모용재화의 시선이 오갔다.

“처, 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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