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다시 쓰는 사천혈사(6)>
망했다.
그렇게나 말하지 말라고 눈치를 줬건만…….
눈치가 없는 건지, 눈치를 안 보는 건지…….
‘근데 내가 언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죽겠다 맹세했지?’
분명 내 완벽한 기억 속엔 없는 일인데.
아무튼 애당초 이런 상황이 생기리라 예상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천으로 향하는 내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도움을 청할 곳이라곤 이 사람밖에 없었다.
최악의 경우 혈교 전체와 싸워야 할 수도 있는데. 전생처럼 무림맹이 올 때까지 하염없이 버티는 미친 짓거리는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차피 흑도 신성이네 흑도의 공동전인이네 하는 말 같지도 않은 소문에 녹림과 의형제라는 소문이 하나 추가된다 한들 별 타격이나 있겠나.
그나저나 안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방두칠은 아주 괴물이 되어있었다.
아무리 천강무극체라고 해도 이건 반칙 아닌가?
구령신초와 성화멸마수의 효능으로 나도 사 갑자가 조금 안되게 내공을 모았는데.
방두칠은 그사이 뭘 처먹은 건지 나에 비해 조금도 밀리지 않는 기도를 선보이고 있다.
“아우님! 아우님도 그간 수련에 게으르지 않았던 모양이군, 으하하하하!”
내 어깨를 퉁퉁 내려칠 때마다 두 발이 땅속으로 푹푹 꺼지는 기분이다.
그나저나 수련만 했다고?
근데 이렇게 강해졌다고……?
“진짜 수련만 하신 겁니까?”
방두칠은 뭔가 찔리는 표정으로 눈알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럼 그렇지, 뭐라도 집어 먹었겠지.
공청석유가 술인 줄 알고 한 동이를 먹었다거나 만념화삼이 안줏거린 줄 알고 마구 집어 먹었다거…….
“사실, 절강의 녹림채를 정리하느라 수련에 완전히 매진하진 못했네. 이리 발전한 아우님을 보니 새삼 부끄럽구만.”
“…….”
아니, 그마저도 안 했다고?
염병, 나 안 해.
그때.
“이런 개 같은 새끼가!”
내 심경을 대변한 욕지거리가 부채주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차갑게 가라앉자, 방두칠이 불만스러운 듯 부채주들을 노려보았다.
“어떤 놈이냐? 어떤 놈이 우리를 방해한 것이냐?”
사실 따지자면 방두칠이 녹림채들과 우리 사이를 방해한 것이 맞지만,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세상 홀로 사는 방두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보였다.
“우린 화엄채, 적화채, 흑봉채. 부채주들이다!”
“그런데?”
“이익!”
말이 안 통한다는 게 이런 것일까?
솔직히 방두칠이 나한테 저따위 말과 태도를 보였다면 오장육부가 뒤집어지는 느낌이었겠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전혀 감도 잡지 못한 태도니까.
부채주들 입장에서도 방두칠이 만만한 놈이었다면 생각을 더 하고 살라며 단매에 도끼로 머리를 갈라버렸겠지만, 내가 방두칠에게서 느끼는 압도적인 기운을 그들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가가. 저들은 우리가 끼어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봐요.”
백소령의 고아한 목소리에 방두칠이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렇다면 그렇다 말을 할 것이지. 역시나 무식한 산적 놈들답군.”
부채주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답답해 속이 터질 것 같다는 표정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꺼져라!”
부채주의 서슬 퍼런 윽박에도 방두칠은 태연하게 내게 물었다.
“나를 이곳까지 부른 이유가 무엇인가, 아우님?”
본래의 목적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그가 온 것은 나에겐 금동아줄이 내려온 일이나 마찬가지.
세상 어디 하나 기댈 곳 없는 놈한텐 이런 형님이라도 있는 게 어디겠는가?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들과 산왕쟁투를 벌여주십시오.”
“응?”
방두칠의 눈썹 한쪽이 치켜떠진다.
내 입에서 산왕쟁투가 튀어나오리라곤 예상치 못한 것이겠지.
“절강성에서 벌인 일도 산왕쟁투를 통한 것이었겠죠? 이곳 사천도 발아래 두시길 바랍니다.”
전생의 사천혈사는 혈교와 무림맹, 사천의 맹주인 청성, 아미, 당가와 그를 따르는 수십의 중·소문파.
거기에 더불어 녹림채까지 끼어들며 아수라장이 되었었다.
피의 역사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거창한 일이 일어난 이유가 있었다는 것.
최소 녹림채들이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사천의 맹주들이 무림맹을 무시하고 움직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후후, 역시나 아우님은 그걸 알고 있었군. 하지만 이제 막 절강을 손에 넣은 내가 굳이 사천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 거지?”
녹림칠십이채를 복속시키는 일은 땅따먹기처럼 차근차근히 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천하의 방두칠도 아는 것이겠지.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형님 말대로 말이 안 되는 소리이긴 하죠.”
하지만 난 방두칠보다 방두칠을 더 잘 안다.
그를 마치 사술에 걸린 듯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보물’같은 말을.
“그렇지만 녹림의 ‘왕’이 그런 것에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응?”
역시 걸려들었고.
나는 그의 호승심을 살살 건드렸다.
“어차피 ‘천하’가 녹림의 ‘왕’의 것인데, 어딜 먼저 발아래 두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양쪽 눈썹을 치켜뜨던 방두칠이 작게 탄성을 내지르며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한다.
방두칠은 전생에서도 호방한 단어 하나에 감정의 격동을 견디지 못했다.
분명 그랬긴 했는데…….
“음화화화화화화화!!!”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고막을 떵떵 울린다.
‘이거 반응이 너무 격한데?’
내공을 담지도 않은 듯한데 내부가 진탕될 것 같다.
거기에 어찌나 기분이 좋았던지 어깨를 내려치는 손에도 자비가 없다.
퍽퍽퍽.
뼈가 부서질 듯한 통증을 겨우 견뎌내고 고개를 숙이니, 실제로 두 발이 땅바닥으로 조금 파고들었다.
이 양반한텐 정도라는 개념이 없는 건가?
“그렇지! 당금 ‘왕’이라면 쫌생이들처럼 이리저리 계산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지!!”
……반응이 전생에 비해 더욱 격하다.
전생엔 그나마 단전이 망가졌기에 성격이 조금 누그러졌던 걸까?
내 어깨를 망치처럼 두들기던 손을 거둔 방두철이 고개를 홱 치켜든다.
“들어라!”
그는 부채주들을 하나하나 쳐다보며 말했다.
“나 녹룡채의 채주이자 절강성의 패자인 방두칠이 녹림도들에게 말하노니…….”
절강성과 방두칠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부채주들이 굵은 침을 삼킨다.
“사천의 녹림채들에게 산왕쟁투를 신청한다!”
“녹룡채라 함은…….”
“항우재림?”
“그자가 왜 여긴…….”
산골에 처박혀 속세와 인연을 끊었더라도 지들 이야기에는 관심을 두고 있었던지, 금세 방두칠을 알아보는 부채주들.
방금 전까지 득달같이 달려들려 하던 이들은, 어느샌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이어 저들끼리 쑥덕거리더니, 정리가 얼추 끝난 것인지 화엄채의 부채주가 입을 열었다.
“녹룡채 채주 방두칠. 산왕쟁투를 받아들여야 함은 알고 있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
“녹림맹의 제 일(一) 규칙을 어길 셈이더냐?”
“그것이 아니다! 우린 지금 산채의 존폐를 위협한 적을 처단하기 위해 이곳에 와 있는 것. 그대도 채주라면 산왕쟁투를 할 때가 아님을 알겠지?”
방두칠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린다.
“존폐를 위협했다고?”
“그, 그래! 그대의 아우라는 자가 우리 세 곳의 산채에 복구 불가능한 피해를 입혔다. 산왕쟁투를 받아들이기 위해선, 그 일 먼저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렇게 나오리라곤 나도 어느 정도 예상한바.
당연히 저런 이유를 대면 산왕쟁투를 이어갈 수 없다.
내가 바라는 건 방두칠이 평소처럼 막무가내로 나서주는 것.
평소의 그라면 그딴 게 무슨 상관이냐고 자신이 산왕쟁투에서 이긴다면 상관없는 일 아니겠냐고 우길 터.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그런가? 그런 거라면 문제가 되지 않겠군.”
방두칠이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뭐지? 알수 없는 불안감에 방두칠의 입을 막아보려는 시도도 하지 못한 사이.
“내 아우도 산왕쟁투에 참가하면 될 테니까.”
응? 저기요?
산왕쟁투는 산적 놈들끼리 하는 겁니다만?
나뿐 아니라 부채주들도 어이가 없었나 보다.
“방두칠 채주! 녹림맹의 규칙을 어기겠다는 것이냐! 그렇다면 네놈은 녹림칠십이채의 자격이 없다.”
그래그래.
차라리 그냥 싸우자고 억지를 부리는 게 낫지. 암, 그렇고말고.
나도 모용재화에 연락해서 벽력시 몇 대 때려주고, 방두칠과 내가 난장을 조금 부리면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방두칠과의 산왕쟁투를 받아주지 않겠나.
내가 산왕쟁투에 참가하는 건 아예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러나 방두칠의 근엄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억지 부리는 것이 아니다.”
“그, 그럼! 저자가 녹림칠십이채의 주인이라도 된단 말이냐?”
“그렇다!”
응? 뭐라고?
잘못 들었나?
내가 아직 청력에 문제가 생길 나이는 아닌…….
“내 아우가 흑룡채의 채주 진소운이다!”
응?
시바,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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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나는 아득해질 것 같은 정신을 필사적으로 부여 잡으며 말을 이었다.
“쌍막채가 있던 자리에 녹룡채와 흑룡채라는 걸 만들었고…….”
내 귀로 들은 사실을 말하고 있음에도 제발 사실이 아니길 빌고 또 빌었다.
“……거기 채주가 저라고요?”
“그렇다!!!”
이 양반이 돌았나?
당연하다는 듯이 얘기하는 저 태도가 더 황당하다.
“그…… 혹시나 해서 물어봅니다만, 흑룡채라는 게 실체가 있는 겁니까?”
“그렇다! 내 부하들과 새로 들어온 이들이 합쳐져 이백 명 규모의 산채다.”
“……그럼 그 흑룡채는 지금 누가 이끌고 있는데요?”
“부채주 자리는 내 부하가 맡고 있다.”
그냥 당신이 산채 두 개를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잖아!
“베일에 싸인…… 흑룡채의 채주가 자네였나?”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구정룡이 기함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시바, 그런 거 아니라고요.
“역시 범상치 않다 느꼈지.”
부당주 감천악이 어쩐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나는 애써 그들의 시선을 피해 방두칠을 노려보았다.
어서 아니라고 말해!
그러나 방두칠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결국 백소령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그래도 제정신인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 다행…….
“미안해요. 진 공자, 이이가 너무 완고해서 말이죠. 나도 그냥 반쯤은 장난으로 내버려 뒀던 건데.”
장난? 자아앙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장난이 어디 있다고?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에요. 덕분에 산왕쟁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잖아요. 후훗.”
“…….”
제정신이라는 말 취소다.
부창부수 아니랄까 봐.
아니, 저 아리따운 미소 뒤에 숨겨진 광기를 봤을 때, 저쪽이 방두칠보다 더 이상하다.
“형수님…….”
당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부채주들은 자신들이 결정할 일이 아니라며 산채로 우리를 이끌었다.
부상자들은 보호자와 함께 남겨두고 가려 했지만 녹림도들이 그걸 용납할 리 없었고, 우린 결국 천 명에 달하는 산적들과 함께 화엄채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와아아아아아아!”””
천지를 울리는 듯한 함성 소리.
‘미친…….’
쌍막채에 방문했을 때의 악몽이 떠오른다.
그때는 금면불도와 독안혈부 두 명만이 왕처럼 앉아 있었지만, 지금은 총 세 명의 채주와 봉우리 하나를 가득 메운 거대한 인파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얼떨결에 화엄채에 끌려온 학관생들과 장로들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
“산왕쟁투를 하기 위해 왔다고?”
화엄채의 채주 조상빈의 말에 봉우리 전체에 울려퍼지던 환호성이 뚝─ 끊겼다.
방두칠이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앞으로 나선다.
“나 녹룡채 채주 방두칠과 흑룡채 채주 진소운이 산왕쟁투를 신청하는 바이다.”
“……진소운은 학관생이라 알고 있다.”
방두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다니고 있을 뿐, 본래는 흑룡채의 채주다!!”
이 사람이 진짜……!
아니야! 아니라고!
녹림채 인원들은 물론이고 학관생들도 웅성거림을 멈추지 못했다.
“흑룡채라니? 그냥 흑도 신성 아니었어?”
“흑도의 공동전인이라 했으니 녹림과도 관련되어 있는 거 아닐까?”
“……대체 정체가 뭐야?”
내 이럴 줄 알았지, 가뜩이나 가시밭길인 내 진로에 불까지 놓아버린다.
아…… 괜히 불렀다. 진짜.
내 표정이 썩어 들어가든 말든, 채주들의 대화가 이어진다.
“그렇다 해도 산왕쟁투를 신청하기도 전에 녹림채에 피해를 끼친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조상빈의 말에 방두칠이 콧방귀를 뀐다.
“그래서?”
“……뭐?”
방두칠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재차 물었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이지?”
그 태도에 조상빈이 뿌드득 이를 갈았다.
“……이 자리에서 네놈들을 모두 죽여버릴 수도 있다.”
그의 말에 학관생들은 물론이고 장로들도 한껏 긴장한다.
바른말로, 이 정도의 숫자 차이면 무공의 높낮이는 어느 정도 무의미해지지 않던가.
하지만 방두칠은 제가 데려온 부하와 우리 일행을 모두 합쳐도 인원이 삼백도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지 않는지, 거침없이 입을 놀린다.
“할 수 있으면 해보라!”
“…….”
방두칠이 두어 걸음 앞으로 걸어나간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방두칠의 부하들은 재빨리 내기를 끌어올리고 몸을 웅크린다.
‘뭐지?’
생각을 이어 가려는 찰나, 방두칠의 몸에서 엄청난 기파가 퍼져 나온다.
퍼퍼퍽.
방두칠의 주변으로 바닥이 조금 파이더니 흙더미가 밀려나고 자갈이 사방으로 굴러갔다.
‘그냥 내기를 일으킨 거라고?’
보통 무인이 무복을 터질 듯 부풀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방두칠은 이 말도 안 되는 신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고 있었다.
방두칠이 동시에 발을 구르자, 대지가 진동하는 기분이 들었다.
“산왕쟁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네놈들을 모두 때려죽이겠다!”
……미친 사람처럼 떠드는데, 그냥 미친 소리처럼 넘겨 들을 수가 없다.
“……꿀꺽.”
진짜로 그렇게 되어버릴 것 같아서.
내가 다 살이 떨릴 지경이네.
“사, 산왕쟁투에서 살생은 엄금되어 있다.”
조상빈이 살짝 쫄린 듯 눈을 내리깔았다.
이 양반아, 벌써부터 그렇게 쫄면 어쩌려고?
방두칠이 손가락으로 그를 척 가리키며 다시 소리친다.
“그러니 산왕쟁투를 받아들여라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
강도도 아니고……, 살고 싶으면 받아들이라니…….
아닌가 산적이니 강도는 맞나?
이 사람, 진짜 무림학관 안 오길 천만다행이다.
혹여라도 무림맹에 들어왔다면 금방 사고 치고 강호 공적으로 찍혀 도망이나 다녔겠지.
진로 하나는 기가 막히게 제대로 잡았다.
방두칠의 기세에 결국 조성빈이 눈을 질끈 감는다.
“조, 좋다. 받아들이겠다. 단, 산왕쟁투에서 패배한다면 녹림채에 피해를 끼친 진소운에게 책임을 지워 그의 목을 치겠다!”
졌을 때 목을 치면 산왕쟁투를 하는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이에 내가 이의를 제기하려 했다.
“저기…….”
하지만 방두칠이 한 발 빨랐다.
“당연히 그래야지!”
……이 양반아, 당신 나랑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죽겠다며?
그렇게 쉽게 얘기해도 돼?
“누가 먼저 나설 것이냐?”
조상빈의 물음에 방두칠이 말했다.
“먼저 둘이 한꺼번에 나와라. 내가 한 번에 상대하겠다.”
“뭐?”
황당함에 눈썹을 꿈틀거리는 채주들을 바라보며, 방두칠이 별거 아니라는 듯 말을 툭 내뱉는다.
“이 몸은 사천에 온 김에 관광을 해야 한다. 산왕쟁투에 시간을 쏟을 겨를이 없다 이 말이지.”
“…….”
이쯤 되자 채주들도 도저히 참아 줄 수 없다는 듯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이제 막 약관을 조금 넘은 방두칠의 행태는 그들의 눈에 오만방자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으니.
“그 말을 후회하지 마라.”
“녹림의 왕은 한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지 않는다.”
얼씨구.
벌써 녹림의 왕이 되셨네.
흑봉채와 적화채의 채주가 먼저 나섰다.
각기 대도와 대부를 든 전형적인 산적의 형태.
전력으로 내기를 끌어올리는 두 사람으로부터 어마어마한 투기가 발산된다.
“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악!”
악바리를 내뱉으며 방두칠을 단매에 쳐 죽일 듯 달려드는 채주들.
그러나.
펑!
흑봉채의 채주가 입에서 하얀 이빨을 마구 흩뿌리며 털썩 스러진다.
순간 표정이 샐쭉하게 변한 적화채의 채주가 주춤거리자, 방두칠이 질풍공으로 적화채의 채주를 쑥- 끌어당긴다.
꽝!
그러곤 맨주먹으로 대부를 산산조각 내고 적화채 채주를 삼 장 밖으로 날려버린다.
──────.
삽시간에 소나기라도 내린 듯 산채 전체가 정적에 휩싸인다.
이 말도 안 되는 신위에 다들 놀라 자빠질 듯 눈알을 부릅뜬다.
오로지 방두칠만이 태연하게 움직이고 있다.
“다음!”
그가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자, 조상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네, 네가 셋 모두를 상대할 셈은 아니겠지?”
“거야 당연하다. 너를 상대할 사람은 내 아우니까.”
조상빈이 다행이라는 듯 작게 한숨을 쉰다.
뭐지? 왜 난 만만하냐?
이거 괜히 기분 상하는데.
조상빈이 바닥에 나뒹구는 채주들을 한 차례 쓸어보고는 나를 노려본다.
“네놈을 쳐 죽여 녹림 동도들의 원수와 채주들의 원수를 갚겠다.”
“채주들을 때려눕힌 건 저 사람인데?”
내가 이성적으로 말했음에도 조상빈은 그리 이성적이지 않게 반응했다.
“문답무용!”
대검에 검기까지 둘러 폭풍처럼 휘두르는 조상빈.
난 억울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크게 외쳤다.
“왜 나한테만 지랄이야!”
동시에 백월제천삼식의 제 일(一)식을 뽑아내며 놈의 대검과 허리춤을 잘라냈다.
떵───
기묘한 소리와 함께 대검이 반으로 갈라져 바닥에 구르고, 바지가 훌렁 아래로 떨어졌다.
조상빈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자신의 대검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계속할 텐가?”
멍하니 바지를 내리고 있는 조상빈을 향해 방두칠이 물었고.
절레절레.
넋을 잃은 조상빈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방두칠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주위를 향해 선포했다.
“이 시간부로 적화채와 흑봉채는 녹룡채의 채주 방두칠의 명을 받든다. 동시에…….”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화엄채는 흑룡채의 채주 진소운의 명을 받든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산채 전체를 울리고,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린다.
하, 그냥 사천 온 동네방네에 내가 흑룡채 채주라고 소문 다 내라 내.
잘하면 사천까지 들리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