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189화 (189/357)

#189. <다시 쓰는 사천혈사(9)>

귀환 여정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

성도 지부장에게 빌려온 무림맹의 깃발을 높이 걸어놓으니 어설픈 산채가 들러붙는 경우도 없는 데다, 수가 워낙 많다 보니 흑도 무림인들도 고까운 눈으로 쳐다보고 지나가기만 할 뿐이었다.

묵엽표국의 표사들도 무림맹 깃발의 이점을 알았는지 위험 때문에 평소 가지 않던 편한 길로 인도하여, 여정에 무리를 느끼는 자들도 없었다.

다만 학관생들 중엔 식사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승호당이야 워낙 야외 훈련을 많이 하고 행군도 자주 하는지라 직접 밥을 해 먹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본산에서 귀하게 자란 우리 구대문파의 정예님들께서는 야외 취사에 익숙한 분들이 없으신 관계로, 그 만들기 쉽다는 죽을 태워먹거나 제대로 익지 않은 죽을 먹기도 했다.

결국 몇몇 학관생들이 불만을 모아 구정룡에게 건의하기도 했지만.

“뭐? 밥을 해 먹기가 힘들다고? 그럼 벽곡단을 씹어 먹어라. 본산에서 수련하며 먹어본 적 없나?”

매몰찬 반응만 돌아오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시무룩해져선 돌아갔다.

어화둥둥 귀한 내 새끼라는 대우는 어디까지나 본산에서나 받을 수 있는 것임을 뼈저리게 배웠을 터.

우리 일행은 어떠냐고?

“은호야, 고기가 모자란 것 같다.”

“금표 형, 눈 다쳤어? 고기는 충분해. 말린 야채가 양이 워낙 많아서 그렇지.”

“난 그래도 고기가 더 좋은데.”

“그러게 말린 육포 좀 더 만들어 놓으라니까.”

언제 준비한 것인지, 금표와 은호는 말린 곡식보다 두 배나 많은 양의 고기와 야채를 때려 넣은 죽을 매 끼니마다 준비했다.

덕분에 우리 일행은 매번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내가 얘들을 굶긴 적이 있었나?’

분명 데리고 다니면서 굶기기는커녕 산해진미를 배불리 먹였음에도, 녀석들의 식탐은 끝을 모르고 커져만 갔다.

“어째, 학관에 있을 때보다 야외 취사를 할 때 살이 더 찌는 기분이에요.”

남궁선화의 말에 성모란도 고개를 끄덕인다.

“난 되려 학관에 있을 때 약간 부실하게 먹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야.”

나는 학관생들을 쓱-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퀭하니 볼이 쏙 들어가고 눈두덩이가 검게 변했다.

사천에서의 일에 이어 연이어 노숙을 하자니 피로가 겹겹이 쌓인 것.

백팔봉 중의 정예라 하는 12봉성들의 상태도 영 시원치 않다.

반면, 남궁선화나 성모란을 비롯해 우리 일행들 얼굴에선 반질반질 윤이 난다.

“다들 안 힘드십니까?”

내 물음에 성모란이 고개를 갸웃했다.

“삼시 세끼 편안히 먹고, 불침번도 없이 잠도 푹 자는데 뭐가 피곤해요?”

아무리 봐도 다른 학관생들의 처지와 별반 차이가 없는데……?

이에 은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

“대사형, 누님들과 재화는 저희랑 함께 정시를 치르시지 않았습니까.”

“아…….”

본래 찐 고생을 해보면 그다음에 하는 고생은 고생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했던가.

새삼 내가 정시 때 얼마나 이들을 굴렸는지 깨달았다.

‘다들 구대문파의 진신제자들 못지않게 귀하게 자라왔을 텐데.’

남궁선화만 해도 신검의 금지옥엽 손녀딸로 손에 물 한번 제대로 안 묻히고 자랐을 텐데.

지금은 말린 육포로 만든 고기 죽을 앉은 자리에서 세 그릇씩 먹어 치우니…….

“왜 그러세요? 공자님?”

내가 바라보자 고개를 갸웃하는 남궁선화.

“아닙니다.”

집에서 귀하게 자란 사람들을 이리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고개를 들기가 무섭게, 마음 한구석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합리화가 쿵 하니 죄책감을 찍어 눌렀다.

‘그래도 뭐, 덕분에 지금 강한 사람들이 된 거니까. 장차 맹에 가서 어떤 무각에 들어가든 적응하는 데 큰 문제는 없겠지.’

내 표정을 보던 성모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뭔가 자기합리화하고 있죠?”

이게 여자들이 말하는 육감인가?

난 얼른 말을 돌렸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걱정하는 중이었습니다.”

“무슨…… 일이요?”

성모란이 불안한 듯 입술을 파르르 떤다.

내가 뭐 귀신인가. 아직 별다른 말도 안 꺼냈는데 저 반응은 뭐람.

“진 공자가 걱정한다니까 더 불안하잖아요!”

“…….”

사실 그렇게 느긋한 상황이 아니긴 했다.

우선은 정도회 장로들.

그 양반들이 성도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제 제자들마저 내팽개치고 무림맹으로 먼저 출발한 이유가 뭐겠나.

가서 뭔가 수작을 부려놓겠다는 의도임이 뻔하지.

본인들 잘못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수작 정도로만 끝나면 다행.

이번 일과 엮어 무슨 음해를 할지 예상조차 안 되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둘째로 무림학관.

학사 일정 중에 대표가, 그것도 대표단 간부들을 모조리 끌고 나가 자리를 비웠다.

정식적인 절차를 밟았다 하지만, 그 또한 총군사가 없는 사이 부장의 월권으로 이뤄졌단 사실이 밝혀진다면?

차후 학사 일정에 차질이 생길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학관 대표 자리를 탐내는 것들이 슬금슬금 다시 움직이겠지.

나는 이번에 확연하게 깨달았다.

학관 대표 자리를 그냥 넘겼다간 무림학관이 얼마나 더 개판이 될지 모른다.

무림학관이 개판이 되면, 차후 무림맹은 전생에서 그랬듯 똑같이 등신들의 집단이 될 것이 분명하다.

‘절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순 없지.’

나는 다시금 맘을 다잡았다.

귀환 여정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무한에 도착함과 동시에 묵엽표국은 자신들의 마차와 인원들을 끌고 되돌아갔다.

무한에서 무림학관까지는 승호당과 학관생들끼리만 움직였다.

“아우으으으! 드디어 도착이다!”

성모란이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다른 이들의 얼굴에도 어느새 미소가 어린다.

‘무림학관’이란 현판이 보이니, 새삼 도착했다는 실감이 난다.

“돌아가서 삼일 내내 잠만 자고 싶어.”

“나도요.”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정문을 지난 순간.

“““와아아아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뭐, 뭐야?”

놀라는 금표와 마찬가지로 일행들도 어안이 벙벙한 상황.

본관 건물로 가는 길 양옆으로 학관생들과 외부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도열해 환호를 내지르고 있었다.

“대체 무슨……?”

그때, 학관생들 사이에서 장우재와 그의 친구들이 걸어 나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표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학관 대표가 학관생들을 지키러 달려가 그들을 구해오지 않았습니까. 그 누구라도 당연히 나와 환호를 보내고 싶을 테지요.”

그런가?

그런 것치고는 백도회나 정도회의 인물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듯한데?

장우재는 영웅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손 한번 흔들어 주시죠. 대표님.”

“…….”

갑자기 손은 무슨…….

이런 환대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주춤거리는 사이, 갑자기 장우재가 내 손을 잡아 번쩍 치켜들었다.

그와 동시에,

“““와아아아아아아아!!!”””

방금 전보다 더 커다란 함성이 장내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흑염룡!! 흑염룡!!”

“멋있다!! 태을문!!”

“최고다! 최고!”

뭔가 듣고 싶지 않은 별호가 자연스레 섞여있는 듯한데…….

어쨌든 누구를 향한 환호인지 명확히 드러나자, 태을문 아이들과 남궁선화 성모란, 모용재화 등도 사방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럴 때마다 군중들은 그들의 이름을 연호하며 환호한다.

방금 전까지 피곤해서 바로 드러눕고 싶다 했던 일행들은 그간의 피곤을 모두 잊었는지, 환하게 웃으며 그들의 환호에 화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뭐,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진 않네.”

#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최대한 빠르게 대응한다고 했지만, 결국 늦어버린 사천 파견.

사천의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되지 않아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던 제갈소명은, 정말 예상치 못한 보고서들에 어안이 벙벙한 상황이었다.

-혈교 동진 멈춤

-혈교 부대 내 이상 감지

-혈교 전투 준비 미비

가장 우려스러웠던 것은 혈교와 먼저 만날 아미파였다.

아미파는 겉으론 혈교 따위에 당하지 않는다며 자신만만했지만, 속으론 두려움에 떨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본산에 설치된 기문진식을 재정비하기 위해 제갈세가에 급히 파견을 신청했고, 속가무문들의 제자들마저 본산으로 끌어모아 방비를 단단히 마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부디 무림맹의 무사들이 파견되기 전까지만 버텨 달라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었거늘…….’

어찌 된 일인지 혈교의 동진이 멈췄다.

“뭔가 더 큰 것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

가뜩이나 혈교에 철강시가 있다는 소식에 예민함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기에, 제갈소명의 신경은 칼날과 같이 벼려진 상태.

“빌어먹을 놈들이…….”

결정적으로 파견이 이렇게 늦어진 이유는 다름 아닌 제령구 때문이었다.

혈교가 펼치는 사술이 워낙에 강력하여, 도력이나 불력이 높은 이들도 순식간에 이지를 상실해 버렸다.

이 때문에 파사와 제령의 기본 도구인 제령구의 소지를 재차 확인하라는 명령서 하나를 하달했을 뿐인데, 곳곳에서 난감한 보고서가 올라왔다.

‘진즉 다 팔아먹었다고?’

너무도 어이없는 상황에 어안이 벙벙하여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한두 놈이면 당장 문책하여 무림맹의 가장 깊숙한 금옥에 처박아 버리려 했으나, 제령구를 팔아먹은 놈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금옥에 수용 가능한 숫자를 아득히 넘어버린 것은 물론, 진짜 실행했다간 무각 몇 개가 날아가 버릴지도 몰랐다.

“으…… 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분노를 해소할 길이 없다.

급히 제령구를 구하려 해봤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가뜩이나 만들기 어려운 도구라 재고도 한참 모자란다.

결국 사천에서 보내온 보고서대로, 효과가 특출하다는 형산파의 복마부를 급하게 사서 쥐여 보냈다.

제갈소명은 손에 쥔 보고서를 구기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두고 보자, 반드시! 반드시!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아니, 제령구를 떠나 이번 사태만 마무리되면 무림맹이 지급한 보급품에 대한 실태조사를 바로 시행하리라 다짐하는 제갈소명이었다.

물론 벌써부터 보급관들의 곡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듯했지만. 이는 당금의 사태에 당연히 있어야 할──.

그때.

“총군사님…….”

제갈소명의 심기가 매우 매우 불편하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감지한 맹주원이 그에게 조심스레 접근했다.

아니나 다를까 제갈소명은 제 신경질을 마음껏 풀어냈다.

“이 자식이!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는 것이야!”

“…….”

오늘 출근한 뒤로 처음 말을 거는 맹주원은 억울하기 그지없었지만, 억울함을 속으로 꾸욱 삼켰다.

‘하……. 한동안은 엄청 시달리겠군.’

제령구를 팔아먹은 놈들 때문에 자신도 덩달아 피해를 입겠지만, 평소처럼 뻗대선 안 된다.

자신도 어디까지나 지은 죄가 있었으니.

잘못하다간 그놈들을 대신해서 한동안 금옥에 처박힐지도 몰랐다.

맹주원은 제갈소명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하며 본론을 꺼냈다.

“그게 아니라 진소운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제갈소명의 눈이 번쩍 뜨인다.

“……응? 그놈이?”

“네. 방금 학관을 통해 연락이 왔습니다. 무사히 모두 돌아왔다고.”

“벌써?”

보고를 받긴 했지만,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다.

‘성도 지부장은 또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듣기로는 성도 지부장이 사재를 털어 마차를 구해주고, 표국까지 고용해 주었다 했다.

모두가 방만하게 무림맹의 비용을 쓰는 와중에, 알뜰하게 맹의 비용을 아끼는 모습이 기꺼워 보이는 것은 당연지사.

제갈소명은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다시금 끌어내렸다.

‘아니지, 그래도 혼낼 것은 혼내야겠지.’

어차피 공은 혁무강이 치하할 테니 자신은 조금 쓴 소리를 해야겠다 마음먹었던 참이다.

장차 만통부에 들어와 큰일을 해야 할 놈이 벌써부터 규율을 뛰어넘는 요령을 피워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마침 궁금한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겠다, 제갈소명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학관에 다녀오겠다.”

“네? 진소운을 보러 가시는 거라면 만통부로 오라…….”

“아니, 되었다. 내가 직접 간다.”

진소운이 무림맹에 입맹한 순간, 혁무강의 귀에 이야기가 들어갈 테니.

혼을 내자면 지금밖에 없었다.

벌컥.

만통부의 덜렁거리는 문을 박차고 나간 순간.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예상치 못한 객의 등장에, 제갈소명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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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해서 여장을 풀기 무섭게, 무림학관장 실에서 호출을 받았다.

‘정확하게는 만통부의 호출이라던데.’

내게 말을 전한 교관도 정확한 연유는 모르는지 그렇게만 말을 전하고는 가버렸다.

‘근데 왜 만통부로 부르지 않은 거지?’

애당초 맹주원을 통해 일을 처리했을 때부터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

득의양양하게 맘껏 월권행위를 저질렀지만, 제갈소명이 오는 순간 다 뒤집어질 것은 자명했던 일.

‘그래도 되려 맹주원이라 일이 수월하게 풀렸지.’

어느 정도 제갈소명에게 징계를 받을 것까지 예상하고, 난 예의 그 보따리를 챙겼다.

주기적으로 은설란이 꽁꽁 얼려놨던 탓에 냄새는 나지 않았다.

‘이거면 조금 무마가 되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며 학관장실을 두드린 순간.

벌컥.

기다렸다는 듯 안쪽에서 문이 열리며, 빙긋 웃고 있는 북원평이 나타났다.

“어서 오시게.”

북원평이 먼저 자리하며 차를 내줬다.

역시나 학관장답게 좋은 차를 마시는구나.

“언제 오신 겁니까?”

“학사 일정이 시작됨과 동시에 돌아왔지. 내가 없는 동안 아주 엄청난 일을 벌였더군?”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학관장님께서도 사정을 대충 아시지 않습니까.”

사실 그가 모르고 있다면 그것도 문제다.

학관장으로서의 자격을 의심받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장로원에서 이번엔 아주 크게 선을 넘었어.”

“…….”

“하필 나와 총군사님.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일을 저질러 버리다니.”

북원평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곧장 그에게 물었다.

“성도에서 무림맹으로 먼저 출발했었는데……. 그사이 뭔가 일을 저지르진 않았습니까?”

“무림맹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니며 뭔가 하는 것 같네만, 쉽지 않은 듯 보이네. 이번 사태가 워낙 컸어야지. 쯧.”

음, 그럼 걱정 하나는 던 건가?

“그래도 안심하고 있지 말게. 그들 입에서 나온 이야기들 대부분이 자네와 관련된 것이었으니.”

빌어먹을, 그럼 그렇지.

그래도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어차피 장로원에 대한 복수는 만통부에 들어가서 차근차근해도 늦지 않을 테니.

나는 기분을 조금 바꾸고 싶은 마음에 화제를 돌렸다.

“살피러 가셨던 일은 잘 해결되었습니까?”

북원평은 일인전승인 삼청무상검의 한계를 넘기 위해 태을문의 속가제자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를 위해 학관장 실을 비워두었던 것이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켠 북원평이 씨익 웃는다.

“잘되었네.”

“듣던 중 다행이군요. 그럼 앞으로 사숙이라 불러야 할까요?”

이것으로 태을문의 제자들도 무림맹에 그럴듯한 뒷배 하나가 생긴 셈이나 마찬가지.

삼청무상검이 태을문의 속가제자가 되었는데, 어떤 잡놈이 함부로 태을문을 근본 없는 문파라 욕하겠는…….

“사숙이 아니네.”

“응?”

지금 일대는 장로님들을 비롯한 일부 원로뿐이니, 속가제자로 들어간다면 당연히 문주님 대에 들어가는 게 당연하지 않나?

의아함에 잠시 할 말을 잃은 사이, 북원평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부순다.

“앞으로 사형이라 부르시게.”

“…….”

나는 멍하니 있다가 귀를 팠다.

귀지가 안 나오는 걸 보니, 머리에 이상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내가 관자놀이를 툭툭 두어 번 치고 있자니, 북원평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나는 그대를 사제라 부르되 앞으로 대제자로 모시겠네.”

대제자……?

머리가 굳어서 뭔가 말이 안 나온다.

북원평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장로원의 어른들께선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셔서 말일세. 결국 문주님께 삼배를 올렸네.”

음, 역시나 태을문은 근본 없는 문파가 맞는 것 같다.

이래서야 욕을 처먹어도 별수가 없는 노릇인 게지.

그때,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얼른 북원평에게 말했다.

“그럼 첫 번째로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사형?”

“뭔가?”

“제가 혼날 때, 총군사님 좀 적당히 좀 말려 주십시오.”

북원평이 갑자기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럴 순 없습니다. 제가 어찌 하늘 같은 대사형에게 그늘을 드리울 수 있겠습니까.”

이 아저씨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방금 사제라 부른다고.”

“그거와 그건 다릅니다. 대사형.”

거 ‘대사형’이란 호칭이 너무 입에 착착 달라붙는 거 아닙니…….

벌컥.

문이 열림과 동시에 제갈소명이 야차 같은 얼굴로 들어섰다.

‘생각보다 더 심각한 얼굴인데?’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죽을죄를 지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제갈소명의 표정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진소운 네놈…… 으드득.”

이를 바드득 가는 제갈소명의 뒤로 그의 어깨를 지그시 짚으며 안으로 들어오는 이가 한 명 더 있었다.

나는 기함하는 심정에 입을 제대로 다물지도 못했다.

‘저 사람이 여긴 왜……?’

백수신검 혁무강.

강호의 절대 고수 중 하나이자, 무림맹주인 그가 무림학관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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