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과거로부터 온 전령(5)>
퍽, 퍽, 퍽, 퍽.
야율극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분명 맞고 있는데, 더 이상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상처가 곪고 곪아서 감각을 느낄 신경 따윈 사라져 버린 것일까.
아니면 이제 아픔을 느끼는 것조차 사치라 생각하는 걸까?
반대로 몸은 평소 견뎌냈던 시간의 반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더 버티고 싶었지만, 더 이상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럼 또 내일 보자고…….”
절로 감기는 눈동자 사이로 악주평의 비열한 얼굴이 보인다.
이상하게도 그간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한 대만 때리고 싶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아……. 일어나야 하는데.’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
더 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일대.
귓가를 간질이는 바람의 소리도 서서히 사그라든다.
완벽한 적막 속에서 조금은 춥게 느껴지던 주위의 공기에도 서서히 무뎌진다.
‘집에 가야 하는데…… 집에 가면 큰 형이 실망하겠지?’
왜 자신이 살아남았을까?
차라리 자신이 죽고 둘째 형이 학관에 들어왔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셋째 형이 다치지 않았다면, 셋째 형은 무공을 완성 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헛된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엉키고 엉킨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감각이 느껴진다.
‘쉬고 싶어…….’
일어나서 기숙사로 돌아가면, 몸에 묻은 오물도 닦아낼 수 있고, 짧은 시간이겠지만 회복도 할 수 있다.
그럼 악주평 일당들에게 반격도 조금은 할 수 있을 테고.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다음 날이면 또 맞을 텐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아니,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이대로도 괜찮은 건가.’
심력이 꺾여버린 야율극은 더 이상 움직일 의지조차도 모두 잃어버렸다.
고요한 어둠이 그의 몸을 뒤덮었다.
#
“헉, 헉, 헉, 헉.”
긴급 호출을 받고 진소운을 쫓던 이자곤은 숨을 몰아쉬었다.
‘뭔 놈의 신법이…….’
더구나 진소운은 기숙사에 들러 악주평의 양발을, 꺾이지 말아야 할 방향으로 꺾어버렸다.
교관과 교두들이 힘을 합쳐 포위망을 만들었지만, 진소운은 전혀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다는 듯 포위망을 유유히 뚫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 진소운이 맞다고?’
견성사자 시험을 치를 때만 해도 진소운의 신위는 분명 뛰어난 후기지수 수준이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 만에 이 정도의 발전을 이뤄냈다.
이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허나 누구도 그 수준에 경각심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무지한 자들은, 앞다투어 단편적인 분노만 표출할 뿐.
“양산봉으로 갔다고 합니다.”
“이 일을 그냥 좌시해선 안 됩니다.”
“감히 학관 내에서 폭력이라니요!”
이자곤은 쓴웃음을 지었다.
언제부터 학관 내의 폭력이 그리 큰 제재 대상이었던가.
되려 수련을 게을리한 피해자를 탓하곤 하는 게 학관 내의 분위기가 아니던가.
‘어른들의 사정인가?’
목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대는 교관들의 면면을 살펴보자면, 다들 백도회와 조금씩 인연이 있는 자들.
자신들의 관리하에서 악주평이 이런 일을 당해버렸으니, 앞으로 백도회를 볼 낯이 안 설 것이다.
‘더구나 상대가 안 좋아.’
그간 진소운은 외로운 싸움을 지속해 왔다.
제법 잘 버텨왔다고 생각했는데 하필 이런 곳에서 일이 터져버렸다.
‘악주평의 삼촌이 감찰각에서 일한다고 했던가?’
가뜩이나 바짓바람이 쎈 무림학관에 무림맹의 직위까지 끼얹어지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진소운을 위해서라도 사태를 빠르게 안정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
그때.
목표 인물을 발견했다는 신호가 들려왔다.
양산봉의 한 공터에 다다른 교관들이 그곳에서 무릎 꿇고 앉은 진소운을 발견한 것.
“진소운! 네 이놈! 감히 학관 내에서 폭력을 자행하다니! 당장 이리 오너라!”
교두 중 하나가 엄숙하게 이야기했지만, 진소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교관들이 강제로라도 끌고 오기 위해 진소운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이상한 점을 눈치챈 이자곤이 그들을 말렸다.
“잠깐만 기다려 보십시오.”
“응? 이 교두, 저놈은 당장에 징계를 받아야 할…….”
“아니, 그게 아닙니다.”
진소운의 앞에 웬 아이가 누워있다.
이자곤이 천천히 다가가자 아이의 얼굴이 보인다.
수업 때 종종 봤던 학관생.
유환문인가? 이름이 헷갈릴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문파의 제자라 기억하고 있었다.
‘야율……극! 근데 저 아이와 진소운이 친분이 있었나?’
진소운은 학관 내에서도 주요 시찰 대상이다.
교두들은 그가 누구와 친한지, 누구와 마찰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지 등을 미리 파악해 두고 있었다.
‘분명 진소운과는 친분이 없는 아이였는데…….’
이자곤이 그런 생각을 할 때쯤, 결국 참지 못한 교두 하나가 나섰다.
“일단 연행하겠소. 도망의 위험이 있으니. 일어나라 진소운.”
교두가 진소운의 어깨를 잡고 강제로 끌어 올렸다.
뚜둑.
“아악!”
그러나 도리어 진소운이 교두의 손을 잡아 꺾은 후 반대편으로 던져버렸다.
당최 무슨 수를 쓴 건지도 알 수 없는 기묘한 수법.
진소운의 한 수에 교두들과 교관들이 전투 자세를 취했다.
더러는 검을 뽑은 자들도 있었다.
“진소운! 이게 무슨 해괴한 짓거리냐! 감히 교두를 공격하다니! 학관에 대한 도전이더냐!”
진소운은 여전히 돌아앉은 채 말했다.
“……댁들은 여길 왜 온 거지?”
진소운의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교내에서 조금 뛴 것 가지고 ‘연행’이란 단어를 쓸 만큼 요란을 떨 일인가?”
“진소운! 넌 학관 내에서 타 학관생에게 위해를 가했다!”
“그놈 죽었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음산하게 들리는 것은 이자곤만의 착각일까?
칼날을 품은 듯 서늘한 목소리에 목이 말라오는 기분이다.
“……이 애새끼는 몇 달에 걸쳐 그놈들한테 죽을 때까지 맞았다.”
진소운이 고개를 돌려 저를 둘러싼 이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응시한다.
“아마 여기 있는 교두와 교관들 중에서도 이 애새끼의 얼굴을 아는 이들이 있겠지?”
“…….”
여기저기서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에게 뭔가 처벌을 내리고 싶다면, 우선 악주평과 그 일당들부터 처벌해라. 그 전까지 댁들에겐 누군갈 징계할 자격 따윈 없으니까.”
뚜두둑.
한쪽에서 팔이 꺾인 채 날아갔던 교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빠진 팔을 맞췄다.
“크흑! 뭣들 하는가! 교권에 대한 도전이다!”
주춤거리던 교관들이 교두의 말에 다시금 자세를 다잡는다.
진소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명령을 내린 교두를 바라봤다.
“이런 꼬라지를 보고 나면 좋게 볼래야 좋게 볼 수가 없지.”
“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스륵-
우뚝 멈춰 선 진소운의 신형이 연기처럼 서서히 사라진다.
퍽.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커다란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진소운은 환영만 남긴 채 이미 교두의 아구창을 날린 상태.
어찌나 강하게 때렸던지, 그의 입에선 하얀 조각이 세 개나 튀어나왔다.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교두들과 교관들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진소운에게 달려들려 했다.
그때 이자곤이 뭔갈 발견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그만!!”
쩌렁쩌렁하게 양산봉이 울림과 동시에 사람들 모두 이자곤을 바라봤다.
이자곤은 천천히 야율극에게 다가가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얼굴의 멍자국은 물론이고, 온몸에 피멍이 가득하다.
이 정도라면 가히 사람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게 당연할 정도.
‘하지만!’
이자곤은 분명 보았다.
야율극의 가슴이 작게나마 움직인 것을.
‘숨이 있다!’
너무 미약해서 잘 느껴지지 않지만 숨을 쉬고 있었다.
맥을 짚으니 불규칙하고 약하지만, 미약하게나마 뛰고 있었다.
“아, 아직 살아있다!”
“살아있다고?”
진소운이 어느샌가 이자곤의 옆에 나타났다.
“어, 어서 의약당으로.”
이자곤이 손을 뻗으려는 사이, 진소운이 먼저 야율극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가타부타 말을 남기지 않고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휘이잉──
진소운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며 이자곤은 불안한 마음을 떨쳐내지 못했다.
왠지 일이 간단하게 끝날 것 같지 않아서.
사라지던 진소운의 표정이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
의약당에 도착한 진소운은 진료 등록을 하라는 의녀들의 말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가 침상 위에 야율극을 눕혔다.
그러곤 곧장 맥을 짚었다.
‘사, 살아있구나!’
기뻐할 새도 없이 불청객들이 끼어들었다.
“여기 이렇게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돼요!”
의녀들의 날 선 음성.
그러나 진소운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여기 약재는 어디 있습니까?”
“무슨…… 거길 함부로…….”
“약재는 어디 있습니까!”
진소운의 거침없는 행동에, 주저하던 의녀가 결국 한 방향을 가리켰다.
진소운은 지체없이 약재 창고로 들어가 마치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익숙하게 약재들을 하나하나 통에 넣기 시작했다.
그때, 한 남성이 내부로 들어선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의, 의원님! 지금 웬 남자가 갑자기…….”
의약당 당주 사마정은 침상에 누워있는 새로운 환자와 약재 창고에 들어간 진소운을 번갈아 보다가 의녀들에게 말했다.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다들 일 보세요.”
“네? 하지만…….”
“뭐, 보니까 젊은 친구가 대충 치료법을 아는 것 같네요. 이럴 땐 그냥 지켜보는 게 나을 겁니다.”
“…….”
무림맹의 의원각에서 온 사람이라 그런지, 생각하는 게 전대 당주들이랑 다르다 생각하던 의녀는 결국 자리를 나섰다.
“흐음……?”
사마정은 야율극에게 다가가 맥을 짚었다.
‘정기가 상하고, 온몸엔 울혈이 가득 찼고……. 대체 뭘 했기에 상태가 이런 거지?’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위태한 상황.
이런 상황에서 의원을 찾는 게 아니라 직접 약재를 짓는다는 데 호기심이 동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약재 창고 안을 들여다보자, 진소운은 벌써 약재들을 하나하나 손질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가루로 만들고 어떤 것은 크게 자르기도 했다.
그렇게 처리한 약재들을 광목천에 싼 뒤, 양손으로 감싸쥔다.
‘응?’
그러자 잠시 후 손안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검은색 약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약을 저리 짓는다고?’
생전 처음 보는 방법.
저런 방식으로 해선 약력이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됐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진소운의 표정은 너무나도 확신에 차 보였다.
그렇게 사발 하나를 가득 채운 뒤, 광목천을 풀러낸 진소운은 약재들 중 몇 가지를 골라내어 다시금 가루로 만들었다.
그러곤 꿀과 함께 가루들을 뭉쳐 단환 세 개를 만들었다.
“…….”
약을 다 준비한 진소운이 문 앞을 막고 서있는 사마정을 바라봤다.
사마정은 퍼뜩 정신을 차리곤 비켜섰다.
“아, 미안하네. 신기해서 지켜보고 있었네. 지나가게.”
그러자 대꾸도 없이 지나쳐 야율극에게 향하는 진소운.
진소운은 그의 입을 벌려 천천히 약을 먹였다.
“침은 놓을 줄 아나?”
“……부탁드리겠습니다.”
“할 일이 있어 다행이군.”
사마정이 침을 놓는 동안, 진소운은 만들어 온 단약을 다시금 으깨어 탕약과 섞은 후 야율극에게 섭취시켰다.
사마정은 시침을 하는 틈틈이 야율극의 맥을 짚었다.
신기하게도 실시간으로 야율극의 맥이 펄떡펄떡 살아나는 게 아닌가?
‘이게 대체…….’
본래 탕약으론 즉효가 일어나기 힘들다.
헌데 진소운이 특이한 방식으로 제조한 약은 즉각적이라 생각될 만큼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진소운도 그걸 아는지, 이어 두 번째 단환을 으깨어 야율극에게 섭취시켰다.
그러자 다시금 맥이 더욱 강맹해진다.
“그…… 질문 하나 해도 되나?”
“…….”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상황일 때 무인의 신경을 거스르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는 사마정이었지만, 그 역시 의원으로서 지금 당장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이내 통성명조차 하지 않았단 사실을 깨닫곤 황급히 덧붙였다.
“아! 난 사마정이라고 하네.”
“사마정? 천묘……”
진소운은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천묘? 그게 뭔가?”
“아닙니다. 의약당 소속이십니까?”
“아닐세. 본래 맹의 의원각에 있었지.”
왜인지 한순간 진소운의 눈동자가 번쩍인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사마정이었지만, 질문을 이어갔다.
“질문을 좀 해도 되겠나? 어차피 다음 단환을 먹이기 전까지 시간이 있을 듯한데.”
야율극을 잠시 바라본 진소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지요.”
“탕약과 단약으로 이렇게 단기간에 효과를 내는 건 어렵다고 알고 있는데. 대체 어떻게 한 건가?”
“……아시지 않습니까?”
그 말의 저의를 찾던 사마정의 머릿속에 한 생각이 번개같이 스친다.
“설마 독을 쓴 건가?”
“네. 구음사의 독엔 혈액을 타고 빠르게 뻗어나가 몸을 마비시키는 부작용이 있지 않습니까.”
“허! 진짜 독을 썼다고?”
진소운이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대신 구음사의 독을 천천히 뒤쫓아가면서 해독할 양양초도 함께 넣었습니다.”
“과연, 구음사의 독을 이용해 약효를 퍼트리고 양양초로 서서히 해독한다.”
진소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마정은 속으로 경탄했다.
의원인 자신도 머릿속으로 그저 가설만 세워봤던 방법이다.
그런데 겨우 약관을 지난 듯 보이는 청년이 이토록 능숙하게 독을 사용해 내다니.
청년의 정체가 몹시 궁금해지는 사마정이었다.
이어 시간이 되었는지, 세 번째 단환을 먹인다.
펄떡펄떡 뛰던 맥이 서서히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허……. 진짜로 살렸군.”
창백했던 야율극의 얼굴에 서서히 혈기가 돌기 시작한다.
죽은 듯이 감겨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서서히 떠진다.
게슴츠레 눈을 뜬 야율극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진소운을 발견하곤 얼굴을 와락 구긴다.
“진소운, 너……. 내 눈앞에 나타나면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고 분명 경고했을 텐데…….”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사마정은 당황스러웠다.
이 청년이 아니었다면 죽었을 목숨이다.
그런데 깨어나자마자 생명의 은인에게 하는 말이 욕지거리라니.
당최 무슨 영문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아, 사마정은 긴장된 표정으로 진소운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이제껏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진소운의 입가엔 미소가 살짝 걸려있었다.
“하아, 이 싸가지 없는 새끼…….”
어이없어하는 진소운의 얼굴엔 묘한 안도가 감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