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원치 않는 초대(2)>
유비가 거창하게 촉한을 세웠지만, 결국 조조 따까리에게 멸망당하면서 황실의 성급 행정구역 중 하나로 돌아가 버린 사천성.
사람들에겐 그저 강이 많고 음식이 특이하다라고만 알려져 있는 이곳은, 때아닌 특수를 맞이하는 중이었다.
다만, 그것이 전쟁이라는 별로 달갑지 않은 특수라서 그렇지.
“빌어먹을 이놈의 전쟁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거야?”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곧 겨울이건만, 언제까지 싸움질이나 하려는지.”
“무림맹 놈들이 단박에 때려잡을 거라 하더니만……. 이거 생각보다 혈교가 강한 거 아냐?”
“어쩌면, 무림맹이 약한 걸지도.”
처음엔 갑자기 성도로 몰려드는 인원들에 입이 찢어질 듯 웃음 짓던 상인들도, 사천성 전체로 퍼지는 전쟁의 화마에 물류와 경기가 얼어붙자 하나둘 얼굴을 굳히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무림맹의 맹원들이 할 말이 없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일단 혈교라는 놈들의 숫자가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무림맹이 자신들의 앞마당에서 피 흘리는 모습을 뒷짐 지고 보고 있던 청성과 아미, 당가가 급똥 마려운 사람처럼 황급히 움직일 만큼 숫자가 많았다.
더구나 개중에 종종 섞여 있는 철강시는 무림맹의 일반 맹원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고…….
창백한 피부를 가진 그 존재가 전장에 나타나기만 해도 무림맹의 사기가 뚝뚝 떨어졌다.
대가리 수로 밀어버리는 것은 무림맹과 친구들의 가장 강력한 특기이기도 했지만, 철강시나 환술 등은 애당초 머릿수로 밀어낼 만한 것이 아니었으니.
‘맹원 분쇄기’, ‘시체 제조기’ 등의 각종 별명이 덕지 덕지 붙은 철강시는 결국 당가의 독왕과 청성의 장문인, 아미의 장로원이 나선 후에야 그 위세가 조금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었으니.
그간 이론으로만 배워왔던 사도 놈들의 사술이, 외부 강사 새끼가 말하는 것보다 더욱 기괴망측했고.
반.드.시라고 할 만큼 후유증을 남겼다는 것.
더구나 무림맹에 입맹하면서 필수적으로 익히는 파사(破邪)와 제령(制靈)도 도통 통하질 않았다.
애당초 제령구를 팔아먹은 놈들이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샌님같이 입맹 첫 달 동안 손가락만 빨면서 제령구를 제 알인 양 품고 있던 놈들도 결국 혈교의 환술에 광인이 되는 꼬락서니를 보고 나선, 그나마 제령구를 가지고 있던 이들도 돌아가면 반드시 팔아먹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맹의 지휘관들 중에서조차 사도나 사술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거나 경험을 한 이가 적었기에, 무림맹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병법서를 읽고 대응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럴수록 늘어나는 것은 부하들의 비명 소리와 상급자를 향한 욕지거리뿐이었다.
그러나.
그 틈에서도 발군의 성과를 보이는 조직이 있었다.
“아니, 근데 승호당 그 새끼들은 왜 지들만 다른 전쟁을 하고 있는 거야?”
“구정룡 당주가 혈교 출신인 거 아니야? 그러지 않고서야 이리 피해 규모가 차이 날 수 있나?”
“그렇다기엔 혈교놈들을 너무 많이 때려잡고 있는데?”
툭 튀어나온 송곳처럼 전공을 쌓아가는 승호당을 보며 사람들이 의구심을 가지자, 구정룡은 별것 아니라는 듯 답변을 내놓았다.
“진소운 그 친구랑 먼저 상대해 봤으니까.”
“진소운?”
“흑염룡?”
낯익은 이름이 들려옴과 동시에, 사람들은 과연 승호당과 자신들간 차이가 무엇일지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선 당연하게도 ‘진소운’이라는 이름과 관련된 것들부터 탐색하는 것이 당연지사.
“대체 뭐냔 말이지.”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찾던 중, 일선에 나가 있는 이들이 기밀문서로 분류된 ‘진소운 보고서’에서 자신들이 찾던 답의 단서를 발견했다.
‘진소운 보고서’에 나와 있는 구출 과정이나 혈교의 습격에 대응하는 방법 등은 기존 맹의 병법서와는 차이가 극명하여 검증에 대한 불안감을 자아냈지만.
당장 하루를 지날 때마다 동료 하나를 잃는 맹원들에겐, 그냥 죽느냐 아니면 시도해 보고 죽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전쟁터란 가혹한 상황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기 충분하지 않던가.
맹원들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의 심정으로 진소운의 병법을 따라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분에 넘치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시발! 미친 새끼들 이리 좋은 방법이 있었는데 왜 그간 숨기고 있었던 거야!”
“개애새끼들! 분명 태을문이라는 좁밥 문파 출신이 쓴 보고서라고 짬 때린 게 분명해!”
“줄일 수 있는 피해를 늘렸으니, 저놈들은 혈교의 간자가 분명하다!”
맹의 지휘부로선 아직 검증되지 않은 병법을 따를 수 없다는 사정이 있었지만, 친우의 죽음을 경험한 맹원들이 그런 것을 이해하겠나.
맹원들은 기밀로 분류된 진소운의 보고서를 조악하게나마 필사하여 다른 부대에 넘기는 것이 관례가 되었고, 이는 곧 무림맹 파견 부대 전체에 필사본이 도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에 무림맹에서도 단속을 시작했다.
“맹원들이 사특한 보고서를 기반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보고가 계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각주 및 당주님들께서는 부하들을 단호하게 계도하여 지휘부의 명령을 따르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나 오히려 파견 부대들을 자극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단호하게 계도? 이 새끼가 미쳤나. 그럼 우리더러 저 사지로 목 내밀고 들어가라고? 이러면 우리도 못 참지, 자꾸 이러면 너네 목부터 따는 거야.”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훗날 무림맹으로 돌아간 이후에 어찌 감당하려 하십니까!”
지휘부 내에서도 진소운의 병법을 따라야 한다, 말아야 한다를 놓고 치열한 설전이 오갔다.
“흠…… 이것이 그 진소운이란 아이가 쓴 보고서란 게야?”
“도, 독왕 어르신……. 그건 기밀문서인데…….”
“우리 당가의 일반 무사들도 가지고 있는 보고서인데, 기밀이 의미가 있는 게야?”
“…….”
독왕 당혁제는 똑같이 필사한 보고서를 품에서 꺼내어 흔들어 보였다.
“효과가 있다면 적용하는 것이 맞는 게야.”
“독왕 어르신…… 하지만, 저희는 무림맹의 명령을 받고…….”
수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당혁제가 검지를 들어 제 입술에 가져다 대곤 ‘쉿’ 하는 소리를 낸다.
“수만 리 떨어진 무림맹의 명령을 언제까지 듣고 있을 게야? 맹원이 다 죽은 후에야 정신을 차릴 게야?”
“…….”
당혁제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으며 나직이 읊조린다.
“맹주 놈은 무섭고 난 안 무서운 게야?”
지휘부 내부에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꿀꺽.
마음만 먹는다면 간단히 손가락을 비비는 것만으로 이 내부의 모든 이들을 중독시킬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당혁제가 마치 악기라도 연주하듯,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휘저었다.
“맹주 놈은 내가 책임질 게야. 지금 중요한 건 상대를 파악하기 전까지 피해를 줄이는 게야.”
독왕의 설득(?)으로 새로운 병법을 받아들인 무림맹은 차츰 혈교를 사천에서 밀어내기 시작했다.
지휘부는 이전까지 자신들의 병법이 엉성했다는 것을 결국 인정했고, 이후부턴 진소운의 보고서를 곧장 따르기 시작했다.
혈교와의 전투가 점점 격화되는 시점.
서서히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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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진 시주, 이것이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하여간, 곧 죽어도 시주라고 부르네.
“거참, 보면 모르십니까? 보고에 있던 염주 아닙니까. 일각 학.관.생.”
뭐라더라? 마불이라 불리던 흑도인의 신물이라 하던데.
사기가 너무 강해 보고의 가장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던 것이다.
그런데 일각의 표정이 어딘가 미묘하다.
“진 시주……. 이건 흑령주라는 물건입니다. 살아생전 마불의 진기가 가득 들어 있는 기물인 것이죠. 이것을 이리 함부로 가져오시면…….”
“근데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보고에 불가에 관련된 물건은 그것뿐이었는데요. 뭐.”
보고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샅샅이 뒤져봤지만, 선장이나 금불상 같은 건 없었다.
애당초 불가와 관련된 보고가 무림맹에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진즉 소림사에서 다 가져갔을 테니까.
“그 뭐야, 역근경으로 사기만 해소하면 쓸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일각은 흑령주를 보며 복잡미묘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당최 이런 기물을 받아도 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저 반짝이는 머리에 대문짝만하게 쓰여있다.
그도 그럴 게, 맹에 충성하는 것을 대가로 월봉 이외의 보상을 받으리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을 테니까.
대가를 받지 않는 게 습관이 되면, 결국 맹과 자신을 일원화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내가 곧 맹이고, 맹이 곧 나라는 기가 막힌 정신승리.
물론 일각 같은 이들에겐 큰 문제가 없다.
배경이 탄탄한 그들은, 승진과 이권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월봉만이 전부인 하급 맹원들은 어떤가.
노력을 하고도 월봉이 땡인 체계 안에 있다 보니, 노력을 하지 않고 월봉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이런 생각을 뜯어고치려면 웃대가리들의 생각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
“싫으면 그냥 도로 주십시오. 팔아서 대표단의 재정에 보탤 테니. 일각 학관생의 활약은 맹을 위한 충심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
내가 손을 뻗자, 황급히 내 손으로부터 흑령주를 떼어놓는 일각.
뭐야, 방금 관음청강수(觀音靑剛手)로 내 손을 피한 거야?
유려한 소림의 무공을 자연스레 발휘한 일각은, 어쩐지 반질반질한 머리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채 말했다.
“파, 팔다니요. 이런 희대의 마물을 함부로 세간에 뿌렸다간 어떤 혼란이…….”
처음부터 이렇게 나왔으면 얼마나 좋아.
내 한쪽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간다.
“그러니까 직접 사용하시겠다 이거지요?”
“……아미타불.”
일각은 흑령주를 소중히 손에 감으며 합장을 했다.
하여간 솔직하지 못한 인간 같으니라고.
하지만 다른 이들이라고 일각과 다른 반응을 보인 건 아니었다.
여삼통의 손에는 새로운 활이.
남궁선화의 손에는 천잠사로 만든 보의가.
철순직의 손에는 전표가 들려 있었다.
나는 그들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말했다.
“혹시나 맹의 보상을 받기 부담스러운 분들은 언제든 반납하셔도 됩니다.”
“…….”
“…….”
“…….”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저…… 형님.”
“응? 왜 그러니 재화야?”
모용재화가 쭈뼛거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그…… 전 왜 아무것도 없습니까?”
“아! 너 말이냐? 너를 위한 물건은 내가 이미 받아 놓았다.”
일시에 얼굴에 화색이 도는 모용재화.
“어, 어떤 거지요?”
“현철!”
“혀, 현철 말입니까?!”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여 주었다.
“그래. 내가 재료를 받아 훌륭한 장인에게 미리 보내놓았다. 다른 재료들이 모이면 훌륭한 활로 되돌려 받을 거야.”
태양궁이라는 말도 안 되는 신기로 말이지.
십오(十五)신기의 내막에 대해서 모르는 모용재화는 그저 ‘현철’이라는 금속에 꽂혀 입이 찢어질 듯 벌어진다.
하여간 귀여운 녀석이다.
“아 참! 그리고 이거 받거라.”
“네?”
전표를 받아 든 모용재화는 전표에 쓰여 있는 금액을 보고 두 눈을 부릅떴다.
“혀, 형님! 이게 무슨! 금전 백 냥이요?”
“그래! 그걸로 나가서 휴식도 취하고 필요한 것도 사고 그러렴.”
“……아, 아니. 그래도 이건…….”
나는 최대한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형이 주는 거니까 그냥 넣어둬.”
이 형님이 앞으로 너한테 미안할 일이 좀 있을 거 같거든.
“가, 감사합니다, 형님!!”
녀석 해맑긴. 벌써부터 미안해지게. 크흠.
어쨌든, 양의팔괘만상진에 대한 일도 백도회에 대한 일도 얼추 정리가 되었다.
제갈소명은 제 손자인 제갈정기 앞에서 조부가 아닌 무림맹의 총군사로 자리해 제갈정기를 금옥에 처박아 버렸다.
사실상 학관에서는 퇴출당한 것이고, 금옥을 나온 뒤에는 하급 무사로서도 활동할 수 없게 된 것.
이번 일로 커다란 인명 피해를 낼 뻔했던 백도회의 대표단은 자연스레 해산 절차를 밟았다.
약속대로 난 백도회가 꾸려놓고 간 대표단 집무실을 통째로 삼켰다. 그리고…….
‘흐흐……. 백삼십 송이라니.’
새 자리에 들어가자마자 칠색화의 재고부터 파악했다.
이야, 이게 다 얼마야?
돈 지랄도 이런 돈 지랄이 있을까 싶지만, 이 칠색화들이 다 내 입으로 들어갈 거라 생각하니 갑자기 백도회에 대한 호감이 마구 샘솟는데…….
“진 대표는 무엇을 받으셨습니까?”
금전 이천 냥짜리 전표를 품속에 잘 집어넣은 철순직이 물어온다.
난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전 그냥 의약당에서 보약 하나 지어 먹기로 했습니다.”
“약이요?”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거의 다 아문 상처를 들어 보였다.
“이번 일로 몸이 많이 상해서 말이죠.”
이어 탄식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다.
“진 공자님. 겨우 그런 걸로…… 혹시 저희들을 챙겨주시느라…….”
남궁선화가 금방이라도 자신이 받은 보의를 넘기려 하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다들 저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연히 제가 챙겨드려야지요.”
나는 나를 둘러싼 이들을 바라보며 웃어주었다.
“전 여러분이 대가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사마정이 만드는 보약은 미래에 가면 무림맹주나 먹을 수 있는 희대의 영약이니까. 후후.
내공 증진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특히나 오행기의 특성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어 준다.
제조 방법은 기밀로 취급되어 미래엔 아무리 돈이 많아도 먹으려야 먹을 수 없는 영약이라 이 말씀.
그 보약을 먹고 나면 멸마수의 화력이 본래 혈옥수 수준으로 올라갈 것이다.
이거이거, 이러다 혈옥수를 익힌 마인으로 의심받는 거 아닌가 몰라, 음하하하하.
그렇게 개인의 사리사욕에서 초탈한 듯 칠색화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때.
“진 대표님. 백도회에서 왔습니다.”
갑작스러운 손님이 찾아왔다.
본래 이 집무실의 원주인들이 쭈뼛거리며 들어선다.
백도회 대표단의 한자리를 차지했던 이들이자, 양의팔괘만상진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자들.
집무실을 빼앗기면서 개인 물품을 챙기러 온 것이었다.
나는 관대한 표정을 내지었다.
“아, 물건 알아서 챙겨 가라 하세요.”
칠색화는 내 개인 사물함에 모두 옮겨놨으니, 감히 가져갈 생각은 못 하겠지.
그럼에도 불안했던 나는 자리를 딱 지키며 칠색화를 보호했다.
작은 상자 하나에 들어갈 만한 물건들을 챙긴 백도회 인원들은 곧장 나가는 대신 내 앞으로 다가왔다.
‘뭐지? 칠색화를 챙겨 갈 생각인가?’
나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심정으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인상을 마구 찌푸렸다.
그런데.
가장 앞선 이를 시작으로 사람들이 하나하나 포권을 쥐기 시작한다.
뭐야, 이거.
“진 대표님. 그간 실례가 많았습니다.”
“응?”
갑작스런 그들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한 사이.
백도회 인원이 말을 잇는다.
“그동안 좁은 식견 때문에 진 대표님을 편협한 시각으로 봤던 것 같습니다.”
그러곤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인다.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며, 이번에 구해주신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를 따라 다른 인원들도 허리를 굽힌다.
호오, 백도회라고 모두 인면수심의 인간들은 아니었다 이거구만.
칠색화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세상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배포에 주변에 선 자들의 얼굴에 감탄이 어리는데…….
“그래서, 그 은혜는 어떻게 갚으시겠습니까?”
“네?”
포권을 쥔 채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백도회 인원들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아니, 이 사람들이 설마 아가리로만 은혜를 갚으려고 했나?
내가 눈썹을 들썩거리자, 한 명이 나서서 어색하게 웃는다.
“피,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다는 듯 식은땀까지 흘리는 백도회 인원들.
나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손가락을 퉁겼다.
“아! 이렇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번에 제갈정기가 금옥에 갇히면서 백도회장 자리가 비었지요?”
“네? 아…… 네.”
제갈정기가 자리를 비우면 자연스레 나타날 거라 생각했던 악주평이 어쩐지 나타나지 않았고, 중심을 잃은 백도회는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금이 기회였다.
“이 기회에 제대로 된 회장을 자리에 올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제대로 된 회장이라니…… 그게 무슨…….”
나는 백도회 인원에게 어깨동무를 한 뒤, 그의 몸을 빙글 돌려 남궁선화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이쯤 눈치를 줬으면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역시나, 그가 놀라서는 묻는다.
“나, 남궁 소저 말입니까?”
“아! 뭐!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백도회 내부의 일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렇게 사분오열되어 있는 순간에야말로 정당한 자격을 갖춘 자가 회장직을 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궁선화는 남궁세가의 직계임과 동시에 자신의 힘으로 온갖 방해를 뿌리치고 학관에 들어온 정예 중의 정예다.
이보다 정당한 자격이란 있을 수 없는 법.
‘제갈기표? 그 족제비를 어디다 쓰려고?’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백도회 인원이 다른 인원들과 눈빛을 마주한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후, 결국 입을 떼는 백도회 사람들.
“그, 그럼 이 일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남궁선화를 향해 손짓했다.
“그렇다는군요. 선화 소저. 함께 나가서 이야기를 나눠보시지요.”
“네? 네?”
나는 얼떨떨한 표정의 남궁선화와 백도회를 동시에 내보내며 말했다.
“신중하게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백도회를 위한 거니까요! 저를 실망시킨다거나, 배신한다거나 해도 조금만. 아주 조금만 마음 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조, 조금…….”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 지들이 알아서 행동하겠지.
내 조금이 얼마만큼일지는 알아서 상상들 할 것이고 말이야.
여기까지 눈치를 줬는데도 제대로 행동 안 하면 그건 진짜 단죄를 해줘야 한다. 피의 단죄를.
여러 인원이 동시에 우르르 나가자, 대표실엔 다시금 고요가 찾아들었다.
“허…… 이렇게 백도회까지 삼켜버렸네요?”
광경을 쭉 지켜보던 성모란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삼켜버리다니요. 그저 당연한 일을 처리한 것일 뿐이지요.”
내 태연한 반응에, 성모란도 이제는 적응했다는 듯 대화의 화제를 옮긴다.
“이제 ‘명사 초대’는 어떻게 하죠? 아직 누가 올 거라고 이야기 안 했잖아요. 백도회에서 초청한 인물을 우리가 행사에 그대로 활용해도 될까요?”
“아마 그건 안 될 겁니다. 백도회가 제 손에 넘어온 걸 싫어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테니.”
“그럼 어떻게 하게요. 진 공자가 따로 초대했다면서요?”
“초대요?”
아니, 내가 초대한다고 올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내 청에 움직일 사람 중에 제일 이름을 날린 사람은 방두칠일 텐데.
어…… 음…….
녹림투왕을 무림학관에 초대하면 안 될걸?
내가 머뭇거리자, 성모란이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뭐야……. 초대 안 한 거예요? 어쩌면 우리 대표단의 상징적인 행사가 될 텐데. 이걸 그냥 유야무야 넘길 순 없어요.”
나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무렴, 백도회마저 무너뜨린 진소운 대표단의 상징적인 행사를 망칠 수는 없는 법이지.
“음……. 다른 서신을 보내길 했습니다.”
“다른 서신이라뇨.”
“초대엔 절대 응하지 않겠지만, 서신을 받으면 제 발로 올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응?”
성모란이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지금 대답해 줄 순 없었다.
그저 모용재화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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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은호가 의심스러운 듯, 모용재화가 내민 전표를 바라봤다.
“대사형이 준 거라고?”
“응.”
“왜?”
“그냥 주는 거라고 맛있는 거 사 먹으라 하던데.”
그의 얼굴에 짙은 의문이 어린다.
“그…… 냥…… 이라고?”
언제부턴가 동갑내기로 가장 절친한 사이가 된 모용재화와 은호는 전표 한 장을 두고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뭔가…… 음모가 느껴지는데.”
모용재화가 불안한 듯, 은호의 얼굴을 바라본다.
“……왜, 왜 그래?”
“아냐. 뭔가 의도가 숨겨져 있어. 왜냐면 대사형은 이런 큰돈을 막 쓸 사람이 아니거든.”
“하지만, 무림맹으로부터 보고를 털어 선물을 하기도 했는데.”
은호가 단호히 고개를 내젓는다.
“그거랑은 달라. 뭔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상하게 대사형은 금전 관련된 일이면 사람이…… 뭐랄까…… 상당히 이상해지거든.”
정확하게 말하자면, 눈이 돌아가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이런 큰돈을 마구 퍼준다고?”
“…….”
은호의 이야기를 듣던 모용재화도 뭔가 슬슬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 기분을 넘어 육감의 더듬이가 딸깍딸깍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 설마…….”
“왜? 뭐? 의심 가는 게 있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설마……. 자기도 관련이 있는데…….”
모용세가 내에서 모용재화만이 개화한 육(六)감이 있다.
지독한 괴롭힘의 나날과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진화시킨 육감.
통칭 조부감(祖父感)!
그 감각이 불안하게 미친 듯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른다.
“으, 은호야! 도, 도망쳐야 해!”
“야, 야! 왜 이래? 갑자기!”
은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학관 밖으로 나가던 모용재화가 비룡조를 쏘아 기숙사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보던 은호도 얼결에 모용재화를 따라 기숙사 건물의 옥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용재화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모용재화!!!! 이 망할 놈!!!! 어디 있느냐!!!!
“커흑!”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격한 사자후가, 내부를 분탕질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