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원치 않는 초대(3)>
“그게 무슨 말이야?”
은호의 질문에 모용재화는 바들바들 떨며 답했다.
“나, 난 할아버지한테 걸리면 죽어……. 어, 어! 분명 죽을 거야.”
옥상에 몸을 웅크려 숨긴 채, 자신의 머리까지 두 손으로 감싸 쥔 모용재화의 행동에 은호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리 그래도 할아버지한테 죽는다니? 세상 어떤 할아버지가…….
아! 얘 할아버지가 풍백파검이었지!
“네가 검 대신 활을 들어서?”
“으, 응!”
은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혼날 줄 알고 활을 선택한 거잖아?”
“아, 알고 있지만……. 알고 있는데. 그래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달까……. 아니, 그러니까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달까…….”
은호는 어처구니없었다.
이렇게 두려워할 것을 예상하고서도 굳이 그 길을 선택하다니.
모순적이게 용감한 친우가 신기했다.
“그렇게 무서워? 맞을 준비를 해야 할 정도로?”
“사, 사실은 따로 외공을 익혀 놓을 생각이었거든. 무, 물론 외공을 익힌다고 한들 내가중수법으로 맞겠지만, 그래도 멍은 덜 남을 테니까…….”
외공까지 익힐 생각을 했다는 말에 은호도 꿀꺽 침을 삼켰다.
이거 그냥 평범한 할아버지가 체벌을 하는 수준으로 짐작해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든 탓이다.
애가 얼마나 맞았으면 이리 불안하게 굴까…….
“하아……. 근데 본가에 계시는 네 할아버지가 어떻게 네 상황에 대해서 알고 오셨대? 다른 사람들이 말한 건가?”
모용재화가 목이 빠져라 고개를 휘휘 젓는다.
“그럴 리 없어. 내가 다들 단단히 입단속을 시켜놨거든. 근데 의심 가는 건…….”
모용재화가 제 손에 들린 전표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
“…….”
은호는 부끄러움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사형! 대사형! 대사형! 대체 절 얼마나 더 부끄럽게 만드실 작정이십니까!’
전표를 보니 대략 그림이 그려진다.
다들 ‘명사 초대’에 불안감을 내비칠 때 혼자서 자신감을 내보였던 진소운.
자신이 아는 한 대사형에겐 인맥이랄 게 얼마 없기에, 당최 누굴 부를 생각으로 저리 자신감이 넘치나 생각했었다.
아무리 대사형이 막 나가는 인간이라 한들, ‘명사 초대’에 대장간 고씨 아저씨를 부를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그게 풍백파검님이었다 이거지…….’
모용재화의 일탈을 알아챈 모용강이 단박에 학관으로 날아올 것을 알았기에 모용강에게 서신을 보낸 것이 분명했다.
모용재화에게 화풀이를 다 하고 나면, 온 김에 ‘명사 초대’ 행사에 참석해 주십사 부탁할 생각이었겠고.
안 봐도 눈에 훤하다.
“하아…….”
결국 이 모든 일의 피해자는 이 불쌍한 모용재화가 되는 것이다.
‘어쩐지 그 돈 귀신이 순순히 전낭을 연다 했더니.’
사색이 된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용재화를 보고 있자니,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
그래도 미친 사람 때문에 모용재화 같은 선량한 이가 피해를 봐서야 되겠는가?
지금도 돈이 생기자마자 친구 먼저 챙기겠다며 자신을 부르지 않았던가.
악인악과(惡因惡果)라, 자고로 일은 벌인 사람이 수습해야 하는 법.
“뭐, 뭐 해?”
품에서 문방사우를 꺼내는 은호를 보며 모용재화가 묻자.
종이를 크게 펼친 은호가 먹을 찍어 붓을 움직이며 대답했다.
“정의구현.”
“응?”
그 어느 때보다 결연한 의지가 담긴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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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신성한 무림학관 내에서, 그것도 학관장실에 들릴 만큼 커다란 사자후를 내뱉다니.
그 괘씸한 침입자를 처단하기 위해 달려온 학관장과 교두들.
그러나.
“……여, 여긴 어떻게…….”
그들은 그 ‘침입자’의 얼굴을 확인하곤 아연실색해졌다.
교두들 중엔 뭔가 안 좋은 기억이라도 떠올랐는지 파리해진 얼굴로 뒷걸음치다 냉큼 도망간 이도 있었다.
침입자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삼청무상검의 기세가 무섭구나. 선배를 보아도 인사도 하지 않고.”
‘침입자’의 말에 뒷머리가 삐쭉 선 북원평이 얼른 포권을 쥐었다.
“모, 모용강 어르신께 인사 올립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주변에 선 이들도 황급히 따라 허리를 숙였다.
“인사 올립니다!”
모용강.
모용강!
그 괴팍하고 치가 떨리는 이름이 학관 내에 울려 퍼졌다.
인사를 올리는 와중에도 교두들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단지 그의 강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작 무서운 것은 바로 예측이 안되는 그의 괴팍한 성격.
“이렇게 단체로 나온 것을 보니 나를 단죄하러 온 것이겠구나. 덤벼보아라!!!”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저희는 혹여 학관 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닌가 하여…….”
학관 전체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사자후를 마구 발산하지 않았던가.
사용인들 중에는 구역질을 하며 쓰러진 이들도 있었고, 학관생들 중에는 전쟁이 터졌나 하여 검을 챙겨 들고나온 이들도 있었다.
당연히 책임자인 학관장을 비롯해 교두들이 나와보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모용강은 그걸 꼬투리 잡아 자신에게 덤벼보라는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인사를 올리고 안내를 할 일이지. 이리 길거리에 세워두는 것이 맞느냐?”
“그, 그럼 학관장실…… 아니, 귀빈실로 모시겠습니다.”
“싫다!”
“…….”
아, 진짜! 어린애도 아니고!
사람이란 나이가 들면 괴팍한 성격이 잦아들기 마련인데.
어째 무공과 함께 성정이 갈수록 더 날뛰는 걸까.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 분노가 차오름에도 북원평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말했다.
“그, 그럼 어떤 일로 방문하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네게 질문하라 허하지 않았다!”
북원평의 입술에 격한 경련이 일었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이 나이 먹고 두들겨 맞아 다리가 부러졌다는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싶진 않았으니.
상대가 아무리 천하의 파검이라 하여도 말이다.
북원평이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고개를 더욱 조아리며 다시 물었다.
“……그럼 여쭙는 것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흠? 그래 질문해 봐라.”
하여간 이 노인네……!
“크흠, 학관엔 어떤 일로 방문하셨는지요…….”
“내 손자놈이 활에 손을 대었다지?”
“……!”
북원평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모용강의 얼굴이 스산하게 변한다.
“……꿀꺽.”
“알고 있었구나.”
아니, 학관생이 자신의 주력 무기를 검으로 정하든 활로 정하든 그건 학관장이 강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 않은가.
“그, 그건…….”
북원평이 뭔가 변명하려는 찰나.
“어쨌든 내게 알리지 않은 것은 분명 잘못이라는 점을 알고 있겠지?”
“…….”
“그러니 내 앞에서 이리 긴장하는 것이겠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 저 집요한 눈빛.
성정이 괴팍한 자들은 대부분 단순한 경우가 많다.
어르고 달래고……. 절대 고수를 두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우쭈쭈 해주면 알아서 ‘엣헴’ 하고 체면을 차리는 법인데.
모용강은 비상할 정도로 상대의 심계를 잘 파악하고 그걸로 상대를 괴롭힌다.
그리고 그걸 즐긴다.
누구보다 많이.
진짜 모용세가의 가주만 아니라면 진즉 강호 공적이 되고도 남았을 인간.
북원평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당최 여기서 어찌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까?
모용강에게 맞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그래도 강호 중진인이 된 이 시점에 사람들 앞에서 뚜들겨 맞는 것만큼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모용강의 성정상 말 몇 마디 한다고 그냥 화가 풀릴 거 같지도 않고 말이다.
“아, 아닙니다! 그, 제가 알았다면 진즉 알려드렸을 것인데…….”
북원평의 시선에 바들바들 떠는 몇몇 교두들이 들어왔다.
최근 백도회와 손을 잡고 가짜 대표단을 만들었던 이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악주평의 일로 속가사문의 대제자인 진소운을 징계하자 주장했던 괘씸한 이들.
북원평의 눈이 번쩍 빛났다.
“모두 교두들 때문입니다!”
“네??”
“본래 그 업무는 교두들의 소관인데, 제게 보고를 제때 하지 않아서…….”
당최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 교두들의 시선이 북원평에게로 쏠리고, 모용강의 시선은 북원평에게서 교두들로 옮겨간다.
“그렇단 말이지?”
우드득.
“파, 파검 어르신 그것이 아니오라……!”
교두들이 뭔가 핑계를 대기도 전에 모용강의 신위가 연기처럼 흐려졌다.
“이, 이형환위?”
쉬이 접할 수 없는, 무공의 안계를 높일 수 있는 대단한 신위를 목격했지만.
……문제는 그 공격의 대상이 자신들이라는 것이었다.
“어억!”
“컥!”
“큭!”
서 있던 교두들이 단체로 갑자기 고통 어린 비명을 지르며 차례로 바닥을 뒹굴었다.
북원평은 신형조차 보이지 않는 모용강의 신위에 굵은 침을 삼키며 식은땀을 닦아냈다.
한바탕 푸닥거리를 한 모용강이 한결 상쾌해진 얼굴로 북원평에게 물었다.
“모용재화는 어디 있느냐?”
“아, 아마 기숙사에 있을 겁니다. 오늘은 휴일이라…….”
“거기가 어디냐?”
일순, 북원평은 저도 모르게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모르고 오신 겁니까?”
그냥 들어오자마자 열 받아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거라고?
이 사람 진짜 백도 무사가 맞나?
모용강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지려고 하자,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바로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사(四)인 기숙사를 뒤졌지만 모용재화의 종적은 묘연했다.
그가 행선지를 밝히지 않고 나갔다는 말만 하는 학관생들.
화를 풀지 못하여 표정이 구겨지는 모용강을 보며 북원평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그때.
쐐액-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북원평의 귀를 간질였다.
‘뭐, 뭐지? 암습?’
분명 인위적인 소리였건만, 주변을 둘러보아도 날아드는 물체는 보이지 않았다.
“뭐야, 이건?”
심드렁한 말과 함께 모용강이 손을 뻗었다.
이어 하늘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던 화살이 모용강의 손아귀에 손쉽게 잡혔다.
‘곡사?’
북원평은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곡사로 쏘아진 화살을 단박에 잡아채는 모용강도 모용강이었지만, 북원평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는 건 정말 수직으로 쏘아졌다는 말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사이, 모용강의 관심은 다른 데로 향했다.
“전서?”
그는 화살촉 끝에 메여 있는 종이를 펴보곤 빽빽하게 적힌 글씨들을 차근차근 읽었다.
과연 무슨 전서일까?
북원평이 감히 질문할 생각도 못 하는 사이.
전서를 다 읽은 모용강의 얼굴은 이미 악귀처럼 변해있었다.
북원평은 숨이 막혀오는 듯했다.
‘뭐, 뭐지? 가문이 공격이라도 당했나?’
미증유의 압박이 모용강으로부터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북원평 조차도 쉬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압력.
이윽고, 모용강의 입에서 분노의 원인을 제공한 자의 이름이 터져 나왔다.
“진소운!!! 이 씹어 먹을 놈이!!”
응?
북원평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그놈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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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당천(一矢當千)
궁 하나로 학관생들을 보호한 모용재화에게 붙은 별호였다.
아직 입맹도 하지 않은 일개 학관생이 가지기엔 비범한 별호.
사술에 취해 정신이 없던 소림과 점창의 제자들의 눈에는, 모용재화의 그 신위가 기함을 금치 못할 수준이었고.
검의 명가 모용세가의 직계라는 그의 출신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용재화뿐만이 아니었다.
세 명의 인원으로 곤륜의 삼십육검한매검진을 막아선 금·은·동 형제에겐 철벽삼룡(鐵壁三龍)이라는 새로운 별호가 붙었다.
‘시벌, 근데 왜 난 아직도 흑염룡이지?’
금·은·동 삼형제는 왜인지 흑혈삼룡이라는 별호가 사라진 것에 아쉬움을 표하긴 했지만.
어쨌든 우리 일행이 사천으로 학관생들을 구하러 갔던 일이 소문으로 퍼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이야기 구조가 술을 땡기게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더구나 내가 공략법을 상세히 써주었음에도, 이를 활용하지 않아 사천에서 삽질을 하며 전쟁을 질질 끌고 있는 무림맹의 행태.
고조되는 전쟁의 분위기.
하염없이 치솟는 생필품의 물가와 철광류의 가격이 사람들을 점점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들에겐 자신들의 불안감을 없애줄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중 단연 최고의 이야기라면 바로 일시당천 아니겠는가.
“암…….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렇고말고.”
소문이 퍼지는 기세로 보았을 때, 빠른 시일 내에 모용세가에 그 내막이 알려질 날이 올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애당초 검의 명가 직계로 태어나 활을 선택한 모용재화이기에, 언젠가 이 어려움을 한번은 겪어야 했다.
“더구나 본래는 그냥 맞아야 할 매를 돈까지 받고 맞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흐음, 차향 좋고.
그렇게 내가 모용재화의 명복을 빌며 칠색화의 향을 차분하게 느끼고 있을 때.
끄아악!
꺼억!
크헉!
복도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뭐지? 습격인가?’
단박에 칠색화를 입에 털어넣은 나는 습격자를 대비하며 흑룡검에 손을 올렸다.
‘악주평? 제갈기표? 언 놈이든 단박에 팔을 부러뜨려 주지!’
이미 모든 싸움이 끝났건만, 아직도 자신의 패배를 인정치 못하고 이리 무력시위를 하다니.
꼴사납기 그지없다.
정의를 사랑하고 법도를 준수하는 나로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행위다.
아, 내 소중한 차 시간을 방해해서는 절대 아니고 말이다.
나는 태을진경을 끌어올리며 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그리고 잠시 뒤.
쾅!
거대한 폭음과 함께 집무실의 문이 산산조각 났다.
어라? 좀 격한데?
자욱하게 낀 먼지들 사이로 한 인형이 걸어 들어온다.
거침없는 태도, 당당한 행보.
분명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어떤 이의 걸음걸이였다.
‘뭐지? 왜 여기…….’
먼지를 뚫고 얼굴에 심술을 덕지덕지 붙인 채 들어온 이는, 지금 다른 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그래 분명 다른 곳에 있어야 할…….
“진소운…….”
으드득.
풍백파검 모용강 어르신이 이 시간에 여긴 왜?
지금 일탈의 길에 들어선 손자를 흠씬 패주고 있어야 할 그가 이곳에 나타났다.
“감히 네놈이 모용세가의 대를 끊어어어어?!!!!!!”
손자 대신 나를 죽어라 팰 기세로.
시발…… 뭐가 어떻게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