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원치 않는 초대(4)>
“감히 네놈이 모용세가의 대를 끊어?!!!!!!!”
꽉 쥔 두 주먹.
붉게 달아오른 얼굴.
실핏줄이 터진 눈동자.
체면 따윈 내던져 버린 채 팡팡 뿜어내는 콧김까지.
아무튼 딱 봐도 모용재화에게 화를 풀어내지 못한 것이 보인다.
근데 어째서 그 화살이 나에게 날아온 것일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를 끊다니요?”
“허, 모른 척을 하겠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려던 모용강은 제 옷을 잡아채는 부서진 문이었던 것을 한 손으로 잡아.
으드드득, 드득……. 콰탕.
……찢어버렸다.
와……. 절대 고수가 되면 저런 것도 할 수 있구나.
내 탄성과는 별개로 모용강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이다.
“그렇다면 생각나게 해주마.”
두드득, 두드득.
손가락의 뼈마디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목을 풀면서 나는 소리가 집무실 전체를 울린다.
저게 어딜 봐서 절대 고수의 풍모냐고. 차라리 동네 왈패라면 모를까.
어디까지나 내가 기대했던 바는 모용재화를 죽도록 패는 와중에 나타난 모용강을 급히 말리고, 모용재화의 입장을 대변하여 조손 간의 오해를 푸는 아름다운 것이었건만.
어찌 된 일인지 흑도인들도 벌벌 떠는 분노 조절 안 되는 절대 고수가 나를 철천지원수로 여기고 있었다.
과연 제갈소명 앞에서 입을 털었던 것처럼 혀를 굴리면 그가 이해해 줄까?
그럴 수도 있겠지.
문제는 일단 저 화를 어딘가에 풀도록 해야 설득을 할 수 있단 거겠지만.
“잠깐!”
“…….”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내가 당당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용강이 뭔 짓거리라도 해보라는 듯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할 말이라도 있느냐?”
“후우……. 먼지가…… 콜록콜록…… 말을 못 하겠군요. 그러게 왜 엄한 문은 부수셔서.”
“뭬야?”
나는 혀를 차며 천천히 창문으로 걸어갔다.
모용강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래, 무슨 말이라도 해봐라. 그래야 내가 사지를 다 부러뜨려 놓진 않을 터이니.”
급기야 그의 눈빛엔 살기까지 어린다.
“……그래도 소가주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 아니더냐?”
아니, 애당초 아들의 은인이면 사지를 부러뜨리면 안 되잖아.
상식과 이성이 결여되어 있다.
저런 사람을 다루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드르르륵.
나는 창문을 열고 창틀에 발을 걸쳤다.
“너 지금 뭐 하는…….”
손자병법에도 나와 있는 최고의 계책.
삼십육계(三十六計) 줄행랑.
펑.
전력으로 펼친 천하독생신이 주위의 풍경을 순식간에 바꾸었다.
“진소운!!!!!!!”
모용강의 목소리도 점점 멀어지고.
가을의 공기가 어느 때보다 상쾌하게 느껴진다.
#
-좋은 말로 할 때 서는 게 좋을 것이다.
전음인지 음공인지 모를 쩌렁쩌렁한 음성이 고막을 찢을 듯 울린다.
뭐야, 무서워.
나는 대경한 심정으로 발을 더 빨리 놀렸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만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유형의 인간을 말해준 적이 있었다.
압도적인 무공을 가진 자.
분노 조절 불가자.
속을 알 수 없는 자.
저 세 가지 유형이 한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으리란 건 아버지도 몰랐겠지?
아무튼 지금 모용강을 상대하는 최고의 방법은 그냥 ‘도망’이다.
내가 경험한바.
천하독행신은 강호를 모두 뒤져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큼 훌륭한 신법이다.
모용세가의 신법이 훌륭하다 한들, 천마와 태을검제가 합심하여 만든 신법을 쫓아올 바는 아니지.
더구나 내 내공은 무려 사 갑자다.
거기에 일상처럼 적응된 행공까지 펼치면…….
‘하루 종일도 도망칠 수 있어!’
왠지 방패까지 들면 마음이 더 편해질 것 같은 심경이 드는 건 왜일까?
-오호라! 네놈이 신법에 자신이 있나 보구나!
다시금 고막을 찢을 듯 울리는 전음.
나는 마음속으로 심심한 사과를 보냈다.
모용강이 아무리 절대 강자라 한들 쫓아올 수단이란 게…….
펑! 퍼펑! 퍼퍼펑!
응?
공기가 터지는 소리에 뒤통수가 쎄하여 돌아보니.
좁쌀만큼 작았던 모용강의 신형이 폭발음과 함께 성큼성큼 가까워지는 것 아닌가?
뭐여! 시벌!
내가 놀라선 속도를 더욱 올려보지만, 모용강의 전음이 무섭게 귀에 꽂힌다.
-내 적 중에 네놈만큼 빠른 발을 가진 놈이 없었을 줄 아느냐?
아니, 애당초 난 적이 아니라니까!
펑! 퍼퍼펑! 퍼퍼퍼펑!
모용강은 자신의 발치에다 기의 폭발을 일으킨 후, 그걸 딛고 공간을 축약하고 있었다.
와……. 전생의 모용재화가 화살을 멀리 보내는 개념을 자기 할아버지한테 배웠던 거였구나…….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사이, 모용강은 어느새 십(十) 장 안으로 거리를 축약한 상태였다.
몇 번만 똑같은 짓을 하면 나를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
나는 허벅지와 종아리가 터져라 속도를 올렸다.
“멍청한 놈! 그냥 맞으면 될 걸 굳이 화를 돋우다니!”
애당초 무슨 말을 해도 때릴 생각이었네. 저 인간!
이젠 전음을 쓰지 않아도 되는 거리만큼 따라온 모용강.
아슬아슬하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이 여간 분했는지, 결국 나를 앞서고자 자신의 발치에 또 폭발을 일으켰다.
펑!
순식간에 나를 지나쳐앞으로 나선 후, 나를 세우려는 의도.
하지만 나도 쉽게 당해줄 생각은 없지.
모용강이 내 앞을 막아서는 순간.
‘지금이다!’
뿌드득.
나는 순간적으로, 발목을 비롯한 하반신의 모든 관절이 비명을 지를 만큼 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저, 저! 빌어먹을 놈이!”
내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모용강은 더욱 분이 오른 표정으로 나를 쫓기 시작했다.
모용강이 폭발의 강도를 세세하게 조절할 만큼 미세하게 내기를 유용하는 사람도 아니다.
별호도 풍백파검이잖아?
‘이렇게만 도망 다니면…….’
그때.
모용강과 목숨 건 술래잡기를 하던 나는, 순간적으로 눈앞의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이, 이게 무슨…….”
멀쩡한 학관의 풍경이 마구 뒤엉키고 혼탁하게 변한다.
그리고 일그러진 공간은 뚜렷한 손의 모양으로 변했다.
권강? 허공섭물?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뚜렷하고 크잖아?
“컥!”
정체 모를 무언가를 인지한 즉시 죽어라 방향을 돌렸지만, 이미 무형의 거대한 손이 내 옆구리를 때린 뒤였다.
쾅!
발이 엉킴과 동시에 바닥을 수십 바퀴 구른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이놈!!”
어느새 뿌연 먼지 속에서 거대한 권격을 품은 모용강이 다가오고 있었다.
챙!
나는 필사적으로 흑룡검을 뽑아 모용강의 주먹을 막아냈다.
쾅!
금강무괴철이라는 최강의 금속에 맞닿은 모용강의 주먹.
하지만 권격이 해소되긴커녕, 검을 그대로 지나쳐 명치를 때린다.
퍼펑!
가슴뼈들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지만, 아파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미 모용강이 두 번째 수를 흩뿌렸으니까.
건곤무적장.
파괴력으론 건곤파섬검에 못지않은 무지막지한 장법.
허, 이 영감님 진심이네?
나는 흑룡검으로 연화를 시전하여 건곤무적장을 흘림과 동시에, 왼손으로 만화무적권을 떨쳐냈다.
눈앞 가득 퍼진 만화무적권의 권형에 모용강의 눈초리가 더욱 날카로워진다.
“이놈이! 감히 으른에게 대들어?!”
아니, 애초에 본인부터 한참 어린 후기지수 상대로 전력을 다해놓고는……!
떠엉! 떠엉! 떠엉!
벽파권으로 대응하는 모용강의 권격과 나의 권형이 마주치며 종 울리는 소리가 넓게 퍼진다.
이와 동시에 나는 쌍천검결로 그의 신위를 옥죄었다.
촤르르르르르륵!
허공을 빈틈없이 메우는 흑룡검들.
하나하나에 절명할 위기를 느끼게 할 만한 검기가 어려있었건만, 모용강은 심드렁해하는 표정이었다.
“나를 그 뱀과 닭 놀이 하는 놈들 수준으로 본 것이냐?”
그의 오른발에 강한 열기가 어리며, 화룡이 불을 뿜어내듯 사방으로 열을 뿜어내 검기를 불태워 버린다.
역시나 화끈한 양반이다.
“이제 다 한 것이냐?”
열기와 검기를 손짓으로 날려버린 모용강이 여전히 분을 참지 못하는 얼굴로 다가온다.
다 했냐고?
“설마요.”
이래 봬도 내가 명색이 끈질긴 거 하나로 호교법왕 모가지도 딴 사람이란 말이지.
나는 그를 향해 씨익 웃어주었다.
“이제 시작입니다.”
백월제천삼식
제 일식.
‘극쾌’
흑룡검이 호쾌한 소리와 함께 빛살처럼 뻗어나갔다.
#
“……으.”
“똑바로 손 안 들어!!!”
모용강의 호통에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진소운이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어, 어르신 벌써 한 시진이나 지났습니다. 이 이상 손을 들고 있다간…….”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곧 죽을 듯한 시늉을 하는 진소운을 보면서 모용강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 무공의 깊이가 되는 놈이 겨우 한 시진 가지고 힘들어한다고?’
처음 놀란 것은 자신의 평생의 깨달음인 공멸권을 피해냈을 때다.
이어 쌍천검결에 검기를 덧씌운 것도 놀랄 일이었건만, 그 뒤에 쏘아낸 쾌검은 대체 뭐란 말인가.
날카롭기는 둘째치고, 속도가 예상을 아득히 벗어났다.
조금만 늦었다면, 이제 막 검을 잡은 놈에게 앞섶이 잘리는 수모를 겪었을지도 모른다.
‘검마 그놈의 무공이 분명한데…….’
대체 오 년 전에 증발하듯 사라져 버린 놈의 무공을 이 녀석이 어떻게 익혔단 말인가.
그리고 마지막에 가선, 일전에 보았던 만검에 검강을 씌우고 쌍천검결을 휘두르는 미친 짓거리까지 보이지 않았던가.
내공의 양은 둘째치고, 외공으로서 몸이 단련되어 있지 않다면 보여줄 수 없는 파괴력.
그런 수준에 이른 놈이 겨우 손 들고 있는 것 하나로 힘들어한다고?
진짜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쯧, 설이랑 얼추 균형이 맞을까 했는데. 어느새 이리 따라왔누?”
모용설은 최근 강호에서 차세대 검후(劍后)라는 말을 정도로 많은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그래서 슬슬 이야기를 꺼내 봐도 되겠다 싶었건만, 어느새 이놈은 또 다른 경지의 문을 열어버렸다.
하지만 모용강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진소운은 그저 얼빠진 표정만 지을 뿐이다.
“네?”
“똑바로 손이나 들엇!”
그 모습에 모용강은 괜히 신경질을 부리며 버럭 소리를 쳤다.
진소운은 그에 지지 않고 은근슬쩍 손을 조금씩 내리면 모용강에게 물었다.
“어르신, 근데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왜 이러냐고?”
진소운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진짜 모르겠어서 그렇습니다.”
“그럼 왜 도망갔느냐?”
“당연히 무서운 존재가 따라오면 도망가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 아닙니까?”
태연자약한 반응에, 모용강이 ‘허!’ 하며 실소를 터트렸다.
“그게 아니라 잘못이 있어서 도망친 것이겠지.”
“아니! 대체 제가 어르신께 무슨 잘못을 했단 말입니까!”
급기야 억울하다는 듯 양손으로 바닥을 팡팡 내려치는 진소운.
“다시 손 들어라…….”
“넷!”
그 와중에 요령까지 피우다니.
이놈은 당최 파검이라 불리는 자신이 무섭지도 않단 말인가?
“아무튼 전 정말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없다고? 모용세가의 직계를 꼬시고 협박하여 궁을 들게 한 것이 죄가 아니라면 뭐가 죄라는 거냐?”
모용강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진소운이 아연실색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꼬시고 협박하다니요……!”
이렇게 발뺌할 줄 알았다.
그래서 분에 못 이겨 전서를 찢어버리지 않으려 애쓴 것이지.
“쯧.”
모용강은 품 안에서 전서를 꺼내 진소운에게 던졌다.
팔랑거리며 떨어져야 할 전서가 마치 철판이라도 되듯 빳빳하게 펴진 채로 진소운에게 날아든다.
진소운은 눈치를 봐가며 다시금 손을 내린 뒤 전서를 잡아채 읽기 시작했다.
[불초소자 모용재화, 조부님을 직접 뵈어야 하오나. 스스로에게 너무도 부끄러워 이리 인사드리는 것을 용서하여 주십옵…….
저는 단 한 번도 궁을 잡아야겠다 생각한 적이 없었으나 협의의 마음으로 따르기 시작했던 흑염룡 대협은 저의 그런 마음을 이용…….
더불어 제가 궁을 들지 않는다면 제 주위의 모든 이가 죽을 수도 있다는 협박에 어찌할 수 없이…….]
전서를 다 읽은 진소운은 작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와, 여기 나온 흑염룡이란 새끼는 아주 개새끼네요.”
전서를 읽는 순간, 제 얘기인 줄 알면서도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더구나 간간이 언급되는 강호의 사건들과 얽힌 이야기들이 현실감을 더욱 자아낸다.
허, 이럴 줄 알았으면 모용재화에게 궁이 아니라 붓을 들릴 걸 그랬다.
그런데…….
‘가만…… 어디서 많이 본 글씨체인데?’
조금 집중해서 글씨체를 확인하자, 전서 위로 다른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이거 분명, 그러니까 분명…….
‘……은호! 이 새끼가! 친구 때문에 감히 대사형을 팔아넘겨?’
진소운은 금방이라도 전서를 불태워 버릴 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것을 쏘아본다.
진소운이 분에 못 이겨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고 모용강이 물었다.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냐?”
진소운이 튀어오를 듯 몸을 일으킨다.
“아닙니다, 어르신! 전 정말 억울합니다. 이 전서는 날조와 선동으로 가득 찬…….”
“닥쳐라! 그 전서에 거짓이 있다 한들. 모용재화에게 궁을 들린 것까지 거짓이라 고하진 않겠지?”
맹렬한 기세로 일어서던 진소운이 잠시 몸을 주춤거린다.
“그, 그건…….”
“이미 학관장에게 다 듣고 오는 길이다. 특별히 재화를 위해 궁술 강의까지 만들어 줬다지?”
시발, 외통수네.
“사실들이 이렇게 명확한데도 네 죄를 인정하지 않겠다 이거냐!”
진소운은 손을 앞으로 내밀며 모용강의 걸음을 멈추어 세웠다.
“자, 잠깐만요! 사실상 대가 끊긴 건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말이지? 잘 말해야 할 것이다. 명년 오늘, 네 제삿밥을 먹고 싶지 않다면.”
꿀꺽.
진소운이 굵은 침을 삼키며 머리를 최대한 굴렸다.
“사, 사실상 모용설 소저가 검법으론 더 훌륭하지 않습니까?”
“응?”
“그리고 모용세가는 그렇게 꽉 막힌 가문이 아니라 들었습니다.”
모용강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지어졌다.
“호오라. 데릴사위를 들이라는 말이렸다?”
“뭐,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겠고 더불어…….”
“좋다. 그럼 네가 모용세가의 데릴사위가 되면 되겠구나.”
“……엥?”
갑작스런 모용강의 말에 진소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시벌, 이건 또 뭔 소리야. 진짜 정신 나갈 것 같네.’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는 모용강의 사고방식에 진소운은 머리가 점점 아파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