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불편한 사절단(5)>
무림맹에서 파견한 토벌단 아니 사절단…… 아니, 이제는 그 무엇도 아닌 게 되어버린 행단은 순탄하게 태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염귀비와 혈투는 의외로 표국의 인원들이나 무림맹의 인원들에게 말도 걸지 않았기에 갈등을 빚을 일도 없었다.
다만, 밥을 먹을 때마다 내 옆으로 와 앉는 통에 이제 쟁자수와 표사들마저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내 여린 마음에 작은 상처가 남긴 했지만, 언제는 누가 그런 걸 신경 써주기나 했던가.
어쨌든 진중으로 가는 동안 문제는 없었다.
산을 넘을 때마다 종종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지긴 했지만, 함부로 앞을 막아서는 사람은 없었다.
확실히 얼치기 산적들이 많이 생긴 듯했다. 지나는 마을마다 삐쩍 마른 사람들이 즐비했고, 객잔에선 소면 외엔 파는 음식이 없었다.
‘하긴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우리 일행들을 보고 나면 뒷머리가 삐쭉 서겠지.’
본래 사절단의 인원들도 특이하기 그지없었지만, 염귀비와 혈투까지 합류한 뒤에는 괴랄하기 짝이 없는 집단으로 변해있었으니까.
아마 어지간히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이 집단에 시비를 걸 인간은 없겠지.
그렇다고 문제가 아예 없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진중에 가기 위해 지나쳐야 하는 대도시인 태곡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왠지 모르게 볼이 따가워지기 시작하여 고개를 돌려보니.
“두근두근, 이제 정의를 세울 수 있는 것이야?”
태원으로 향하는 흑도인들이 거리에 즐비하고, 길목마다 단체로 싸움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선 당서희가 흥분한 기색을 보였다.
“하아…….”
나는 별수 없이 가장 난잡해 보이는 객잔으로 찾아 들어가 당서희만 데리고 다른 자리를 잡았다.
당연히 염귀비와 혈투가 따라 자리했고.
다행히, 나만 검을 숨기면 일행 중에 무기가 외부로 보이는 이들은 없었기에 먹잇감이 되기도 쉬운 상황.
“소저, 그대는 아주 대단한 미색을 가지셨군!”
아니나 다를까, 염귀비의 얼굴을 보고 긴 환도를 어깨에 둘러멘 사내 하나가 대뜸 다가와 염귀비의 턱을 손으로 퉁겼다.
“어머!”
염귀비는 마치 소녀처럼 놀란 눈망울을 보이며 얼굴을 붉게 물들였고, 흑도 사내는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혀로 핥았다.
“오늘 밤 내 그대에게 화끈한 운우지락을 선보이고 싶은데…….”
하지 마 등신아, 너 진기 빨려…….
흑도 사내는 자신이 탐내는 여인이 희대의 마녀인 것도 모른 채, 범 대가리에 제 머리를 스스로 집어넣고 있었다.
나는 당서희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 정도면 괜찮을 듯하군요.”
난 여태껏 압수해 놓았던 젓가락 통을 당서희에게 내밀었고, 당서희는 콧김을 내뿜으며 얼른 젓가락을 한 움큼 뽑아 들었다.
아니, 뭐 고슴도치라도 만들 생각이니?
내가 황당한 눈빛을 하든 말든, 당서희는 절도 넘치는 동작으로 사내를 가리켰다.
“잠깐! 강호의 질서를 더럽히는 악당! 그만하는 편이 네 신상에도 좋을 것이…….”
당서희가 무협 소설에서 본 듯한 대사를 치며 젓가락을 날리려는 순간.
퍼퍽! 뿌드득.
“끄아아아아악!”
괴랄한 타격음이 들리고, 남자가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우와! 팔이 어떻게 저렇게 꺾이지? 호오, 너무 자연스러워서 난 원래 관절이 저렇게 움직이는 줄 알았네.
양팔이 움직이지 말아야 할 방향으로 꺾인 흑도 사내가 꺼억꺼억 대고 있을 때.
염귀비가 손가락을 튕기더니 작은 불꽃을 생성해 냈다.
“운우지락이라…… 후훗, 귀여워라! 근데 안 되겠어요. 당신의 진기는 너무 지저분해 보이는걸요.”
화르륵.
염귀비의 손에서 뻗어나온 불꽃은 삽시간에 남자의 머리 전체에 옮겨붙었다.
남자는 팔이 꺾인 와중에도 불을 꺼보겠다며 양팔을 버둥거려 봤지만, 노릿하게 타는 냄새만 더해질 뿐 불길은 좀처럼 약해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악!”
일행인 듯 보이는 이들이 동시에 달려들어 머리를 때리고 물을 부어도 불길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남성의 머리카락을 모두 태우고 이어 머리에 붉은 화상 자국을 남긴 후에야 불길이 잦아들었다.
“…….”
“……대체 무슨.”
“꿀꺽.”
단 한 수에 불과했지만, 압도적인 모습에 객잔 내의 그 누구도 쉽사리 몸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사달의 장본인인 염귀비가 가는 손가락으로 제 코를 살짝 집으며 울상을 짓는다.
“후우…… 냄새가 심하네요. 더 이상 음식은 못 먹을 것 같아요.”
이제 와서 소녀 흉내를 낸다고 그게 통하겠냐?
“굳이 불태울 건 또 뭡니까?”
어처구니없는 내 표정에도 불구하고, 염귀비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싱긋 웃는다.
“화끈한 걸 좋아하는 것 같았잖아요. 소녀도 화끈한 걸 무척이나 좋아한답니다? 우훗.”
두 번 화끈했다간 화염지옥의 재림을 보겠구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니.
……이번엔 젓가락을 든 채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분하고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당서희가 눈에 들어왔다.
‘아차!’
사흑련에 가서 ‘정의를 세운다’, ‘협행을 하겠다’ 등의 이상한 짓을한다면 정말 문제가 커진다.
때문에 미리 기운을 빼놓으려 했던 건데……. 내 작전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더구나 혈투와 염귀비의 일 수를 본 이들 중에 더 이상 우리에게 덤벼들 엄두를 내는 이들도 없었다.
‘어쩐다, 이제 와서 다른 객잔에 가볼 수도 없고.’
평소에는 그렇게도 많던 왈패들이 왜 꼭 이럴 때는 없는 걸까?
대충 다음을 노려보자며 당서희를 위로하려는 때에, 당서희가 특유의 멍한 무표정으로 물어온다.
“악인이 악인을 처리하면…… 그것도 정의를 세운 것이야?”
“흠…….”
나도 궁금해지네, 협객이 협행을 하면 정의 구현이라고 하는데.
악인이 협행을 하면 그것도 정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나?
내가 고민에 빠진 사이.
“설마요. 그냥 분풀이한 거예요. 더러운 손으로 제 옥안을 만졌잖아요?”
“난 내 주변에 얼쩡거리는 날파리를 쫓은 거뿐이다.”
당서희의 질문을 들었는지 염귀비와 혈투가 대신 대답했다.
애한테 참 좋은 거 가르친다. 제길.
#
저 두 미치광이가 합류한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며칠 관찰을 했지만,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밤에 자는 척도 하면서 암습을 하지 않을지 기다려 보기도 했고, 시비를 걸거나 해코지를 하진 않을지 경계를 했지만 두 사람의 행동은 별반 특이한 것이 없었다.
정말 그냥 동행을 하고 있는 중인 듯했다.
그들에 대한 관심을 끊고 나니 태원으로 향하는 길이 지루하기 그지없어졌고, 난 그간 미뤄왔던 무공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비록 직접적인 수련은 할 수 없지만, 개념을 잡거나 심상 수련은 할 수 있을 테니.
요즘 내가 깊이 빠져 있는 것은 바로 공멸권이었다.
의지를 통해 공간을 격하여 위력을 행사한다.
허공섭물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개념의 무공.
모용강이 자신의 가문 사람이 된다면 알려주겠다 했지만, 현실성 없는 이야기였으니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볼 수밖에.
우선 원리를 생각해 보았다.
허공섭물이 유형화된 내기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공멸권은 외기의 지배 개념으로 접근해 봐야 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것이 아닌 기운을 의념으로 지배하여 움직인다는 것.
‘근데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린가?’
전형적인 상식인인 내 입장에선 무슨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했겠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몸으로 맞아본 덕분에 머리로는 아무리 부정해도 몸으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기억 속의 모용강의 모습을 한 장 한 장 나누어 들여다보며 공멸권을 살폈다.
‘대체 뭐지?’
다시 떠올려 봐도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갑자기 일그러지며, 커다란 손바닥 형상으로 만들어질 뿐이니까.
하지만, 위력 하나만큼은 대단하다 느꼈다.
‘만약, 검의 모양을 만들고 날까지 세웠다면?’
아무리 피했어도 중상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더욱 탐나는 무공이었다.
‘다시.’
이번엔 기억 속 장면의 모습이 아닌 ‘감각’의 모습을 떠올렸다.
전생엔 악몽의 순간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이 기억력 때문에 매일매일이 끔찍한 하루의 연속이었는데, 그 저주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그렇게 새로운 감회에 빠져들어 갈 때쯤, 감각의 홍수 속에서 어딘가 기이한 감각의 조각이 떠올랐다.
나는 얼른 방금 전 기억을 되감아 다시금 감각에 집중했다.
미친 듯이 쫓아오고 있는 모용강.
그 앞에서 죽어라 도망가고 있는 나의 모습.
그 사이로, 아주 미세하고 미약한 기운이 나를 앞질러 가고 있었다.
‘뭐지?’
기억을 잠시 정지한 뒤, 그 부분을 확대하여 살폈다.
공멸권처럼 공간의 뒤틀림을 품고 있는 작은 이슬.
작은 이슬…….
작은 이슬…….
‘……!’
순간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공멸권의 비밀을 밝혀낼 단서라는 걸.
‘문제는 이게 뭐냐는 건데?’
내가 가진 기억들과 기록들을 모조리 동원하고 마교와의 끔찍한 경험까지 다 떠올려 보았지만, 비슷한 기운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단서를 찾았지만, 정작 정체를 몰라서 쓸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나는 모용강의 가르침도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리고…….
[무의 도와 자연의 도가 하나로 합치하려는 시도. 그것이 바로 공멸권(空滅拳)이다.]
모용강이 한 말 중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내었다.
바로 ‘시도’.
모용강은 무공의 도와 자연의 도의 근본이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시도’라는 말을 썼다.
이는 공멸권이 자연의 도와 합치된 상태는 아니라는 말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합치가 되었다면, 애당초 나와 술래잡기를 할 리가 없었겠지. 이미 내 앞에 서 있거나, 나를 제압할 수 있었을 테니.’
그렇다면 이 ‘작은 이슬’이 바로, 모용강이 말하는 ‘시도’일 것이다.
무의 도는 의념에 의해 움직이고, 자연의 도는 법칙에 의해 흐른다.
나는 모용강과 같이 손안에 기운을 모아 유형화시켰다.
어떠한 의도도 없는 기운의 덩어리.
여기에 강한 의지를 담아 쏘아낸다.
펑.
기운은 반장도 나아가지 못하고 작은 소성을 내며 사라졌다.
공멸권처럼 공간이 일그러지거나 자연의 기운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하긴 의념이란 게 쏜다고 쏘아지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심검의 경지에 올랐다는 건데……. 미친! 이 인간 심검으로 나한테 사기 친 거 아냐?’
의심에 의심이 이어지다 보니 자연스레 모용강의 모든 것이 의심된다.
하지만 그가 다른 것도 아니고 무론으로 장난을 쳤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신없이 생각을 이어가고 있는 그때, 혈투가 내게 다가왔다.
“뭐 하고 있는 거냐?”
자꾸 가까이 붙지 마세요. 사람들이 보면 친한 줄 알 거 아냐.
나는 최대한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냥, 심심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혈투가 갑자기 실실 쪼개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뭐야, 내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었던 건가……?
“무림맹 사절단 내에서 사술을 수행하다니 정말이지 겁대가리 없는 놈이구나.”
“네?”
“……!”
저만치 앞서가던 악병비가 ‘사술’이라는 말에 귀를 쫑긋하더니 뒤를 돌아본다.
저저 진짜 귀신 같은 인간.
혈투는 끈질기게 내게 달라붙었다.
“사부가 누군지 말 안 해줄 테냐?”
하지만 나는 무언가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 듯한 예감에 살짝 몸이 달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사술이라니?”
“흥! 계속 모른 척하겠다?”
“아니, 진짜 몰라서 묻는 겁니다.”
“으응?”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보던 혈투가, 진지한 내 표정에 잠깐 얼빠진 표정이 짓더니 이내 홱 하고 고개를 돌린다.
“네놈은 내 질문에 답변하지 않는데, 내가 왜 네놈에게 답변을 해야 하는 거지?”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래?
어린애도 아니고.
본래 같았으면 대꾸도 안 했겠지만, 지금은 공멸권에 대한 호기심이 너무 강했다.
“그럼 먼저 물어보십시오. 대신 제 질문에도 꼭 대답해 주셔야 합니다.”
“좋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혈투는 갑자기 전음을 보내왔다.
-검마의 무공은 어떻게 익힌 거냐?
역시…… 알고 있었나.
내 사정을 봐준 듯 전음을 보내온 덕분에 나도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뺏었습니다.
“뭐야?!”
아니, 왜 전음 잘 쓰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러는지 원.
혈투가 갑자기 큰 소리를 낸 탓에 쟁자수들과 표사들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악병비는 강철창을 어루만지고 있네.
그래도 나름대로 사절단 단장이라고 나를 보호해 줄 마음이 조금은 있는가 본데?
나는 혈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제 제 차례입니다. 사술이라는 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그러나 혈투는 미간을 일그러뜨린다.
“……넌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제대로 대답했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직접 물어보시든지요.”
“그놈이 어디 있는 줄 알고.”
“얼마 뒤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내 대답에 혈투의 눈이 번뜩인다.
“정말이냐? 만약 거짓이라면…….”
“언제든 찾아오십시오. 무림학관으로, 학관대표 진소운을 만나러 왔다고 찾아오십시오.”
검마가 그렇게 말하라고 했으니, 거짓말한 것도 아니고.
설사 내가 찾아오라 한들 혈투가 무림학관에 올 수나 있겠나.
무림맹이 바로 코앞인데.
의심의 눈초리를 나를 보던 혈투가, 결국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고는 털어놓기 시작한다.
“……네놈이 쓴 것은 사술에서 흔히 쓰는 속임수가 아니더냐.”
“속임수요?”
“그래. 이렇게.”
혈투가 손바닥을 펴, 숲으로 기운을 쏘아냈다.
잠시 뒤, 숲속에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끄아아아아아악!”
머리털이 삐쭉 설만큼 소름 끼치는 비명.
하지만 아무리 기감을 퍼트려도 숲속에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한 겁니까?”
“소리를 담아 다른 공간에서 터트린 것이다.”
“소리를 담는다고요?”
“그래, 사술쟁이들이 사람을 속여 먹을 때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이지.”
생각해 보면 혈교의 술사들은 거리가 꽤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환술진을 펼치곤 했었다.
처음엔 뭔가 기관을 설치해 뒀겠거니 하고 넘겼는데.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이상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정말 몰랐던 거냐?”
“백도 문파의 정도(正道)를 걷는 제가 그따위 좌도방문을 어찌 알겠습니까?”
“호오……!”
혈투는 되려 신기하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상당히 불편하네요.”
혈투가 ‘과연’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한다.
“그렇다는 건, 네가 본능적으로 좌도방문의 술에 끌렸다는 것 아니냐. 역시나 흑도 연맹의 공동전인은 달라도 다른 것인가?”
시바 아니라고!
모용강이라는 백도 문파의 정도(正道)를 걷는……. 음 아닌가? 꼭 정도를 걷는 사람이라고 볼 순 없겠구나.
태생이 모용세가여서 다행인 거지, 그 사람은 본래 강호 공적이 되고도 남았을 사람이니까.
“그럼 그 기운 안에는 소리밖에 담지 못하는 것입니까?”
“음…….”
혈투는 생각하지 못했던 듯, 한참을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때, 반대쪽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는 참으로 흥미로운 사람이네요. 기운 안에 다른 것을 담겠다니……. 혹시 오늘 밤에 나와 무론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 나눠보지 않을래요?”
어느새 내 어깨에 제 손가락을 올리고 있는 염귀비.
의도가 빤히 보이는 그녀의 말에 나는 명백한 거절의 의사를 보였다.
“됐습니다. 이 손도 치우시죠.”
“저런…… 흑도 연맹의 공동전인이라면 당연히 음양합일공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거나 가져다 ‘무공’이라고 붙이지 좀 마라.
그리고 왜 자꾸 친한 척인데. 불편하게.
이러다 진짜 악병비가 날 흑도 간자로 봐도 할 말이 없게 생겼다.
염귀비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건 말건 혈투를 바라보자, 생각을 끝낸 그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담을 필요가 없다. 기운이란 가공을 거칠수록 본연의 특색이 사라지는 법이니까.”
“본연의 특색이 사라진다…….”
어쩐지 혈투가 마지막에 남긴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돈다.
그때, 표사가 악병비에게 제안했다.
“조금 돌아가도 이쪽 길로 가는 것이 나을 듯한데 어떠십니까. 요즘 각문채가 꽤나 요란을 떤다고 하더군요.”
“그런가?”
“네. 다른 행단들도 이쪽 길을 많이 이용한다 합니다.”
표사의 말에 악병비가 대답하려던 찰나.
나와 대화를 하던 혈투가 꽤나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이쪽으로 갔으면 싶군.”
“네?”
그의 손가락을 따라 모두의 시선이 이동하고.
“…….”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혈투가 가리킨 곳은 요란한 각문채가 위치했다는 곳.
여태껏 이런 적이 없었기에 표사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각문채가…….”
“무림맹의 사절단이 산채 하나를 피하겠다고 돌아가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안 그렇소, 단장?”
서로 은근히 피해왔던 악병비에게까지 말을 거네…….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악병비의 성격상 이런 말을 듣고도 참을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천하의 혈투가 입을 연 이상, 자신의 의견을 굽힐 생각을 하지도 않겠지.
……결국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난 싸움이 일어나면 혈투와 염귀비 중, 누굴 먼저 공격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쨌든 난 백도 문파의 정예니까, ‘정의’를 세워야지.
암, 그렇고말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어떻게 하고 싶지?
갑자기 악병비의 전음이 들려왔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여태껏 행로에서 나한테 준 선택권이라곤, ‘언제 물을 마실 것이냐’밖에 없었으면서.
……이런 중요한 질문을 한다고?
황당해하는 사이, 더욱 황당한 말이 들려온다.
-네 의견에 따르지.
시바, 혈투 하나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악병비까지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네. 진짜.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대답했다.
“그냥 돌아가죠. 산채 만나는 것도 귀찮은데.”
내가 턱짓으로 반대편을 가리키자, 혈투가 두 팔을 교차해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난 이쪽으로 가고 싶다.”
“그럼 일행과 그리로 가시면 되겠네요.”
“그럼 동행하겠다는 약속을 어겼으니, 너희라도 다 죽여야겠군.”
시바, 뭐 하자는 거야?
나는 구겨지려는 표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악병비를 바라보았다.
“단장님, 역시 어르신 말씀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뭐 각문채가 아무리 무섭다 한들, 그래도 혈투보단 덜 무섭겠지.
혈투는 사람을 부수잖아?
나의 빠른 태세전환에 혈투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악병비의 눈초리는 이상하게 휘어진다.
-역시 그런 건가…….
악병비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전음을 끝으로 몸을 홱 하니 돌렸다.
미치광이와 이념심문관 이끌고 가자니 하루하루 수명이 닳는 느낌이다.
빌어먹을, 돌아가기만 해봐라.
내 깎인 수명만큼 뭐라도 받아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