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초대받은 불청객>
사천에서 벌어진 무림맹과 혈교의 전쟁이 예상외로 장기화되고, 산서성을 중심으로 하북, 하남, 섬서에 걸친 가뭄으로 인해 기근이 발생하면서 강호 전체의 경기가 둔화되기 시작했다.
전국 단위로 행상을 펼치던 표국과 상단들이 둔화되는 경기에 적자를 버티지 못하여 결국 지부를 철수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지부에서 일하던 이들은 가뜩이나 어려운 판국에 손가락만 빠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런 와중에 안휘성의 한 상단은 매일같이 방을 붙여 사람을 모집하는 공고를 내, 손가락만 빨던 이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 상단은 바로, 태을문에서 운용하는 대천상단이었다.
본래 상단을 보수적으로 운영해 왔던 대천상단은, 그동안 거대한 창고에 쌓아왔던 미곡과 곡식들을 강북과 강서에 유통하면서 때아닌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사람을 고용하고 고용해도 손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배타적 성향이 짙은 각 지역의 미곡상인들마저, 엄청난 곡식을 가득 쌓아놓은 대천상단의 확장을 버선발로 반겼다.
지부가 생기면 덩달아 유통되는 물자의 양이 많아지는 만큼, 엉덩이가 무겁기로 유명한 미곡상인들이 제 발로 안휘성까지 방문하는 경우도 왕왕 생겨났다.
물론, 평생 태을문 외당의 당주였던 진태산이 뭐 대단한 예측을 해서 미곡을 쌓아왔던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처음 남궁세가로부터 창궁상단을 뜯어낸 진소운이 상단의 운영을 보수적으로 하길 원했던 것.
가뜩이나 없는 재산에서 창고를 짓고 물건과 적산을 쌓아 운용하는 방식은 상단의 이익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었지만, 조언을 해주는 왕금산은 오히려 진소운의 이런 방침을 환영하는 편이었다.
붓을 놀리던 왕금산이 진태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자네는 참으로 부러우이, 훌륭한 아들 덕분에 이렇게 큰돈도 만지지 않나?”
덕분에 다른 상단들이 잠정 휴업을 이어가고 최대한 몸을 웅크리며 휴식을 취하는 동안, 진태산은 그야말로 대웅묘의 현신이 되어 계속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왕 장주님이 하실 말씀은 아니시지요. 영특한 따님 덕분에 저보다 더 많은 돈을 만지시지 않습니까?”
본래 가득 쌓이는 서류로 인해 발 디딜 틈 없었던 진태산의 집무실은, 어느새 수많은 사람들이 바삐 오가고 일을 하는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자리에서 왕금산 또한 진태산처럼 대웅묘의 현신이 되어 일을 하고 있었다.
왕금산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이게 왜 우리 딸 때문인가, 다 빌어먹을 자네 아들 때문이지.”
“허! 그렇게 아끼던 제 아들에게 드디어 ‘빌어먹을’이란 별호를 붙이시는군요.”
안휘성의 무림맹 지부로부터 물자 유통 권리를 받은 대천상단은,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양의 물자를 왕가장과 나누었고.
이로 인해 원래도 밀접했던 관계가 더욱 밀접해진 탓에, 왕금산은 아예 본래 대천상단 주변의 땅을 닥치는 대로 사들여 공동 업무실을 지어버렸다.
더구나 최근 닥친 각종 재앙적 문제들로 인해 인근 성들의 물자 유통에 문제가 생기면서, 본래 무림맹의 안휘성 지역만 담당하던 대천상단과 왕가장은 그 세를 넓혀 하남과 강소 절강까지 유통망을 넓히고 있었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사람을 고용하고 고용해도 손이 부족하고,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아! 이럼 어떤가. 우리가 공통으로 투자한 시설들에 대한 권리를 모두 자네에게 주지. 대신 우리에겐 이익의 일 할만 돌려주게.”
지금 안휘성 일대에서 발생하는 유통 수익률에 비하면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는 조건이었지만, 진태산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천상단은 남의 고혈을 빨아먹지 않습니다.”
“젠장! 욕심을 좀 내란 말이야! 자넨 젊잖아!”
“장주님도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화산과 점창과의 거래를 끊은 뒤로 휘청였던 왕가장의 가세는 서방의 유통망을 새로이 개척하며 다시금 예전의 성세를 회복했고.
무림맹과의 거래, 미곡의 유통을 통해 이제는 강남과 강북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수준까지 확장됐다.
이대로 몇 년 뒤라면 천하 삼대 상단 중 하나가 아닌 천하제일 상단이라 불릴 수 있을 정도.
하지만 왕금산의 얼굴엔 기쁨이 어리긴커녕 오히려 그늘이 짙게 깔려있다.
“내가 바란 노년의 삶은 이런 게 아니었단 말일세!”
“무릇 사내라면 한번 사는 인생, 천하 제패를 하겠다는 웅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난 소소하게 손주들이나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체질에 맞단 말이야!”
진태산이 질세라 목청을 높였다.
“저라고 다를 줄 아십니까! 천생 무인인 제가 왜 이런 서류 처리나 하고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헹! 자네가 예전부터 무재는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내 다 들었네.”
“그,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지금 천하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진소운의 아비가 바로 접니다 저! 호랑이가 개한테서 나올 수 있다 보십니끄아아!”
대천상단과 왕가장의 두 수뇌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다투고 있었지만, 주변을 돌아다니는 직원들은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만 할 뿐 두 사람을 말리거나 하진 않았다.
단지, 두 사람이 싸우면서도 붓을 멈추나 안 멈추나에 대해서만 촉각을 곤두세웠을 뿐.
두 사람이 붓을 멈추는 순간, 그들의 야근이 확정되어 버릴 테니까.
씩씩거리며 한참이나 울분을 토하던 두 사람은 금세 기운이 떨어져 언성을 낮추었다.
“자네 아들, 이번에 산서성에 갔다지?”
“왜 갑자기 거리 두십니까. 평소에는 그렇게 ‘우리 소운이’라고 하시더니.”
콧방귀를 뀐 진태산이 그래도 질문에 대답은 해준다.
“이번에 무림맹의 사절단으로 갔다더군요.”
“일개 학관생이 사절단에 포함되는 게 말이나 되나?”
“뭐, 언제는 그놈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움직이는 놈이었습니까?”
왕금산이 손으로 턱을 쓸며 말했다.
“흠…… 흑도와 친하다는 소문 때문에 가는 거라면 문제가 생기겠군.”
진태산이 우뚝 붓을 멈췄다.
“어째서 말입니까?”
아무리 미워도 자식은 자식 아니겠는가.
왕금산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속삭인다.
“그 붓 계속 움직이게. 다른 직원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아무튼…… 정치란 게 그렇지 않은가. 작은 흠결이라도 크게 확대 해석 되어버리니까.”
“흠…… 그렇다면, 앞으로 그놈의 출셋길이 막힐 수도 있단 말입니까?”
“제동이 걸릴 수도 있겠지.”
“그거 잘됐군요.”
“응?”
이번엔 왕금산의 붓이 멈췄다.
자식의 부귀영화를 바라마지 않는 아비의 말이란 놀라운 것이었으니까.
진태산은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놈의 출세가 멈춰야 제 일도 줄 거 아닙니까.”
“…….”
“그리고 전 애당초 상단을 크게 키울 욕심 없습니다. 태을문 사람들이 배곯지만 않으면 충분하지요.”
그렇게 말을 하지만, 왕금산은 알고 있었다.
진태산이 누구보다 진소운을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만 봐도 그렇다.
진소운에게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단 말을 듣고 난 후로, 안 그래도 대웅묘 같은 얼굴이 이제는 불곰처럼 시꺼멓게 변하지 않았는가.
왕금산은 최대한 따스한 눈빛을 지으며 위로를 건넸다.
“걱정 말게. 똑똑한 아이 아닌가. 잘 헤쳐나갈 걸세.”
“…….”
왕금산의 위로가 도움이 되었던 것일까?
죄인처럼 웅크리고 있던 진태산이 고개를 치켜든다.
“다시 붓 움직이십쇼. 자꾸 요령 피우지 마시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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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난 사람들의 입방아에 내가 어떻게 오르내리든 크게 관심이 없다.
전생에선 내가 무슨 짓을 하건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조차 없었으니까.
심지어 전투 중에 옷에다 오줌을 싼 적도 있었지만, 그게 논란이 되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생에서 내 명성에 자꾸 흑도가 묻는 건 마음에 안 든다.
별호도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데, 흑도 연맹의 공동전인이니 뭐니 하는 개소문 때문에 자꾸 미친놈들이 들러붙지 않는가?
사실 누구보다 정파에 가까운 고운 심성을 가진 난데!
지금만 봐도 그렇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쟁자수들을 챙기는 건 나밖에 없잖아?
각문채의 영역 안에 들어선 뒤로 쟁자수들의 불안은 눈에 띄게 커졌다.
“각문채가 산서성 내에서 가장 악독하다지?”
“그뿐인가? 인원이 많기도 제일 많다더군.”
“후…… 이럴 줄 알았으면 유서라도 남기고 오는 건데.”
모든 상행이 위험을 부담하긴 하지만, 그간은 그리 큰 부담이나 위협을 느끼지 않았던 그들로선 당연하게도 불안하기 짝이 없는 상황.
나는 그들을 다독이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네?”
올망졸망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생긋 웃어주기까지하면 완벽하지.
이렇게 얼굴에 ‘선함’이라고 써 있는 흑도가 어디 있나?
“만약 전투가 일어나면 최대한 제 옆에서 벗어나지 않으시면 됩니다. 그럼 최소 죽거나 크게 다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
쟁자수들은 부들부들 떠는 와중에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굳이 그들을 챙기는 이유가 뭔가?”
옆에서 고개를 삐딱하게 갸웃하던 혈투가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저들은 그냥 쟁자수 아닌가? 자네도 이번 표행에서 처음 봤다 들었는데.”
하아. 하기야 시꺼먼 마음을 가진 흑도 놈팡이의 입장에서야 이해가 안 되겠지.
나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다.
“원래 협객은 언제 어디서나 정의를 실현하는 법이지요.”
“……협객이라고?”
이 양반이 지금 시비를 거는 건가?
자꾸 이러면 아무리 혈투라도 참는 데 한계가 있는데.
“자네에 대해 들은 소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네. 보통 그 정도의 소문이 나는 경우라면 둘 중 하나지. 일부만 진실이거나, 아니면 과장이 섞였거나.”
“전부 다 거짓인 경우는 왜 빼십니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거 보았나?”
거참, 그럼 있지!
엄연히 나라는 예시가 있지 않은가.
“그럼 하나 묻고 싶은데, 왜 이쪽으로 가자고 하신 겁니까? 각문채랑 싸우고 싶어서 그러신 겁니까?”
“각문채 따위랑? 내가 저치들과 싸워봐야 무슨 재미가 있겠나.”
“그럼 피해가 일어날 게 뻔한 이쪽길을 선택하신 이유가 뭔데요?”
혈투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대답한다.
“자네와 사절단이 어떻게 대응할지 보고 싶었거든.”
“시발 뭐라고?”
“……자네 지금 욕했나?”
어이쿠야, 너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들은 탓에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표출되어 버렸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그만…… 근데 진짜 그 이유뿐이십니까?”
“그거 말고 굳이 이 길로 갈 이유가 뭐가 있지?”
“…….”
되려 궁금하다는 듯 물어오는 혈투.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미친놈이랑 이야기해 봐야 내 머리만 더 아프지 않겠나.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슬슬 각문채도 나타날 것 같거든.
산 중턱으로 향하는 길이 묘하게 좁아지기 시작한다.
마차를 중심으로 양옆을 호위하듯 이동하던 표사들은 자연스레 앞뒤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행단의 길이는 절로 길어졌다.
이렇게 길을 좁게 만들어 놓으면 양옆의 높은 협곡에서 공격하기가 용이해진다.
녹림채 대부분들이 통행세를 받을 때 이런 방법을 쓴다.
누구 하나 신호를 보내지 않았지만, 곧 녹림도들이 나타나리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나는 검을 고쳐 쥠과 동시에 쟁자수들의 위치를 살폈다.
그렇게 얼마쯤 더 걸었을까.
“우와아아아아아!”
“우와아아아아아!”
“우와아아아아아!”
산등성이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사방에서 고함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협곡의 위는 물론이고 길의 앞과 뒤를 인파가 가득 메웠다.
보통 통행세를 받는 녹림도들은 몇몇의 인원만 길목을 막고 있을 뿐인데, 우리가 무인인 걸 알고는 사람들을 모조리 끌어모은 듯 보였다.
아니면, 우리가 무림맹의 사절단이란 걸 알았을 수도 있고.
“안녕하십니까. 상방표국이 산주께 인사드립니다.”
“어서 오시오. 각문채의 손호방이외다.”
보통 이렇게 인사를 하고 표사가 통행세를 건네면 녹림도가 길을 열어주는 것이 관례건만, 표사가 움직이지 않자 손호방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길을 지나가지 않을 생각이오?”
“그것이…….”
표사가 악병비의 눈치를 본다.
그러자 악병비가 앞으로 나섰다.
“녹림도는 들어라! 우린 무림맹의 사절단으로 맹의 일을 수행 중이다. 그러니 길을 열어라.”
“무림맹?”
“사절단?”
악병비의 말에 녹림도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 녹림도라…….”
그러나.
당황한 일반 녹림도들과는 달리, 대표로 선 손호방은 그다지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니, 되려 자신들을 산주라 표현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냈다.
산호방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으르렁거렸다.
“무림맹이면 무림맹이지,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냐?”
“뭐라?”
“이곳은 각문채의 산이다. 지나가고 싶다면 돈을 내라.”
악병비 역시 쉬이 물러서지 않는다.
“감히 불법으로 점거한 산을 자신들의 자산이라 이야기하는 것인가?”
“그게 싫다면 짐을 두고 가든가.”
챙.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손호방이 도를 뽑아 들자, 협곡 전체에 퍼진 산적들이 저마다 무기를 들기 시작했다.
사절단 인원들도 차례차례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절단이 어떻게 할지 궁금하다는 듯 흥미롭게 지켜보던 염귀비와 혈투도 내공을 서서히 끌어 올렸다.
악병비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비켜서지 않으면 많은 피를 볼 것이다.”
“누구의 피가 흐를지는 보면 알겠군. 얘들아!”
손호방이 외치자마자 행단의 뒤로 바윗덩어리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르르 떨어진 바윗덩어리들은 금세 퇴로를 막아버렸고, 우린 순식간에 독 안에 든 쥐가 되어버렸다.
‘이거 예상보다 힘들겠는데.’
협곡의 높이가 너무 높은 데다 생각보다 녹림채의 숫자가 많았다.
이 정도라면 눈먼 무기에 맞아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몰랐다.
‘젠장…….’
팽팽하게 긴장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건 누가 봐도 양측의 충돌을 예견할 수 있는 상황.
나는 얼른 마차 위에 올라가 위치를 잡았다.
녹림도를 처리하는 대신 쟁자수들을 보호해야 할 테니까.
전투의 시작을 알리듯, 손호방이 손을 높게 치켜든다.
“각문채는 당장 저놈들을……!”
그러나.
명령을 내리던 그가 돌연 말을 멈추었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준비를 하던 녹림도들이 하나둘 움찔거리며 자리에 멈춰 섰다.
‘뭐지?’
무림맹의 이름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여념이 없던 손호방이 어쩐지 나를 쳐다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거기!”
손호방의 손가락이 이편을 가리킨다.
설마 나를 부른 건가?
의아해하기도 잠시.
“……그대가 흑염룡이 맞는가?”
내 빌어먹을 별호를 부르는 손호방.
젠장. 그 별호가 왜 여기서 또 나와.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손호방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대가 진정 흑룡채와 화엄채의 채주인 흑염룡이 맞다고?”
아니 시벌, 갑자기 그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와?
방금 전까지 긴장된 표정으로 전투를 준비하던 사절단과 혈투 일행도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내게로 몰린 시선들을 애써 외면하며 대답했다.
“화엄채를 굴복시켰다는 이야기에 나이가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어리군…….”
아니, 오해라니까.
그러더니 손호방이 조심스레 묻는다.
“혹, 산왕쟁투를 신청하러 온 것인가?”
“그건 아니오. 그냥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들른 것이지.”
“그래……?”
손호방이 한쪽으로 고개를 돌려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같은 녹림채의 동지에게 통행세를 받을 순 없는 노릇이지. 길을 열어라!”
아니라고!
동지 아니라고 빨리 전투 시작하라니까!
내 바람과 달리 무기를 꼬나쥔 녹림도들이 하나둘, 무기를 회수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손호방을 비롯해 길목을 막고 섰던 이들이 양옆으로 길을 터준다.
그러더니 내게 말했다.
“녹룡이 강남에서 벌이는 투왕지로에 대한 소문을 주의 깊게 듣고 있다. 우리 각문채는 언제든 도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전해주게나.”
“…….”
정말로 각문채는 우리 행단이 지나갈 때까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일부는 우리가 지나간 후에 손을 흔들기도 했다.
뭔가 전투도 통행세도 없이 평화롭게 각문채를 지나쳤지만, 행단의 분위기는 더욱 어색해졌다.
고요한 분위기를 뚫고, 혈투의 목소리가 날아든다.
“……혀어업객? 세상 어느 협객이 산채를 두 개나 가지고 있지?”
혈투는 처음으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혈투의 비아냥에도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어 답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악병비의 눈초리가 날카롭다 못해 따가워서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젠장.
사천에서도 안 걸린 일을 산서에서 걸릴 줄이야.
이번엔,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밝은 목소리가 날아든다.
“오옷! 그럼 그대가 산적 두목인 것이야? 그럼 나도 산적 두목이 될 수 있는 것이야?”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협객 놀이에 미쳐있었던 당서희는 어느새 장래 희망이 산적 두목으로 변해있었다.
“……아닙니다. 그런 거.”
“궁금한 것이야. 어떻게 채주가 된 것이야?”
나도 몰라, 그냥 어느 날부턴가 채주가 되어있었다고……. 진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