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초대받은 불청객(2)>
태원에 들어선 사절단은 사흑련으로 향했다.
처음 오는 초행길이지만, 표사들도 우리들도 길을 찾는다거나 사흑련이 어디 있는지 사람들에게 따로 물어보지 않았다.
아니,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태원 무인들 전부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얼굴에 ‘나 나쁜놈이외다.’라고 써 있는 놈들 전부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무한이나 하남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백도 무림인의 모습은 우리 사절단을 제외하곤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우리 사절단도 완전 백도 무림인의 표본이라곤 볼 수가 없지만.’
나는 우리 사절단의 물을 흐리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슬슬 헤어져서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제 와서 말인가?”
내 질문에 되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혈투와 염귀비.
나는 구겨지려는 미간을 최대한 억제하며 설명해 주었다.
“이제 저희는 사절단으로서 무림맹의 깃발을 세워야 하는데, 두 분이 계시면 껄끄럽지 않겠습니까.”
“난 괜찮네.”
“소녀도 괜찮사와요.”
“…….”
아니, 우리가 안 괜찮다고, 우리가!
악병비도 비슷한 생각이었던지, 태원에 들어선 뒤부턴 마치 입안에 쓸개를 굴리고 있는 사람처럼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악병비가 불쾌해하는 게 나랑 뭔 상관이냐 싶겠지만, 안 그래도 그와 나 사이에 쌓여있는 업이 전각 이 층 높이는 된다.
여간 귀찮은 게 아니란 말씀.
“흠……. 무림맹 사절단이 겨우 흑도 놈들의 시선이 두려워 깃발을 못 세우는 건가?”
혈투의 비아냥을 들었던 것일까.
앞서가던 악병비가 갑자기 표사들을 향해 외쳤다.
“깃발을 세워라!”
표사들이 마차 위에 맹의 깃발을 세우자, 혈투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제 문제 될 건 없겠지?”
그래, 흑도인에게 눈치를 바란 내가 잘못이지.
지 꼴리는 대로 살아서 흑도인인데 내가 잘못했네. 암, 그렇고말고!
태원의 도시를 가로질러 외곽으로 향하자 주변의 풍경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민가나 상가들이 사라지고, 꽤 황량한 벌판 위에 우뚝 솟아오른 건물들이 보인다.
무림맹을 의식한 듯, 현대적인 기법으로 꽤나 화려하게 만든 모양이다.
‘무림맹 본관보다 높은 거 같은데?’
새로 지었다 해도 오십 년이 다 되어가는 건물과 이제 막 새로 지은 건물을 비교한다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확실히 사흑련의 건물은 화려하고 웅장하기 그지없다.
주변의 건물들도 본관 건물과 조화를 이루며 지어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당서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특이한 것이야. 왜 담을 짓다 만 것이야?”
그녀의 말대로, 정문과 그 주변을 이루는 담까지는 만들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 이후론 담이 존재하지 않았다.
담의 본래 기능인, 밖과 안을 구분하는 용도로 쓰기에는 어려울 듯 보였다.
저런 모양새라면 굳이 정문을 통과하지 않아도, 뒤로도 옆으로도 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
다른 이들도 모두 당서희와 비슷한 생각을 했지만, 나는 조금 다른 의견이었다.
‘대체 누구지?’
다른 건물들 주변에는 사람들이 바삐 오가고 있어 아직 공사중인 상황이 그대로 드러나는 반면, 담 주위는 고요하다.
이는 아마도 사흑련의 확장성을 고려한 것일 터.
무림맹과 비교하여 사흑련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일지 모르기에 그때를 대비한 모습인 듯했다.
‘산서성 태원에 자리를 한 것도 그렇고, 주위의 건물을 올리는 것도 그렇고…… 지낭(智囊)이 있는 건가?’
무력 단체도 결국은 하나의 기관과 같다.
머리 역할을 하는 이가 있나 없나에 따라 단체의 존속기간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체계와 규칙을 만들고 그 강제성을 발휘하여 단체를 유지하는 건.
백도든 흑도든 모두 똑같이 해결해야 할 문제니까.
“일단 저쪽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일대를 둘러보던 표사가 정문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다들 정문 앞에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천하의 흑도란 흑도는 다 모인 건지, 방명록을 작성하는 자들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좀처럼 줄이 빠르게 줄어들진 않았다.
우리는 마차들이 길게 늘어선 줄의 맨 끝에 섰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별반 관심을 가지지 않던 이들이, 마차에 꽂힌 무림맹의 깃발을 보곤 하나둘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무림맹에서 온 건가?”
“그 위선자놈들이 이곳엔 왜 온 거지?”
“깽판이라도 칠 생각인가?”
“뭐? 감히 흑도 연맹에서 깽판을 친다고?!”
애당초 흑도 놈들 사이로 들어가는 것이니 환영받지 못하리라 예상했지만,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린 이후론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 이들도 많았다.
“그래도 신기하군요. 담이 없음에도 다들 이리 길게 줄을 서 있다니. 역시나 백도나 흑도나 다 같은 사람인가 봅니다.”
일명이 의외로 질서정연한 흑도의 모습에 감탄한듯 말했다.
나 역시 그건 좀 놀라웠다.
이놈들은 애당초 있는 규칙도 다 어기고 사는 놈들 아니었던가.
자신들의 중심이 될 단체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최소한이나마 질서를 지키고 있는 걸까나?
궁금증이 생겨도 차마 물어볼 수 없었기에, 괜히 주변을 쭉 둘러보고 있자니 의외로 그 해답을 알 수 있었다.
“이 빌어먹을 놈이! 저기 정문 안 보이냐!”
쾅!
누군가 정문을 무시하고 담이 없는 곳을 통해 사흑련에 발을 디딘 순간.
악병비만큼 거대한 체구에 철갑을 두른 사내가 솥뚜껑만 한 주먹으로 방문객(?)을 날려버렸다.
무려 십 장을 날아가 바닥에 처박혀 몇 바퀴나 구른 방문객(?)은 정신이 나간 듯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방문객(?)과 함께 사흑련에 들어서려던 동료들은 압도적인 거구의 행태에 질려 슬그머니 행렬의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구의 사내가 팔짱을 끼며, 쓰러진 사내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어떤 놈이든 어디 한번 마음대로 담을 넘어봐라! 저리 될테니.”
아, 이게 바로 질서정연함의 비밀이었고만!
근데 없는 담을 마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걸 보니, 저 담은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들 눈에는 확실히 보이나 보다.
다들 담이 없다는 말을 하지 않잖아?
작게 감탄하며 그 꼬라지들을 보고 있는데.
솥뚜껑만 한 손을 툭툭 털던 사내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응? 넌?”
그는 다름 아닌 사황봉의 황부식.
무림 정시 치르던 때에 사황봉의 대문을 박살 내며 인연이 닿았던 자였다.
“흑염룡!”
황부식은 사람들더러 들어오지 말라 했던 가상(?)의 담을 가뿐히 넘어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니, 남들에게 함부로 넘어오지 말라 했으면 자기도 정문으로 다녀야 하는 거 아닌가?
하여간 흑도 놈들은 제멋대로 산다니까.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이, 황부식이 몸을 뒤로 젖히며 크게 웃기 시작했다.
“역시 네놈이 올 줄 알았다! 으하하하하!”
시벌, 니들이 초대한 거잖아.
저렇게 이야기하니까 꼭 내가 제 발로 찾아온 것처럼 느껴지네.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안부를 물었다.
“그간 잘 지냈습니까?”
“잘 지내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결국 이렇게 흑도 연맹을 만들었군요.”
앓는 소리를 하던 황부식이 갑자기 내 일행들을 쭉 둘러보더니 어깨를 팡팡 두드리기 시작했다.
“다 진소운, 네 공이다!”
아니, 제발 좀!
당신이 이런 말을 하면 내가 곤란하다고, 난 무림맹 사절단이니까.
“가짜 친한 척은 자제해 주십시오.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습니까…….”
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읊조리는데.
왜인지 악병비를 슬쩍 본 것 같은 황부식이 내 어깨에 슬쩍 손을 올린다.
“이거 왜 이러나! 우리 그래도 흑도야행부터 여러 가지를 함께 해온 사이 아닌가! 흑도 연맹은 그대의 공적을 잊지 않을 걸세!”
하, 이거 봐라. 이 인간 일부러 이러네.
내가 한숨을 쉬건 말건 사절단의 인원을 둘러보던 황부식의 얼굴이, 혈투와 염귀비를 보는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아, 아니. 어르신들이 어찌 이놈들과…….”
혈투가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이군. 자네는 과거보다 더욱 키가 큰 것 같아.”
“그, 그렇지요. 그땐 열 살이 막 넘었을 때니.”
세상 무서울 것 없어 보이는 황부식이 눈에 띄게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혹 진소운과 함께 오신 겁니까?”
“응. 이 친구가 우리 길 안내를 맡아줬지.”
“…….”
혈투의 말에 황부식이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혈투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제가 곧장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혈투가 우리 일행들을 훑으며 물었다.
“이들도 함께 들어갈 수 있겠나?”
“저흰 괜찮습니다.”
내가 거절했지만.
혈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네, 그렇게 하시지요.”
우리를 탐탁지 않게 보던 이들이 놀람 반 부러움 반 섞인 눈빛으로 우릴 보았다.
황부식은 줄을 벗어나 사람들이 함부로 넘어오지 못하게 했던 담을 성큼성큼 넘어 우리를 안내했다.
거침없는 그의 태도에 나는 몹시 의아해졌다.
“이 담, 넘어도 되는 겁니까?”
내 물음에 황부식이 되려 고개를 갸웃거린다.
“담? 무슨 담?”
아까 당신이 담 넘어오면 죽인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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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자마자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사흑련의 중진인들과 인사를 하고, 초대 련주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표물을 가져온 표사들은 숙소를 따로 배정받고, 우리 사절단 일행은 본관 건물에 가장 가까운 숙소로 안내받았다.
우리가 중요 인사기 때문일까? 만약을 대비해 포위하려 함일까?
우리가 머물 숙소를 안내해 준 황부식은 그대로 혈투와 염귀비를 이끌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던 혈투와 염귀비가 뒤를 돌아본다.
“나중에 보지.”
“소녀, 매일밤 공자님을 그리워 하겠사와요.”
……뭔가 쓸데없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부디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나의 바람과 달리, 두사람은 곧 다시 만날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멀어져 갔다.
어쨌든 우리는 숙소의 사용인들에게 꽤 괜찮은 방을 배정받았다.
여자인 당서희가 혼자 쓸 방 하나와 악병비와 일명 그리고 내가 쓸 방 하나.
“나가는 것이 불편하실 테니 음식은 직접 가져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용인은 그렇게 말하곤 방을 나섰다.
사흑련 전체에 마치 연회라도 벌어진 듯 곳곳에서 술판과 도박판 싸움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개파식 전야로 행사를 치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토록 유흥을 맘껏 즐기는 광경은 백도 문파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기본적으로 백도 문파는, 상대의 사문에 가서 싸움을 벌이면 초대한 사람을 모욕한 것이라 생각하니까.
어쨌든 사흑련 내부에 모인 인원들이 모두 흑도인인 걸 생각하면, 우리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벽력탄이나 다름없다.
이를 알기에 사용인들도 음식과 술을 숙소로 가져다 주겠다 한 것이겠지.
하지만 나가고 싶어 하는 이도 있었다.
하얀 두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은…….
“왜 나가서 잔치를 즐기면 안 되는 것이야?”
바로 당서희.
그녀는 계속해서 사흑련 내에서 벌어지는 술판에 끼고 싶어 했다.
그게 되겠냐고.
특히나 도박판이나 싸움판을 볼 때 눈이 반짝이는 걸로 봐선, 술보단 유흥에 더 관심이 가는 것 같은데.
내심 악병비가 말려주길 바랐지만, 그는 뭔가 말할 생각조차 없는 듯 사용인들이 가져다준 술을 쉼 없이 들이켜고 있었다.
아니, 술에 독을 탔을 줄 어찌 알고 저렇게 겁 없이 먹는 거지?
하아, 골이 아프다 진짜.
나는 다시금 악병비를 노려보았고, 그가 결국 입술을 뗀다.
“마음대로 해라. 어디 가서 맞고만 오지 마라.”
“…….”
악병비는 그렇게 말한 뒤 연신 술을 들이켰다.
말을 말자, 말을.
내가 고개를 내젓는 사이, 당서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번쩍 들더니 외쳤다.
“와! 이제 참석해도 되는 것이야?”
……이젠 나도 모르겠다.
사용인이 음식까지 가져다준다 한 걸 보면, 나가지 말라는 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듯한데.
뭐, 또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나가지 말라는 이야기를 한 건 아니니까.
다만.
문제는 당서희만 홀로 내보내면 무슨 문제가 발생할지 모르겠다는 것.
물론 당서희가 누군가에게 당하는 게 걱정되는 건 아니다.
당서희에게 누가 당할지가 걱정돼서 그렇지.
더구나 여기까지 오면서 결국 협객 놀이도, 산채 놀이도 못 했잖아.
그야말로 폭발하기 직전의 기운을 가진 애가 밖에서 무슨 놀이를 할지 모르니, 혼자 보내는 것이 불안하기 짝이 없는 부모의 심정과도 같은 상황인 것이다.
결국 난 당서희의 감시역을 맡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한쪽에서 염불을 외고 있던 대머리가 함께 일어난다.
“……함께 가실 생각입니까?”
“그 어느 때보다 부처님의 뜻을 알릴 좋은 기회 아니겠습니까.”
“…….”
아아, 그렇네.
이곳만큼 부처님의 뜻이 통하지 않는 곳도 없을 테니.
너무 뿌듯해서 죽어버릴 것 같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