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 <내일의 운세(4)>
나는 기미상궁인 당서희만을 데리고 연회에 참석하려 했지만, 일명이 함께 나섰다.
“흑도 신성들이 모두 모여있는 곳이니 진 시주 혼자 가는 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군유현도 그편이 좋겠다며 일명의 이야기에 동의했고, 우린 군유현의 안내를 따라 사흑련 외곽에 위치한 전각으로 향했다.
본관의 북쪽에 위치한 전각은 여타 다른 전각들과 달리 외부 모양에 상당한 신경을 썼는지 고급스런 마감을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귀인(貴人)들을 위한 공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내부로 들어서자 절도 있는 태도의 사용인들이 자리를 안내했고, 우린 전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대전으로 안내되었다.
커다란 대전의 중앙엔 기다란 탁자가 놓여있고, 그 위로 온갖 산해진미가 놓여있다.
커다란 대전에 오직 그 탁자만이 존재하여 사람들이 소란스레 이야기하는 소리가 대전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대전에 들어선 뒤 탁자에 다가가자 시장 바닥처럼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갑작스레 뚝- 끊겼다.
왜 니들이 여기 와 있냐는 명백한 적대가 어린 시선들.
“……제가 괜한 짓을 한 건가 싶군요.”
우릴 초대했던 군유현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나는 가만히 있다간 이도저도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쥐었다.
“좋은 인연을 맺을 자리가 있다 해서 왔습니다. 함께 자리해도 되겠습니까? 만약 불쾌하시다면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정중하지만 당당하게 이야기하자,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린다.
정중앙에 앉아 술잔을 들고 있던 날카로운 눈빛의 사내.
탁.
담악이 술잔을 내리며 말했다.
“먼저 초대를 하지 않은 점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이리 열린 마음이신 줄 알았다면……. 진작 초대를 했을 텐데 말이죠.”
마음에도 없는 소리라는 게 눈에 훤히 보이네.
나는 싱긋 웃었다.
“이리 서로의 간격을 좁혀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 태연한 태도에 담악이 따라서 싱긋 웃는다.
“괜찮으시다면 함께하여 자리를 빛내주시겠습니까?”
그러곤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담악의 근처에 앉아있던 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자리를 비워주었다.
“술맛 떨어지게 생겼군.”
“키킷.”
“큭.”
누군가 혼잣말하듯 하는 이야기.
나를 비롯한 무공을 익힌 이들이 못 알아들을 리 없다.
하지만 부동심을 가진 일명이 이런 도발에 넘어갈 리 없었고.
나 또한 마찬가지.
당서희는…… 모르겠다.
얘는 그냥 음식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우리가 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여전히 분위기는 이전만큼 돌아오지 않았다.
어색함을 느껴서 그런 자들도 있었고, 반대로 적대심 때문에 그러는 자들도 있었다.
그때.
우리의 반대쪽에 앉은 사내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우리가 잘못했군, 흑염룡이라면 흑도 무림의 이름 높은 신성 아닌가.”
“으하하하하!”
“으흐흐흐.”
사내가 던진 말에 일단의 인원들이 입을 쩍 벌리며 웃는다.
소란은 돌아왔지만, 여전히 모두의 시선은 우리에게 집중된 듯한 느낌이었다.
“근데 이상한 이야기가 들리더군, 그 흑염룡이 사흑련과 무림맹의 동맹을 주선하고 있다고 말이야.”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동의를 구한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마치 우리가 어떻게 할지를 보겠다는 듯.
제 입술을 핥으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사내.
내가 그의 정체를 가늠하고 있을 때.
군유현의 전음이 들려왔다.
-황사문주의 네 번째 제자 갈전기입니다. 황사문주와 마찬가지로 지독한 주전파죠.
사웅(邪熊) 갈전기가 본래 황사문 출신이었던가?
흑도 놈들은 매번 제 소속을 옷 갈아입듯이 바꾸니 뭐가 뿌리인지를 모르겠다.
아무튼 군유현 덕분에 상대가 의도하는 바를 더욱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나는 갈전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 될 건 또 뭡니까?”
“응?”
“꼭 무림맹과 싸우기 위해 사흑련을 조직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가 허리를 젖히며 웃었다.
“으하하! 그렇지.”
그러곤 이내 번뜩 눈빛을 반짝인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무림맹의 탄압에 저항하기 위함이지.”
하아, 전쟁의 참상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알량한 실력으로 패기 부리는 꼴이라니.
이런 놈들 때문에 주전론이 항상 힘을 얻는 것이다.
정작 싸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뒤로 빠질 썩어빠진 놈들.
이런 새끼를 설득하려고 해봐야 내 힘만 빠진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해야 한다.
애당초 난 담악을 설득하기 위해 온 것이니까.
“싸움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
“그…… 구타유발죄라고 아십니까?”
“뭐?”
어우, 저 사나운 눈초리 좀 봐라.
“먼저 싸움을 걸지 않았어도 맞을 짓을 하면, 맞아도 싸다는 거죠.”
“……하,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를 도발했다.
“여기서 일명 선배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
“아마 황사문의 무사들 백 명이 한 번에 덤벼든다고 해도 일명 선배를 꺾을 수 없을 겁니다.”
“이 새끼가!”
쾅.
갈전기가 무식하게 몸을 일으키자, 탁자가 들썩거리며 음식들이 엎어지고 술잔이 넘어졌다.
“황사문이 우습더냐!”
“무림맹과 전쟁이 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은데. ……귀공께선 일명과 생사대적을 벌일 자신이 있냐는 겁니다.”
“…….”
“왜 아무 말이 없죠? 전쟁은 하더라도 일명 선배와 같은 고수들은 피해 다닐 생각입니까?”
나는 갈전기와 함께 웃었던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전쟁을 주장하는 사람들치곤, 자신이 가장 앞서서 싸우겠다 나서는 이들이 없었죠.”
하나같이 제 나이대에 비해 월등한 재능으로 악명을 쌓고 있던 이들.
하지만 그건 평화의 시절에나 가능한 일이다.
전쟁이 터진 후엔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모두가 강함과 약함의 절대적 척도 로 재단당하는 상황에 놓일 테니.
“전쟁은 비무가 아닙니다. 내 수준에 맞춰 상대가 나올 일도 없고요. 아마 지금 사흑련과 무림맹 사이에 전쟁이 터진다면 여기 계신 분들이 전쟁터의 가장 선두로 내몰리겠지요?”
그렇게 냉혹한 전장터 위에 서면, 상대의 칼날에서 자비 따윈 사라진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곳에선 나무와 볏짚을 베던 무정한 검이, 인간을 벤다.
“전쟁이 벌어진 첫날, 사망자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서로 간의 만반의 준비를 마친 끝에 전투가 벌어지면, 순식간에 수많은 희생자가 나온다.
어떤 전쟁은 너무 기운이 넘쳐서 일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끝나버린다.
일반적인 전쟁도 그러할진대, 무인들끼리 하는 전쟁은 그보다 못하겠는가?
“전쟁은 부상으로 끝나는 싸움이 아닙니다. 최소가 팔다리, 기본적으로 목숨을 잃을 걸 각오하고 하는 겁니다.”
내 말에 분위기는 더욱 침체되었다.
갈전기는 이를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우리 흑도가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전쟁을 벌일 거라 생각하나?”
“사흑련의 각오를 묻는 게 아닙니다.”
“뭐?”
“귀공께 그런 각오가 있는지 묻는 겁니다.
나는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첫날 일명 선배를 맞이하여 생사대적을 치를 각오가.”
“…….”
일명을 슬쩍 본 갈전기가 다시금 나를 보며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내려 할 때.
정중앙에 앉았던 담악이 말했다.
“그렇다면……. 우린 무림맹의 눈치나 보면서 죽음을 기다려야 합니까?”
갑자기 이건 무슨 소리지?
담악은 술을 들이켜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으로선 사천의 혈교의 득세로 인해 무림맹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지요. 하지만 혈교와의 전투가 끝나고 나면 그 화살이 어디로 향할까요?”
모든 단체에게는 그 단체 나름의 목표와 명분이 필요하다.
단지 득세와 권력만을 좇는 단체는 말이 없는 마차나 마찬가지다.
단체는 언제나 목표와 명분을 쫓는다.
그렇기에 담악은 무림맹의 명분과 목표를 묻는 것이다.
“지금 무림맹이 약해져 있는 순간을 놓치는 것은 하늘이 주신 기회를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하는데, 흑염룡 공께서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물론 담악 말이 맞지.
지금이 사흑련으로선 제일 좋은 시기가 맞다.
물론, 무림맹을 토벌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하지만.
“그건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사흑련의 힘이 부족할 거라 보십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림맹의 힘은 단지 무림맹의 크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뿌리가 다릅니다. 사흑련은 무림맹을 토벌함과 동시에 무림맹을 받치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백팔봉과 그 외의 무수히 많은 문파들까지 동시에 상대할 자신이 있습니까?”
무림맹의 진정한 힘은 무림맹과 함께 성장해 온 그 문파들에 있다.
아무리 사흑련이 머릿수만으로 숫자를 채운다 한들, 문을 연 지 백년도 되지 않은 문파들로는 힘의 공급에도 한계가 생길 것이다.
“무림맹을 공격 하신다면, 이는 분명 백도 문파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느껴질 겁니다. 사흑련은 그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습니까?”
순간적으로 담악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무림맹과 사흑련은 물과 기름과 같은 존재입니다. 무림맹은 결코 사흑련이 기틀을 마련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겠지요.”
우리를 하나하나 바라보는 담악의 시선에는 적대심이 가득 어려있었다.
전생엔 무림맹의 총군사 역할도 했던 이가 어찌 현생에선 무림맹에 대한 적대심이 이리 높은 것이지?
담악이 탁자 위를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며 내게 물었다.
“흑염룡 공께서 지모(智謀)가 뛰어나다 하시니 하나 묻겠습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내게로 향한다.
“사흑련은 무림맹에 토벌되기 전까지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전생에 내가 알던 담악은 이렇게 피에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누군가의 의견을 구하기는 해도 항시 판단은 스스로 내리는 사람이었다.
지금 이렇게 묻는 것도 정말 몰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떠보기 위함일 터.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혈교와의 전쟁이 끝나도 무림맹이 사흑련을 공격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어찌 그리 자신하지요? 흑염룡 공은 그저 학관 대표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긴 하지.
학관 대표일 뿐인 내가 무림맹의행동을 예단할 순 없다.
그러나, 나는 모두가 모르는 미래를 이미 겪었다.
“괴랄한 사술을 쓰는 건 혈교만이 아닙니다. 더 무서운 존재들이 있지요.”
“…….”
“그리고 ‘그자’들은 지금 천하를 노리고 있지요. 사람의 인명 따윈 개의치 않아 하는 괴물들 말입니다.”
담악이 제 턱을 매만지며 몸을 뒤로 젖힌다.
내 주장이 근거도 없는 헛소리라 생각하는 듯한 태도.
“음모론을 이야기하는 겁니까?”
음모론이라…….
담악을 향해 곧장 물었다.
“혹시 사천에 철강시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사술을 쓰는 자들은 그런 존재들을 당연하게 쓰지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전 무림정시 와중에 그들보다 더욱 괴이한 자들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괴이하다는 거지요?”
나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눈에 보이지 않고, 형체도 잡히지 않으며 어둠 속에 숨어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존재.
“피부는 강철처럼 단단하고, 뼈를 깎아 검처럼 사용하며, 어둠 속에 녹아들어 모든 것들을 집어삼킵니다.”
“…….”
그런 존재가 실재한다고 도저히 믿지 못하는 눈빛이다.
“우리 서로가 싸우는 것은, 그들에게 천하를 내주겠다는 신호나 다름없습니다.”
“증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담악이 곧장 내 옆으로 시선을 던진다.
“다른 분들도 똑같은 걸 본 겁니까?”
담악의 시선을 받은 일명과 당서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조금은 긴장된 기색으로 우리의 대화를 듣던 이들이 숨을 내쉬곤 피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하긴 나 또한 이야기로 들어서는 쉬이 믿지 못했을 것이다.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다시금 소란스러워지려는 그때.
“……그들은 독기와 비슷한 것을 뿜어내기도 합니다.”
한 사내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날아들었다.
“……?”
“응?”
사람들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쏠린다.
모두의 시선이 모인 곳에 서 있는 사내는, 바로 군유현이었다.
그가 두려운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분명 그들은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존재들이었습니다.”
나는 침음을 겨우 삼키며 물었다.
“……본 겁니까?”
“먼 발치였지만 똑똑히 보았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눈빛을 주고받는 사이, 담악은 잠시간 군유현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실제로 보지도 않은 것에 희망을 걸 순 없는 노릇이죠.”
단언하듯 고개를 젓는 담악.
“우린 무림맹을 믿을 수 없습니다.”
담악의 단호한 말이 대전에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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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담악에 대한 인상은, 그가 꽤나 뛰어난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전에 병법을 맡았던 인간들이 무능해서 상대적으로 뛰어난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이번 만남으로 확실히 깨달았다.
담악은 적일 때 상당히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다.
‘도통 속을 내비치지 않는단 말이지.’
현실적으로 담악 또한 당장 사흑련이 전쟁을 벌이긴 힘들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가 사흑련의 패망을 원하는 게 아니라면, 지금 무림맹을 노린다 한들 백도 전체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점도 알고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어째서.
담악은 계속해서 적대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것일까?
“어렵게 되었군요.”
우리와 함께 대전에서 나왔던 군유현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했다.
도박판에서 태연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도박판에 비하면, 전쟁은 그 무게 자체가 달랐으니까.
나는 그에게 포권을 쥐어 보였다.
“신경 써 주셨는데.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했습니다.”
내 말에 군유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일단 오늘 해주신 이야기만으로도 어느 정도 현실을 파악하는 이들이 생길 겁니다. 그들을 모아 중론을 형성하면 위에서도 재고해 주겠지요.”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띤 군유현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일단은 다른 분들을 조금 더 만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개파식이 끝날 때까진 어느 정도 시간이 있을 테니까요.”
일단 련주인 차석두와 마령고원에서 만났던 이들과 대화를 나눠보는 게 우선이다.
군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혹시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우리가 머무는 숙소에 다다랐다.
군유현과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군유현이 물었다.
“오늘 일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시고 답변 하나만 해주시겠습니까?”
답변? 무슨 답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군유현이 지체 없이 입을 뗀다.
“마지막 판에 오천왕이 나왔던 거…….”
그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진짜였습니까?”“
마치 일생일대의 답변을 기다리듯 간절하기 그지없는 모습.
어지간히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
괜히 양심의 가책이 느껴질 정도.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러자 그는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런 것이었군요.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군유현은 날 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너무도 투명한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당서희도 그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좇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사람인 것이야. 속임수에 당했는데, 저리 웃다니.”
도박꾼들의 정신상태는 당서희조차도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나 보다.
하긴 세상 누가 도박꾼들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기지개를 펴며,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저희도 들어가죠. 일단 앞으로 행방에 대해서 논의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숙소에 들어선 우리는 내실에 발을 내딛는 순간, 모두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혈향?’
분명, 비릿한 철내음이 섞인 피 냄새가 내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윽고.
“진 시주!”
눈을 부릅뜬 일명이 한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의 손가락이 향한 곳에는.
악병비가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