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32화 (232/357)

232. <어둠속의 어둠(2)>

오백 년간 무림을 지배하면서 오만해질 대로 오만해진 무림맹.

혈교는 그런 무림맹의 오만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사천사태의 초창기, 장로원과 학관생들의 뒤통수를 쎄게 때려 얼을 빼놓은 후, 옆구리에 칼침을 놓아줄 수 있었던 것.

하지만, 무림맹이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오만할 수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듯하다.

뒤통수와 옆구리를 찔린 무림맹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무림맹은 목을 좌우로 꺾으며 우두둑 소리를 냈고, 그 거대하고 둔탁한 손으로 혈교의 목줄을 잡아 쥐었다.

전세는 순식간에 뒤집혔다.

사천에서 나대던 혈교의 무사나 술사들 대부분이 도망치거나 무림맹의 칼날에 쓰러졌고, 최후의 무기인 철강시도 독왕의 손속에 한 줌의 독수가 되어 녹아내린 상태.

개전 초창기 이래로 혈교는 승리한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계속 뒤로, 또 뒤로 물러나기만을 반복했다.

분명 사천에서 더 이상 혈교가 나대는 꼴을 보지 않게 되었건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무림맹 만통부에서 매일같이 고통받던 맹주원은 사천의 파당으로까지 와서 고통받아야 했다.

“여긴 어디? 난 누구?”

정예만 추려 급파했다곤 하나 무려 수천에 달하는 인원.

그들이 먹어야 할 삼시 세끼 엄청난 양의 식량.

전투 중에 소실된 무기의 충당.

그 외에도 말과 무사들을 보조하는 일부 하급 무사.

거기에 사용인들까지 고려하면, 물경 일만이 넘는 인원이 ‘배고프다’, ‘춥다’ 삐약삐약 거리고 있는 상황.

무림맹 파견 시 물자 보급은 보통 각 성도의 지부를 통한 현지 보급으로 충당하는 편이지만, 그거야 한 개의 ‘대’단위 부대 일 때나 가능한 것이고.

지금과 같이 예측하지 못한 전쟁에서의 보급은, 애당초 지부 규모만 운영하던 행정가들이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행정가들이 야근을 밥 먹듯이 해도 병참 보급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이는 무사들의 분노를 돋웠다.

그러다 하루 한 끼밖에 먹지 못해 분노한 무사가 행정가의 멱살을 쥐고 공중제비를 두어 번 돌려주는 날에는…….

“이러다 다 죽소……!”

평생 직장이라 여기며 무슨 일이 있어도 지부에서 나가지 않겠다 다짐했던 행정가들이 야반도주를 하게 되고, 병참은 더더욱 개판이 되었다.

그리하여.

사천으로 파견된 무사들을 가엽게 여긴 제갈 총군사가 결단을 내렸다.

“네가 가라. 파당!”

“…….”

내가 무슨 까라면 까는 인형인가! 나는 가엽지도 않……!

그러나.

“빌어먹을…….”

눈떠보니 자신은 어느새 파당에 와있었다.

여기까지가 만통부의 맹주원이 파당까지 오게 된 경위.

맹주원이 울분을 삼키며 상황을 둘러보았다.

그에겐 가장 싫어하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가 과도한 업무로 인한 야근이었고.

두 번째가 인원 부족으로 인한 업무 과중화였으며.

세 번째가 인원 부족으로 인한 파견 업무였다.

이를 토대로 판단해 보았을 때.

……당장에 사직서를 써도 무방할 상황이었다.

“빌어먹을…….”

인재의 수급으로 정시퇴근을 오매불망 바라왔지만, 되려 과중한 업무를 받아버린 비운의 사내.

백도무공에서 흔히 말하는 ‘내려놓음’ 대신, 흑도무공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분노’를 끌어올려 한없이 흉포해진 맹주원은 거침없이 사천의 상황을 정리했다.

“누가 보고서를 이따위로 쓴단 말이냐! 보고서가 개판이니 보급이 엉망이지! 아니! 네놈이 일부러 물자를 낭비하는 걸 보니 무림맹의 세를 약화시키려는 음모를 품은 것 같구나. 너를 집행각으로 보내 조사를 해봐야겠다!”

“사람을 구해와! 뭐? 사람이 없어? 구하지 못하면 납치해 와! 뒤는 무림맹에서 책임질 테니. 지나가는 유생이건 상인이건 다 데려와서 앉혀. 일단은 인원을 채우는 것부터가 우선이다!”

“보급! 보급! 밥부터 챙기란 말이다! 일단 배가 부르면 사소한 걸로 지랄하지 않으니까!”

근 삼십 년간 무림맹의 그 누구도 다뤄본 적 없는 파견무사들의 밥줄을 능숙하게 매만지며, 맹주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총군사의 가장 훌륭한 애착인형임을 증명했다.

“역시 총군사님이 가장 아끼는 만통부의 최강 인재라 하더니, 헛소문이 아니었구만!”

“그러게나 말일세!”

그의 활약으로, 평생 방만하게 살아온 무사의 혈도처럼 막혀있던 보급이 겨우 조금씩 숨통을 트였다.

#

사천에 도착하자마자 무사들에게 뜨끈한 밥 세 끼를 모두 챙겨주고 한숨 돌리려던 맹주원은 다시금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직도 대응책이 나오지 않은 게야?”

그는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의 본분은 바로 군사.

전쟁터에서 작전을 수립하고 조언하여 원활한 전쟁을 수행하도록 하는 직책이었다.

문제는, 천하의 맹주원도 현 사천의 일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

사천에서 시원하게 뺨따귀를 후려 맞은 혈교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사천과 청해가 만나는 창도까지 물러났다.

이미 천목각의 조사로 혈교의 본진이 청해에 있다는 것을 안 이상, 발본색원(拔本塞源)을 주저할 무림맹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 역천(逆天)의 사고를 가진 인간들이 자신들의 본진 근처에 괴랄한 함정들을 마구 설치하고 최후의 결전에 들어갔다는 것.

‘누가 씹새끼들의 후예 아니랄까 봐.’

하나같이 후유증을 남기는 환술진과 치료제가 없는 극독, 역천의 술을 이용한 동물형 강시까지 그득그득 쌓아놓았다.

이로 인해 천하의 무림맹도 섣불리 발을 내디딜 수 없는 상황.

그런데 이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흑도 놈들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사천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혹여나 저들에게 불똥이 튈까 전전긍긍하며 손과 발을 잔뜩 웅크리고 있던 흑도 놈들도 슬슬 주변 눈치를 보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흑도 무림의 최대 행사인 사흑련 개파식에 참석하지 않은 사천의 흑도들이 하나둘 응집했고, 전투를 준비 중이라는 첩보가 속속들이 들려왔다.

무림맹은 혈교에 이어 흑도들에게도 옆구리를 내줘야 하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지경.

무림맹으로선 혈교를 제압하러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혈교를 두고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

“하…….”

지끈거리는 머리를 두 손으로 지압하던 맹주원에게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소갈머리 그놈은 왜 아직도 말이 없는 게야?”

“그…… 총군사께선 최선을 다해 사흑련의 동태를 살피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그 결과가 언제 나온다는 게야?!”

맹주원의 어깨까지밖에 오지 않는 키에 차돌같이 단단한 몸뚱어리.

노인답지 않게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이가 연신 아침부터 자신을 갈구고 있었지만, 맹주원은 만통부에서처럼 함부로 개길 수가 없었다.

만통부에서야 목숨이 열 개라도 되는 양 제갈소명에게 개겼지만.

그마저도 자신의 명석한 두뇌로 ‘넘어도 되는 선’을 파악하여 ‘용인될 수준으로만’ 개겼던 것.

그러나 파당의 일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는지라, 이 노인의 선은 어느 정도일지 파악할 시간조차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제갈소명이야 손속을 쓴다 해도 멍이 남을 정도로만 쓰는데, 독왕이 그런 관용(?)을 베풀리란 법도 없지 않은가.

맹주원은 담악의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를 쓰며 말했다.

“그, 그러니까 지금으로선 모든 정보가 막힌 상태라…….”

천목각은 물론이고, 산서성에 파견되어 있던 개방들도 정보를 보내오지 않고 있었다.

사흑련에서 어떤 지시가 있었길래 사천성의 흑도 새끼들이 자꾸 뼈마디 푸는 소리를 내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뭔가 정보가 있어야 판단을 내려도 내릴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흠…….”

독왕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떠지자, 맹주원이 히끅 딸꾹질을 시작했다.

아, 설마 이대로 한 줌의 독수가 되어버리는 건가?

그때.

싸늘하게, 자존심을 건드는 말소리가 날아와 꽂힌다.

“왜 무능한 네놈이 온 게야?”

“네??”

어라, 이건 좀 선 넘네?

곧 죽을 사람의 혈도처럼 꽉 막혔던 사천의 보급을 뚫어낸 게 바로 자신 아닌가.

무공으로 치면 삼단전을 뚫어 오기조원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인 대단한 일을 한 것이다.

지금 무림맹의 어떤 이가 와도 자신만큼 하진 못할 텐데. 그런 자신을 두고 무.능?

이상한 말투나 쓰는 노인네가 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

“진소운.”

그러나, 이윽고 들려온 이름에 맹주원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 아이가 오지 않은 게야? 나는 분명 그 아이를 보내라 말했던 게야.”

“아…….”

맹주원은 어쩐지 금방 납득해 버렸다.

하긴 그놈이 있었다면, 자신이 여기까지 왔을 리도 없겠지.

“그 친구가 지금 사흑련에 사절단으로 나가 있습니다.”

“흠…… 그런 게야?”

“네. 그렇습니다.”

독왕은 어쩐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네놈이고, 소갈머리고. 일 처리가 마음에 안 드는 게야.”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판단을 받아오는 게 좋을 게야. 그렇지 않으면 칠 주야 안에 진격할 테니 그리 알고 있으란 게야.”

“……네.”

차마, 안 됩니다. 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간 보급이고 나발이고, 전선만 뒤로 물리다가 혈교와 흑도 사이에서 전멸당할 수도 있었으니.

‘총군사님…….’

사흑련의 동태가 빨리 파악되어 만통부에서 판단을 내려주길 바라고 바랄 뿐이었다.

#

“약속을 지키실 차례입니다.”

혈투는 여전히 승복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판만 더…….”

나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 약속을 지켜주십시오. 대국은 그 후에 다시 하죠.”

물론 앞으로 열 판 아니, 백 판을 한들 내가 혈투에게 질 일은 없을 것이다.

바둑이란 것도 결국 수 싸움.

머릿속에 수만 개의 기보를 쌓아두고 대국하는 놈과 싸워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더구나 그 수만 개의 기보 중엔 혈투의 다른 신분인 황실기사 ‘도아’의 것도 가득하다.

그가 바둑으로써 환골탈태(換骨奪胎)하지 않는 이상, 그가 내게 이길 일은 없을 것이다.

결국 혈투가 몸을 뒤로 물렸다.

“오늘 밤에 만나게 해주마.”

주위를 둘러보니, 일명과 당서희뿐 아니라 염귀비의 얼굴에까지 경탄이 어려있다.

거참, 이 정도로 뭘 그리 놀라나.

중요한 건, 이제 시작인데 말이지.

#

밤이 되자, 혈투가 은신술을 쓰면서 문밖을 나서려 했다.

난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몰래 움직이는 겁니까?”

“그럼 다들 네놈 목을 따고 싶어 안달인데, 당당하게 련주 만나는 꼴을 보여주란 말이냐?”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만약 내가 은신술을 쓰지 못했다면?

“그거야 네놈 사정인 것이지. 어찌 다시 대국해 볼 테냐? 이번에 이기면 당당하게 나갈 수 있도록 해주마.”

역시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추한 노인네 같으니라고.

“됐습니다. 가시죠.”

나는 귀식행보를 펼치며 그의 뒤를 따랐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혈투는 인기척이 사라진 나를 보고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의 전음이 들려온다.

[대체 그 무공은 뭐냐?]

[어르신 무공의 비밀을 밝혀주시면 저도 알려드리지요.]

[…….]

혈투는 나를 잠시 노려보고는 다시금 앞장서기 시작했다.

하여간, 호기심만 넘치는 얍삽한 노인네 같으니라고.

사흑련의 본과의 건물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경계가 삼엄했지만, 혈투와 나의 존재를 알아채는 자는 없었다.

당연하게도 사흑련주의 집무실을 찾아갈 줄 알았지만, 혈투는 이상한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이거 집무실에 데려가는 게 아니라 고문실로 이끄는 거 아냐?

그러다 어떤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혈투가 한쪽 벽면을 꾸욱 누르니 막다른 벽면이 조용히 움직이며 입구가 드러났다.

“여기다.”

야명주도 박혀있지 않은 복도를 한참 지나, 작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안에 들어서니.

그곳엔 사흑련주 차석두와 담악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서 오게. 흑염룡!”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차석두는 갑자기 나를 와락 끌어안더니 내 등을 팡팡 두드렸다.

뭐야, 술을 마시고 있었나?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의 품에선 짙은 주향이 풍겨 나왔다.

“이런 곳에서 만날 수밖에 없어 안타깝군. 어쨌든 자네는 사흑련의 창단공신이나 다름없는 존재 아닌가. 내 그대의 이름을 걸고 커다란 주연을 열려 했었는데 말이야.”

이 양반, 태연한 얼굴로 무서운 소리를 하고 있네.

차라리 사흑련이 암살자를 내 처소에 보내는 쪽이 내게는 타격이 덜할 것이다.

주연을 열어 그가 나를 창단공신이라 공표해 버리면, 그땐 빼도 박도 못하고 진짜 흑도 신성이 되어버릴 테니.

나는 그에게서 겨우 몸을 빼내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됐네. 자네와 나 사이에 어쭙잖은 예의는 집어치우라고, 하하!”

차석두는 그렇게 말하곤 잔에 술을 따라 내게 내밀었다.

하필 사흑련의 모두가 우릴 죽이고 싶어 하는 상황에서, 사흑련주인 차석두가 건네는 술잔이라니.

가뜩이나 당서희가 같이 온 것도 아닌데, 이걸 마셔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단박에 술잔을 비웠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고문을 당하다 죽는 것보단 독살로 죽는 게 덜 고통스럽겠지란 생각 때문이었다.

차석두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공기를 울린다.

“으하하하하. 역시나 자네는 어지간한 흑도인보다 호탕하다니까. 정말 우리 사흑련에 올 생각 없나?”

“일절 없습니다.”

“안타깝군. 안타까워.”

차석두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술잔을 채웠다.

나는 그의 손을 좇으며 본론을 꺼냈다.

“제가 뵙고자 한 이유는…….”

“알고 있네. 악병비 그자 때문이겠지.”

우뚝.

이내, 술을 따르던 그의 손이 멈춰 선다.

“미안하네만, 이번에도 도와줄 방법이 없네.”

나는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단장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차석두는 이내 술잔을 지그시 보더니 단숨에 삼키고는 입술을 거칠게 닦아냈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그를 믿어볼 참입니다.”

“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믿어본다라……. 나 또한 그러고 싶네만. 그럴 수가 없네.”

“어째서입니까?”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담악에게서 돌아왔다.

“모두가 피를 바라고 있으니까요.”

여전히 날카로운 눈으로 꿰뚫을 듯 나를 바라보는 담악.

“담 군사께서도 피가 필요하다 생각하십니까?”

“필연적이라 생각합니다.”

와…… 저 원수를 보는 듯한 눈빛.

대체 이번 생에 저 사람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사흑련이 제대로 몸을 펴보기도 전에 사라진다 해도 말입니까?”

“그거야 해보면 알 일이죠.”

우리 둘 사이의 가시 돋친 말들이 오가자 차석두가 중재에 나섰다.

“둘 다 그만하게. 전쟁을 선포하자고 이리 만난 게 아니니까.”

담악을 향해 고개를 내저은 차석두가 내게로 시선을 옮긴다.

“자네는 지금 우리 사흑련의 문제가 뭐라 생각하는가?”

당금 사흑련이 직면한 문제는 전생에 검마가 만들었던 흑도맹이 겪은 문제와 다르지 않을 터.

그들이 무너졌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힘이 없군요.”

“그래.”

진짜 힘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미 천하의 흑도들이 모두 모였으니, 물리적인 힘이라면 여느 단체들 못지않게 강하다.

내가 짚어낸 것은, 바로 사흑련 지휘부의 권위 문제.

지휘부의 명령을 사흑련 전체에 강제할 힘이, 즉 권위가 없다는 것이다.

차석두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우린 무림맹처럼 체계가 완성된 곳이 아니야. 당장은 사황봉의 인원들로 채웠지만, 중론이 생기면 사흑련은 그에 끌려갈 수밖에 없네.”

“…….”

그는 이제 술잔도 쓰지 않고 술병을 나발로 불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서린 근심은, 술로도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이윽고.

탁-

그가 소리 나게 술병을 탁자 위로 내려놓았다.

“이렇게 하세! 악병비는 사흑련의 금옥에 가둘 거야. 아마 오래도록 나오지 못하겠지. 대신 자네와 동료들이 도망갈 수 있는 시간은 벌어주겠네.”

“그걸로 주전파를 잠재울 수 있겠습니까?”

“임시방편일세. 아마 결국 중론에 의해 사흑련은 전쟁을 벌이겠지.”

사황봉주인 차석두가 련주가 되었다곤 하지만, 현재로선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상태.

나는 몸을 앞으로 숙여 차석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혹여, 힘을 모으기 위한 전쟁을 일으키려는 작정입니까?”

차석두의 움직임이 멈추고, 담악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피를 흘리고 나면, 사흑련 내부에서도 수습을 위해 지휘부에 힘을 실어주는 목소리가 생겨날 것이다.

자연히 지휘부로 힘이 모이고, 권위가 생겨날 터.

담악은 지금 그걸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무림맹에서 또 다른 분노를 품게 될 겁니다.”

이렇게 서로 주고받고를 계속하다 전생과 같은 상황이 되어버린다.

내겐 이를 두고 볼 생각이 추호도 없다.

내 결연한 표정에 담악이 생긋 웃으며 말을 건넨다.

“다른 방법도 있죠.”

“뭡니까?”

“사절단의 인원 모두를 단죄하는 겁니다. 그렇게 분풀이를 하고 나면 좀 낫겠지요.”

시발,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네.

자기 일 아니라 이건가?

나는 그의 도발에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여 주었다.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가만히 있어봐야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죠.”

“…….”

흐음, 저 인간 말대로 가만히 있어봐야 해결될 게 없긴 하지.

나는 입안의 가시를 조금 빼고 말을 했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말인가?”

“너무 절묘하지 않습니까.”

차석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턱을 쓸어내리며 부연했다.

“원한을 가지고 있던 단장이 구계악을 죽였다. 이게 너무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느냐 말입니다.”

담악이 눈을 날카로이 빛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요?”

나만 그렇게 느끼나?

주전파가 득세하고 있는 와중에 주전파의 우두머리나 마찬가지인 사람이 암습에 당해 죽었다.

그것도 백도의 악명높은 감찰각 당주의 손에 말이다.

마치 역사 속의 한 장면을 그대로 따온 듯 앞뒤 맥락이 너무 잘 맞는다 이 말씀.

모든 게 무림맹과 사흑련의 전쟁이란 사건을 향해 자연스레 흘러가고 있다고 할까.

더구나 악병비는 자신의 무공을 숨기지도 않았다. 아무리 원한이 깊다고 해도 정도가 있는 거다.

한 세대의 커다란 전쟁을 직접 경험해 본 나로선, 역사란 이렇게 정확한 맥락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자존심 싸움으로 전쟁이 시작되기도 하고, 완벽한 준비 끝에 작은 실수 하나로 부대 전체가 몰살당하기도 했다.

역사는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 듬성듬성 빈 공간을 메꾸어 그럴듯한 맥락을 만들어 낼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도 자연스러워, 오히려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졌다.

“제 생각엔 누군가 의도적으로 사흑련과 무림맹의 전쟁을 바라는 것 같단 말입니다.”

담악도 그런 생각을 했던 건지, 멈칫하며 뚫어지게 나를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미 흑도 무림엔 무림맹에게 원한을 가진 이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렇겠지요. 그런데 그게 너무 작위적일 정도로 개연성이 맞다는 게 문제지요.”

“…….”

담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지만,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

“만약 그런 거라면, 누군가의 의도에 우리가 놀아나는 거라면.”

나는 잠시 숨을 들이켠 뒤, 두 사람에게 물었다.

“우리가 이 사태를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까?”

잘 이해가 되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리는 차석두.

그와 달리 턱을 괴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담악.

두 사람이 잠시간 시선을 교환한 후, 담악이 말했다.

“이론상으론 의미 있는 말처럼 들립니다만, 결국엔 단지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하는 말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나는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어느 정도 확신합니다.”

“확신이요? 무슨 증거라도 있습니까?”

어쩌면 지금이 사흑련과 무림맹의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몰랐다.

승부수를 둬야 할 때라는 것.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네.”

“……그게 뭡니까?”

내 단호한 말에 담악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나를 응시했다.

“그건 차차 말씀드리고, 일단은 부탁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뭐지요?”

“사건을 조사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두 사람의 얼굴에 의문이 서린다.

“그게 무슨……?”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다 보면 이번 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담악이 내 의중을 알아차린 듯, 몸을 앞으로 숙여온다.

“미끼 역할을 하겠다는 겁니까?”

“네.”

담악과 차석두가 서로를 바라봤다.

차석두가 끌끌 웃었다.

“위험할 텐데 괜찮겠나?”

이미 할아버지의 명예까지 건 이상 내겐 돌아갈 길은 없었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오직 직진만이 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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