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어둠속의 어둠>
[당신도 참.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무기부터 맞춰줄 생각이에요?]
어둠 속, 말을 하는 여인의 입가에 미소가 어른거렸다.
한심하단 듯 말하고 있지만 그 표정이 보기 좋아 악병비는 너스레를 떨었다.
[당신과 나의 아이니까. 아마 천하제일인이 되겠지. 그런 아이를 위해서라면 지금 준비하는 것도 늦지.]
여인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대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짐을 지울 작정이에요, 당신.]
사실 악병비도 아이에게 커다란 걸 바라지 않았다.
다만, 곧 태어날 아이에게 뭘 줘야 이 벅찬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만 생각했을 뿐.
그 결론이 무기라는 건 자신이 생각해도 좀 한심하긴 했다.
여인은 자신의 배를 소중하게 쓸어내렸다.
[난 우리 아이가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흠…… 그럼 뭘 준비해야 하지? 땅이나 객잔을 하나 사둘까?]
[나 참…….]
당최 뭐가 중요한지 모른다며 타박하듯 고개를 젓는 여인의 모습이 악병비는 보기 좋았다.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저 시선이, 악병비는 좋았다.
자신을 바라보며 세상을 다 가진 듯 해사하게 웃는 저 얼굴이, 그저 좋았다.
[당신이 옆에 있어주면 되잖아요.]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겨우 그런 것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인가?
[네.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나와 우리 아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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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인의 입가에서 피가 흐른다.
[그런데…… 당신은…….]
그녀의 발 사이로 피가 철철 쏟아지기 시작했다.
[당신은 그것도 하지 못하는군요…….]
바닥에 쓰러지며 원망스레 손을 뻗는 여인.
악병비는 미친 듯이 달려가려 해보지만, 온몸을 옥죄는 사슬에 잡혀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클클클…… 무능한 놈…….]
여인의 모습을 가려버린 구계악이 악병비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다.
그 시선에 악병비의 두 눈에 불이 켜진다.
“네놈……! 네놈……!”
[평생 후회와 절망을 안고 살아가라.]
“구계악!!!”
철그럭, 철그럭.
온 내공을 끌어올려 발악을 해보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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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썩 들썩 들썩.
침상 전체가 움직일 정도로 발작을 하기 시작한 악병비.
의원과 의녀들이 전부 달려들어 제압해 보지만 악병비는 좀처럼 얌전해지지 않는다.
“마혈! 마혈을 짚어!”
“안 통해요, 의원님!”
“선천진기를 쓰고 있는 것 같아요…….”
“미친!”
무인들 중에 종종 기절해 있는 와중에도 기운을 쓰는 이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건만, 선천진기까지 쓴다는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대체 이 환자는 무엇 때문에 이리 절박하게 발악을 하는 것인가?
“별수 없는 것이야.”
그때, 보호자 역으로 대기하고 있던 당서희가 팔짱을 풀고 앞으로 나섰다.
“내가 해볼 것이야.”
의원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환자에게 어떤 약도 침도 들지 않아요! 비켜서세요.”
“나도 봐서 아는 것이야. 하지만…….”
당서희의 품에서 작은 자개 병 세 개와 긴 장침 세 개가 나타났다.
“아직 독은 써보지 않은 것이야.”
“네? 그게 무슨…… 그랬다간 이 환자…….”
“죽지 않을 정도로 쓸 것이야.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는 것이야.”
당서희가 부채질하듯 손짓을 하자, 의원과 의녀들이 동시에 물러섰다.
눈깔이 뒤집혀 허연 눈동자만 보이는 악병비는 금세라도 진기를 폭발시켜 주화입마에 빠질 기세.
당서희가 차게 가라앉은 눈으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매우 곤란해진 것이야. 이대로 죽으면 안 되는 것이야.”
백수신녀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원과 의녀들은 왜 그녀의 별호에 백수(百手)가 붙었는지 직접 목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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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 이(二) 일 차.
숙소 밖의 인원들이 더 늘었다.
기존 경비를 서던 인원들 너머 전각 주위를 얼쩡거리는 인원들까지.
황사문의 인간들도 있고, 처음 느껴보는 기감의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군요.”
내 말에 바둑 기보를 보던 혈투가 혀를 찼다.
“가뜩이나 무림맹에 불만이 많던 아이들 아니냐. 좋은 불씨가 피어오른 것이지.”
“그래도 혈투 어르신이라면 모두 상대하실 수 있겠지요?”
“잉?”
뭐가 잉? 이야, 그럼 당신 여기 왜 와있는 건데?
“저흴 보호하기 위해서 오신 거 아닙니까?”
“뭐, 표면상으론 그렇지만, 너희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지 않겠느냐?”
“…….”
아무리 내막에 대해 서로 눈치를 채고 있다 하더라도 그런 이야기는 대놓고 하지 않는 법인데.
괜히 말을 꺼냈다가 기분만 잡쳤다.
아무튼 이렇게 계속 대기만 하고 있는 건 위험하다.
사흑련 내부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르는 데다, 그 결정을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다간 대응해야 할 시기마저 놓쳐버릴 수도 있으니까.
“사흑련주를 만나게 해주십쇼.”
“응? 그걸 왜 나한테 말하냐?”
“지금으로선 도움을 청할 곳이 혈투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도움?”
혈투가 피식 웃으면서도 기보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나한테 그런 권한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천하의 혈투님이 바보도 아니고, 사흑련이란 단체가 결성되었다고 그에 순순히 따르실 리 없지 않습니까? 아마 이곳에도 사흑련주의 개인적인 부탁으로 행차하신 거지요?”
혈투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기민한 놈. 역시 다른 신성들과 달라도 다르다 이건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하던 혈투가 넌지시 묻는다.
“만나면 뭘 하려는 거냐?”
“문제를 해결해야지요.”
“문제?”
회귀까지 해서 이곳까지 왔다.
아직 세 번째 삶이 약속되어 있다는 확신도 없다.
그러니 이런 곳에서-
“이대로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호오?”
혈투의 시선이 처음으로 내게 향한다.
“죽을 때 죽더라도 끝까지 발악을 해보겠다는 말이더냐?”
“왜 벌써 죽을 거라고 확신하십니까?”
“아님 말고.”
혈투는 영 관심이 없는 듯 다시 기보를 보며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어차피 제 일이 아니다 이건가?
“그럼 저랑 내기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난 그의 손에 들린 바둑 기보를 쳐다봤다.
혈투도 흥미가 동한 듯, 나를 올려다본다.
“내기?”
“제가 바둑을 열 판 이기면 사흑련주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십쇼.”
“허허, 이놈이 이쁘다 이쁘다 해주니 이젠 머리채를 잡으려 하는구나! 그렇다면-.”
킬킬거리며 웃던 혈투가 일순 웃음을 감추었다.
“지면 무얼 줄 것이냐?”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뭘 원하십니까?”
혈투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어린다.
“네놈 목숨.”
한쪽에서 면벽을 하던 일명이 홱 하니 고개를 돌렸다.
“진 시주!”
이윽고 혈투의 냉담한 목소리가 공기를 짓누른다.
“그게 싫다면 얌전히 있어라. 지금까지 보인 건방짐으로도 내 심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니.”
어느새 다가온 일명이 내 팔을 부여잡고 당겼다.
난 그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섰다.
“좋습니다.”
“뭐?”
“진 시주!”
나는 손을 들어, 일명의 발언을 막았다.
“대신 제가 이기면 약속을 지키셔야 합니다.”
“…….”
혈투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무감해졌다.
“내가 하는 말이 농담으로 들리느냐?”
“설마요.”
“아니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것이냐?”
“둘 다 아닙니다.”
나는 그의 앞에 마주 앉아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저 멍청하게 죽음을 기다릴 생각이 없을 뿐입니다.”
“…….”
이어 바둑알을 정리한 후, 백색 바둑알을 집었다.
내 움직임을 가만히 좇던 혈투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난 건방진 놈을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만한 놈은 그냥 두고 보는 법이 없지.”
혈투는 내게서 백색 돌을 가져갔다.
“목숨은 빼앗지 않겠다. 하지만, 대신 네놈 왼팔을 가져가겠다.”
오른팔이 잘리면 검을 못 쓰지만 왼팔이 잘리면 청룡환을 잃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달리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없다.
“……알겠습니다.”
“진 시주!”
난 일명을 바라보고 작게 고개를 저은 뒤, 바둑판 위에 검은 돌을 하나 올렸다.
순식간에 시작된 승부.
혈투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염귀비.”
“네.”
“왼팔을 잡아라.”
“흐음…… 어쩔 수 없지요. 팔 하나가 없더라도 서방님은 서방님일 테니까.”
촤르르륵.
순간 염귀비가 허리에 차고 있던 장식을 풀어내더니, 촤르르 소리를 내며 내 왼팔을 감았다.
허리에 매고 있던 것이 연검이었나?
“바둑은 오른손만으로도 충분하겠지?”
“……잘 부탁드립니다.”
탁- 탁- 탁- 탁- 탁-
실내엔 바둑말 움직이는 소리만이 울려퍼졌다.
“세간에 알려져 있진 않지만 말이다. 내겐 여러 개의 신분이 있다.”
탁- 탁- 탁- 탁- 탁- 탁-
내 속도는 그렇다 쳐도, 바둑알을 놓는 혈투의 속도가 만만치 않다.
“그중 하나가 황실기사 ‘도아’라는 신분이지.”
손이 우뚝 멈췄다.
전 황실의 바둑사부이자 수많은 신묘한 기보를 만들어 낸 ‘도아’의 이름이 여기서 튀어나올 줄이야.
혈투 역시 잠시 손을 멈추고는 나를 건너다본다.
“도아를 알고 있느냐?”
나 또한 처음에 바둑을 ‘도아’의 기보로 배웠기에 그의 이름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말세군요. 혈투가 도아였다니……. 어떻게 걸리지 않은 겁니까? 흑도의 인물이었다는 건 금방 들통났을 텐데.”
“내칠 수 없었을 뿐이다. 흑도라 멀리하기엔 실력이 너무 아까웠을 테니.”
탁- 탁- 탁- 탁- 탁- 탁-
속도는 다시금 본래로 돌아왔다.
혈투나 나나 바둑을 두는 속도에서는 조금도 지지 않았다.
제 정체를 밝힌 혈투가 선심 쓰듯, 내게 물어온다.
“네가 누구에게 내기를 걸었는지 이제 알겠느냐?”
“……네.”
“이제라도 사과를 하고 얌전히 있어라. 그럼 대전 상대를 해주는 것으로 팔은 가져가지 않겠다.”
흑도인에게도 관용이란 게 있다니. 참으로 놀랄 노자다. 하지만.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내기는 계속하시죠.”
“……뭐?”
“말씀드렸던 대로 이대로 죽을 순 없어서 말입니다.”
솔직히 무공으론 이길 자신이 없다.
생사대적이라면 모를까.
그의 손아귀에서 탈출한다?
부처님 손바닥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쉽겠지. 최소 부처님은 대가리를 부수지는 않으시잖아?
하지만 바둑은 무공과 다르다.
“그리고, 저도 바둑이라면 자신이 있어서 말이지요.”
나는 머릿속 장서고에 저장된 수만 개의 바둑 기보들을 모두 꺼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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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병비가 깨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황부식은 사절단이 머무는 숙소로 향했다.
본래라면 따로 보고를 해야 하는 사항이었지만, 최소한 자신들끼리 마지막 인사라도 할 수 있게끔 배려를 했던 것.
‘어쨌든 흑염룡에겐 빚을 진 것이나 마찬가지니.’
숙소에 다다른 황부식은 숙소 인근에 진을 친 채 살기를 뿜어내는 흑도인들을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절차보다 제 감정을 우선하는 놈들이, 사흑련지휘부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오기도 전에 서둘러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매번 백도 무문들에게 밀린다는 것을, 멍청한 놈들은 조금도 깨닫지 못한다.
“저놈들을 치워라.”
“네.”
황부식의 명령에 철갑을 두른 무사들이 일제히 숙소 인근에 뭉쳐있던 흑도인들을 해산시켰다.
작은 저항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직접적으로 반기를 드는 이들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갈까.
주전파의 수장이나 마찬가지인 구계악이 죽었지만, 사흑련 내부의 여론은 오히려 주전파의 의견 쪽으로 더욱 힘이 실렸다.
구계악 뒤에서 보고만 있던 이들이 하나둘 나와 제 세력을 일구기 시작했고, 주화파 인물들은 그나마도 설 자리를 잃은 채 뒤로 밀려나기 일쑤.
이대로라면 진짜 전쟁이 터져버릴지도 몰랐다.
머리를 가로저어 생각을 털어낸 황부식이 사절단의 숙소로 들어갔다.
자신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예상한 것과 달리.
사절단 일행과 감시자들은 자신이 들어왔음에도 한곳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바둑?’
황부식은 의아함에 서둘러 가까이 다가갔다.
혈투와 진소운이 대전을 벌이고, 염귀비는 자신의 암기인 연사검으로 진소운의 왼팔을 감고 있다.
탁- 탁- 탁- 탁- 탁- 탁-
혈투의 바둑 실력이야 흑도 무림 내에서도 유명하긴 했지만, 황부식을 놀라게 한 건 도리어 진소운의 움직임이었다.
혈투의 속도에 맞춰 마치 검무를 나누듯 속도를 늦추지 않고 바둑알을 올리고 있었던 것.
탁- 탁- 탁- 탁- 탁- 탁-
바둑에 관해선 기본적인 규칙밖에 모르는 황부식이었지만, 두 사람이 나누는 수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쯤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혈투 어르신을 이길 수는 없겠지.’
무슨 내막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진소운이 팔이 잘릴 위기에 처했다는 점을 알아차린 황부식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혈투는 내기에서만큼은 그 대가를 받아내기로 유명했으니.
진소운의 팔은 이미 잘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기까지인가.’
신성들은 이렇게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다 결국 고꾸라진다.
다를 거라 생각했던 흑염룡도, 결국 다른 신성들과 같은 전철을 밟는다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형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기 위해 판이 벌어진 곳으로 다가갔다.
한참을 쉬지 않고 바둑돌을 놓던 두 사람.
먼저 손을 멈칫한 쪽은 혈투였다.
‘으음? 허……!’
혈투는 분한 듯 진소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부들부들.
혈투의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황부식은 기함하는 심정이었다.
자신이 어린아이였던 시절에도 아득할 만큼 높은 경지의 절대고수였던 혈투.
항시 여유만만하던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이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바둑으로 혈투 어르신을 몰아세웠다고?’
흑도 무림…… 아니, 나아가 강호 전체에도 적수가 얼마 없다는 그를 이리 당황시킬 수 있는 바둑 기사가 대체 몇이나 될까.
혈투의 노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로지른다.
“대체 어떻게 한 것이냐?”
“뭘 어떻게 한 게 아닙니다. 그냥 실.력.이죠.”
바둑은 잘 모르지만, 분위기상 진소운이 유리하단 것만은 알 수 있었다.
“…….”
한참 진소운을 노려보던 혈투가 한숨을 내쉬며 바둑돌 두 개를 바둑판 위에 올려놓았다.
패배를 인정한다는 의미의 두 접.
진소운의 팔을 감고 있던 연사검이 풀리고, 혈투가 고개를 떨궜다.
“십(十) 승 모두 채웠습니다. 약속은 지켜주십시오.”
“알았다.”
단지 한 판을 이긴 게 아니라 열 판이나 이겼단 말인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황부식을 발견한 진소운이 말했다.
“단장님은 깨어났습니까?”
“……으응? 그, 그래.”
“지금 가도 되겠습니까?”
“크흠. 그래, 가자.”
고개 숙인 절대 고수.
그에 반해 이제 막 빛을 발하기 시작한 신성은,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바깥으로 나선다.
황부식은 이 기묘한 광경이 어쩐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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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병비의 상태는 전문지식이 없는 내가 봐도 심각해 보였다.
회색빛 얼굴.
검게 그을린 듯한 눈두덩이.
의원의 말로는 본래 깨어날 수 없는 사람을 당서희가 억지로 깨웠다는데.
확실히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지금은 이 인간의 상태를 배려할 때가 아니었다.
이 인간 때.문.에 우리까지 모두 죽을 위기에 처했으니까.
“왜 그랬습니까?”
악병비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동태 같은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실핏줄이 거미줄처럼 일어난 그 안에는 회한, 후회, 절망 등 복잡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난…….”
그가 메마른 입술을 벌리며 거친 음성을 토해냈다.
“하지 않았다.”
“지금…… 삿된 말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
나는 다시금 입을 꾸욱 닫은 그에게 일갈했다.
“단장님뿐만 아니라 사절단 전체의 목숨이 달려 있습니다.”
이번 사건은 절대 악병비의 목숨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사절단은 물론이고 나아가 무림맹과 사천에 파견된 무사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터.
똥을 싸도 어지간히 크게 싸버렸다는 이야기다.
“그런 상황이란 말입니다.”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는 악병비가, 목소리를 쥐어짜 낸다.
“‘그놈’은 확실히 죽었나?”
“누가 봐도 악가의 열화창 흔적이었습니다.”
악병비는 고개를 푹 숙이며 깊은 회한에 빠진 듯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들었다.
“만약 내 목숨 하나로 정리가 된다면 그것도 상관없다. 하지만…… 난 분명 하지 않았다.”
“…….”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나는 물론이고 일명과 당서희도 입을 꾸욱 다물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바라고 또 바라왔던 일이다. 언젠가 내게, 등에 짊어진 모든 것들을 버려둘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가 언제든 지체 없이 황사문으로 달려가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하지만……!”
건조하게 갈라져 철판을 긁는 듯한 목소리가 귀에 거슬릴 만큼 크게 울려퍼졌다.
“이번엔 정녕 내가 하지 않았다!”
“맹세할 수 있습니까?”
“……악가의 명예를 걸…….”
나는 핏발선 그의 두 눈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아니, 그거 말고. 더 소중한 것을 걸고 말입니다.”
악병비가 죽일 듯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빠드득.
그가 이를 갈며 겨우 내뱉었다.
“……죽은 아내와 태어나지 못한 자식을 걸고서 말할 수 있다.”
입술에선 당장이라도 피가 흘러내릴 듯했다.
“……못난 애비는 스스로의 손으로 복수를 이뤄내지 못했다.”
차라리 제 손으로 복수를 이뤘으면 하는 표정이었다.
이를 보고 있자니, 더 이상 의심할 수도 없었다.
“그럼 단장님의 상처는 어찌 된 것입니까?”
“모른다. 네놈들이 돌아온 줄 알고 그냥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옆구리가 화끈거리면서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악병비의 말을 그대로 믿자면, 구계악과 악병비를 각각 습격하여 주위로 하여금 악병비가 구계악을 암습했다고 믿게 만들었다는 말인데…….
이게 현실적으로 말이 되나?
차라리 악병비가 복수심에 창을 들고 구계악 가슴에 구멍을 만들어 줬다는 것이 더 말이 되지.
하지만, 난 어쩐지 이 못난 꼴만 보여준 악병비의 말에 더 신뢰가 갔다.
“미치겠군.”
일명과 당서희의 표정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영민한 그들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 터.
그때, 악병비가 입을 열었다.
“만약 사태가 수습되지 않는다면, 내게 모든 책임을 넘겨라.”
“…….”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무림맹에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만들어 봐라. ……네놈이라면 할 수 있겠지.”
이 인간이 당최 뭔 소릴 하는 거야. 그 어려운 일을 나보고 어떻게 하라…….
꾸벅.
악병비가 고개를 숙인다.
“……뭐 하는 겁니까.”
“부탁한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가문에 이야기하여,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마.”
뭐야, 이 아저씨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습격을 당했다면, 다른 누군가가 암수로 단장님을 함정에 빠트린 겁니다. 억울하지도 않습니까?”
“지금 내 억울함 하나 풀자고 너희를 비롯한 무림맹과 사천의 무사들까지 위험에 빠트릴 순 없는 일 아니더냐.”
악병비가 내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더구나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론 복수를 한 노릇이니, 더 이상 삶에 미련 따윈 없다. 그러니 얼마든 날 매달고 앞으로 나아가라.”
“끔찍한 소릴 하시는군요.”
“진소운!”
온 힘을 다해 나를 부른 그가 묵직한 음성으로 말한다.
“세상의 모든 불합리와 모순을 해결해 나가며 앞으로 나아갈 순 없다. 때론 어떤 것들은 그저 짊어지고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다.”
“…….”
“그러니, 나아가라. 나도 악가도 이번 일로 너에게 원망이나 책임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지긋지긋하게 미웠던 인간이 갑자기 이런 말 한다고 이뻐 보일 리 없다.
애당초 내겐, 그의 말대로 세상 모든 불합리와 모순을 다 해결해 나가며 나아갈 마음도 없고.
하지만.
“그건 더 큰 문제가 생겼을 때나 할 생각입니다.”
“진소운!”
나는 힘이 빠져 겨우 몸을 붙들고 선 악병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지금 이 사건은 단장과 구계악, 두 사람을 암습한 흉수만 찾으면 될 일 아닙니까.”
벌써부터 쉬운 길만을 골라 나갈 생각은 없다.
그런 길이 정답일 리도 없고.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범인을 반드시 잡겠다 맹세하겠습니다.”
“…….”
난 나의 굳은 다짐을 말했다.
“제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악병비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홱 하니 돌려버린다.
“…….”
감정을 추스르는 악병비를 두고 나가려는 때.
잠자코 지켜보던 당서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소운의 할아버지가 유명한 포괘인 것이야?”
“……아뇨, 안휘성에서 표사 일을 하셨던 분입니다.”
그녀의 고개가 더욱 옆으로 꺾인다.
“……그럼 왜 할아버지의 명예를 건 것이야?”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여 보였다.
“우리 집안에서 그나마 유명한 분이 그분밖에 없어서 말입니다.”
“…….”
고개를 돌렸던 악병비와 일명이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본다.
쩝.
거참, 별 중요한 것도 아닌 걸 물어서 좋았던 분위기를 망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