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40화 (240/357)

240. <숨은 흉수 잡기(5)>

무림맹 만통부.

만성적인 인력 부족으로 인하여 맹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갈려나가는 곳.

평소에도 비산하는 서류와 난무하는 맹원들의 신음 소리로, 소란이 그칠 일 없는 이곳이 어쩐 일로 정적에 잠겨 있었다.

제갈소명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태원 지부에서 답장은 아직인 것이냐?”

“……네.”

사천 일대의 흑도 세력들이 자꾸 수상하게 꼼지락거린다.

혈교와의 전쟁으로 무림맹의 신경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터.

지금 흑도의 행동은 본격적인 전쟁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혈교 정벌을 눈앞에 둔 무림맹은 한 발 더 전진해야 하나, 말머리를 돌려 사천의 흑도의 뺨을 날려주러 가야 하나 결정해야 하는 시기.

사흑련에서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여러 번 태원지부에 연락을 보냈지만, 결국 답장은 오지 않았다.

툭툭.

“흐음…….”

고뇌에 빠진 제갈소명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천목각에서도 아직 연락이 없지?”

“네. 벌써 약속된 날짜가 지났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전서구는 분실의 위험이 크다.

그렇기에 그간의 정보 단절이 이해는 되었으나, 천목각의 인원들까지 이리 회신이 늦어지는 것을 보아선, 누군가 의도적으로 산서성의 정보를 틀어막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사흑련일까요?”

뚝.

순간, 책상을 두드리던 제갈소명의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질문한 맹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왜…… 제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흐음…….”

맹주원이라면 이런 질문 따윈 하지 않았겠지.

제갈소명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고르고 고른 인재라 하지만, 역량에서 분명한 차이가 났다.

그간 맹주원으로 어떻게 버티긴 했지만, 슬슬 그것도 한계가 보인다.

이번과 같이 불가피하게 그를 파견 보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만통부의 일을 제갈소명 혼자서 다 처리해야 하니까.

이건 나이 먹고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어서 진소운 그놈을 만통부에 앉혀야 하는데.’

귀찮지만 그때까진 어쩔 수 없다.

제갈소명은 질문한 맹원에게 일러주었다.

“이제 막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은 사흑련에 그런 정보 단체가 있을 리 없지.”

사실 이제 막 만들어진 조악한 단체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어쨌든 사람들을 끌어모아 첫발은 떼었으니.

‘청와 서원의 담악이라…… 좋은 인재를 빼앗겼군.’

물론 처음부터 그가 황실에 들어갈 인재란 사실을 알았기에, 무림맹과 연이 닿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흑련의 총군사라니.

그의 선택은 몹시 의외였다.

내막을 알아보고 싶지만, 지금 무림맹은 그럴 여유조차 없다.

안 그래도 사천에 파견된 무사들이 제대로 된 보급을 받지 못해 비명을 지르고 있으니까.

이러다간 혈교의 발악에 무림맹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맹원들의 반란에 무림맹이 무너지게 생겼다.

물론 이런 어려움이 어제오늘 벌어진 일은 아니다.

아마 이후에도 무림맹은 계속 비슷한 어려움을 겪을 터.

그렇기에 무엇보다, 뜻을 이어가는 이들이 필요하다.

가문을 넘고, 사문을 초월하여 강호의 평안을 진심으로 바라는 이들이.

이는 제갈소명이 항시 인재에 갈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맹주원과 진소운……. 그 녀석들이 시작점이 될 터.’

두 눈을 꾸욱 누르고 있자니 세상이 핑핑 도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휴식도 제갈소명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총군사님! 천목각의 전서가 왔습니다.”

“……!”

그 소식에, 조금 쉬고 싶다 생각하던 제갈소명은 피곤함도 잊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천목각과 만통부의 검수를 받지 않고 곧장 총군사에게 전달되는 붉은 전서.

붉은 전서에는 간결한 문장만이 쓰여 있었다.

[임무 실패]

가타부타 설명 없는 간결한 문장에, 제갈소명과 맹원도 입을 다물었다.

맹원이 겨우 입술을 떼었다.

“총군사님. 이건…….”

천목각의 보고는 틀이 정해져 있다.

최소의 간결함만으로 정보의 핵심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틀.

그런데 그 틀을 쓰지도 못했다니.

이는 조사를 나갔던 천목각의 인원이, 임무 실패는 물론이고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까지 처했다는 의미였다.

“설마…… 담악 그자가 대비를 해놓은 것일까요?”

제갈소명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천하의 담악이라 해도,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천목각을 막을 순 없을 테지.’

천목각이 어떤 단체인가, 무림맹의 눈과 귀가 되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무림맹의 특수훈련을 받아온 자들.

무공 면에선 다를 수 있지만, 대상에 숨어들어 정보를 수집하고 취급하는 실력 면에선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그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

심지어 유사시 암살 임무도 처리하는 이들을, 제아무리 담악이 기지를 부린다 해도 쉬이 막아낸다는 게 어불성설.

툭툭.

“어찌 된 일일까…….”

단지 천목각의 임무가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하는 문제가 아니다.

산서 태원. 사흑련이 있는 곳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게 문제.

지금 중요한 건 과연 누가, 왜 정보를 틀어막고 있느냐다.

책상을 두드리던 제갈소명이 순간 주먹을 꽉 쥔다.

‘설마……. 마교 그놈들이!’

지금 그들이 아니면 태원의 일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들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냐는 것.

만약 그들이 사흑련과 무림맹 간의 전쟁을 꾸미고 있는 거라면, 정말 그런 것이라면…….

사절단의 임무는 불가능한 수준으로 난이도가 올라간다.

아니, 임무가 문제가 아니라 사절단의 안위 자체가 위험해진다.

‘너무 어려운 임무를 맡긴 건 아닌가!’

반쯤은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라는 심정으로 맡겼지만,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걱정이 앞섰다.

“일단 기다려 보도록 할까요?”

맹원의 말에 제갈소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범인은 모르겠지만 지금 그리 여유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총군사님?”

“맹주전에 다녀오마.”

제갈소명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

서평오견 중 넷째가 인피면구를 쓴 암수였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사흑련 전체에 충격이 퍼져나갔다.

특히나 수내부들의 충격이 컸다.

도봉수와 서평오견 형제들이 몰랐다는 건, 그만큼 암수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방증이었으니까.

더불어 자신들 또한 암살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고, 더러는 가장 가까운 이들과도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지금 중요한 건 이 암수를 누가 보냈냐는 겁니다.”

“당연히 무림맹에서 보냈겠지요.”

“너 이 새끼!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전쟁하자고 지껄이는 거냐? 무림맹이 미치지 않고서야 지금 저딴 일을 벌인다고?”

“…….”

암수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결국 그 존재들을 키워낸 조직이 대단하다는 뜻.

하지만 지금 천하에 무림맹과 사흑련, 혈교를 제외하고 그런 존재들을 키워낼 만한 존재가 어디 있을까.

더불어 사람을 죽이고 그 사람을 흉내 내게 할 만큼 간악한 심계를 가진 이들을 손에 꼽으라면 더더욱이 없을 것이었다.

사흑련 내부에서도 암수를 골라내야 한다는 의견이 거세졌다.

“일단은 암수를 먼저 선별해야 합니다.”

“누가 암수인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 흑염룡이 쓴 방법을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다만 실제로 행하기를 주저할 뿐.

진소운이 암수를 어떻게 잡았는지 모두 알려졌지만, 정작 그 일을 해낼 만한 간담을 가진 자는 없었다.

암수를 의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혹여 한 치의 실수라도 범할 경우 무고한 사형제와 동지를 죽일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간 당장이라도 사절단을 끌어내어 목을 쳐야 한다고 주장하던 주전파를 비롯한 수뇌부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모두 흑염룡의 다음 행보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

이제껏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었던 진소운은 그 억울함을 해소하듯 득의양양하게 사흑련을 활보하고 다녔다.

물론 애초에 주눅 들어 다닌 적도 없긴 하지만.

쾅!

사룡문이 기거하는 전각의 문이 부서지고, 사룡문도들이 뱀눈을 치켜뜨며 저마다 무기를 꺼내 들려 했다.

“누구냐! 감히 사룡문에…….”

“나다 이 뱀새끼들아!”

무례하기 그지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들어서는 존재는 다름 아닌 진소운.

“…….”

보무도 당당히 들어서는 그의 모습에 방금 전까지 분노를 쏟아내려던 사룡문도들은 멈칫했다.

군유현과 혈투를 동반한 진소운은 마치 제 안방에라도 들어온 듯, 거침없이 의자를 당겨와 앉으며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호위대들 다 모여.”

“…….”

진소운이 왜 사룡문에 방문했는지,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직감한 사룡문도들은 주춤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는 사룡문의 갈문정을 죽인 암수를 찾기 위해 사룡문에 방문한 것이다.

이제껏 암수가 사절단의 일명이라 주장하던 사룡문의 입장에선 피가 거꾸로 솟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진소운이 도봉수의 암수를 찾아내면서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진소운이 아무도 몰랐던 암수의 존재를 알아내고 찾아내어 죽이기까지 한 이상.

련주의 허락까지 받은 그를 막아설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그때.

“흑염룡.”

기다렸다는 듯이 사룡문 부문주 왕주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최대한 정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암수를 찾으러 온 거겠지?”

그러곤 단언하듯 말했다.

“우린 내부 심문을 통해 암수가 없음을 확인했네. 그러니 다른 곳으로 가보게.”

왕주발을 바라보던 진소운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내부 심문?

“지랄하네.”

“…….”

모멸적인 진소운의 언행에 왕주발의 눈가가 부르르 떨렸다.

“우린 분명 철저한 질문을 통해…….”

“그럼 왜 아직도 암수가 있는 거요?”

“뭐?”

진소운이 턱짓으로 사룡문도들을 가리켰다.

“진짜 암수를 내버려 둘 건가? 그럼 앞으로 벌어지는 암살의 책임은 모두 사룡문이 지게 될 건데…….”

그러곤 왕주발을 바라보며 싱긋 웃는다.

“그래도 괜찮소?”

일순, 왕주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

“아직도 내 능력을 의심하는 겁니까?”

“…….”

두 사람 사이에 치열한 눈빛이 오고 갔다.

이제 한 문파의 수장이 된 왕주발과, 사절단을 살려서 무림맹으로 데려가야 하는 진소운의 물러설 수 없는 자존심 싸움.

치열한 기 싸움에 장내의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그때.

“콜록, 콜록.”

적막을 울리는 가벼운 기침 소리.

진소운의 눈빛이 희번득 번쩍였다.

“누구인가?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

이윽고 진소운이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다.

“본 좌가 관심법을 쓰고 있는데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느냐 말이야!”

진소운의 호통에 사룡문의 문도들이 하나둘 한쪽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시선이 모인 곳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히끅.

“네놈인가?”

“죄, 죄송합니다.”

진소운은 그 남자에게 다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지금 본 좌가 관심법을 쓰고 있는데 어찌 기침을 할 수 있느냐, 이 미련한 것아!”

“히끅! 히끅! 히끅!”

“내가 가만히 보니 네놈 머릿속에 마군이가 가득 찼구나.”

“히끅…… 태, 태을문은 도문이라 들었는데요…….”

수염 덥수룩한 건장한 사내가 소년이 된 듯 움츠러들며 말했고.

진소운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말에 말대꾸를 하는 걸 보니 네놈이 암수가 확실하구나!!!”

“그, 그게 무슨!!!”

상황이 이쯤 되자, 기침을 했던 사내는 기침 하나로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결국 왕주발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그만하게. 흑염룡.”

이 이상 진소운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어떤 모멸을 당할지 몰랐다.

모르긴 몰라도 흑염룡이 지독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건, 이미 흑도 무림 내에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으니까.

왕주발이 진소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호위대만 모아주면 되는가?”

“호위대와 장로진들 모두 모아주시오.”

“나도 포함이 되겠지?”

“아니. 당신은 오지 않아도 상관없소.”

“응?”

진소운이 팔짱을 낀 채로 그의 얼굴을 한 차례 훑었다.

“본 좌가 이미 관심법으로 그대의 머릿속엔 마군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

왕주발은 복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종전의 문도가 말한 것처럼 태을문은 본래 도문이 아닌가?

왜 불가의 마군(魔軍)이가 나오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괜히 귀찮아질 것 같아 입을 꾸욱 다물었다.

“…….”

그리고 이 상황을 지켜보던 군유현과 혈투는 함지박만 하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혈투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진짜 미친놈이군.”

“…….”

“너도 그리 생각하지?”

군유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분명 진소운 머리에 마군이가 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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