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 <판돈을 챙기는 흑염룡(5)>
그래, 솔직히 인정한다.
내 행동이 좀 과하긴 했다.
의심암귀가 붙어 있는 이념심문관 눈에는 딱 봐도 흑도의 간자 아니면, 언제든 진영을 바꿀 수 있는 변절자 새끼로 보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적이나 다름없는 적군의 총군사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다니.
솔직히 나라도 ‘저 새끼가 뒷돈을 얼마나 받아 처먹었길래 저렇게 목숨을 내던지지?’ 하겠다.
그런데 나로선 억울하지 않겠나.
아니, 나라고 목숨을 걸고 싶었겠는가.
그 염병할 제금학 새끼가 음양쌍마일 줄 내가 알았겠냐고.
물론 알았다고 해서 놈을 처단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면으로 맞붙기보단 다른 방법을 찾으려 애를 썼겠지.
이처럼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 담악의 호의를 얻으려 하진 않았을 거다.
“왜 대답이 없지?”
아무리 그래도 사흑련과 무림맹의 평화 조약의 최대 공신인 나를 두고 흑도에 가담할 생각이냐는 질문은 좀 너무 나간 거 아닌가?
나도 선 넘었지만, 악병비도 선 세게 넘은 거다.
내가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쳐다보자, 악병비의 미간 주름이 더욱 깊게 파인다.
“정말 가담할 생각이냐?”
험악한 인상에 번뜩이는 눈빛까지 쏘아내는 걸 보니, 내가 그렇다고 말하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다.
이 빌어먹을 인간 같으니.
“무슨 소립니까. 제가 왜 가담을 해요?”
악병비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상처가 아문 지 오래됐으니, 피가 모자라 그런 건 아닌 듯하고, 머릿속으로 괜한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건 초장에 잡아야겠지.
“정통성 있는 정도백문의 제자인 제가 왜 사흑련 따위에 가담을 한단 말입니까?”
“……정통성?”
뭐야? 저 띠꺼운 표정은.
나도 지지 않고 띠꺼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역사로 따지면 악가보다 더 오래된 게 태을문입니다.”
“…….”
악병비는 잠시 흠칫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띠꺼운 표정이 되었다.
“정도백문?”
정도를 걸은 것으로 따지면 태을문에 비할 데가 없다.
오백 년간 세력을 불리거나 힘을 가져본 적이 없거든.
……근데 이거 왜 눈물이 나지?
나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깨끗한 걸로 따지면 태을문에 비할 문파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묻는 것이다. 련주의 말대로 사흑련에 가담하여 부귀영화를…….”
“사흑련에 가담한 시점에서 이미 부귀영화와 멀어진 거 아닙니까?”
악병비는 말없이 한참이나 나를 응시했다.
사실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다.
악병비에게 사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애당초 내가 사흑련에서 저지른 일들이 무림맹과 학관에 알려지면 어마어마한 난리가 날 것 같거든.
아마도 의심암귀가 붙은 인간들이 시뻘건 눈동자를 하고선, 내 머리털이 검은 걸 가지고 흑도 물이 든 거 아니냐고 추궁하겠지.
지금 눈앞에 있는 이념심문관은 의심암귀들 맨 앞에 설 것이고.
이념심문관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고 비굴한 모습 따윌 보일 생각은 없다.
눈깔이 새빨간 놈들은 그렇게 살라 하지.
난 내 행동에 당당하다.
“앞으로도 사흑련에 가담할 생각이나…….”
“없습니다. 전 무림맹에서 겁나게 출세할 거고, 태을문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버금가는 문파로 만들 생각이니까요.”
“…….”
아, 이건 좀 많이 나갔나?
방금 전까지 의심의 눈초리로 보던 악병비가 한심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제길, 왜지? 더 기분이 나쁘네.
“가능할 거라 보진 않는다만…….”
“뭐요?”
내가 눈을 살쾡이처럼 치켜뜨자, 악병비가 헛기침을 한다.
“큼큼. 어쨌든, 그렇다면 알겠다. 앞으로도 그 마음 변치 않도록 해라.”
응?
“네?”
뭐지? 이념심문관 그쪽 왜 따스한 표정 짓는 건데.
“말 그대로다. 앞으로 너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수많은 인간들이 너를 음해하고 헐뜯을 것이다.”
아니, 그걸 가장 본격적으로 앞장서서 했던 게 본인 아닌가?
이제 와서 왜 아닌 것처럼…….
나는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네가 해왔던 행동을 생각해 보면, 그보다 더 물어뜯기 좋은 재료가 없지.”
어느새 악병비의 얼굴이 진중하게 바뀌었다.
“그렇다 해서, 표리부동하여 눈앞의 이익이나 감정에 취해 잘못된 길을 밟지 마라.”
“…….”
“정도는 본래 힘든 길이며, 괴로운 일이다. 그 괴로움에서 눈을 돌린 이는…… 아집에 둘러싸인 채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제 눈을 가린다.”
악병비는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는 듯 허공을 바라봤다.
“그런 자는 자신이 잘못 걷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지.”
악병비는 타인의 이야기를 하는 듯 말을 전했지만, 누가 들어도 본인의 이야기라는 것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니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계속 그 길을 가라. 그러다 보면…….”
잠시 말을 멈춘 악병비가 양손으로 주먹을 꽉 쥔다.
“널 믿고 돕는 이들이 분명 나타날 것이다.”
그러곤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 같은 놈에게도 나타났으니, 이건 분명할 것이다.”
이내 고개를 돌려버린 악병비의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하려니 영 부끄러움이 밀려드나 보다.
나는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그 말은 제가 흑도의 간자가 아니란 걸 확인했다는 말입니까?”
“……크흠, 애초에 넌 간자였던 적도 없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아무튼 그리 알고 있어라. 그리고…….”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이는 악병비.
뭐야, 손은 왜 꼼지락거리는 건데.
또 무슨 말을 하려…….
“포기하지 않아줘서 고맙다.”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쯤 되자 나도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음, 한 가지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악병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차후, 감찰각이 네놈을 흑도 간자로 의심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이는 삼당주인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네네, 알겠습니다. 근데 제 부탁은 그게 아니고요.”
나는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음…… 얼굴 한번 당겨봐도 되겠습니까?”
“?”
거, 인피면구인지 확인 좀 해보게.
아무리 봐도 내가 아는 이념심문관이 아닌 거 같거든.
“살짝만 당겨보겠습니다.”
“…….”
섬전 같은 속도로, 악병비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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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실에 들어서던 일명은 악병비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방금 진소운과 ’대화‘를 했을 텐데, 어째서 양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거지?
“단장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니다.”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볼이…….”
“아니라 했다!”
“…….”
성난 강아지처럼 왕왕 짖어대는 악병비.
두 눈에 불을 켜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쏘아보는 모습에 일명은 입을 꾸욱 다물었다.
혹시 대화가 잘되지 않은 건가?
“혹여…… 아직도 의심하시는 겁니까?”
“의심?”
그게 아니면 왜 볼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건데.
일명이 악병비의 시선을 오롯이 받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소운 그 친구가 행동 방식이 좀 거칠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의 색까지 검다 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진소운에겐 그를 보호하고 지탱해 줄 배경이 없을 뿐이다.
본사의 청원 스님도, 모용세가의 패검도 행동이 거칠기 그지없지만, 강호의 그 누구도 그들의 벡도로서의 본질은 의심치 않는다.
일명으로선 삿된 눈으로 껍데기만 보고 인간을 판단하는 속세인들이 안타까웠다.
그때.
“나도 안다.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정도는.”
“네?”
악병비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터져 나왔다.
“녀석은……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이무기 같은 놈이다. 한번 뛰어오를 때마다 사람들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존재인 거지.”
“…….”
“나 또한 아직 용이 되지 못한 녀석의 외피만을 보았기에 녀석을 의심했던 것이다. 녀석의 목표와 본질이 어떤지는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
이윽고 악병비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읊조렸다.
“……모두 반성하고 있다.”
문득 일명은 악병비의 얼굴이 많이 바뀌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변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조금 더 편안해지고 단단해진 느낌.
“아마 녀석의 행동이 그렇게도 불편했던 이유는, 우리 아니, 어쩌면 모두가 이미 본질을 많이 잃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악병비가 한쪽 눈을 치켜뜨며 일명을 바라보았다.
“소불(笑佛) 또한 그리 생각했기에 순순히 진소운을 따른 것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천하의 소불이 누군가의 심부름만 하다니. 자네는 용소아 옆에서도 그러지 않았었는데 말이야.”
“……아미타불.”
어느덧 악병비의 입가에 홀가분해 보이는 미소가 어린다.
“걱정 마라. 더 이상 놈을 의심하는 일은 없을 테니. 아니, 앞으로 녀석을 의심하는 놈들을 의심하는 게 내 일이 되겠지.”
일명은 슬며시 눈을 감았다.
깨달은 자는 존재 자체만으로 주변인들의 눈을 밝히고 바른길로 인도한다.
용소아 또한 깨달은 자에 속하지만 그 궤가 다르다.
용소아는 직접 손을 잡아 이끌어 길을 안내한다면, 진소운은 억지로 눈을 뜨게 하여 스스로 길을 찾게 한다.
“아미타불…….”
과연 현시대에 필요한 영웅은 어느 쪽일지 심히 고민이 되는 일명이었다.
그때, 악병비가 중얼거리듯 혼잣말을 했다.
“……어쨌든 난 의심을 벗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지.”
그러곤 볼이 아픈지 양손으로 문질거리는 악병비.
“…….”
일명은 악병비의 양 볼이 왜 빨갛게 부어오른 건지 다시금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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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투 어르신은 어디 계십니까?”
이 인간은 대체 어디에 박혀 있길래 보이질 않는 거지?
“어머, 진 공자님. 이제 일어났나 보네요?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는데.”
염귀비가 매혹적인 향을 풍기며 슬쩍 손을 뻗는다.
나는 그 손을 밀어내며 말했다.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고난을 함께 거쳐온 남녀가 나눌 이야기가 뭐가 있겠어요.”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꼬며 제 입술을 매만지는 염귀비.
뭔가 매혹적인 향이 더 진해지면서, 코가 조금씩 아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절대 염귀비가 헛소리를 해서 그런 게 아니다. 코가 아파서다. 코가.
“거 또 무슨 이상한 말씀을 하시려…….”
“어찌 되었든 진 공자님과 난, 생사를 함께 넘었잖아요. 그걸 기념할 만한 일을 해야지 않겠어요. 후훗.”
내 어깨에 팔을 올리고 귓가에 숨소리를 불어 넣는 염귀비.
아니, 이 할머니가 대체 왜 이러지?
“뭐, 공치사라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부담스러운 염귀비의 팔을 내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염귀비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왜 안 통하지?”
그녀의 혼잣말에 나는 서둘러 내 몸을 매만졌다.
뭐지, 그사이 뭔 짓이라도 한 건가?
“태을문의 무공은 이것저것 섞어놓은 잡탕심법 아니었나?”
왠지 목소리도 쌀쌀맞아진 것 같았다.
나는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서며 대꾸했다.
“……정통 도가 문파에 무슨 그런 말씀을.”
“혈투 그 영감 말이 맞았나. 쳇.”
쓰고 있던 가면을 들킨 듯, 허탈한표정으로 자리에 털썩 앉아버린 염귀비.
이윽고 그녀는 거친 사내처럼 술병을 나발로 불었다.
당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람?
“뭔 일입니까?”
“됐다. 통하지도 않는 놈한테 애써봐야 내 몸만 축나지.”
“……혈투 어르신은 어디 계십니가?”
염귀비가 귀찮다는 듯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다.
“저 뒤쪽 소연무장으로 가봐라. 아침부터 그곳에서 나발을 불고 있으니.”
뭔가 기분이 팍 상한 듯 눈초리도 곱지 않다.
그래도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다 생각했는데 말이지.
“감사합니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곤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내실을 나가며 문고리를 잡는 순간.
콰직.
……뭔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숙이니 문에 붙어있어야 할 문고리가 손안에 떨어져 있었다.
‘또냐…….’
이걸로 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고개를 돌려 염귀비를 바라보니, 별반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이긴 한데.
설마 나중에 담악에게 고자질하진 않겠지?
담악도 사람인데, 생명의 은인에게 청구서를 날릴 일도 없겠고.
‘그래도 날린다면…….’
그때는 무림학관에 가 있을 터이니 무시하면 그만이다.
계산이 선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왔다.
급한 일을 대충 처리한 후, 곧장 혈투를 찾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온몸에 넘쳐흐르는 활기. 도무지 제어되지 않는 신체.
기의 운용도 심상치가 않다.
그전엔 집중을 해야 단전이 움직였다면, 지금은 의념이 뻗는 것만으로도 단전이 빠르게 움직였다.
‘대체 뭔 짓거리를 한 거람.’
내가 느끼기에도 난 음양쌍마와의 전투에서 죽었어야 했다.
흘린 피로 치면 저승 문턱 넘고 염라대왕 앞에서 인사를 올리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었으니까.
헌데 근육의 부작용과 몸에 이상이 생기긴커녕, 오히려 몸에 더욱 활기가 돋고 있었다.
의원은 물론이고 당서희도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지 못했다.
궁금한 점은 혈투에게 물어보라고 할 뿐.
이 말만 아니었어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는데, 혹여 그가 내 몸에 뭔가 사술을 걸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불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침 할 이야기도 있었기에, 대체 내 몸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그를 찾는 중이었다.
연무장에 들어서자마자,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내가 보였다.
“여기 계셨군요.”
“……엥?”
연무장 중앙에서 널브러진 술병들을 친구삼아 홀로 술을 마시고 있는 혈투가 한쪽 눈을 치켜떴다.
“뭐야? 백도의 졸개가 왜 내 눈앞에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는 거지?”
“…….”
취했나?
“여쭤볼 것이 있어 왔습니다. 다음에 다시 올까요?”
“흥! 백도의 졸개가 흑도의 명망 높은 이 혈투 어르신을 보러 다시 오겠다고? 언감생심 가능하기나 할 것 같으냐?”
맞네, 취했네.
내가 한심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쏘아보든 말든, 혈투가 술병으로 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래, 좋다! 어디 한번 말해봐라. 뭐가 궁금한 것이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제 몸에 관한 겁니다.”
“그래.”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혈투.
난 그에게 내 얼굴을 각인시키듯,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대체 제 몸에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응?”
콰직-
내가 혈투의 손에 들린 술병을 가로채 살짝 거머쥐자마자, 술병은 흔적도 없이 바스러졌다.
“몸이 제어가 안 됩니다. 사흑련의 문고리란 문고리는 다 제가 부술 판이고, 밥을 먹을 때마다 식기도 한 무더기씩 버려지고 있습니다.”
내 말에 혈투가 음침하게 웃는다.
“으흐흐흐흐.”
아니, 이 노인네가.
나는 정말 심각하다니까?
“지금 웃을 때가 아닙니다. 무인에게 신(身)의 제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혈투는 다른 술병을 집어 들며 타박했다.
“멍청한 놈이 제 손에 금덩이를 쥐고도 가치를 모르니 웃지 않고 배길 수가 있느냐?”
“……금덩이요?”
혈투는 속이 쓰린 듯 술병째로 꿀떡꿀떡 쉬지도 않고 술을 마셨다.
주변에 널브러진 술병의 숫자만으로도 이미 한계치를 넘긴 것 같은데…….
저 노인네, 저러다 쓰러지는 거 아냐?
“크하……!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다. 그저 네 몸이 스스로 변한 거지.”
“……그게 가능합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바라보던 혈투가 피식 웃음을 흘린다.
“그러니 기연이라 부르는 것 아니더냐?”
“기연이요?”
“그래…… 보통 무인, 아니 특별한 놈도 만나기 힘든 대단한 기연이지.”
나는 그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제가 만난 기연이 대체 무엇입니까?”
술병을 다시 입에 가져가려던 혈투가 동작을 멈추곤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
나 역시 숨을 멈추고 그의 입이 움직이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윽고, 희미한 미소가 어린 그의 입술이 열린다.
“환골탈태(換骨奪胎).”
그의 말에 척추를 타고 희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