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판돈을 챙기는 흑염룡(4)>
사천에 북서풍이 풀기 시작했다.
농사를 짓던 이들은 겨울을 날 땔감 준비에 박차를 가했고, 상인들은 호수의 물과 같이 꽁꽁 얼어붙을 시장 경제를 대비해 주문 물품을 줄였다.
고향에서 만 리나 떨어진 곳에 파견을 나온 무사들은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느껴지는 냉기에 더욱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오늘까지.
사천에서 전투를 준비하던 흑도 무림의 방파들이 저마다의 사문으로 돌아간 후, 일부 지원 물품을 보내주기 시작했다.
애당초 사흑련에서 발표한 이야기는 합동작전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제까지 적이었던 이들과 오늘부터 곧장 등을 맞대고 싸울 수 있을 만큼 간담이 큰 자는 없었다.
더구나 각 지역에서 성세를 널리 퍼트렸던 백도에 비하면, 재정 상태가 불안정한 흑도 무림에서 보내는 지원 물품도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무림맹의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 드높았다.
더 이상 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정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달콤한 포상이었다.
게다가 당가의 독왕을 중심으로 청성과 아미 그리고 백팔봉에 소속된 많은 문파들 역시 무림맹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독왕은 사기가 넘쳐흐르는 인뭔들 앞에 서서, 제 허리에 두 손을 착 올려두었다.
“전쟁을 너무 오래 끌고 온 게야! 이제 전쟁을 끝낼 때가 온 게야!”
“““우아아아아아아악!”””
“고로 이제는, 천명을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지 놈들에게 보여줄 때인 게야!”
“““가즈아아아아!”””
본래 무림맹의 청룡각주가 부대를 통솔하여야 하지만, 상징성이나 무사들의 사기를 고려하여. 실제 지휘는 청룡각주가 하되 표면적으론 독왕이 대장직을 수행하기로 하였다.
수뇌와 군사부들이 전략적으로 내린 이 결정은, 예상대로 백도 무림의 사기를 엄청나게 끌어올렸다.
적진에 괴랄한 사술을 쓰는 존재들이 있다면 아군에겐 독인과 독왕이 있다.
이런 단순명쾌한 안정감과 이제 곧 전쟁이 끝난다는 기대감은 그 어느 때보다 무림맹의 무사들을 흉포하게 만들었다.
모산파와 제갈세가에서 보내온 진법가들이 가장 앞서서 혈교가 설치한 기문진을 해진했다.
이어 독인들이 사방에 널린 독들을 치워버리며 길을 열었고, 백도 무림은 혈교로 곧장 펼쳐진 진입로를 따라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갔다.
“죽여! 죽여버려!”
“시체를 가지고 장난치는 놈들이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포로는 필요 없어! 이곳에 잡초 한 포기조차 남기지 마라!”
그간 혈교가 부린 횡포로 인해 분노에 가득 차 있던 백도 무림은 폭풍같이 혈교를 휩쓸었다.
혈교의 가장 깊은 지하실에선 강시를 만들려고 준비해 온 시체 백 구가 발견되었고, 강시를 만들다 실패한 흔적이 역력한 시체만 이백 구 이상 발견되었다.
이 끔찍한 광경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파견부대에 전해졌고, 그들 사이에선 그간의 분노에 더해 이젠 역천의 존재들을 모두 멸해야 한다는 사명감까지 불타올랐다.
그들의 손속엔 한 톨의 자비심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혈교의 무사들과 술사들을 모두 죽이고, 연구소와 실험실의 자료를 전부 챙긴 후에 불을 질렀다.
“하, 항복하겠소!”
“사, 살려주시오!”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겠소……!”
혈교의 명이 다한 것을 알고 일찌감치 항복한 이들도 있었지만, 무림맹은 그 어떤 예외도 용납지 않았다.
사술 연구에 동원할 일부 술사들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인원들.
특히 혈교의 무공을 익힌 자들은 전부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렸다.
폭풍 같은 기세로 혈교를 쓸어버리는 와중, 독왕 당혁제는 맹주원을 대동해 실험에 사용된 시체들과 자료를 살폈다.
“쯔쯧. 딱 봐도 별거 없는 게야.”
“그, 그렇습니까?”
“공부의 수준도 낮고, 실험도 어설픈 게야.”
당혁제의 말에 맹주원은 치솟아 오르는 구역질을 억지로 참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군요. 근데 어째서 제가 여기 와 있는 겁니까……?”
자신은 지원부대에 속한 군사다.
자고로 군사란 작전안을 세우기만 할 뿐, 전쟁터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진 않는 법 아니던가.
“네놈이 이 상황을 봐야 적들에 대해 알 수 있는 게야.”
“…….”
이젠 저 이상한 말투에 조금 적응이 되었나 싶었는데, 여전히 그가 하는 말의 내용은 도통 이해가 안 된다.
아니, 만통부 부장인 자신이 적들에 대해 알아봐야 뭘 하겠는가?
“쯔쯧. 이런 위급한 상황에 저런 멍청한 놈을 보내다니. 소갈머리 그놈에게 따져야겠는 게야.”
멍청? 만통부 최고 인재인 자신에게 멍청이라니…….
뭐, 제갈소명이 소갈머리인 건 맞다만…….
혀를 차는 당혁제에 맹주원의 이마에 핏대가 불거졌지만, 그는 애써 감정을 감추었다.
아직 어디까지 개겨도 되는지 판단이 확실히 서지 않았기 때문에.
독왕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맹주원을 바라보며 툭 내뱉었다.
“놈들의 주력 무기는 사술과 철강시였던 게야. 그런데 놈들은 철강시를 만들 능력이 없었던 게야. 이게 뭘 뜻하는지 아직도 모르는 게야?”
“아!”
그제야 맹주원은 한 대 맞은 듯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설마…… 배후에 다른 존재들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맹주원은 절대 있어선 안 될 상황을 상정하며 머릿속으로 조각을 짜맞추었다.
혈교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무림맹에서 얼마나 많은 재화와 인명을 쏟아부었던가.
더구나 사천의 사태를 해결했다 한들 무림맹에 이득이 되는 건 없다.
그저 본래 가지고 있던 걸 지켰을 뿐이니까.
그런데 이들이 몸통이 아니라면?
그저 꼬리에 불과한 이들을 처리하기 위해 무림맹의 기둥이 몇 개나 뽑혀나갔는지 모른다.
이 정도 수준의 적들이 몇 번만 더 나타나도 존폐의 위기에 처할 텐데, 만약 배후가 직접 나타난다면.
……무림맹은 결국 쓰러지고 말 것이다.
당혁제는 지금 그걸 이야기하고 있었다.
“확실하진 않은 게야.”
“…….”
천하의 독왕은 모용강과 다르게 쉰소리를 하지 않는 이로 유명하다.
그런 그가 단순한 예측만으로 말을 꺼냈을 리 없다.
이를 증명하듯 독왕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다.
“그래도 준비는 해야 하는 게야.”
“…….”
준비…….
너무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말이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당혁제의 얼굴을 보니, 그는 벌써 혹독한 앞날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너도 적응하는 게 좋을 게야. 이런 장면을 보는 건 이번이 끝이 아닌 게야.”
연속된 토악질로 얼굴이 창백해진 맹주원을 뒤로하고 당혁제는 돌아섰다.
그리고 그 순간, 맹주원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서, 설마…… 평생 이렇게 돌아다녀야 한다고?’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전쟁이 터지면 무림맹이 흔들리는 것뿐만 아니라 군사인 자신도 전쟁터에 끌려다니게 될 것이다.
‘조, 좆대따…….’
어쩌면 자신의 평생소원이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과 절망감이 가슴속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한편.
맹주원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무림맹의 무사들은 승리를 만끽하고 있었다.
전쟁은 모두를 피폐하게 한다.
전쟁이 종식되었다는 것,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투에 참전한 무사들은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을 느꼈다.
당가와 청성, 아미와 백팔봉 등 모든 문파의 무사들이 각 세력을 떠나 서로의 어깨동무를 하며 승리를 한껏 만끽했다.
“우아아아아아아!”
“이겼다!!!”
“돌아가자!!!!”
#
“궁금증은 해소했는가?”
차석두의 물음에 찻잔을 들어 올리던 담악이 다시금 찻잔을 내려놓았다.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진소운이 깨어나기 직전, 담악은 누구보다 빠르게 진소운과의 대면을 원했다.
자신의 처소에서 나타난 미상의 존재들을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죽음의 위기를 넘긴 사람.
진소운을 처음 봐야 하는 건 무림맹 사절단이 맞았다.
그럼에도 담악은 차석두에게 부탁을 했고, 차석두는 다시금 무림맹 사절단에게 부탁을 해야 했다.
그런데.
‘당가 꼬맹이가 걸림돌이 될 줄이야.’
당연하게도 악병비가 가장 먼저 거절할 줄 알았건만, 되려 그는 별반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신 당서희라는 꼬맹이가 고집을 부렸다.
깨어나는 모습을 자신이 꼭 봐야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이는 정치적인 선택이나 결정을 넘어선 개인의 단순한 감정 표출에 불과했지만, 쉬이 꺾을 수 없었다.
애당초 악병비나 일명의 설득이 통하는 상대도 아니었고.
당가의 고집이 얼마나 강한지 아는 차석두였기에, 결국 물러서려던 찰나.
일명이 전음을 보내왔다.
-부련주 놀이를 시켜주면 물러날 겁니다.
부련주 놀이?
그게 뭔데 땡중아!
대체 뭔지 감조차 잡지 못하는 차석두에게 전음이 재차 들려왔다.
-대충 사황봉의 무사들을 이끌고 사흑련을 두어 바퀴쯤 돌면 됩니다.
일명의 조언(?)에, 차석두는 설마 하는 생각으로 당서희에게 제안을 했고.
“……그, 그럼 어쩔 수 없는 것이야. 아쉽지만 첫 만남은 양보하는 것이야.”
당서희는 깊은 고뇌 후에 이를 받아들였다.
그녀가 몸에 맞지도 않는 사황봉의 철갑주를 입고.
황부식의 어깨에 앉아 사흑련을 두어 바퀴 행진한 탓에, 황부식이 고생하긴 했지만.
그도 사황봉의 무사들도 그리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사흑련을 구한 진소운의 동료 아닌가.
어쨌든 그런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까지 만든 자리였건만, 잘 모르겠다니.
차석두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자, 담악이 천천히 찻잔을 매만졌다.
“그는 자신의 불이익을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것이 백도가 말하는 ‘협의’라지만…… 제 이성은 그가 진정 ‘협의’를 행했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어쩐지 담악의 눈꼬리가 축 처져 있다.
그간은 날카로운 살쾡이 같은 얼굴이었다면, 오늘은 왠지 시무룩한 강아지처럼 느껴졌다.
차석두는 그런 담악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자꾸 이성적으로만 생각하니 그런 거 아니겠는가.”
“그게 무슨…….”
“난 얼추 이해가 간다는 말일세.”
담악의 입술이 벌어졌다.
“……이해가 간다고요?”
“녀석도 자네도 외로운 존재들이니 그렇지.”
“…….”
담악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평생을 책과 글을 가까이 두고 살았지만, 무공만 배우지 않았다뿐이지 사내답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 자신이다.
그런 자신에게 외로운 존재라니.
차석두가 생각에 잠긴 담악을 따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아이의 출신을 아나?”
“태을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태을문이라면 그대가 있던 세계에 대입해 봤을 때…… 그래 촌구석에 박혀 있는 작은 서당 정도로 치면 되겠구만.”
차석두는 뭐가 재미있는지 히죽거렸다.
“서당의 훈장도 실력이 형편없고, 사납금도 제대로 못 받아 지붕에서 물이 줄줄 새는 그런 서당 말일세.”
“…….”
“그런 서당에서 그 뭐냐, 자네가 합격한 시험…….”
“향시와 회시 말입니까?”
차석두가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그래! 그걸 합격하고 나면 진사가 된다고 했던가?”
“네.”
“녀석이 그런 입장일세.”
“…….”
차석두의 입가에 내걸렸던 미소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합격한 아이가 북경에 가면 어떻게 되는가? 출세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가?”
“…….”
힘들다.
열악한 환경에서 향시와 회시를 합격한 것은 대단하나, 결국 이는 배경이 하나 없다는 말이었다.
최소한 좋은 서원 출신이라면 연줄이라도 맺을 수 있지. 개천에서 난 용은 그 밑에 줄줄이 달려있는 떨거지들과 개천에서 온 용이 날지 못하게 견제하는 이들에 의해 금방 추락한다.
아무리 잘나봐야, 그저 개천의 주인으로 살아갈 뿐인 것이다.
담악의 표정을 살피던 차석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소운 그 녀석도 그런 입장일세. 그러니 항시 외로울 수밖에.”
개천의 사람들은 용을 보며 대단하다 말하겠지만, 정작 용은 자신이 천하를 훨훨 날지 못한다는 생각에 좌절감을 느낀다.
“녀석의 이름이 천하를 울리고 있으나, 결국 뼈에 사무치게 외로움을 느끼고 있을 것이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백팔봉의 12봉성들은 북경의 귀족들 못지않은 권모술수의 대가들이니까. 더구나 귀족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 사적 무력까지 가지고 있지.”
생각해 보면 강호는 북경이란 곳보다 더 비정하다.
그곳에선 황제를 위시한 권력 투쟁만이 벌어지지만, 강호에서는 직접적인 실력행사가 벌어지지 않던가.
담악은 새삼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곳에 발을 디뎠는지 깨달았다.
차석두가 진소운이 있는 전각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외로웠을 것이네. 앞으로 자신의 길이 외로우리라는 것도 알고 있을 테고.”
이윽고, 차석두는 담악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 녀석의 눈에 자네가 들어왔네, 낯선 세계에 홀로 서서 복수를 준비하는 자네가. 쉬이 고개를 돌릴 수 없었던 것이겠지.”
차석두의 말에 담악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새삼 진소운의 마음이 느껴진 것이다.
왠지 과거 서원에서 경쟁하던 동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는…… 적인데도 말입니까?”
붉어진 담악의 얼굴을 발견한 차석두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어린다.
“정치판이 그렇겠지만, 강호도 마찬가지네.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지. 그러니 그 친구는 우리가 동지인 동안 자네를 위하고 싶었던 게지. 자신이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을 알면서도 말이네.”
“……곤란한 상황이요?”
“어찌 되었든 백도 신성이 사흑련의 총군사를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지 않았는가? 무림맹의 감찰각과 집행각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으려 하겠지.”
“…….”
그러고 보니, 무림맹 사절단장이 감찰각의 삼(三)당주라는 독한 인간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흑도인들이 이를 갈 정도면, 어지간히 독한 인간이 아니라는 건데.
……새삼 진소운에 대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괜찮겠습니까?”
담악의 물음에 차석두가 웃는다.
“왜? 새삼 친구가 걱정되는가?”
“치, 친구는 무슨…… 그냥 빚을 지는 게 싫을 뿐입니다.”
“뭐 그건 제 놈이 알아서 하겠지. 만약 무림맹의 핍박을 참다못해 사흑련으로 전향하면 그건 또 그거대로 나쁘지 않고.”
한바탕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 차석두가 말을 이었다.
“어찌 되었든 빚은 좀 갚는 게 우리로선 부담이 덜하겠지. 안 그래도 그놈이 염병을 떨기도 했고.”
“네?”
차석두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한테 와서 자네를 구해준 값을 치르라며 갖은 염병을 떨고 갔네. 무슨 죽다 살아난 놈이 어찌 기운이 그리 넘쳐나는지.”
담악이 조심히 말했다.
“어디까지 생각하십니까?”
“뭐, 놈이 바라는 건 동맹이긴 한데. 이미 동맹은 하지 않겠다 말 했으니…… 말을 번복하는 것도 웃기는 일 아니겠는가?”
“그렇지요. 흔들리는 모습은 최대한 지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왕학의 기본이다.
군중은 흔들리는 왕좌를 좋아하지 않는다.
차석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담악에게 물었다.
“우리 사흑련의 보고에 백도의 물건들이 좀 있지?”
사흑련의 형성 과정에서 주력 문파들은 일정 금액 이상의 참가금을 내야 했다.
하지만 제 주머니에서 돈 나가는 것이 싫었던 흑도 문파들은 저들이 쓸 수 없지만, 값이 나가는 백도 문파의 골동품이나 실전된 무공서 등을 참가금으로 냈다.
당시 차석두 입장에선 어처구니없는 행태였으나 그게 빛을 발할 때가 온 것이다.
“그것 중에 몇 가지를 보내주는 게 어떤가?”
“우호의 상징으로 충분하겠군요.”
“그래. 어쨌든 물건이 괜찮으면 진소운이 타박받는 것도 좀 덜할걸세. 어떻게 자네가 준비해 보겠는가?”
잠시 고민하던 담악이 고개를 숙였다.
“……네. 제가 적당한 걸 찾아 준비해 보겠습니다.”
담악은 담백하게 이야기했지만, 차석두는 알고 있다.
벌써부터 담악이 머리를 열심히 굴리기 시작한다는 걸.
그것도 백도에 속한 친구가 위기에 처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
난 지금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어, 어쩐 일이십니까?”
그것도 꽤나 큰 위기에.
그간 악병비와 단둘이 있는 자리를 최대한 피해왔다.
사흑련 내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선 딱히 변명할 거리가 없었으니까.
숨은 흉수를 찾는 거야 그렇다지만, 담악을 위해 목숨을 내건 일은 내가 봐도 쫌 선 넘긴 했다.
때문에 어떻게든 동맹까지 가져가려 차석두를 압박해 보았지만, 그 인간도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똥 다 쌌다 이거지.
‘나만 새 됐네.’
먼 미래를 생각하면 담악을 구하는 게 맞았지만, 지금 당장은 악병비나 맹주전의 저 수신호위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가장 큰 문제였다.
아무리 봐도 흑도의 총군사를 구한 건 선 넘었다 생각할 테니까.
하여간, 어떻게 해서든 학관에 돌아갈 때까지 대면의 자리를 만들지 않으려 했는데.
기어코 악병비가 대면의 자리를 만들어 냈다.
이걸 어떻게 피해야 하나…….
“아이고, 몸이야. 제가 좀 피곤해서 그런데 저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엉거주춤 일어나려는 찰나.
악병비가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너는 흑도에 가담할 생각인 것이냐?”
몸이 우뚝 멈췄다.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다.
“네?”
뭐라는 거야 이 양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