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판돈을 챙기는 흑염룡(3)>
“왜 일어나지 않는 거지?”
악병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흑도 내에서 별의별 놈을 다 상대해 왔던 의원조차도 그의 험악한 얼굴에는 조금 기세가 짓눌렸는지 목소리가 바닥을 긴다.
“글쎄요. 아직 원인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상처가 컸기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정확하게 모른다는 건가?”
“대부분 큰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며칠 혹은 몇 주까지도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더러는…….”
말을 잇던 의원이 입을 꾸욱 다물었다.
장내에 있는 인원들 모두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했기 때문.
무림맹의 사절단은 물론이고, 차석두와 황부식, 혈투와 염귀비, 더불어 사흑련을 지탱하는 원로들까지.
모두 하나같이 얼굴을 뚫어버릴 듯 매서운 기세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크, 크흠…….”
흡사 쓰러진 황제의 안위를 걱정하듯 몰려든 이들의 면면에 긴장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얼음장 같은 눈빛을 쏘아대는 이는…….
단연 악병비였다.
“더러는…… 다음에 할 말은 무엇이었지?”
‘몇 달, 혹은 몇 년까지도 잘 수 있다…… 어쩌면 평생 깨어나지 못할지도…….’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무엇이었지?”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자고로 황제의 어의는 진료를 잘하기보다 요 입을 조심해야 하는 법 아니던가.
하지만 얼버무리는 것도 적당히 해야겠지.
“최,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의원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악병비가 그에게 다가가려 할 때.
당서희가 물기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마 영영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려던 것이야…….”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침상에 걸터앉아 진소운을 바라보는 당서희.
당황한 의원이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서둘러 대답했다.
“그, 그런 일은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
“…….”
의원의 말에 희망을 품는 이들은 없었다.
차석두를 시작으로, 다들 분위기를 파악하곤 하나하나 내실을 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방 안에는 무림맹 사절단과 혈투, 염귀비만이 남았다.
“우리도 그만 가자. 옆에서 보고 있는다고 놈이 깨어날 것도 아니니.”
혈투의 말에 결국 남은 사람들도 하나둘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할 때.
투둑-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뭐지?”
놀란 사람들이 의원을 바라보았다.
혹여 그가 진소운에게 뭔가를 한 건 아닌가 하고.
하지만 세 걸음 떨어진 의원은 당황하여 고개를 저을 뿐.
그리고.
투둑-
다시금 이상한 소리가 또 울렸다.
“어?”
그때, 당서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끝에는.
……진소운의 팔이 평소보다 길어져 있었다.
깜짝 놀란 의원이 진소운에게 달려가려는 순간.
혈투가 그의 마혈을 짚으며 막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마라!”
“…….”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혈투를 바라보자, 그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믿을 수가 없군……. 빌어먹을 놈, 이렇게 운이 좋다니.”
사람들 모두 혈투의 의미심장한 말에 의문을 품었지만, 혈투는 대답하지 않고 진소운을 바라보기만 했다.
#
이건 뭘까?
사방이 온통 깜깜하다.
뭔가 좁은 느낌은 아니고…… 엄청나게 광활한 공간에 들어온 느낌이다.
너무 아득해서 내 존재 자체가 먼지만큼도 되지 않는 듯한 느낌.
대체 뭘까…….
아, 죽은 건가?
죽음 이후의 삶은 이런 건가?
‘빌어 처먹을…….’
갑자기 그렇게 생각하니까 분노가 치솟아 오른다.
팔자가 좋은 놈은 금덩이를 줍고 나서도 곧바로 다음 금덩이를 줍는 반면, 팔자가 더러운 놈은 은자 하나를 주워도 도둑 누명을 쓰고 맞아 죽는다더니…….
내 경우가 딱 그렇다.
‘시바 만나도 하필 음양쌍마를 만나선…….’
전생도 그렇게 운이 좋은 인생이라 할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팔자가 드세지도 않았다.
생각해 보면 소정대 새끼들을 만난 후부터 팔자가 드세졌던 것 같은데…….
분명하다. 불운이 옮은 것이다.
하여간에 도움이 안 되는 새끼들.
그렇게 열을 내고 있자, 어둠 속에서 붉은 구체가 서서히 커지더니 공간을 가득 메우기 시작한다.
이어 구체의 내부에 음양쌍마와 싸우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이건 또 뭐람?’
제금학은 얼음방벽을 만들고 나는 그걸 뚫어내려 한다.
하지만 공격이 번번이 막히고, 이어 무형비마대의 존재들까지 합세한다.
내가 겪었던 그대로, 일련의 일들이 펼쳐지고, 결국 나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마치 내가 죽게 된 과정을 그대로 그려낸 듯한 모습.
두 번째 생을 살면서 그래도 좀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마인은 마인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그간 마인들의 수준을 너무 낮춰 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상대한 마인들 중 음양쌍마 수준의 거물이 있어봐야 몇이나 있었겠나.
소정대의 적수는 대부분 중·하급 무력 집단이었기에, 내 기준도 항시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하여간 약해빠진 소정대 개새끼들!’
……아무튼 소정대 새끼들 잘못이다.
현생에서 태을진경에 역마경에 옥청천상력까지 가지게 되고 나선, 마인에 대한 두려움도 떨쳐내게 되었지만, 생각이 짧았다.
무림맹에서 내 위치가 달라졌으니, 미래에 내가 상대해야 할 놈들도 달라질 터.
난 여전히 전생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응?’
붉은색의 구체가 황금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곳에선 다시금 제금학과 나의 싸움이 벌어진다.
‘어라?’
그런데, 이번엔 좀 다르다.
제금학의 품을 파고들어 연화와 설화를 펼치는 나.
소천검법의 기본 초식만으로 차근차근 얼음방벽을 깨부순다.
내공의 소모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간 현실에선 내가 벼락같고 폭풍 같은 기세로 상대를 짓눌렀다면, 구체 안의 나는 유려하고 부드러우면서 바위 같은 단단함으로 상대를 깨부순다.
저게 과연 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모습.
‘검을 이렇게 뻗나?’
나는 천천히 나의 모습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림들의 움직임도 덩달아 천천히 움직인다.
혹시, 내가 따라 하도록 기다려 주는 것일까?
뚜둑- 뚜둑-
어두운 공간에서 뭔가가 계속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계속 동작을 따라 했다.
처음에 잘 흉내 내지 못했던 동작들도 수십 번 수백 번 하다 보니 서서히 올바르게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동작들이 다 완벽해졌을 때쯤.
‘나’의 모습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제금학과 싸우기 시작했다.
뚜두둑- 뚜두둑-
빠각, 빠각.
여전히 싸움과 관련 없는 소음들이 공간 전체에 울린다.
나는 애써 싸움에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그림 속의 나는, 이번엔 광천신장을 쏘고 검강을 휘둘러 전투를 벌인다.
‘허! 이렇게 금방 끝낼 수 있었다고?’
이전에 싸웠던 시간에 비하면 말도 못 하게 짧은 전투다.
하지만 너무나 압도적인 우위로 싸움을 정리한다.
무형비마대가 나타나기도 전에 싸움이 끝나버렸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음양쌍마를 제압해 버린 것이다.
‘대단하긴 한데…….’
너무 압도적이다 보니 현실감각이 떨어진다.
저건 내가 가진 숙련도와 내공의 양을 참고한 싸움이 맞을까?
여러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저’ 동작을 따라 한다.
이번엔 내공의 운용도 함께 한다.
뚜두두둑- 뚜두두두둑-
빠각, 빠각, 빠각.
소음은 더 커진다.
이상하게 소음이 들릴 때마다 뭔가 청명한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저 구체 안의 모습들을 온전히 머리와 몸에 담는 것.
따라 하고 또 따라 하다 보니, 서서히 몸에 익기 시작한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어라?’
계속해서 들려오던 소음이 뚝 끊기더니 미친 듯이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
‘안 돼! 한 자락! 딱 한 자락만이라도 더……!’
나는 내가 절대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구체 안의 형상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자 애를 썼다.
이 감각은 왠지 기억하지 못할 듯했기에.
하지만.
‘진짜 빌어 처먹을…….’
음양쌍마를 상대할 때처럼 내 눈은 스르륵 감겨 버렸다.
#
의식이 잠에서 깨고 눈을 떠보려 했지만, 도통 떠지지 않는다.
꿈뻑 꿈뻑.
억지로 눈을 비비자 뻑뻑한 눈곱들이 떨어지며 눈이 떠진다.
눈떠보니 낯선 천장이었다.
주변의 집기도 풍기는 향기도 생경하기만 하다.
뭐지?
세 번째의 삶인가?
라고 생각하며 단전을 살피니.
‘……뭐야, 시바.’
사 갑자에서 삼십 년이 불어난 태을진경의 기운이 느껴진다.
세 번째의 삶이 아니라는 것에 나는 감탄했다.
‘와, 이걸 사네. 하하.’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그때 흘린 피는 도저히 한 사람이 흘리고 살아날 수 없는 양이었는데…….
설마 죽은 화타의 환생이라도 사흑련에 있는 걸까?
흐음, 실력 좋은 의원이라면 포섭하는 것도 한번 생각해 봐야겠다.
사흑련같이 흑도 놈들이 가득한 곳에 있기보단 정의롭고 순수한 태을문의 전속의원으로 지내는 게 훨씬 낫지 않겠는가?
암, 그렇고말고.
생산적인 생각을 끝내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누구라도 부르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이건 또 뭐야?’
……담악의 등이 보였다.
그가 서류를 읽다 바삐 붓을 놀리고, 또 서류를 읽다 붓을 놀린다.
흠, 이 장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스륵, 스륵.
그러네. 본 거 확실하네.
지난번에 총군사가 똑같은 짓을 했었지.
부상당한 사람 뒤에 놓고 일하면 효율이 좋나?
아니, 내가 무슨 부적도 아니고.
“으흠…….”
슬쩍 인기척을 내자, 일을 하던 담악이 붓을 내던지듯 놓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괜찮습니까?”
나도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침상에 손을 짚고 힘을 준 순간.
빠직.
손이 침상 바닥을 뚫고 들어가 버렸다.
“엥?”
무슨 침상이 이리 부실해.
손을 뻬낸 후 옆의 난간을 잡고 일어나려 하는데.
콰지직.
……이번엔 난간이 속절없이 부서진다.
“…….”
담악이 회색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쩝, 내가 아무리 사흑련의 기물을 부쉈다고 해도 명색이 당신 생명의 은인인데, 거 너무 눈치 주는 거 아니냐고.
나는 머쓱하게 손을 거두며 말했다.
“흐음…… 낡은 자재를 썼나 보군요.”
“련주님 숙소는 최고의 자재로만 지어졌습니다.”
“응?”
여기가 사흑련주 숙소였어?
내가 주위를 휙휙 둘러보자, 담악이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마 변화된 신체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라 하셨으니, 조심히 움직이시지요.”
난 고개를 갸웃했다.
“변화된 신체?”
“혈투 어르신께서 그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거라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피도 왕창 흘렸고, 싸우기도 격하게 싸웠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근육통 하나 없고 관절도 부드럽다.
이게 대관절 무슨 일이람.
“궁금하시면 나중에 혈투 어르신께 여쭤보십시오. 사절단을 비롯해 사흑련에 있는 이들 중에선 오로지 그분만이 알고 계시는 듯했으니까요.”
“그렇습니까?”
담악이 잠시 나를 쳐다보곤 정중히 물어왔다.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말은 권유였지만, 행동은 벌써 차를 따르고 있었다.
어차피 무림맹 사절단 다 물린 채 혼자 기다리고 있던 거라면, 필시 의도가 있는 거겠지.
나는 혹여나 또 사고(?)를 칠까, 조심스레 앉아 찻잔을 아주 살짝 쥐었다.
쩌적.
좆됐네.
“……조나라 때 골동품을…….”
아니, 그런 귀한 거라면 애초에 사용하지 말라고.
나는 헛기침을 한번 하곤 물었다.
“그냥…… 일반 찻잔 없습니까.”
“……휴우. 그냥 쓰십시오. 이미 금이 갔으니.”
거참, 사람 무안하게시리.
“큼큼.”
찻잔에서 올라오는 김을 바라보고 있자니, 담악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시발. 설마 기문진 안에서 다 본 건가?
분명 기절한 거 확인하고 움직였는데…….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나 말을 고르고 있을 때, 담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날 구한 겁니까?”
“응?”
예상치 못한 질문에 머리가 멍해진다.
나는 찻잔이 깨지지 않도록 조심히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그게 왜 궁금하지요?”
“궁금하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난 끝까지 사흑련과 무림맹의 동맹을 반대한 사람입니다. 더구나 무림맹과 전쟁을 치르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고요.”
잠시 말을 멈춘 담악이,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머리를 살짝 흔들고는 말을 이었다.
“전략적으로 보아도 전술적으로 보아도, 구하지 않는 편이 합당한 것 아닙니까?”
역시 뛰어나다.
나도 모르게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거야 그렇지.
근데 넌 나중에 나랑 같이 마교를 상대해야 하잖아. 나 혼자 뺑이칠 순 없는 노릇 아니겠나.
즉, 담악의 존재 자체가 내겐 꼭 따고 싶은 ‘판돈’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는 법.
나는 일명과 일각의 것보다 자애로운 미소를 내지었다.
“빚을 갚았다 생각하시지요.”
“빚이요?”
나는 의아함이 가득 어린 담악의 눈을 응시했다.
“총군사께서 그토록 간절하게 기다리셨을 때, 손을 내밀지 못했던 무림맹이 진 빚 말입니다.”
“…….”
담악의 눈동자가 복잡하게 흔들렸다.
날카로운 눈초리도 저리 보니 조금은 맹해 보이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여전히 복잡한 눈빛을 한 채로, 담악이 힘겹게 입술을 뗀다.
“……그건 그쪽이 진 빚이 아닙니다.”
“알지요. 그러니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협객 흉내 내지 말라 비난하기엔…… 너무 큰 위험을 부담했군요.”
담악은 내 행동에 어떻게든 위선의 그림자를 씌우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머릿속의 인지부조화가 그걸 계속 방해하는 듯 보였고.
나는 고뇌에 찬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실 총군사께서 보는 무림맹의 모습이, 진짜 무림맹의 모습일 겁니다.”
일순 담악의 눈빛이 날카로이 번뜩인다.
“……그래도 모두를 미워하지 말라,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는 사흑련의 총군사인데, 무림맹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증오가 스멀스멀 솟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
“별로 은혜를 느끼게 한다거나 빚을 지운다거나 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쨌든 언젠가 사흑련과 무림맹은 서로 적이 될 테니까요.”
담악이 얼빠진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 모습을 쳐다보며 내 생각을 이어 말했다.
“그때가 되면 저라는 사람을 상대하셔야 할 테니. 제가 총군사님의 사정을 봐주고 양보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뭐, 어차피 총군사께서 전력을 다해도 저를 이겨내진 못하시겠지만요.”
“…….”
거참, 농담을 했는데 왜 얼굴이 굳어지지?
사람 무안하게.
“아무튼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 아닙니까. 난 무림맹의 사절단으로 왔고, 사흑련과 무림맹은 현재 공적을 두고 협정을 맺고 있는 사이지요. 그럼 서로 도울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고 목숨을 내던집니까?”
나는 볼을 긁적였다.
이 부분은 사실 제금학, 아니 군유현 흉내를 내던 마인 놈을 엿 먹이고 싶었던 내 개인적인 감정이 더 크다.
그 연놈들이 전생에 저딴 식으로 사람 기만한 게 대체 몇 번이던가.
한 번쯤은 얼굴에 똥칠해 주고 싶었단 말이지.
한편으론 전생에서 담악에게 진 빚을 갚고 싶기도 했고.
“뭐, 각자 행동에는 정도라는 게 있는데. 전 평범한 이들보단 좀 위험하게 행동하는 면이 있지요.”
“좀?”
나는 됐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무튼 그런 겁니다. 저도 할 말은 더 이상 없으니 같은 이야기라면 그만하시지요.”
“…….”
담악은 한참을 내 눈을 바라보다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자의 정체는 어떻게 안 겁니까?”
“누구?”
“군……유현 말입니다.”
배신의 상처가 어지간히 컸나 보다.
미약하지만 손을 바들바들 떠는 담악.
나는 그 손을 지그시 쳐다보며 운을 떼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기억납니까?”
“네.”
그날 난 군유현의 도움으로 담악과 한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군유현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실수를 저질렀다.
“복양평원에서 만난 존재들. 어둠에 제 몸을 숨기던 놈들이었습니다. 조명탄을 터트려도 가장 가까운 곳에 선 자들이나 그들의 실체를 흐릿하게 볼 수 있었지요.”
고개를 갸웃하는 담악.
“그런데 그자는 멀리서 그자들의 모습을 보았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담악의 입이 천천히 벌어진다.
“하, 하지만 그날은 분명 그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당연히 조사는 뒤로 은밀하게 하는 거 아닙니까.”
“…….”
이어, 하오문에서 받은 전서를 꺼내 보여주었다.
“천관문이란 문파에 대한 조사 결과입니다. 천관문의 대공자 군유현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제 아버지를 믿고 주변에 패악질을 부리는 망나니 같은 놈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런 놈이 개과천선해서 현재의 군유현 같은 놈이 되었다?
사람의 기질이라는 것이 그리 쉬이 바뀌던가.
최소한 그 과정이 있어야 할 터인데, 하오문의 조사에 따르면 그런 과정은 없었다.
마치 사람이 변한 것처럼 하루아침에 싹 바뀌었다니…….
“그 외에도 정황은 여럿 있었습니다. 돈 보기를 돌같이 한다든가 하는…….”
“그게 왜?”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도 금전을 돌처럼 대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그런데 그는 정말 돌처럼 대하더군요.”
나는 하오문의 조사지를 톡톡 두드렸다.
“그렇다는 건 그 금전의 가치가 그에겐 돌과 같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강호에 적을 둔 자가 아니라는 얘기지요.”
내 얘기가 끝났음에도 담악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난 후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쪽…… 아니, 흑염룡이 무림맹과 사흑련의 평안을 바라는 건 ‘그들’ 때문입니까?”
역시나 영민한 사람이다.
벌써부터 전체 그림을 그릴 줄 안다.
역시 내게 꼭 필요한 인물이다.
그래도 흑염룡보다는 ‘그쪽’이라는 호칭이 더 나은 것 같은데…….
“총군사께서도 이번 일을 겪으며 경험하셨지요?”
“…….”
“과연 그들을, 사흑련 무림맹 혹은 여타 다른 무림 문파 단일 세력이 홀로 대항할 수 있을까요?”
아닌 말로, 스무 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사흑련을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갔던 놈들이다.
놈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강호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내 설명에 담악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대체 그들이 누구입니까?”
난 잠시 생각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은가, 하지 않는 것이 옳은가.
평소라면 하지 않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담악은 다르다.
이제 사흑련의 적을 둔 사람이 되었지만, 그렇기에 홀로 움직여야 한다.
이해할지 이해 못 할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일이 닥쳤을 때 내가 한 말이라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담악의 존재는 그만큼 내게 중요하다.
내 목숨을 내걸고 따고 싶었을 만큼, 매력적인 판돈과 같은 존재.
나는 양손으로 깍지를 낀 후, 조용히 내뱉었다.
“오백 년 전, 하늘을 뒤집었던 역천의 존재.”
“…….”
그러곤 담악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마교.”
“마교?”
“그들은 스스로를 천마신교라 부르더군요.”
그의 눈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