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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54화 (254/357)

254. <열매가 맺히는 시간>

“어떻게 알았지?”

“무얼 말입니까?”

혈투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반응을 할 사이도 없었다.

그의 왼손이 어느새 마혈을 짚어 움직임을 제어했다.

언제 꺼냈는지 혈투의 반대손엔 기가 어린 단도가 쥐여 있었고, 그것으로 내 목덜미를 꾸욱 누르고 있었다.

그가 조금만 힘을 주어도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

꿀꺽.

환골탈태를 하고 나서 조금은 그의 수준에 다가갔다 생각했건만, 역시나 하루 이틀 안에 메꿀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그곳이 실존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물었다.”

“몰랐습니다.”

“……장난치는 것이 아니다. 어찌 알았는지 바른대로 말해라.”

혈투의 과민반응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흑림은 그들에게 마지막 안식처와도 같은 곳이니까.

나는 최대한 목을 움직이지 않으며 대답했다.

“정말 몰랐습니다. 근데 이제 알게 되었군요.”

“뭐?”

“방금 반응으로 흑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

흑림은 강호에 전설처럼 떠도는 소문들 중 하나다.

은퇴한 흑도 고수들이 모여 산다는 곳.

다른 말로는 흑선계(黑仙界)라 불리우며, 많은 술꾼들의 입에 좋은 안줏거리로 오르내린다.

나 또한 전생엔 그저 태을검제와 같이 허황된 소문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반응을 보니 확신이 선다.

“놀랍군요. 정말 흑림이 존재한다니.”

“……정말이더냐?”

혈투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정말이고 아니고를 떠나 그런 곳이 진짜 존재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

물론 거짓말이다.

전생에 흑림의 고수들이 대거 강호에 쏟아져 나온 시기가 있었다.

그때 나도 흑림이 실존함을 알게 되었다.

검마의 사흑련이 무너지고 난 후 흑도 무림까지 초토화되자, 전설로만 떠돌던 곳의 문이 열렸던 것.

대부분이 죽거나 노화로 은퇴했다 알려진 흑도 절대 고수들의 등장은, 무림맹의 입장에서도 꽤나 큰 충격이었다.

나는 목덜미로 전해져 오는 고통을 참아내며 덧붙였다.

“평소 꾸준하게 농담을 던졌던 것이 이런 뜻밖의 이득을 가져오는군요.”

“……목숨이 더욱 위태로워졌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게냐?”

“지금 바로 죽이지 않으신 것만으로도 어르신의 실수임을 인정하신 것 아닙니까?”

스륵-

혈투의 손이 아래로 내려간다.

나는 마혈이 풀린 몸으로 목을 매만졌다.

조금 피가 났지만, ‘흑림’의 이야기를 끌어낸 대가치고는 약한 편이다.

혈투가 나직이 경고했다.

“방금 들은 말은 깨끗하게 잊는 게 좋을 것이다.”

“어째서지요?”

혈투는 단도를 품에 넣은 후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애당초 사람들이 믿지도 않을뿐더러, 네놈에게서 그곳에 관해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들은 이들은, 하나씩 죽어나갈 테니까.”

“…….”

가만히 듣고 있자니, 그간 ‘흑림’의 존재가 헛된 소문으로 떠돈 건, 그들이 원해서였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어디 가서도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야 할 것이다. 헛된 죽음을 보고 싶지 않다면.”

나는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인 후, 본론을 꺼냈다.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이건 거래 조건이 아니다.”

“그럼 그냥 부탁드리겠습니다.”

혈투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난 그에 굴하지 않았다.

흑림이 전생과 같은 시기에 나타나면 너무 늦으니까.

나는 혈투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흑림의 어른들을 만나 뵐 수 있게 해주십시오.”

“흑림이 무슨 관광지라도 되는 줄 아느냐?”

“흑림을 구경하고 싶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계신 분들을 만나고 싶다는 겁니다.”

“왜?”

이럴 땐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이유를 스스로 납득하도록 만드는 편이 얘기가 빠르다.

“어르신도 보셔서 아시지 않습니까. 사흑련과 현 강호에서 벌어지는 일들.”

“무슨 소릴 하는…….”

말을 하던 혈투가 일순 미간을 찌푸린다.

내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사흑련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살펴보면 내가 흑림에서 무슨 일을 할지 쉬이 납득이 갈 것이다.

혈투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건 강호의 일이다.”

“흑림 또한 강호 안에 있지 않습니까.”

“우린 세상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도 순순히 물러설 수 없다.

“혈투 어르신과 염귀비 어르신이 사흑련에 온 것은 세상일에 간섭하신 거 아닙니까?”

“그건…….”

결국 혈투가 입을 꾸욱 다문다.

이런 종류의 말싸움이 그저 지지부진한 의미 없는 일에 불과함을 잘 아는 것이다.

“이번 일은 사흑련에서 일어난 일이다. 네놈이 계속 이리 흑도 무림에 발 담글수록, 백도 무림에서 네놈의 설 자리가 사라진다는 걸 모르더냐?”

나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단순 사흑련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전 하남성에서, 복양 평원에서 그리고 사천에서 이번 사건을 일으킨 이들의 흔적을 끊임없이 봐왔습니다.”

“…….”

혈투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표정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을 뿐, 내가 말하는 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

“흑림이 강호 안에 있다면, 강호가 없이 흑림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흑림이 협력하여 ‘그 집단’에 대항하지 않으면, 강호는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네놈.”

혈투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었다.

“겁이 많구나. 그래 봐야 그들도 거대한 강호 속에 한 집단에 불과하다.”

“그 한 집단이 무림맹과 사흑련을 온통 뒤흔들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흔적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요.”

“…….”

고민하는 혈투의 얼굴을 보고 나 또한 입을 다물었다.

이 이상 말을 덧붙이면, 오히려 부정적인 감정만 더하는 꼴이 될 테니까.

그리고 잠시 뒤.

“흑림에서 무엇을 할 생각이더냐?”

혈투가 입을 열었다.

나는 지체 없이 계획을 꺼내놓았다.

“너무 늦지 않도록 준비할 생각입니다.”

“흑림의 인원을 꺼내겠다고?”

“네.”

혈투가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불가한 일이다.”

“속세를 떠났다 한들, 그들의 뿌리는 여전히 강호에 있습니다. 뒤늦게 참전해 봐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밖에 되지 않고요.”

혈투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전생에 한 후회를 또다시 반복할 셈인가?

나는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엔 후회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그게 아니다.”

“네?”

혈투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야.”

“무슨 이유가 있는 겁니까?”

“…….”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복잡한 눈으로 나를 한참이나 응시하는 혈투.

이내 그의 무거운 입이 다시 열렸다.

“……그건 흑림에 오면 알려주마.”

“……!”

됐다.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는 곧, 흑림에 방문하는 걸 허락한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기쁨도 잠시.

혈투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그럼 언제 가능하겠습니까?”

“그때는 내가 알려주마.”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겁니까?”

잠시 생각에 잠기는 혈투.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제가 어디로 연락을 해야 하는 겁니까? 전 계속 움직일 텐데요.”

“네가 어디 있든 우리가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알려주마.”

아쉬움이 많이 남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이야기가 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더 이상 채근해선 안 된다는 판단이 섰다.

“기다리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네놈이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

혈투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나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차석두를 설득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들은 척도 안 하던 그는,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나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사흑련 창설도 사흑련의 안정도 다 내가 만들어 줬건만.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

특히 속이 시커먼 놈은 믿는 게 아니라더니.

“그 정도면 되었다. 무림맹도 이번 일로 사천의 혈교를 정리했다고 하니, 네가 해야 할 일은 충분히 한 것이다.”

사절단장인 악병비가 이렇게 말할 정도니 내가 할 일을 잘하긴 했나 보다.

“더구나 이들은 흑도다. 우리와 양립할 수 없는 존재들. 지금도 보아라. 사흑련을 위기에서 구해주었지만 그 누구도 우리를 배웅하지 않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

그의 말마따나 차석두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나랑 인연이 닿아 있던 흑도 거물들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건 서운했다.

“혹여, 네가 동맹을 이끌어 내지 못한 걸로 흉을 보는 자가 있다면 내가 나설 테니 걱정하지 마라.”

“…….”

뭐야, 이 아저씨.

갑자기 왜 이렇게 자상해?

흠…… 뭔가 서로의 오해가 풀린 것 같아서 좋긴 한데.

왠지 관계가 더 뒤틀려 버린 것 같기도 하고.

당서희는 한술 더 뜬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야. 정 말이 안 통하면 사흑련의 부련주가 되면 되는 것이야.”

내가 자고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사황봉의 무사들과 부쩍이나 친해진 당서희.

그녀는 우리 사절단원들 중에서 무림맹에 돌아가는 것을 가장 아쉬워하는 인물이었다.

두 사람 덕분에 조금 미련을 털어버릴 때쯤, 표사가 보고했다.

“단장님,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표사의 말에 우리들 또한 개인 짐을 챙겨 밖으로 나섰다.

선물을 가득 싣고 왔던 마차는 텅 빈 채, 돌아가는 여정에 쓰일 물자들만 조금 자리했다.

이윽고 표사들이 이끌고 온 말에 우리가 올라타려 할 때.

갑자기 문밖이 소란스러워지며 일단의 인원들이 마장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낯익은 얼굴이 앞으로 나섰다.

“어?”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담 군사가 말에 오르려는 악병비에게 포권을 쥐자, 악병비는 얼떨결에 마주 인사했다.

“나와 줄 줄 몰랐소이다.”

악병비의 표정에는 당황이 가득 어려 있었다.

이에 담 군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옛 성현께서 말씀하시길 감사함을 표하지 않는 건 짐승보다 못하다고 하셨지요.”

“…….”

악병비가 자신들 욕을 무지 했었다는 걸 알고 있는 걸까.

담악은 사절단원들을 둘러보다가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는 덧붙였다.

“앞으로 함께 길을 걸어갈 동료가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당연히 나와 봐야지요.”

악병비는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했다.

오, 저러다가 얼굴 터지는 건 아닌가 싶네.

“……신경 써주어 감사하오.”

담악이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젓다가 곧장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더불어 련주님께서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선물?”

잠시 뒤, 크고 작은 상자를 든 십여 명의 인원들이 마장으로 차례차례 들어섰다.

“저게 무엇인 것이야?”

호기심 가득한 당서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들은 담악의 양옆으로 서서 상자를 열었다.

“억! 저건!”

처음 비명을 내지른 건 일명이었다.

그는 담악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상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곤 감격한 듯 탄성을 내질렀다.

“미, 미륵소불상!”

마치 실제 부처를 만난 듯 몸을 부르르 떠는 일명.

두피까지 격렬히 진동하는 모습이 제법 진귀하기까지 하다.

“호오……!”

물론 다른 사절단 인원들의 반응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정작 선물을 준비한 담악은 담담했지만.

“련주님께서도 이번에 동맹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셨습니다. 하지만, 먼 거리의 두 집단이 갑자스레 한 번에 가까워질 순 없는 법. 이리 한 걸음씩 거리를 좁혀나감이 어떨까 의견을 전하셨습니다.”

상자 안의 물건들을 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한 세 걸음은 가까워진 것 같은데.”

“…….”

내 주책에 악병비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응시했으나, 이내 고개를 돌리곤 담악에게 포권을 쥐었다.

“사흑련의 뜻은 무림맹에 확실히 전달하겠습니다.”

그의 입꼬리도 어느샌가 슬며시 위로 올라가 있었다.

하여간 아닌 척은.

“자자! 이쪽으로 실어 주시면 됩니다!! 힘내십시오, 힘!”

내 열띤 응원과 구호에 맞춰 표사들이 담악이 준비한 물건들을 하나씩 빈 마차에 싣는 동안, 담악이 내게 다가왔다.

그러곤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다 툭 하고 내뱉었다.

“고맙소.”

“뭐가 말입니까?”

내 반문에 그가 두어 번 헛기침을 하더니 고개를 돌려버린다.

“……다음에 또 봅시다.”

왠지 귀가 조금 붉어진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그를 향해 피식 웃어 주었다.

“또 봐야죠, 당연히.”

정확하게 전달하진 않았지만, 어쩐지 담악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담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이윽고.

이제 정말 출발이라는 생각에 말 고삐를 강하게 당기려는데.

“……!”

마장 앞을 가득 메운 인원들 때문에 우리는 다시금 멈춰서야 했다.

“이게 무슨……!”

길을 가득 메운 흑도인들.

그들로 인해 표국의 마차가 지나갈 길이 없었다.

“어, 어쩌죠?”

하나같이 험상궂은 인원들을 보며 일명의 미간이 일그러지자, 악병비가 담담히 말했다.

“그냥 가면 된다.”

“네?”

악병비가 고개를 치켜들며 정면을 응시했다.

“우릴 막아서려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일명과 당서희의 눈에 의아함이 서리는 순간.

“……!”

길을 막아서던 이들이 양옆으로 갈라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짝짝짝짝짝

누군가를 시작으로 박수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환호성까지 들려온다.

“잘 가라! 다음에 또 봐!”

“흑염룡! 넌 역시 흑도 신성이 맞아!”

“무림맹 졸개들도 조심히 가라!”

뭔가 듣기 싫은 소리도 섞여 있는 듯하지만…….

어쨌든 우호적인 목소리가 우리를 감쌌다.

이곳저곳에서 경단이나 전낭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당서희는 그중에 간식이 될만한 것들만 쏙쏙 골라잡아 냈다.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맹주전의 수신호위들은 당금 일어난 사태에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들의 인사에 답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환호성은 연신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사절단 인원들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흑련 밖으로 나온 후 그들의 배웅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쯤.

고삐를 당겨 속도를 늦춘 악병비는 내게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어쩌면 내가 틀린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무슨…….”

악병비는 그 말만을 남기곤 다시금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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