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 <열매가 맺히는 시간(4)>
나는 흐뭇한 얼굴로 오른팔에 착용된 손목갑을 보았다.
“흐흐흐.”
사흑련 내에선 본래 착용하고 있던 것처럼 덤덤한 척 신경 쓰지 않았고, 그 작전이 통했는지 사흑련을 벗어날 때까지 포식갑에 관해서 물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 해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다.
아직 사절단 내에도 보는 눈이 많으니까.
때문에 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포식갑에 대한 호기심을 몰래몰래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음양쌍마를 호법의 자리까지 올려준 귀물이렷다.’
물론 마교의 귀물인 만큼 마기를 사용한다거나 사술의 흔적이 남는다면 바로 폐기해 버릴 생각이었지만, 아직까진 본래 내가 알고 있는 기능 외에는 다른 능력은 없는 듯 보였다.
핑.
손가락 끝에 모은 막대한 기를 포식갑을 향해 쏘아냈고.
지잉.
본래라면 팔뚝이 부러졌을 정도의 지풍은 포식갑에 스며든 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포식갑의 효능을 살피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대단한 능력이긴 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음양쌍마가 호법의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건 쉬이 믿기지 않았다.
‘뭔가 더 있을 거 같은데.’
나는 머릿속 장서각을 뒤지며 음양쌍마가 싸웠던 기록들을 살폈다.
음양쌍마가 정마대전에 합류했을 때는 이미 전쟁이 벌어진 지 한참이 지난 상황이라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진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각 지부를 다니면서 기록을 저장해 놓는 건데.’
과거로 회귀할 줄 알았다면 더한 짓도 했겠지.
하지만 애당초 두 번째 삶이 있을 거란 생각을 누가 할 수 있을까?
당금 나 자신도 세 번째가 있으리라곤 믿지 않는데.
그렇게 다른 생각에 빠져 있을 때쯤, 악병비가 슬쩍 다가왔다.
“정말 가보지 않아도 되는 되겠느냐?”
나는 자연스럽게 포식갑을 숨겼다.
“뭐가 말입니까?”
“사문의 상단이 위기에 처했다 하지 않았느냐?”
“아.”
하오문이 알려준 바론, 수라문이 대천상단에 탐을 내고 있다고 했다.
이번에 무림맹으로부터 따낸 안휘성 지부들의 물류공급 독점계약이 꽤나 탐난 것 같았다.
‘하긴 나라도 탐이 나겠지.’
규모가 워낙 커서 왕가장과 나눠 먹어야 하는 처지임에도, 단일 계약 하나만으로 원래라면 대천상단이 십 년간 벌어들일 수익을 일 년 만에 벌어들일 테니까.
물론 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독점계약은 무림맹에서 직접적으로 밀어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니까.
무림맹.
그러니까 만통부가 태을문을 직접적으로 밀어주고 있다는 신호나 마찬가지이며, 장차 대천상단과 태을문이 크게 날개를 펼치리라는 예측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만통부가 대천상단을 왜 밀어주는지 확실히는 모른다.
아마도 빚진 마음을 주어 나를 부려 먹을 생각인 것 같은데…….
‘빚? 부담감? 그게 뭐지? 흐흐. 쉬이 부려 먹힐 생각은 추호도 없지!’
앞으로도 어지간하면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내가 손안에 들어온 것을 빼앗기는 등신은 또 아니지 않은가.
“일명 선배가 본 산에 전서를 보냈습니다. 그럼 굳이 저까지 나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내가 별 걱정 없는 얼굴로 대답하자, 오히려 악병비가 애달은 표정이 되었다.
“……단지 그것만으로 되겠느냐?”
“뭐, 당장은요.”
근데 이 사람은 사흑련에 갔다 온 뒤로 왜 이리 변했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터 나를 이렇게 생각해 줬다고. 참 나.
“무림맹에서 활동하는 것이 사문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사문의 성세가 무림맹의 출세를 관장하기도 한다.”
“그건 알고 있지요.”
“무림학관의 대표라면 어느 정도 지부에 입김을 넣을 수 있을 텐데…… 그런데도 가만히 있겠다고?”
“문제 될 거 있습니까?”
내 태연한 반응에 악병비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점차 짙어진다.
“그러다가…… 수라문에게 대천상단을 빼앗기기라도 하면?”
“빼앗기면 뭐, 어쩔 수 없는 거…….”
“뭐?!!”
아 씨바, 깜짝이야.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린데.
누가 보면 단장이 태을문 제자인 줄 알겠네.
“제 입장에선 그리 큰일은 아닙니다.”
애초에 사문의 도움을 받아 출세할 생각도 없는 데다, 내가 갈 길은 어차피 다들 가기 싫어하는 백랑각이다.
오늘 당장 백랑각이 청룡각에 이어 출세의 지름길이 되지 않는 이상, 백랑각에 경쟁이 몰릴 일은 없을 테고.
“애당초 남궁세가에서 창궁상단 지부를 하나 받아와 차린 상단입니다. 제가 운영하지 않는 이상, 제가 하나하나 신경 쓸 건 아니죠. 지킬 수 없으면 빼앗기는 게 당연합니다.”
“…….”
악병비는 내 말이 쉬이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가 어디에 의문을 품는지 알고 있다.
“제가 무림맹에 선을 대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것이 의아합니까?”
“……!”
악병비가 정곡을 찔린 듯 눈을 번적 뜬다.
하기사 감찰각에 있으면서 얼마나 가문의 편의를 봐줘왔을까.
힘을 가진 이는 응당 그 힘을 제 편에 유리하게 쓰려고 드는 법.
절대다수가 따르는 본능을 거스르는 내가 이상하게 보이겠지.
“저는 딱히 잡을 줄도 청탁할 배경도 없긴 하지만, 만약 있다 해도 쓸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
인상을 찌푸린 채 잠자코 듣고 있던 악병비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째서지?”
나는 어깨를 한 차례 으쓱여 보였다.
“아무리 높게 쌓아봤자, 위태롭게 쌓은 탑이 가도 얼마나 가겠습니까?”
누군가에게 받은 것, 빌려온 것으로는 내것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전생에 태을문이 멸문할 때까지 약자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는, 계룡상단에게 계속 의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 생에선 주도권을 가져오고 주체적으로 움직였기에, 태을문이 전생에서와 다른 모습이 될 수 있었던 것.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한 듯 인식하고 남용하면, 사람은 오만해지지요. 악가만 해도 그런 특권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망나니들이 수두룩 하지 않습니까?”
내 일침에 악병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내 흥분을 가라앉힌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해 보였다.
“……그게 다 잘못된 문제 해결 방법 때문이다?”
대화를 끊으려 일부러 약을 올려봤는데, 악병비는 되려 호기심이 작동한 거 같다.
“뭐, 그런 거지요. 특혜 의식만큼 사람의 인성을 갉아먹고 우물 속 개구리로 만드는 것이 없으니까요.”
“…….”
한참을 고민하던 악병비가 입술을 뗀다.
“너희 사문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응? 이 양반이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건…….
“하지만.”
뭐야, 저 눈빛.
순간, 악병비의 눈빛에 왠지 모를 기대감과 경탄이 어린 듯 보였다.
“네 말대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간다면, 악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대단한 문파로 거듭나겠구나.”
“…….”
그렇게 말하곤 자신만의 깊은 생각에 빠져버리는 악병비.
그의 말에 내 머릿속에서도 온갖 생각이 뒤엉키기 시작한다.
나 또한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문제를 내가 해결할 수는 없다.
누군가 기반을 닦아주었다면, 그 위를 달리는 건 스스로 해야 한다.
아버지라면 충분히 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태을문을 지켜온 사람이니까.
‘뭐, 따로 대비도 해놓긴 했으니까.’
난 무공사부인 백해광을 떠올렸다.
한동안 연락이 없기에 정말 스스로 살길을 찾았나 했더니만, 결국 연락이 왔다.
흑도의 거두였던 이가 갑자기 평범한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세 식구 먹여 살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이전처럼 흑도로서 먹고 살자니, 아내와 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을 것이다.
하오문을 통해 알아보니 여기저기 취직한다고 노력은 해본 모양인데, 과거를 숨기고 있자니 칼밥 먹기도 여의치 않았나 보다.
예전에 내가 제안했던 ‘식객’으로 당분간 태을문에 좀 머물 수 있겠느냐는 연락을 보내왔기에, 대천상단으로 가보라는 답장을 보내주었다.
‘그래도 성질은 좀 죽이고 살아야 할 텐데…….’
문파를, 그것도 백도 성향의 문파를 만든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론 폭력보다는 정치가 더 필요한 상황이 많을 테니까.
힘이 있는 자에겐 굳이 안 되는 말솜씨로 상대를 설득하는 시도 자체가 인내심 훈련이나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한편으론.
‘오히려 틀을 깨부술지도 모르지.’
천하의 검마가 위정자들을 상대로 성질머리를 잘 참아내면서도 어떻게 교육(?)시킬지, 조금 기대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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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참 사람이 좋다 해야 할지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만.”
왕금산이 혀를 찼다.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
‘진소운’의 소개를 받고 왔다는 이유만으로 진태산은 백해광을 극진하게 모셨다.
“소운이가 보낸 손님 아닙니까. 당연히 정중하게 모셔야지요.”
“떼잉, 그 도가 지나치단 말이야.”
왕금산이 이리 혀를 차는 이유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통상 ‘식객’이란 전각의 방 한 칸 정도를 내어주고, 식사 등을 제공하며 무공이나 학문을 교류하는 이들을 이야기한다.
한마디로 주고 받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백해광이란 자는 출신성분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데다가 자신의 가족까지 데려와 식객을 요청했다.
이에 진태산은, 이들의 편의를 봐준다며 대천상단의 손님용 별채 전체를 내어주고 하인까지 붙여주어 불편함이 없게끔 했다.
왕금산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더구나 문파 창설을 돕겠다고? 자네가 지금 남의 처지 도울 땐가?”
“어쩌겠습니까. 빌어먹을 아들놈이 이미 그리 해주라 전서를 보냈는 걸요.”
진태산은 갑자기 들이닥친 백해광으로 인해 합비 인근에 땅을 알아보고 목수를 구하는 중이었다.
언제 수라문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진태산이 애먼 일에 힘쓰고 있으니, 왕금산으로선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내 말대로 적당히 돈을 주고 보내면 되지 않겠나.”
그러나 진태산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소운이 그 녀석이 이분께 은혜를 입었답니다. 그 빌어먹을 놈이 어디 그런 이야기를 하는 놈입니까.”
그러곤 왠지 모를 안도감과 만족감이 깃든 미소를 짓는다.
“못난 애비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최대한 해주어야지요.”
어디 기댈 곳도 없고, 남에게 기대본 적도 없는 놈이 은혜를 입었다는 소리에 얼마나 고마운 감정을 느꼈던가.
진태산은 설사 내일 대천상단이 망한다 하더라도 백해광에게 아들이 입은 은혜를 갚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아비로서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데에 기쁨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고 있는 사이, 사용인이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어디서 오신 분이라고?”
“수라문에서 오셨답니다.”
“…….”
두 사람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혔다.
“안으로 모셔라.”
대답을 한 진태산이 왕금산을 돌아보며 말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아니네, 나도 함께 있지.”
“장주님.”
왕금산이 진태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미 무림맹의 일을 함께 처리하는 순간부터 왕가장과 대천상단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이야. 이에 대해선 길게 말하지 않겠네.”
자리를 잡고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표정을 짓는 왕금산.
진태산은 작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세 명의 사내가 들어섰다.
왼쪽에 선 사내는 일전에 대천상단을 사고 싶다는 의향을 전달한 사람이었고, 남은 두 사람은 그가 극진히 모시는 걸로 보아 수라문 내에서 높은 직위를 가진 것이 분명했다.
내부로 들어온 세 사람은 왕금산과 진태산의 앞에 선 후, 두 사람을 지그시 쳐다보고만 있었다.
‘후우…….’
먼저 인사를 하지 않겠다는 명백한 의도.
길게 한숨을 내쉰 진태산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십시오. 대천상단의 진태산입니다.”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여는 방문객.
“반갑소. 수라문의 문주 주영산이올시다.”
“문주님이셨군요.”
주영산이 힐끔 왕금산을 훔쳐보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왕 장주께서도 오랜만에 뵙소이다.”
애써 태연함을 유지하는 태도에, 왕금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게 말이야. 십(十) 년 전에 이천 냥을 융통해 달라고 빌었던 때가 마지막이었나?”
“그, 그게 무슨!”
“말조심하시오!”
왕금산의 말에 주영산의 양옆에 선 사내들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 자세를 취했지만, 주영산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과거의 추억만을 뜯어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추한지 왕 장주는 모르시오?”
“글쎄…… 아! 호랑이 등에 타서 산왕 노릇을 하는 게 얼마나 바보 같아 보이는지는 잘 알고 있네만.”
소림사를 등에 업고 성세를 넓히려 하는 행태를 꼬집는 말에, 수라문의 사람들이 얼굴을 와락 구기며 입을 다물었다.
결국 보다못한 진태산이 나서서 사태를 진정시켰다.
“다들 그만하시지오. 말싸움을 하려 오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장주님도 그만하시고요. 제 손님입니다.”
“흥!”
진태산의 만류에 결국 말싸움을 멈추고 세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거만한 표정을 내건 주영산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일전에 의견은 충분히 전달된 것으로 아오. 결정을 내리시었소?”
상대의 무례한 태도에도, 진태산은 고고하면서도 정중한 태도로 답했다.
“말씀드렸다시피 대천상단은 태을문의 먹거리를 책임지고 있는 바. 팔 생각이 없다 대답했습니다.”
“충분히 그 값을 치르겠소.”
“…….”
“백만 냥 정도면 어떻소?”
기함할 만한 금액이 나왔지만 왕금산이 코웃음을 쳤다.
“도둑놈도 어디 이런 날도둑놈들이 다 있나! 무림맹의 안휘성 지부 유통을 독점하는 상단을 겨우 백만 냥에 꿀꺽하려 하다니.”
그의 개입에 주영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백만 냥이면 그 상단이 십 년간 벌어도 벌 수 없는 돈이외다.”
“물론 금액만 따지면 그렇지. 하지만 무림맹의 독점 유통을 가지고 있다는 이점과 그에서 파생될 다른 이점들을 생각하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급기야 부들거리는 수라문주의 두 손.
“……대천상단의 주인은 태을문이라고 알고 있소만.”
“으음? 누가 뭐라 했던가?”
왕금산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주영산이 애써 무시하며 진태산을 바라봤다.
“상단주, 잘 생각하시오. 어차피 수라문은 상업에 진출할 것이오. 그렇게 되면 대천상단의 성세가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외다. 그러나 지금 상단을 팔고 나간다면 향후 태을문이 운영하는 철광석을 두 배의 가격으로 매입하겠소.”
“…….”
한참을 고민하던 진태산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역시나 팔 생각은 없습니다.”
“이 답답한 사람…….”
주영산이 얼굴을 구기며 언성을 높였다.
“아직도 모르겠소? 이번 일은 단지 수라문만의 의도가 아니오. 소림사의 안휘성 진출과도 관련되어 있단 말이외다. 설마, 지금 소림을 상대로 싸움을 걸겠다는 것이오?”
“소림사…….”
진태산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우자, 왕금산이 끼어들었다.
“소림사? 소림사가 끼어든다면 우리 왕가장도 그땐 깡패가 되는 거…….”
그때, 진태산이 왕금산을 막아섰다.
“장주님.”
그러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왕금산은 콧김을 뿜어댄다.
“내가 뭐 못 할 말 했는가! 아니, 저놈들이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장주님!”
진태산이 재차 막아서자, 결국 왕 장주도 한발 물러섰다.
“……크흠 에잉.”
왕금산의 입이 닫히자 주영산이 득의양양한 표정이 되었다.
“잘 생각했소. 왕가장의 금력이 대단하다곤 하나,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를 상대할 순 없는 것 아니겠…….”
“판다고 안 했습니다.”
“으잉?”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진 수라문주 앞으로, 진태산이 품을 뒤져 꼬깃하게 접은 전서를 꺼내 들었다.
“수라문에서 다녀간 후, 저도 이곳저곳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그러곤 그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인다.
“소림사에서 이번 일에 대해 손을 떼겠다고 했다더군요.”
“뭐, 뭐요?”
“혹시 확인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진태산이 몰랐다는 듯, 박수를 짝 쳤다.
“아하! 아직 전달이 되지 않았나 보군요. 제가 전달받은 바로는 수라문이 상업에 진출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소림사가 힘을 쓰는 일은 없을 거라 하더군요.”
“그게 무슨…….”
진태산이 쐐기를 박듯, 전서를 건네준다.
“제 아들놈이 이번에 소불과 함께 동행을 했는데. 그쪽을 통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에, 수라문의 세 사람이 눈을 불을 켠 채 번갈아 가며 전서를 살폈다.
소불(笑佛) 일명이라면 소림사 내에서도 중요한 존재다.
그런 이가 헛소리를 했을 리도 만무할뿐더러, 그런 이를 끌고 와 거짓말을 할 일은 더더욱 없을 터.
“믿기지 않으신다면 사실 확인을 하셔도 좋습니다.”
진태산의 당당한 태도에 주영산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소림사가 없다 한들, 우리가 대천상단 하나 잡지 못할 것 같소?”
그러곤 슬쩍 왕금산의 눈치를 본다.
“왕가장과 소림사가 나서지 않는다면 수라문과 태을문의 대결이 될 텐데, 수라문은 이에 지지 않을 자신이 있소.”
은근슬쩍 왕가장과 소림사를 하나로 묶어버리는 말에, 왕금산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달리 나서진 않았다.
지금은 진태산의 시간이었으니까.
그 마음에 응답하듯, 진태산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군요.”
이어 여유로운 목소리로 수라문주의 말을 바로잡아 준다.
“정확히는 수라문에서 만든 상단과 대천상단의 싸움이 되겠지요.”
“……!”
“그리고.”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어려있지 않았다.
“그런 싸움이라면 제가 질 것 같지는 않군요.”
“허헛!”
수라문의 비웃음에도 진태산은 자신 있었다.
단기간에 대천상단을 이만큼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진태산 본연의 능력 덕분이었으니까.
이에 더해 왕금산도 그에 동의한다는 듯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자, 수라문의 사람들의 얼굴이 천천히 굳기 시작했다.
소림사의 도움이 없다면 이미 안휘성 일대에 자리 잡고 있는 대천상단을 상대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주영산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자신만만한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구려. 하지만 그거 아시오? 강호에 속해 있는 상단들은 결코 힘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
“태을문은 아직 봉문을 하고 있다는데, 맞소?”
“그렇습니다.”
주영산이 코웃음을 치곤 싸늘하게 내뱉었다.
“봉문을 하고 있음에도 상단을 운영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소.”
“…….”
“이는 지탄받아야 마땅하다는 말이오.”
탕-!
가만히 듣고 있던 왕금산이 노기를 가득 담아 탁자를 내리쳤다.
“이자가 보자 보자 하니까!”
그러나 주영산은 지그시 진태산을 노려보기만 할 뿐.
“우린 모자라는 금력을 상쇄하기 위해 얼마든지 무력을 동원할 마음이 있소. 그러니 태을문도 슬슬 문을 열고 준비하는 편이 좋을 것이오.”
명백한 협박에 분노한 왕금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를 쳐다보던 주영산이 덧붙였다.
“왕 장주님께도 한마디 드리겠소. 만약 왕가장이 나선다면, 분명 소림사도 나설 것이오. 그러니, 강호의 일에 함부로 나서지 마시오.”
이 말을 끝으로 세 사내가 한꺼번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분은 이 정도면 충분했으니까.
지금 당장은 소림사의 의견이 사실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세 사내가 인사조차 남기지 않은 채, 집무실을 나서려 문을 활짝 여니.
문 앞에 웬 백발의 사내와 중년 여성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세 사람은 그들을 피해 바깥으로 나가려 했으나.
스윽-
슥.
백발의 사내가 걸음을 옮기며 세 사람의 길을 막아섰다.
“이 무슨……!”
이후에도 몇 번이나 거듭된 진로 방해.
가뜩이나 왕금산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던 주영산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다.
“대체 뭐 하는 놈들이냐!”
그는 괜한 시비를 거는 것이라면 단매에 때려 눕힐 생각까지 하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흐음.”
백발의 사내는 느긋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난 대천상단의 식객이다. 시벌놈들아.”
세상에서 가장 담백하고 무례한 자기소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