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64화 (264/357)

264. <금의야행(5)>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악병비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쉽사리 믿을 수 없었으니까.

“야율극이란 아이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네!”

악주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형벌을 받은 사람처럼 자신의 슬픔을 마구 토해냈다.

“이 잡놈이 시도 때도 없이 덤벼들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난번 사건 이후론 학관에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고요.”

“야율극이라면 네가 일방적으로 괴롭혔던 그 아이가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일 이후로 전 한 번도 괴롭힌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미친놈이 시도 때도 없이 저를 못살게 굴고 있습니다.”

처음엔 심상치 않은 얼굴 때문에 진소운이 해코지를 했다 생각했다.

그런데.

“진소운이 아니라 야율극이란 말이지…….”

“그 야율극이란 놈도 진소운이랑 똑같은 놈입니다. 출신도 변변치 않은 놈이 운 좋게 학관에 들어와서 제 분수도 모르고 설치고 다니는 꼴이죠.”

악병비의 고갯짓이 우뚝 멈췄다.

“뭐라?”

악주평은 악병비가 제 편을 들어주며 화난 것이라 잘못 이해하고 신이 나 계속 재잘댔다.

“들어보니 진소운이랑 그 야율극이란 놈이 보통 친한 게 아닌 거 같습니다. 따로 대련도 하고, 그 진소운 놈의 출신인 태을문의 제자들도 야율극을 보살핀다고 하더라고요.”

“…….”

“진소운 그놈이 학관 대표 자리에 오른 이후로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현 학관장인 북원평과 진소운이 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듯한데…… 그 때문에 학관의 교관들과 교두들이 잘 움직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내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짓던 악주평이 눈을 반짝거렸다.

“하여, 감찰각 소속이신 숙부님의 단죄가 필요합니다.”

그를 바라보는 악병비의 머릿속엔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당연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듯 인식되면, 사람은 오만해지지요. 악가만 해도 그런 특권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망나니들이 수두룩하지 않습니까?』

악가에 대해서 잘 모르는 진소운의 질투가 섞인 말이라 치부했건만, 눈앞에 귀하게 생각했던 조카가 진소운의 비아냥에 딱 맞는 녀석일 줄이야.

“단죄라…….”

학관에서 야율극의 일을 문제 삼지 않는 이유는 이미 악주평이 그간 쌓아온 악업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삼(三)당주인 자신이 학관에 끌려가 머리를 조아렸던 장면을 보았기에 교관들과 교두들도 두 사람의 일에 개입할 수 없다 판단한 것이겠지.

하지만 이 눈앞의 망나니는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못 하고 편협한 시야와 생각에 사로잡혀 온 세상이 자신을 억압하고 있다고 억울해한다.

“맞습니다! 숙부님! 단죄가 필요합니다.”

더구나 눈앞의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조차 못한 채 자신의 앞날에 꽃길이 열릴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어쩌다, 악가가 이리되어 버린 거지?’

악병비는 악주평을 마치 제 자식처럼 생각하며 돌보았었다.

처와 자식을 잃고 난 다음 해에 태어난 악주평을 보고 얼마나 울었던가.

심정적 관계는 차지하고서라도 악주평은 악가에서도 중요한 존재다.

장손은 아니지만, 둘째 형의 장남이다.

악가를 물려받지는 못하겠지만, 악가와 관련된 중책을 맡아 가문을 위해 일할 것임이 분명했다.

그런 중차대한 위치에 오를 아이의 소갈머리가 겨우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니…….

악병비는 크나큰 실망감을 느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악주평은 순진한 얼굴로 제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본가엔 제가 미리 서신을 보냈습니다.”

“서신?”

“네. 야율극과 진소운 일당을 단죄할 인원을 보내달라고 말입니다. 숙부님께서 나서주시면 뒤처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

악병비는 가슴으로 시작하여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꾸욱꾸욱 눌러 삼키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래, 이게 평범한 아이들의 모습이다. 어화둥둥 자라온 강호의 신성들이란 대저 철이 없는 모습이지 않던가…….’

그러나.

분을 천천히 가라앉히려던 악병비의 머릿속에 지난 며칠간 동고동락했던 일명, 당서희, 그리고 진소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특혜 의식만큼 사람의 인성을 갉아먹고 우물 속 개구리로 만드는 것이 없지요. 그런 놈들이 가득한 가문이라면 얼마나 오래가겠습니까?』

쾅!

악병비의 손속에 탁자가 반으로 쪼개지고, 온갖 서류와 문방사우가 사방으로 흩날린다.

악병비가 두 눈을 번쩍 뜬 순간, 그의 시야로 기대를 한가득 품은 채 웃음을 숨기지 못하는 악주평의 얼굴이 들어왔다.

“네놈…….”

아주 어린 시절부터 봐왔던 아이.

첫 번째 창을 쥐여 주고 찌르는 방법을 직접 가르칠 만큼 누구보다 어여삐 여기던 아이.

“그런 네놈이…….”

지금은 가문을 갉아먹고 썩어 문드러지게 할 악귀처럼 보였다.

이 절망감을 희롱하듯.

“바로 준비할까요? 숙부님?”

호랑이 등에 탄 것처럼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악주평.

놈의 얼굴에 꽉 쥔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당주님! 손님 오셨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

“손님?”

악주평이 이미 와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굳이 보고를 하다니…….

악병비는 분노를 가라앉히며 되물었다.

“누군가?”

“진소운 학관 대표입니다.”

“진소운이?”

“그, 그놈이?”

그저 이름 세 글자에, 악주평의 얼굴이 어쩐지 하얗게 질렸다.

득의양양 웃던 얼굴이 종이 구겨지듯 찡그려지고, 급기야 초조한 듯 다리까지 부들부들 떤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악병비가 밖을 향해 명령했다.

“들여보내게.”

“수, 숙부님?”

그러자 악주평의 두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만큼 커다래진다.

서로 다른 기수도 아니고 같은 시기에 함께 입학한 동급생이건만, 어찌 이리도 그릇의 차이가 크단 말인가.

‘하…….’

악병비는 새어 나오려는 탄식을 겨우 삼켰다.

전대에선 용소아와 일명 등의 천재들 때문에 악북산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리고.

“지, 진소운…… 히익……!”

이번 기수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큰 형님의 염원이 이뤄지려면 한참이나 더 기다려야겠군.’

악가의 이름으로 천하를 뒤흔들어 보겠다는 소가주의 바람은 현세대에는 이뤄내기 영 요원해 보였다.

#

무림맹원들이 가장 가고 싶지 않은 곳을 꼽자면 단연 감찰각과 집행각일 것이다.

그곳에 배정된 것이 아닌 이상 감찰각에 끌려간다는 건, 멀쩡히 돌아올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는 이야기니까.

그런데 지금 내가 제 발로 이곳에 와있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삼(三)당에 말이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찰각에 끌려가는 사람들을 보고, 혹자는 전생에 큰 죄를 지어서 재수가 없는 것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나도 참 전생에 어지간히 큰 죄를 짓긴 했나 보다.

뭐, 소정대 놈들이랑 친했으니 그것도 죄라면 죄라 할 수 있지 않겠나.

하여간에 도움 안 되는 새끼들.

다행히 내 목적지는 취조실이 아니라 집무실이다.

나를 안내하는 사람은 삼당의 당원답게 엄숙하고 딱딱한 표정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하여간 그 상사에 그 부하라니까.

“삼당주님께선 취조실을 집무실로 쓰신다던데, 제가 취조실로 끌려가는 건 아니겠죠? 하하하!”

“…….”

농담을 건넸는데 서늘한 눈빛이 돌아온다.

시벌, 살 떨려서 뭐 입이나 열겠나.

내 말 따윈 가벼이 무시한 당원이 집무실 앞에 멈춰 섰다.

“당주님, 모셔왔습니다.”

“들이게.”

서늘한 인상의 사내가 고갯짓을 했고,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문이 닫힐 때까지 쫓아오는 시선이 매우 거북하다.

뭐야, 일부러 저러는 걸까.

찜찜한 기분을 털어내며 집무실 내부에 들어서니.

“엥?”

의외의 광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박살 난 탁자와 널브러진 서류들.

그리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악주평.

저 새낀 또 언제 와있었대.

내 시선을 읽었는지 악병비가 첨언한다.

“자네가 온 일이 이 아이와 관련이 된 것 같아 일부러 불렀네. 불편하다면 따로 자리하겠는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어차피 당주님께 말씀드리면 악주평의 귀에도 들어갈 텐데요 뭐.”

“그럼 앉게.”

“……탁자가 왜 부서졌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탁자 앞에 앉으면 안 되겠습니까?”

“음…… 그런가?”

악병비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일어나 회의용 긴 탁자로 자리를 옮겼고, 나와 악주평은 악병비를 가운데 두고 마주앉았다.

“그래. 어떤 일로 왔는가.”

“악주평도 같은 일로 온 것 같은데…….”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라!”

“…….”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악주평.

뭐 이리 까칠해.

흠, 그래도 싫다면 굳이 안 불러야지.

난 남이 싫어하는 짓은 안 하는 협객이니까.

나는 턱 끝으로 놈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이 새끼랑 야율극 사이에 문제가 좀 있다는 이야긴 들으셨습니까?”

탕!

“진소운!!”

악주평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한다.

“왜, 이름 부르지 말라며?”

“네놈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쩝. 누군데.”

“뭐?”

“누구냐고. 악가 출신의 악주평이고, 학관에서 학관생이고…… 또 뭔데?”

입을 오물거리던 악주평이 분한 듯 악병비를 바라봤다.

“숙부님!”

악병비도 꽤나 화가 날 법한 상황이지만 어쩐지 표정에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진 대표, 계속 얘기하게.”

“……!”

악주평이 눈을 부릅뜨다가 이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놈을 턱짓으로 대충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 새끼가 본가에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거, 굳이 애들 싸움에 어른들까지 나서서 난장판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

악주평을 한번 쳐다본 악병비가 다시금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들어보니, 이 녀석도 꽤 심각하게 괴롭힘을 당했다던데. 야율극이 시도 때도 없이 기습을 당했다고.”

“그 건에 대해선 제가 얘기해 뒀습니다. 앞으로 정식 비무만 신청할 겁니다.”

“이는 자네가 분개했던 사건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네. 그 일의 대가로 자네는 악주평에게 장애를 남겼지.”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무슨 집단 폭행이랑 비교를 해? 거참, 어이가 없네.

“무슨 그 일을 가져다 대십니까. 그때는 이 새끼가 지 친구들까지 끌고와 단체로 때리지 않았습니까. 반대로 야율극 그놈은 성격이 별로라 친구가 없어 혼자 대항했고요. 완전히 다른 일이죠.”

“그런 건가?”

“그런 겁니다.”

“자네가 나설 일은 없는 건가?”

“악가나 당주님이 나서지 않으신다면 제가 나설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고개를 주억거리던 악병비가 즉각 동의했다.

“알겠네. 본가에는 내가 따로 이야기를 전하지. 악가가 나서는 일은 없을 걸세.”

오! 이렇게 쉽게?

다른 조건은 차치하고 기껏 좋은 관계였던 악병비와 다시금 악연이 되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끔 선뜻 받아들였다.

“숙부님!”

물론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악주평은 우리의 거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고.

“우리 악가가 뭐가 무서워서 저딴 놈이랑 거래를 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악주평의 악다구니가 끝나기 무섭게 악병비의 주먹이 탁자를 때렸다.

탕!

콰직!

기다란 회의용 탁자가 한 방에 부서진다.

아까 손님용 탁자가 부서진 이유가 여기 있었구만.

“닥쳐라!”

“수, 숙부님……!”

악주평은 여전히 이해를 못 하겠다는 눈빛으로 악병비를 바라봤다.

하지만 악병비의 얼굴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다시 한번 그 뚫린 입으로 악가를 함부로 더럽혔다간…… 내 직접 네놈 입을 찢어놓을 것이다.”

“어, 어…….”

악주평은 현 상황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악병비는 멈추지 않았다.

“하나 묻겠다. 야율극을 괴롭혔던 건, 그의 배경이 비루할 뿐만 아니라 무공의 수준조차 낮아서겠지?”

“…….”

너무 당연한 일이다.

무공을 익히고 강약으로 서열을 나누는 강호에서, 그 법칙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누구보다 악독하게 그 법칙을 이용하니까.

“너에게 장애가 조금 남긴 했지만, 치료를 잘했기에 이전과 기량에서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네놈이 이리 나를 찾아온 것은 실력으로 밀려서겠지?”

“…….”

그의 언성이 점차 높아진다.

“실력을 올려 직접 상대할 생각은 하지 못한 것이냐? 야율극 그놈이 네 눈을 보기만 해도 도망치도록 만들 생각은 못 했냔 말이다!”

“…….”

악주평이 대답하지 않자 악병비의 눈초리가 더욱 사납게 치켜떠졌다.

“네놈이 그러고도 악가의 이름을 입에 올려!”

“…….”

숙부의 다그침에 악주평은 이가 부러지도록 앙다물었다.

“좋은 가문과 좋은 부모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네놈의 인생 최대 업적이더냐! 네놈은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게야!!!”

결국 악주평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눈가에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무릎에 번졌다.

“야율극이 구파일방의 출신이었다면…… 아니, 하다못해 백팔봉 출신이었다면 네놈이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냐?”

나는 너무 나간 듯한 악병비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애한테 너무 하시네.

“에이, 당주님 너무 그러지 마세요. 비겁한 놈들이 언제 제 놈보다 강한 이와 대적하는 걸 보셨습니까?”

“!”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악주평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어 나를 노려본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이 참으로 흉하다.

내 만류에도 악병비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네놈이 학관에 들어온 것이 온전히 네놈 실력 덕분이더냐! 가문의 덕을 봤다면 최소한 가문에 먹칠은 하지 말아야지!”

“흐끅…….”

“썩 꺼져라! 꼴도 보기 싫으니!”

악병비의 축객령에 어깨가 축 늘어진 악주평이 터덜터덜 집무실을 나섰다.

악주평이 나간 뒤에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씩씩거리는 악병비.

“그 좋은 환경에서 자라났는데도 고작 저 정도밖에 되지 않다니.”

한참이나 분노하던 악병비는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자네 사문 어른들이 부럽군. 그분들은 좋으시겠어. 자네 같은 제자가 있다니 말일세.”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던데.”

매번 서신을 보낼 때마다 제발 조용히 좀 살라는 이야기를 전해 오시니까.

내가 볼을 긁적거리자 악병비가 고개를 저었다.

“아마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시는 거겠지.”

“그런 겁니까?”

“그렇네.”

악병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만약 자네가 우리 가문의…….”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아니네. 내가 별소릴 다 하는군.”

나는 뒷이야기가 궁금하긴 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뭔가 악병비의 표정이 세상 다 산 사람 같은 표정이었으니까.

#

악병비가 약속한 대로 악가에서 나서는 일은 없었다.

야율극도 내 이야기를 알아들어 처먹었는지, 더 이상 악주평을 기습하지 않았고.

야생 살쾡이 같은 놈이 그래도 말을 알아먹는다는 점에서 조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대신 매일 찾아가 비무를 신청하는 바람에 악주평이 매번 야율극을 피해 도망 다닌다는 이야기가 들리긴 했지만…….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 아니겠나.

게다가 악주평 입장에선 악가의 자제인 자신이 야율극이 걸어온 비무를 피하는 꼴을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비무를 신청하는 통에 악주평은 결국 폐관수련을 신청하였다는 소식까지 들었다.

하여간 진짜 제 형이나 동생이나 사람 질리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니까?

그렇게 악주평이 폐관수련동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들릴 때쯤.

나는 제갈소명의 부름을 받았다.

드디어 사절단의 일로 정산서를 받을 때가 된 것이다.

간만에 들려온 너무도 반가운 소식에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온다.

‘이번엔 뭘 뜯어내지?’

나는 머릿속 장서고를 뒤지느라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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