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63화 (263/357)

263. <금의야행(4)>

이야기를 들은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니까.”

야율극은 그간 틈이 날 때마다 악주평을 쫓아가 일방적 비무를 신청했단다.

악주평이 거절해도 비무를 시작하고, 시도 때도 없이 놈을 괴롭혔단다.

이야, 이거…….

“혹시 미친 새끼세요?”

“……대사형.”

아차,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입으로 튀어나와 버렸네. 근데 뭐?

나는 은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후 야율극을 다시 쳐다봤다.

네가 그렇게 꼬라보면 뭐 어쩔 건데?

“야, 한판 뜰래? 좋은 말로 할 때 눈 깔아…….”

쿠당탕.

“한판 뜨자!!”

저저 성질머리 좀 봐라.

씩씩대며 벌떡 일어난 야율극.

은호가 한숨을 쉬며 녀석의 마혈을 짚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학관 쪽에서는 아직 별말이 없습니다.”

그렇겠지, 내 사형이자 학관장인 북원평이 삼당주를 불러다 놓고 호통을 치는 광경을 봤을 테니, 그 밑에 있는 놈들 입장에서 쉽사리 나설 수가 있겠나.

“더구나 삼당주가 사절단장으로 사흑련에 가 있던 탓에, 악주평이 직접 본가에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거기까지만 알고 있습니다.”

“흠…….”

나는 바닥에 쓰러진 야율극을 발로 툭툭 찼다.

“야, 그만 화해하고 좀 잘 지내면 안 되냐?”

그러자 야율극이 움직이지 않는 몸 대신, 으르렁대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다.

……무슨 야생동물이냐.

“그놈과 한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다!”

“…….”

길들여지지 않는 놈을 보며 내가 한숨 짓는 사이.

“쯧쯧, 제멋대로 굴면 명이 짧은 것이야.”

내 옆에 앉아 칠색화를 마시던 당서희가 땅콩을 하나씩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저기 음,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

“카아악! 이 땅꼬맹이가 죽고 싶나!”

하……. 머리가 어질거린다, 진짜.

야율극이 야차 같은 얼굴로 당서희를 노려보지만, 당서희는 여전히 야율극의 얼굴을 표적 삼아 땅콩을 던져댈 뿐이었다.

“네가 더 땅꼬맹이인 것이야.”

“한번 붙자!”

그만해. 쟤 백수신녀야. 멍청아.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나는 다시금 물었다.

“아직도 극복이 안 되냐?”

“뭐?”

죽일 듯 날 노려보는 야율극.

나는 녀석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두려움. 극복이 안 되냐고.”

야율극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상처를 입으면서도 살쾡이처럼 짖어대며 달려드는 건, 결국 두려움에 잠식되지 않기 위한 발악이니까.

오랜 기간 쌓여온 두려움은 하루아침에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매일 아침 두려움과 무력감으로 시작하는 하루하루는 그저 지옥의 연속일 뿐.

‘나도, 야율재 녀석도, 그리고 소정대도…… 매일매일을 몸부림치면서 살았으니까.’

누구보다 야율극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녀석도 목 끝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숨이 넘어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고 있는 것뿐일 테니까.

“…….”

살쾡이처럼 캬악- 거리던 야율극의 입이 꾸욱 닫힌다.

“난…… 용서가 안 된다.”

“그래, 그 정도로 괴롭힘을 당했는데 쉽사리 용서가 안 되지. 그렇…….”

“무력하게 도망만 쳤던 내가 용서가 안 된다.”

“……응?”

야율극의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힘을 줬던 탓인 듯했다.

“힘들게…… 학관에 들어온 내가, 결국 도망칠 수도 없을 만큼 무력하게 이 기회를 흘려보냈다는 게 도저히 용서가 안 돼……!”

투둑- 투둑-

결국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는 야율극.

말은 하지 않았지만, 형들의 희생을 등에 짊어졌던 녀석은 내 예상보다 더 큰 부채감과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나 보다.

“…….”

더구나 마지막에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 했던 것까지 생각하니, 더욱 큰 무력감이 덮쳐왔던 거겠지.

“나는…… 내가 너무 혐오스럽다.”

녀석의 말대로 녀석은 추하고 혐오스럽기 그지없다.

어쩌면 두 번째 삶을 살면서 아직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내 모습이 녀석 위로 겹쳐져, 더욱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이를 앙다물고 몸을 부들부들 떠는 녀석을 바라보며 내가 잠시 고민에 잠긴 사이.

덜컥.

별안간 당서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야율극의 근처로 다가가 쪼그려 앉더니…….

“……?”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구나 다 그럴 때가 있는 법인 것이야. 그렇다고 스스로를 책망할 필욘 없는 것이야.”

당서희의 말이 어쩐지 가슴 한편을 욱신 찌르는 듯했다.

“그런 자신이라도 증오하면 안 되는 것이야. 더 이뻐해 주고 더 사랑해 줘야 하는 것이야.”

이어지는 말에, 가슴을 찌르던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울컥 치솟아 오른다.

당서희에게 저런 면이 있었나.

그때.

“……특히나 악가를 상대로 빌미를 주는 건 더욱 바보 같은 것이야.”

불식간에, 당서희가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놈의 머리를 퍽 하고 내리쳤다.

“넌 멍청한 것이야.”

……그럼 그렇지.

기습의 한 방을 맞은 야율극의 얼굴이 다시금 살쾡이처럼 변했다.

“누가 바보라는 거야! 네가 더 바보야!”

“아닌 것이야. 난 이미 용봉지회로써 증명한 것이야. 넌 용봉지회에 들 수 있는 것이야?”

“……한판 붙자!”

흥분하며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야율극의 뒤통수를 한 대 더 때리고 자리로 돌아온 당서희.

나는 소란스런 그들의 목소리에 관자놀이를 꾸욱꾸욱 누르며 참을 인을 새겼다.

역시나 한숨을 내쉰 은호가 내게 말했다.

“일단 야율극이 대표단에 들어왔으니, 악가 쪽에선 움직이더라도 조심할 겁니다.”

“……그렇다고 일도 안 하는 놈을 대표단에 넣어놓을 순 없는 노릇이지.”

나는 발끝으로 야율극을 툭툭 건드렸다.

“비무 신청을 통한 싸움은 인정하마, 하지만 그 외의 기습이나 반칙은 허용하지 않겠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나는 담담히 덧붙였다.

“내가 지켜줄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야. 오대세가를 우습게 보지 마라. 그들의 저력이 오백 년간 이어진 데엔 분명 이유가 있는 거니까.”

이 정도 얘기했으면 제발 알아먹으면 좋으련만.

그런데 놈이 움직임을 멈추곤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지켜…… 준다고?”

나는 대답 대신 놈을 한 차례 더 발로 툭 차고는 뒤돌아섰다.

하여간 성가신 녀석.

야율극을 내려다보던 은호가 의아한 듯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일단 얘기해 봐야지.”

“……악주평과 말입니까? 악주평이 야율극보다 더 싫어하는 게 대사형이잖습니까.”

나는 은호를 향해 피식 웃어주었다.

“그런 조무래기랑 왜 말을 해. 그놈보다 더 높은 사람이랑 이야기해야지.”

“네?”

무슨 이유 때문인진 몰라도 한동안 관계 좋았는데.

이번 일로 틀어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그래도 저놈이 죽는 것보단 나으니까.’

야율극이 죽으면 슬퍼할 놈의 얼굴이 떠오른다.

차라리 그놈이 이죽거리며 제 무공을 자랑하는 꼴을 보는 게 낫지. 제 동생이 죽었다고 우울감에 빠져있는 꼴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뭐, 해봐야지.”

나는 다시금 당서희의 땅콩 표적이 된 야율극을 바라봤다.

녀석은 당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를 못 하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보지 마라. 나도 이런 내가 이해가 안 가니까.

#

악병비는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근래에 들어서야 총군사를 자주 만나고 있지만, 그렇다 한들 만통부의 수장을 만나는 건 감찰각의 삼당주 직책에 있는 악병비로서도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으니까.

‘후우…… 독대라니…….’

어떤 의도에서 따로 보자 한지는 알고 있다.

자신을 사절단장으로 임명한 것에서부터 이미 의도는 확연히 보였으니까.

‘분명 진소운과 관련된 것이겠지.’

그간 녀석이 보인 수상한 행적을 면밀히 조사하라는 의도임과, 그 일에는 자신이 적격이란 점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조사 결과는 사절단 보고를 할 때 함께 전달하지 않았나.

진소운의 공로에 대해 충분히 얘기함으로써 흑도의 간자라는 의심은 거두어도 된다 표현했건만, 주도면밀한 제갈소명은 기어코 자신의 입을 통해 직접 의견을 들으려 이런 자리를 만든 것이 분명했다.

‘역시나 총군사는 총군사인 건가…….’

제갈세가의 뒷배로 자리를 차지했다는 소문이 무색할 정도로, 제갈소명은 현재 무림맹을 훌륭하게 운영해 나가고 있었다.

은퇴한 감찰각의 선배들의 입을 통하자면, 득세하는 무문과 가문의 입김 때문에 이미 무림맹이 뒤집혀도 몇 번은 뒤집혔을 거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현 무림맹주 혁무강이 이십 년에 가까운 긴 세월 동안 맹주 자리에 있을 수 있는 덴, 같은 기간 만통부의 수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제갈소명의 공 또한 크다 할 수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제갈소명이 느긋하게 걸어 들어왔다.

“바쁜 사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내실로 들어선 제갈소명은 어쩐지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었다.

“차는 어떤 걸 좋아하는가?”

“전,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그런가? 이번에 들어온 군산은침이 좋더군.”

직접 차를 준비하는 제갈소명의 모습에 악병비가 벌떡 일어나려 했다.

“아, 제가…….”

“되었네. 바쁜 사람 불러냈으니 내가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차를 준비하는 총군사의 모습에 악병비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당겼다.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어 상대를 방심하게 만드는 것.

이는 감찰각에서 사람을 취조할 때 흔히 쓰는 방법이었으니까.

잠시 뒤, 두 사람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 두 개가 놓였다.

“어서 드시게.”

제갈소명이 천천히 차를 마시며 향을 음미하는 동안 악병비는 차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를 느긋하게 관찰하던 제갈소명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왜, 차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

“아닙니다.”

“그럼 왜 들지 않는가?”

“…….”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잠시 맞닿았다.

제갈소명의 의도를 파악하려 머리를 굴리던 악병비.

그가 대뜸 입을 열었다.

“……진소운은 흑도의 간자가 아닙니다.”

“응?”

의외라는 표정의 제갈소명.

악병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런 심리적 계략을 이겨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면 돌파를 하는 것.

그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총군사를 응시했다.

“사흑련에 사절단으로 다녀오는 동안,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한시도 놓치지 않고 진소운을 관찰했습니다. 분명 그 아이에겐 불손하고 불량한 모습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 아이의 뜻이 흑도에 있다고 예단하는 것은 백도무림의 거목이 될 좋은 떡잎을 짓밟아 버리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생각합니다.”

잠자코 악병비의 말을 듣던 제갈소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저 인사 평가를 앞두고 상담을 할 예정이었건만, 그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쏟아진 것이다.

제갈소명은 흥미로운 듯, 손가락으로 찻잔을 매만졌다.

“흐음…… 거목이 될 나무라…… 정말 그리 생각하는가?”

“물론 어려움이 많다 생각합니다. 타고난 재능도, 든든한 배경도 부족하지요.”

고개를 내젓던 악병비가 이내 한 차례 숨을 고르곤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분명 백도무림의 커다란 나무가 될 만한 그릇을 가졌습니다.”

“흐음……?”

악병비의 말을 듣던 제갈소명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감찰각의 삼(三)당주라면 흑도무림에서도, 백도무림에서도 유명했다.

올곧기가 대나무 못지않고, 유혹에 흔들림이 없으며 빈틈이 없다.

가문에 대한 애정도가 강하긴 하지만, 무림맹에서 활동하는 이들 중에 그렇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려고 말도 안 되는 무림정시나 학관의 시험을 치고 무림맹에 들어서려 애를 쓰는 것 아니었던가.

결국 그 균형을 잘 잡아 무림맹에 도움이 되는지, 기생충처럼 제 잇속만 챙기는지가 중요한 법.

그렇기에 일부러 이번 사절단에 그를 단장으로 보냈다.

흑도를 극렬하게 증오하고 미워하는 그가 흑도와의 거래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보고 싶었으니까.

대당주(大幢主)의 자리부터는 직책 본연의 일을 처리하는 역량보단 큰 그림을 보는 능력을 필요로 하니까.

한데 그런 능력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대뜸 하는 말이 진소운의 칭찬이라니.

엉뚱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잠자코 계속 들었다.

“없는 자가 출세하기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그의 치부나 과거가 아닙니다. 그를 질투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곤 하지요. 그렇기에 감찰각이나 집행각은 그런 이들의 삐뚤어진 무기가 되어 높이 날려 하는 새를 떨구어선 안 된다 생각합니다.”

제갈소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자신의 사문이나 가문의 일이 연관된다면 어떤가? 그때도 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악병비의 가슴을 깊이 찌르는 말.

그는 자신의 과거를 꼬집는 말에 담담히 답했다.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책임을 지라 하신다면 얼마든지 책임을 지겠습니다.”

“쯔쯧, 되었네. 무림맹에서 그 정도 사적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이가 얼마나 된다고. 괜히 내빼서 일을 딴 사람에게 떠넘기려는 생각은 말게.”

장난기 어린 농으로 분위기를 쇄신한 제갈소명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자네 이야기는 진소운이 간자가 아니고 앞으로도 간자가 될 가능성이 없다 이 말인가?”

악병비가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진소운은 누구보다 백도무림의 정신을 올곧게 가지고 있으며, 협의를 실천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인물입니다.”

“흐음…….”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고.

“끌끌끌.”

일순, 제갈소명의 입에서 웃음이 삐져나왔다.

“감찰각의 삼(三)당주 입에서 나왔다곤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군.”

내실을 울리는 웃음소리에 악병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알겠네. 내가 알아야 할 것은 다 알았으니. 이만 돌아가 보게.”

악병비가 나간 후, 홀로 앉은 제갈소명이 중얼거렸다.

“원한을 가진 자를 아군으로 만든다. 정말 그 정도로 그릇이 큰 놈인가? 아니면 올곧은 대나무가 갈대가 된 것일까?”

차를 마시는 제갈소명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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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각 삼(三)당으로 돌아온 악병비는 탈력감에 털썩하고 자리에 앉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힘들군.”

차라리 간자 의혹이 있는 이들 백 명을 데려다 조사하는 게 더 쉽겠다 생각할 때쯤.

“당주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네. 악주평 도련님입니다.”

악병비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외쳤다.

“들여보내게.”

“네.”

잠시 뒤.

악주평이 한쪽 발을 미세하게 쩔뚝거리며 들어섰다.

“숙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의 악주평을 본 순간, 악병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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