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70화 (270/357)

270. <누군가의 악의>

학기말 마지막 실기평가 날이 다가왔다.

학관생들은 겨울 휴식기가 다가온다는 기대감을 느끼는 한편, 반영 점수가 가장 높은 실기평가에 대한 긴장으로 무거운 분위기를 유지했다.

짧은 기간이나마 폐관수련에 들어갔던 학관생들이 날짜에 맞춰 바깥으로 나왔고.

저마다 손발이 맞는 사람을 찾아 조를 짜기 여념이 없었다.

물론 조 만들기가 어느 정도 끝난 사람들은 다른 일을 처리하기도 했다.

그리고 진소운에게 닥친 가장 시급한 일은.

“사흑련에서 아주 대애애단한 일을 하셨더라구요. 대사형.”

“크흠……. 태을문의 제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그나저나 련매는 짧은 기간 동안 많이 성장했구나.”

“련매…… 련매…… 내가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죠!”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온 사련에게서 살아남기였다.

“자, 잠깐! 그게 내기를 끌어올릴 정도로 잘못한 건 아니잖아!”

“얌전히 죽으세요!”

“힘들게 살아 돌아온 사람에게 죽으라니!”

“문답무용!”

그렇게 전략 전술 평가 날이 다가왔다.

“사련아…… 표정이 왜 그래?”

폐관수련을 함께 들어가면서 부쩍 친해진 남궁선화가 걱정스럽게 홍사련을 바라봤다.

“한 대도 못 때렸어요.”

“응?”

남궁선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사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사형이요. 분명 전력으로 덤볐는데 한 대도 못 때렸어요……. 혹, 폐관 수련이 잘못된 걸까요?”

남궁선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홍사련은 짧은 폐관수련 기간 동안 무섭도록 수련에 매진했다.

어떤 날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기본적인 것도 까먹을 정도로.

남궁선화는 난생처음 보는 집중력이었다.

노력한 만큼 성과가 있어 짧은 기간 동안 사련은 부쩍 실력이 급증했다.

아무리 학관생들 간에 수준 차이가 있다고 해도, 진소운이 한 대도 맞지 않았다는 건 사뭇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력을 다한 거 맞아?”

“네. 완전 전력이었어요.”

얼마나 억울했는지 사련은 금방이라도 분통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진소운은 대표 업무에 더해 만통부를 오가며 일을 돕고 있다.

최근엔 사흑련에까지 다녀왔기에 당연히 수련할 시간이 부족했을 텐데…….

그사이 진소운의 실력이 늘었다는 것이 사뭇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뭘 깊이 생각해. 원래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었는데, 읏챠.”

성모란이 몸을 풀며 말했다.

“그런 거 하나하나 이해하려고 했다간 더 모르게 될걸.”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남궁선화의 물음에 성모란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글쎄, 진 공자가 파산검법의 약점을 다 알고 있더라고. 거기에 더불어 보완점까지.”

“…….”

“사문의 어른들이 그렇게 숨기려고 무던히 애를 썼는데, 어쩜 그렇게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지.”

그러고 보니, 창제신검인 할아버지도 진소운과 대화를 한 이후에 창궁운위검법을 만들어 내지 않았던가.

남궁선화는 성모란의 말대로 이해하려 할수록 점점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무슨 얘길 하고 있었습니까?”

그때, 이야기의 당사자인 진소운이 사형제들과 함께 나타났다.

성모란이 툴툴대며 말했다.

“있어요. 알면 알수록 모르겠는 사람.”

진소운의 미간이 걱정으로 일그러진다.

“……그거 꽤 위험하게 들리는군요. 사기꾼입니까?”

“……뭐, 비슷해요.”

말을 얼버무리는 성모란의 모습에 진소운 또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사련의 눈초리가 무섭기도 했고.

“흠흠, 아무튼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려야죠.”

“태을문 제자들이 많은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되려 제가 부탁해야죠. 무(戊) 평가 때문에 간당간당하니까. 선화도 아마 비슷한 이유로 진 공자 조에 들어온 걸 테고요. 그치?”

“네. 되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어요. 어쨌든 이번 실기평가 점수가 높아야 오라버니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거든요.”

두 사람의 말에 진소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어 그는 자신의 일행들을 쓱 살폈다.

금표, 은호, 동룡, 사련, 성모란, 남궁선화, 모용재화, 은설란.

그리고 야율극까지.

응? 야율극?

진소운이 고개를 갸웃하며 야율극에게 물었다.

“넌 왜 여기 있냐?”

“나, 나도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온 게 아니야!”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바락바락 목에 핏대를 세우는 야율극.

은호가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

“같이 소대를 이룰 사람이 없어서 제가 데려왔습니다. 저희도 열 명은 맞춰야 하니까요.”

진소운이 안 봐도 눈에 훤하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으휴, 그러게 평소에 성격 좀 죽이지 그랬냐.”

“나, 난!”

“됐어. 이제 시작한다.”

진소운은 살쾡이 새끼 녀석을 입을 막은 후, 실기평가장을 죽 둘러봤다.

일각과 장우재는 각기 자신들의 사람들로 소대를 만들어 모여있었다.

교관과 교두들은 학관생들 사이를 오가며 명단을 확인한 후, 진영에 알맞은 색깔의 깃발을 나눠주기 시작했고.

깃발을 받은 학관생들은 기수를 숨기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

“이번만큼 권각술을 익힌 사람이 부러울 때가 없네요.”

“모든 것엔 다 장단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전략 전술 평가에선 상대에게 중대한 상처를 입히는 것 또한 감점 요소다.

그리고 이는 자연히 무기를 쓰는 이들을 위축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디까지나 전략 전술에 기반하여 평가를 치르라는 주최 측의 의도.

“일각 스님은 소림사의 인원으로 소대를 이뤘다죠? 아주 작정을 했더라구요.”

성모란이 입술을 삐쭉거리자, 진소운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평가 결과는 무기를 들었나 아니냐로 갈리지 않습니…….”

“마음에 안 들어.”

“네?”

성모란이 눈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갑(甲) 평가만 받은 사람은 무(戊) 평가를 받은 사람의 마음을 이해 못 한다고요!”

그러곤 장비를 점검하던 금표를 잡고 흔들었다.

“금표야, 뭐라 말 좀 해봐! 니네 대사형이 저렇게나 매정하다.”

성모란의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금표가 이내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말했다.

“분명 저희는 좋은 평가를 받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에 성모란이 슬그머니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얘는 또 갑자기 왜 이래.”

이윽고 교두들이 보는 앞에서 학관생들이 하나하나 군자산을 먹기 시작했다.

무려 사천당가에서 제조법을 전수하여 무림맹 신의각에서 만든 군자산이다.

약의 효능은 정확히 열두 시진 동안 발휘되며, 하루 동안 학관생들은 내공을 전혀 쓸 수 없게 된다.

“으……, 언제 먹어도 이상한 기분이야.”

성모란이 인상을 찌푸리자 은호가 물었다.

“전에 드셔보신 적이 있습니까?”

“응, 사문에 있을 때. 종종 군자산을 먹고 수련을 시키거든. 군자산은 무인들이 중독되는 가장 기본적인 독이니까.”

군자산을 먹고 수련을 해본 적이 없던 은호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졌다.

그때 막 군자산을 삼킨 진소운이 입을 열었다.

“태을문에서 했던 수련만 생각해라. 그때의 감각만 가지고 있다면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거다.”

성모란이 놀라며 물었다.

“내공을 제한한 수련을 한 적이 있어요?”

진소운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태을문은 군자산을 구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살림이 아니었거든요.”

“하아……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 거야. 이 인간은.”

성모란이 투덜거리는 사이.

북원평이 연단 위에 올랐다.

[오늘 열리는 전략 전술 평가는 올 한 해 마지막 평가가 될 것이다. 학관생들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그럼 시작하라!]

북원평의 말을 끝으로 신호탄이 날아올라 터졌고, 학관생들은 자신들의 깃발 색깔에 맞춰 이동하기 시작했다.

#

학관으로부터 한 시진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작은 산봉우리 세 곳에는 본래 이름이 없었다.

하지만 무한의 주민들은 어느 순간부터 세 산봉우리를 각각 홍산, 청산, 백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대대로 이곳에서 전략 전술 평가가 치러졌기에, 학관생들의 말이 전해지고 전해져 무한의 주민들에게까지 퍼진 것이었다.

“와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

소대를 이룬 이들은 각기 자신이 속한 청군, 백군, 홍군 안에서 소대 간 서열 다툼을 시작한다.

깃발을 빼앗긴 이들은 깃발을 빼앗은 이들의 명령을 받기 시작하며 때로는 합의에 의해 소대를 합쳐 중대를 만들기도 했다.

“아직은 구경하는 이들이 많네요.”

주변을 둘러보던 성모란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가 만만한지 먼저 보고 있겠지요.”

깃발을 빼앗겼다고 끝이 아니다. 그 안에서도 몇 개의 깃발을 빼앗은 후 패배했느냐가 평가에 중차대한 영향을 끼친다.

백도회, 정도회, 12봉성뿐 아니라 기반 세력이 없는 이들도 자신들보다 약한 소대를 필사적으로 찾는다.

홍군 진영의 가장 가까이 있던 우리는 중앙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홍군 내부의 전투는 과열되지 않은 상태.

그때, 한 소대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대표님.”

그들은 다름 아닌 장우재와 그의 친구들.

“벌써 탈락하려고?”

내 물음에 장우재가 씨익 웃었다.

“우승이 확실한 소대에 전략적으로 편입되는 것도 훌륭한 전술로서 가산점이 붙으니까요.”

“그럼 깃발을 넘길 건가?”

“그래도 한번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역시 마음에 드는 녀석이란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흑룡검을 뽑았다.

“아주 패기 넘치는 소대원들이 들어오겠군.”

내 말에 장우재 역시 검을 뽑는다.

이윽고 홍군 내부의 첫 서열 싸움이 시작되었다.

#

장우재를 시작으로 몇몇 홍군 소대들이 연이어 덤벼들었다.

그때마다 우리 소대는 연신 승리를 이어 나갔고, 전투가 끝날 때마다 인원이 늘어나는 우리를 보고 홍군 내부의 소대들 중에선 전략적인 합의로 부대 합치기에 나선 곳도 있었다.

아직 중대 이상의 인원들이 한 번에 덤벼들지 않았지만, 우리 소대는 끝없는 도전장에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크윽!”

“송무열 학관생 탈락!”

“강차숙 학관생 탈락!”

전투 와중에 체력적 한계에 부딪히거나 부상의 정도가 심하여 탈락하는 이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공을 쓰지 않은 상태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은 평생 내공 수련에 매진했던 무인들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의 체력 이상의 힘을 써버려 탈진하는 이들이 종종 나왔고, 과하게 힘을 쏟아 상대에게 중상을 입히고 탈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까지 우리 소대의 인원들 중에 탈락자는 없었다.

그렇게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중.

“근데 좀 이상하네요.”

성모란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왜 다들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거죠?”

“…….”

“…….”

그녀의 의문에 은호와 모용재화가 인근 바위와 나무 위로 올라가 주변을 살폈다.

나 또한 시선을 돌려 청군과 백군이 있는 곳을 살폈다.

깃발을 합치고 중대를 이룬 곳들도 있었지만, 다들 관망하는 자세로 상황을 주시하고만 있다.

성모란의 말마따나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이 없었다.

시간제한이 있는 걸 생각하면 조금은 분위기가 과열돼도 이상할 것이 없었건만, 다들 뭔가 목적이 있는 듯 크게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뭐지? 뭔가 더러운 냄새가 나는 거 같은데.’

내 불길한 촉에 반응하듯 바위 위에서 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사형, 청군이 움직이기 시작하는데요?”

곧바로 재화의 목소리도 따라붙는다.

“형님, 백군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백산을 살피던 재화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아무도 싸우질 않고 있습니다.”

“응?”

“……홍산으로 곧장 향하고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

“무슨 꿍꿍이지?”

청군과 백군의 인원들이 동시에 움직인다.

서로 어깨를 맞대고 깃발 싸움을 해도 모자를 시간에 싸움은커녕 질서정연하게 홍산으로 오고 있었다.

“홍산에 다 와갑니다.”

“쟤네들 대체 뭐 하는 거야!”

옆에서 금표가 방패를 꽉 쥐며 나직이 보고한다.

“……홍군도 검을 안 듭니다.”

“이 새끼들 대체 무슨 꿍꿍이…….”

그때.

촤악-

홍산에 퍼져있던 홍군의 인원들이 길을 열기 시작한다.

그 덕분에 청군과 백군의 인원들은 아무런 방해 없이 홍산을 오르고 있었다.

“형님…… 저 새끼들 이쪽으로 오는 거 아니죠?”

“…….”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짓는 모용재화.

하지만 우리 일행 중 누구도 녀석의 우려에 답하지 않았다.

아니, 답할 필요가 없었다.

“씨바, 빌어먹을…….”

정확히 우리 소대가 있는 곳으로 청군과 백군의 소대들이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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