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 <빌어먹게 그리운 얼굴(4)>
철순직과 그를 따르는 졸개(?)들의 얼굴이 똥이라도 맛본 표정들이 되었다.
평소 난 새로운 제안들을 기꺼워하는 편이다.
내가 만통부와 만서고, 무림맹의 정보들을 모두 다 알고 있다 해도, 여전히 모르는 것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데다가 남들이 더 뛰어난 식견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일례로 대표단의 일을 나눠야 한다는 장우재의 의견도 곧장 받아들였다.
대표단 운영에 있어선 당장의 효율성보다 장기적인 안정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견.
실제 일을 처리함에 있어,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내가 그들보다 더욱 빨리 처리할 수 있는 건 사실이다.
학관과 교육각, 만통부와 서류를 주고받아야 하는 과정도 필요 없이 내가 작성한 서류들은 곧장 통과될 테니까.
하지만 극단적 효율을 찾지 않고 업무를 나눈 이유는 내가 없는 동안에도 대표단이 잘 굴러가길 바라서다.
그리고 장우재의 말대로 대표단은 이제 내가 없어도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방향으로 완성되고 있다.
이렇게 열려있는 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가리 굴리는 것들은 극도로 싫다.
‘결국 전생에서 무림맹이 무너진 본질적인 이유는, 본인만 잘살면 된다는 역겨운 이기심 때문이었지.’
매번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12봉성 등의 알력 다툼에 밀려 설움을 받았던 게 바로 우리 백랑각 소정대였으니까.
나는 철순직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무력단체와 상단들이 상명하복의 체계를 유지하는 이유가 뭔지 알고 있습니까?”
“…….”
“때론 부당한 명령이 단체 전체의 이익을 만들어 내기도 하기 때문이죠. 문파 사람들이 문주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 사문은 금방 사라질 것이고, 상단의 사용인들이 제멋대로 군다면 상단은 유지되지 않을 것입니다.”
“……무림학관은 다릅니다.”
끝까지 ‘그럴듯한’ 말로써 제 주장을 내세우려 하는 철순직.
“물론 다르죠. 하지만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학관을 졸업하여 무림맹에 배정받은 이후에도 ‘의원회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표출할 겁니까?”
“…….”
철순직이 이리 모략을 꾸밀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만만해 보였기 때문일 터.
소림의 일각이, 제갈세가의 제갈정기가 학관대표가 되었다면 함부로 이따위 짓을 꾸미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겐 반격할 힘이 충분하니까.
지지 기반이 단단하니까.
씨알도 먹히지 않을 이야기를 내 턱밑에 가져다 들이밀 수 있는 이유는 내 기반이 빈약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강자와 약자를 철저하게 구분하여, 이길 수 있는 싸움만 거는 졸렬함으로 생을 연명하는 인간.
그리고 저런 부류의 인간을 깔아뭉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마 무림맹에 배정받게 되면 어떤 곳에 가든 최소 조장, 혹은 부당주 정도의 직책을 맡게 되겠지요. 그때 철순직 그대의 명령을 부하가 부당하다고 거부하면 어쩔 겁니까?”
“…….”
“조직원들의 의견을 모은 결과, 적과 싸우지 않는 것이 이익이란 결론이 도출된다면.”
바로, 내가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점’을 주지시켜 주는 것.
나는 주변을 한차례 둘러본 후 철순직에게 질문했다.
“적을 앞에 두고 도망갈 겁니까?”
쉬이 대답할 수 없으리라.
그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본인의 앞서 늘어놓았던 말에 결국 발목을 잡힐 테니.
“방금까지 유려하게 말하더니, 왜 꿀 먹은 벙어리가 됐습니까?”
강호의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기론 백도보다 흑도들의 대화가 더 걸다 생각한다.
하지만 사흑련을 일주하고 온 내 생각은 다르다.
어쩔 땐 흑도들의 언변이 더 조심스럽다.
물론 뒤가 없이 달려드는 놈이야 쌍욕을 박고 시작하지만, 그 외의 놈들은 의외로 조심조심 이야기를 한다.
왜 그렇냐고?
흑도들은 항시 대가리가 깨질 위험을 갖고 있으니까.
언제든지 혈투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말조심을 하는 것이다.
반면 백도들은 상대적으로 대가리가 깨질 위험이 없다.
아무리 상대를 비아냥거리고 조롱해도, 그것이 직접적인 모욕이 아닌 이상 검을 뽑을 명분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난 결심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철순직에게 대가리가 깨질 수 있다는 공포를 심어줄 것이다.
본인의 언행이 불러올 파장을 깨닫게 할 것이다.
그가 다시금 입을 열 때, 조심할 수 있도록.
다음번에 머리를 굴릴 땐 함부로 나를 희생양으로 삼지 않도록.
나는 손목을 풀었다.
“그렇다면 그대를 비롯한 이곳에 모인 이들은 학관을 졸업할 필요가 없겠군요. 다들 집에 가서 그 의원회인지 뭔지나 만들면서 죽을 때까지 토론이나 하십시오.”
“…….”
“그대들이 학관을 그만두는 연유에 대해선 내가 문서를 작성해서 각 사문에 보내놓겠습니다. 그대들이 생각해 낸 훌륭한 체계를 각 사문에서 곧장 적용할 수 있게끔 말이지요.”
내 말에 사람들의 두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그게 무슨 무례한 소리요!”
“아무리 학관 대표라 한들 그딴 짓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오!”
“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탕!
“그만.”
콰직-
내가 가볍게 내려친 탁자가 두 동강이 났다.
그 위에 쌓여 있던 서류뭉치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흩어진다.
“이, 이게 무……!”
내 괴력에 철순직을 비롯한 자칭 대표의원들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린다.
왜 인간은 자신이 저지른 무례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내 오랜 궁금증에 대한 답은 그들을 통해 나타났다.
애당초 자신이 저지른 게 무례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은 해도 되는, 하지만 자신들이 당하면 안 된다 생각하는 적반하장.
“지금 ‘그딴 짓’이라 했습니까?”
“…….”
머리채를 잡고 잘못을 눈앞에 들이밀어 보여줘야 정신을 차린다.
자신이 어떤 짓을 하려 했던 건지 인지를 시켜줘야, 그다음부터 ‘생각’이란 걸 시도한다.
“모든 사문에서 놀라겠지요. 문주의 권위에 도전하겠단 말이나 다름없으니. 작게는 하극상이고 크게는 기사멸조 행위나 마찬가지일 터.”
“…….”
대가리가 한번은 깨져봐야 그다음부터 말조심을 하는 것처럼.
내가 손을 들어 올리자, 모두 일제히 자라처럼 목을 움찔하며 방어태세를 취한다.
“시발, 그런데 지금 그딴 좆같은 걸 나더러 도입하자고 한 겁니까?”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그에 반발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물론 수치심에 분개하지만, 애당초 그 모욕 역시 자신들의 잘못으로 당한 것이기에.
나는 의자 등받이에 나른하게 몸을 기댔다.
“이제 알아들었으면 꺼지시지요. 보다시피 일이 바빠서 말입니다.”
무거운 정적이 장내에 깔린다.
일을 하던 대표단들도 내 걸은 말에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처음 움직인 건 화산의 제자.
이어 제갈세가의 제자를 비롯해 사람들이 차례차례 움직인다.
끝까지 남아있던 철순직.
“왜, 뭐요? 아, 저 탁자처럼 되고 싶으신가?”
내가 턱짓으로 두 동강 난 탁자를 가리키자, 그도 고개를 저으며 문 쪽으로 걸어간다.
철순직은 아마 대표단을 나간 후 그 특유의 언변으로 함께 왔던 자들을 달랠 것이다.
그리고 계속 제가 이용할 장기 말로 쓰겠지.
내가 이런 걸 그냥 두고 볼 정도로 인성이 함양된 인간은 아니지 않나.
“생각 없이 움직이면 저런 사기꾼에 끌려 자신의 명예는 물론이고 사문의 명예도 바닥에 떨어지는 겁니다. 지금도 보십쇼. 이 모든 계획은 철순직이 시작이었겠지만, 욕은 그대들이 함께 먹고 있지요. 오늘을 기억하시오.”
내 말에 나가던 이들이 하나둘 철순직을 바라보더니, 홱하고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섰다.
덩그러니 홀로 문 앞에 선 철순직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진 대표, 한 번의 전투에서 이겼다고 전쟁을 승리했다 생각하는 겁니까?”
나는 코웃음을 쳤다.
“애당초 이 자리를 승부의 자리로 생각하고 온 겁니까?”
“…….”
“그대가 얼마나 알량하게 나를 봤는지 알겠군요.”
“……오늘 일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라면 나만큼 많이 해본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대 생각만큼 제가 여리지 않으니, 괜한 걱정하지 마십시오.”
“…….”
철순직은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듯 홱하니 몸을 돌려 나갔다.
“대사형, 괜찮겠습니까? 이렇게 모욕을 주고…….”
철순직의 심계를 아는 은호가 걱정스럽게 물어온다.
나는 녀석을 향해 툭 내뱉었다.
“안 괜찮으면 어쩔 건데?”
“네?”
“말하지 않았느냐? 우리가 나아가는 한, 저런 발목 잡는 놈들은 끝도 없이 나타날 것이다. 저딴 놈들 때문에 제자리에 멈춰서길 바라는 거냐?”
“아니요.”
나는 은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렇다면 너도 크게 신경 쓰지 마라. 덤비는 자가 있다면 언제든 대가리를 깨주면 그만이다.”
“……대사형. 아니 대표님.”
“응?”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공공연하게 대가리를 깨겠다니요.”
“…….”
슬쩍 시선을 돌려 보니, 그간 호의 가득했던 시선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백안시하는 눈빛만이 가득했다.
나는 쪼개진 탁자와 철순직이 나간 문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하여튼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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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말이 되면서 만서고가 텅 비었다.
더 이상 필기시험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학관생들은 마지막 남은 실기시험인 실전 전략 전술 평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갑(甲) 평가를 받은 이들은 오 일에 한 번꼴로 훈련을 하고.
을(乙) 평가를 받은 이들은 삼 일에 한 번꼴로 수련을 한다.
병(丙) 평가를 받은 이들은 이틀에 한 번.
정(丁) 평가를 받은 이들은 하루에 한 번 이상 수련을 한다.
그럼, 무(戊) 평가를 받은 이들은 어떻게 하냐고?
하루에 두 번 이상 연무장을 찾아 죽어라 무기를 휘두른다.
‘무(戊) 평가가 세 개 있는 나는 쉴 자격이 없지.’
모(某) 금표는 하루 중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곤 줄곧 연무장에 나와 있었다.
입김이 하얗게 물드는 겨울 날씨임에도 온몸이 땀으로 젖어 추운 줄 몰랐고, 잠시라도 쉬고 있자면 불안함이 엄습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연무장에는 금표와 같은 신세의 학관생들이 종종 보였다.
아마 이들 중에서 첫 낙오자가 나올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들어왔던 학관을 제 발로 나가야 하는 낙오자들.
일(一) 푼에 불과한 인원이라고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무림학관에서 낙오된다는 건, 학관에 입학하지 못했다는 것보다 더 심한 굴욕감을 느끼게 할 테니까.
‘미치겠군.’
요 며칠 함께 수련하던 성모란은 파산검법에서 어떠한 깨달음을 얻고선 개인 연무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깨달음을 잘 정리하고 실기평가 전까지 자신의 무공에 적용할 수 있다면, 낙오 인원에 성모란이 들어가는 일은 없겠지.
그렇기에 금표는 더욱 조바심이 났다.
“헉헉! 헉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오줌보가 터지기 직전까지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러 보지만.
성모란과 같은 기연은 오지 않는다.
두 동생과 사형제들을 무림학관에 두고 간다는 불안감보다, 자신이 그들을 쫓을 수 없다는 조바심이 금표의 마음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여, 금표 공!”
밉살맞은 대사형은 요 며칠째 자신을 계속 ‘금표 공’이라 부르고 있었다.
무(戊) 평가를 맡고 학관에서 낙오된 사람은 태을문의 제자가 아니라던가.
“후우…….”
“금표 공. 고민이 많은가 보오?”
“무슨 일이십니까?”
“아, 이런 내가 ‘남’의 수련을 방해했나?”
저렇게까지 사람을 약 올려야 직성이 풀리는가.
어떻게 저런 인성으로 학관대표 자리를…….
“후우…….”
금표는 서리처럼 얼어버린 땀방울을 닦아낼 생각조차 않은 채 나직이 읊조렸다.
“……대사형.”
“으잉? 왜 나를 대사형이라 부릅니까?”
“방해하실 거라면 그만 가십시오. 그럴 기분 아닙니다.”
“쯔쯧, 사내새끼가 무(戊) 평가 몇 개 받았다고 축 처져서는.”
털썩.
갑자기 뭔가 뭉뚝한 것을 자리로 깔고 바닥에 앉는 진소운.
이젠 아예 자리까지 잡고 자신을 놀리려 하는 건가.
금표는 그간의 설움이 터져나와 쏟아냈다.
“제가 무(戊) 평가를 받았다고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놀리지 않으셨습니까!”
“당연히 놀림받아 마땅하지. 자라 대가리나 그런 점수를 받는 거니까.”
“…….”
금표는 가슴 속에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동생들과 사저에게 차마 바라지 못했지만, 그래도 대사형으로선 조금 위로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런데 저 대사형이란 작자는……!
“내가 너무하다고 생각하냐?”
“……!”
그간의 부담감과 서운함이 목구멍을 때리고, 눈가에 물기가 고이기 시작한다.
금표는 부끄러움에 이를 악물고 눈가에 흐르는 물기를 감추려 애썼다.
“저도 여기서 낙오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대사형과 같은 길을 걷고 싶다고요. 그런데…….”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동생들에 비해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더욱 열심히 노력했다.
잠자는 시간을 아끼고, 먹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수련에 매진했다.
하지만 그 결과가 결국은 낙오.
금표는 성모란이 가진 행운이나 동생들이 가진 재능, 그 무엇도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범재는 찬란히 빛나는 천재 앞에서 자신의 어둠을 절실히 깨닫고 좌절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도저히 못 쫓아가겠습니다. 쫓아가고 싶은데…… 저 혼자만 남겨질 거 같아 무섭습니다.”
겨우 참았던 눈물이 결국 뚝 하니 떨어진다.
물길이 터버린 눈물길은 실개천처럼 쉬지 않고 눈물을 흘려낸다.
“끄윽…… 혼자 남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함께 큽, 가고 싶어요.”
“쯔쯧. 그런 조바심 나는 마음으로 검을 휘두르니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거다.”
“끄윽…… 네?”
진소운이 쯧 하고 혀를 찬 후 묻는다.
“우리 마지막 실기평가가 무엇이냐?”
“……전략 전술 평가요.”
“그 진행 방식은?”
“삼군(三軍)이 소대로 나뉘어 서로의 깃발을 빼앗고, 진지를 점령하기 위해 움직입니다.”
“그럼 그 안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건 뭘 의미하지?”
“소대가 살아남고 부대를 키워 진지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뭐가 말입니까?”
진소운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네 동생들이나 사형제들이 너를 소대에 넣지 않을 거라 생각하느냐?”
“…….”
금표는 눈물 자국을 지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좀 넓게 봐라. 그리 근시안적인 시야에 갇혀 있다면, 지나가는 깨달음이 있다 한들 잡을 수 있겠느냐.”
“하, 하지만…… 제가 들어가면 짐이 되지 않겠습니까.”
진소운이 다시금 혀를 찼다.
“쯧. 하나 물어보자. 너는 왜 네 검술이 동룡이보다 날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느냐?”
“그야 동룡이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기 때문이죠.”
“그럼 사련이를 포함하여 넷이 백호검진을 이뤘을 때, 은호가 검진축이 되는 이유는?”
“은호가 전체 그림을 잘 보기 때문입니다.”
“넌 그때마다 뭘 하냐?”
“저, 저야 맨 앞에서 검을 휘두르고…….”
진소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다.”
“네?”
“네 검이 공격적이지 않은 이유,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동작이 몸에 밴 이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금표에게로 날아드는 대사형의 목소리.
“네가 본능적으로 동생과 검진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
진소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흑룡검을 뽑았다.
“보통 태을문의 제자들은 소천검법을 펼칠 때, 상대의 척추까지 뚫는다는 느낌으로 검을 휘두른다.”
휘익.
“이것이 바로 일섬(一閃). 하지만 넌 본능적으로 명치 부근에서 멈추지. 척추까지 들어갔다가 돌아오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여기곤, 다음 동작을 펼쳐야 할 조바심에 빨리 돌아오는 것이다.”
금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인에게 습(習)이란 것이 얼마나 무섭던가.
한번 잘못 들리면 고치기는 무척이나 고되다.
가뜩이나 쫓아가야 할 길도 먼데, 잘못된 습까지 들었다니…….
금표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 전 망한 겁니까?”
“응?”
“실력도 안 되는데…… 나쁜 습(習)도 바꿔야 하지 않습니까.”
진소운은 진심으로 한심하다는 탄식을 내뱉었다.
“뭣 하러 고치느냐? 어차피 동룡이와 비교해 보았을 때 더 과감하게 들어가지 못할 텐데. 네 검술은 동룡이와 함께 있는 한 더 공격적으로 변할 일은 없을 거다.”
“…….”
더 이상 발전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금표의 낯빛은 더욱 어두워져만 갔다.
그렇게 밉살맞은 대사형의 말에 푹푹 가슴이 찔려 피가 철철 흐를 때.
“대신.”
대사형의 말이 이어진다.
“그걸 더욱 발전시키면 그만이다.”
“네?”
진소운이 자신이 깔고 앉았던 것을 빼내어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잘못된 습(習)을 잘못되지 않게 만들 물건이지.”
금표가 물끄러미 진소운이 내민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방패가요?”
진소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검진 안에서 누군갈 보호하는 게 몸에 뱄다면, 본격적으로 막는 역할을 해라.”
“…….”
“아직도 방패에 거부감이 있는 거냐?”
금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난 정시 때 대사형이 준 방패가 아니었다면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던가.
그 이후로 다른 이들이 어떻게 보건 방패에 대한 거부감은 모두 사라졌다.
진소운이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방패를 들 거라면, 제대로 들어라. 형제들과 사형제들을 지키는 방패.”
그러곤 금표의 손에 방패를 꽉 쥐여준다.
“나아가 태을문을 지키는 가장 단단한 방패가 되거라.”
“……!”
대사형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찌르르 울렸다.
진소운의 올곧은 시선이 금표의 얼굴에 머문다.
“너의 단단한 방패 안에서 네 사형제들은 얼마든지 널 위해서 검을 휘둘러 줄 거다.”
자신이 남겨지고 말 것이라는 절망감이 한순간 걷힌다.
천재성으로 찬란히 빛나는 대사형의 얼굴이, 동생들과 동료들의 얼굴이 더 이상 아득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동룡만큼 검을 잘 쓸 필요도, 은호만큼 머리가 좋을 필요도 없다.
내가 그들을 보호하는 동안, 사형제가 적들을 처치할 테니까.
이제야 자신의 역할을, 자신의 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대사형이 건넨 방패를 다시금 본다.
소복이 쌓인 먼지를 걷어내니 선명한 도깨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저 낡은 골동품이라 생각한 물건에서 고아한 고태미가 느껴진다.
금표가 도깨비 그림에 빠져 있을 때, 그의 귓가로 대사형의 목소리가 들린다.
“금강패(金剛棑). 어떠한 악의도 모두 막아낸다는 신물이다.”
그의 음성이 금표의 가슴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킨다.
“어떠한 악의도…… 모두 막아내는 방패…….”
자신의 사명인 듯 같은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금표.
불안하게 날뛰던 가슴이 묵직하고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다.
“모두를 지킬 방패…….”
금표의 목소리가 고요하고 묵직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