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68화 (268/357)

268. <빌어먹게 그리운 얼굴(3)>

“은호야.”

내 부름에 속을 부글부글 끓이던 은호가 당장 달려 나가 검을 휘두를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검 가지고 올까요?”

“검은 무슨……. 우리 처리 완료된 서류 있지.”

양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던 은호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학관과 교육각으로 보낼 서류들 말입니까?”

“응. 거기에다가 만통부에서 빌려온 서류들 있지.”

“그건…… 그냥 예시문인데요.”

나는 은호를 향해 씨익 웃어주었다.

“그거 다 싹 다 꺼내와.”

“…….”

철순직, 그 같잖은 술수로 함부로 덤빈다 이거지.

“싹 다 꺼내와서 여기에 쫙 깔아.”

그런데 어쩌나. 내가 네놈 같은 쥐새끼들 한둘 패본 게 아니라서 말이야.

“후후…….”

“또 무슨 일을 벌…… 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던 은호는 갑자기 번뜩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바쁜 척하란 말입니까?”

“그래.”

어느새 녀석의 얼굴 위로도 사악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거참 재밌겠네요, 흐흐. 알겠습니다.”

은호는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익살스런 표정으로 대표단 인원들을 이끌고 집무실을 나섰다.

자, 사전 준비는 됐고.

“읏챠.”

나는 평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장우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대표님 방금 무슨…….”

그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내 얼굴과 은호가 나간 문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려 주었다.

“아, 그런 게 있어. 한번 봐봐.”

“…….”

어디 약관의 철순직이 어느 수준이었는지 볼까나.

#

처리가 끝난 서류부터 전달만 하면 되는 서류까지 싹 다 긁어모아 집무실을 가득가득 채운 은호는, 인원들이 최대한 소란스럽게 일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장우재의 안내와 함께 학관 ‘의원회’라는 것들이 나타났다.

“…….”

소란스런 집무실의 한가운데서 우뚝하니 서 있는 철순직과 일행들.

은호는 일부러 그들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인상을 찌푸리고는 대표단 인원들에게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누가 일 처리를 이따위로 하라고 했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다시 하세요! 그리고…….”

이내 은호의 서슬 퍼런 눈빛이 철순직 일행에게로 향한다.

“대표단이 아닌 학관생들이 대표관엔 왜 와있는 겁니까?”

신들린 은호의 연기에 맞추어 장우재도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바삐 설명하기 시작했다.

호오 이 녀석들, 제법 치는데?

이거 학관 행사 때 연극 무대 한번 만들어 줘야 하는 거 아냐?

난 차분한 태도로 그들을 말렸다.

“은호야, 내 손님이시니 안쪽으로 모셔라.”

“대사형…… 아니 대표님! 아무리 그래도 이 바쁜 시기에 굳이 이렇게 일 처리를 하셔야 하겠습니까?”

나는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어쩌냐? 학관생들을 ‘대표’하는 분들이시라는데.”

은호가 생뚱맞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미간을 와락 구기며 물어온다.

“그게 무슨 ‘개소리’랍니까. 이미 우리가 학관 대표단을 맡고 있는데.”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남화성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모르지. 그 개소리가 뭔지 한번 들어보려고 오라고 한 거니까.”

“…….”

은호는 경멸스럽다는 시선으로 의원회 인원들을 하나하나 살폈고, 그때마다 그들은 헛기침을 하거나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나는 바삐 움직이는 대표단을 한번 둘러본 후, 철순직을 돌아보았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서류가 가득 쌓인 탁자 한쪽을 밀면서 손짓을 하자 철순직이 이맛살을 구겼다.

“중요한 이야기니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떻습니까?”

“그럼 다음에 정식으로 약속을 잡고 그때 얘기하시든지요. 보다시피 많이 바빠서 말입니다.”

“…….”

뭐, 니가 그렇게 노려보면 뭘 어쩔 건데.

내가 제 두 눈을 빤히 쳐다보자, 철순직이 경미하게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됐습니다. 그리 긴 이야기가 되진 않을 테니까요.”

철순직이 대표로 자리에 앉고 그와 함께 온 인원들이 그를 둘러싸듯 주위에 섰다.

그 구성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면면이 재밌군요. 확실히 12봉성 대표로 온 건 아닌 듯 보이도록 애쓴 티가 팍…… 앗,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하하.”

“…….”

내 말에 일제히 얼굴을 붉히는 이들.

12봉성에 소속된 인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 소속된 인원들이었다.

어느새 평정심을 되찾았는지 철순직이 특유의 냉철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애당초 12봉성으로 왔다면 12봉성 대표의원 자격으로 왔다는 말을 했겠지요.”

“안 그래도 그거 묻고 싶군요. 의원회?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의원(議員), 의논하여 결정을 내리는 곳이란 뜻입니다.”

얼씨구, 말은 번지르르하네.

하여간 저 좋은 대가리를 허튼 데 쓰는 거론 얘가 제일이라니까.

나는 몸을 뒤로 젖히며 되물었다.

“흐음. 무엇에 대해서 결정을 내린다는 거죠?”

“학관생의 행동과 결과에 따른 모든 것에 대해서 입니다. 학관생 모두의 의견이 모이는 곳이니 불만이 나올 일도 없지요.”

언뜻 듣기로는 매우 좋게 들린다.

하지만 화자가 철순직인 이상, 그걸 곧이곧대로 들어선 안 된다.

“그럼 그 의원회의 결정이 곧 학관생 전체의 결정이 된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책임은 누가 집니까?”

“모두가 지는 거지요. 그간 무림맹은 상명하복식 구조를 유지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강호는 정체되어 있고, 세력은 굳어졌으며 종국에는 순혈이니 잡혈이니 하는 신분제까지 나오게 생겼습니다.”

그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명령을 내린 기득권은 아래에 책임을 전가하고, 무고하게 끌려가던 아래 인원들이 결국 영문도 모른 채 책임을 지기만 하지요.”

철순직의 담담하고 선명한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연기로 꾸며진 집무실 내부의 소란이 잦아든다.

제게로 모이는 시선을 의식하며, 철순직이 나직이 내뱉는다.

“소수에게 결정권이 집중된 작금의 구조가 정녕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확실히 말하는 것에 있어서는 참으로 타고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런 수평적이고 뛰어난 조직 구조를 학관 내에 도입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내 눈엔 훤히 보인다.

공리(公利)를 위하는 군자의 탈을 썼지만 결국 제 사익(私益)에 혈안이 된 위선자의 모습이.

내 비아냥에 철순직은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대답했다.

“진 대표라면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 생각했습니다.”

난 확실히 말했다.

“잘 모르겠군요.”

“…….”

철순직의 입가가 움찔거린다.

하지만 이내 평정을 이어가며 표정을 가다듬는다.

“의원회는 결국 모두의 의견을 수용하는 단체가 될 겁니다. 자신들의 의견을 토대로 내려진 단체의 결정에 따라 능동적으로 움직일 것이고,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만큼 결정과 판단에는 신중해지겠지요.”

이래도 모르겠냐는 철순직의 되물음.

이렇게까지 노골적이라니.

나는 끌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의원회를 조직한 이유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하군요.”

철순직은 이 의원회라는 수평적인 구조를 대표단에 적용하여 대표단의 권력을 약화하고 싶은 것이었다.

“지난 수백 년간 이어진 잘못된 관행을 이젠 깨뜨릴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진 대표님은 그간의 상식을 타파해 오신 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철순직이 더없이 청렴해 보이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한다.

“진 대표님께서 학관과 무림맹을 지배해 온 강압적인 관행을 깨뜨릴, 그 첫발을 내디딜 분이시라고 말입니다.”

평소에는 진 대표, 진 대표라고 부르던 인간이 ‘대표님’이라는 호칭까지 붙이며 이야기를 한다.

하, 이 쥐새끼 진짜. 바람 잡는 덴 선수라니까.

확실히 철순직은 철순직이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올바른 대표’라면 응당 그의 의견에 동조할 것이란 기대감을 주변에 심어버린 것.

그의 말마따나 그를 따라온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백팔봉의 인원들이 기대에 찬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다.

더불어 연기를 하던 대표단의 인원들도 어느새 혹했는지 관심이 가득한 표정이다.

무엇보다 철순직의 말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는 은호의 찌푸려진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모두의 의견…… 부조리한 관행…….”

적어도 대표단 안에선 가장 논리적이고 이지가 뛰어난 녀석이니까.

하지만 대표단의 지위가 흔들릴 것 역시 알기에, 녀석 역시 쉽사리 좋아할 수 없겠지.

나는 철순직을 응시했다.

전생의 모습과 달라진 점을 보자면 주름이 몇 개 사라진 것 말고는 딱히 다를 게 없다.

인간은 손실을 극도로 회피하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의심하고 계산하며. 불안과 위험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바 최대한의 기량을 동원해 손실을 회피하려 한다.

그렇기에 지금 철순직이 하는 말은 효용성이 있다.

“물론 의원회란 체계가 적용된다 해도 대표님의 자리가 사라지진 않을 겁니다. 결국 최종 결정을 하는 건 대표님일 테니까요.”

그의 시선이 대표단 인원들을 주욱 훑는다.

“더구나 대표단도 그 누구 하나 자리를 내줄 필요 없습니다. 그저 지금 그 자리에서 하던 일을 계속하면 될 테니까요.”

마치 모두가 승리할 수 있는 최적의 방안을 찾아낸 듯 말하는 철순직.

그의 말은 너무도 달콤해서 잃게 될 것보단 이익을 상기시키게 만든다.

인간의 연약한 심리를 파고든 그의 화법은, 상대로 하여금 모두의 이익을 극대화할 방법을 찾았다고 느끼게 한다.

이전에 하지 못했던 것을 할 수 있다고.

명예를 원하는 자에겐 명예를 가질 수 있다고.

돈을 원하는 자에겐 돈을 가질 수 있다고 믿게 한다.

“대표님의 결정이 향후 백 년간의 학관의 체계를 바꿀 겁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의 후배들은 더 나은 환경에서 공정하게 더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겠지요.”

철순직이 단호한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대표님의 결단을 바랍니다.”

선택권을 내게 넘기는 용의주도함까지.

머리 돌아가는 것도 전생의 나이 든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상대로 하여금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 생각하게 만들어 유능감까지 끌어올리는 전략.

상대는 철순직의 복잡하고 철저한 설계에 따라 움직이는 말에 불과할 뿐이지만, 장기 말은 자신이 적의 왕을 잡기 위해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고 믿게 된다.

철순직은 그런 인간이다.

상대를 마음대로 조종해 자신의 이익을 쟁취할 수 있는 인간.

타인의 심계를 장악하여 자신의 이익을 극도로 성취해 낸 후, 자신이 결국 이겼다 생각하는 인간.

살아남은 자가 강자가 되는 세계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인간.

모사(謀事) 철순직.

나는 시선을 돌려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를 따라나선 구파일방의 인원들, 오대세가의 인원들, 백팔봉의 인원들.

그리고 대표단의 인원들까지.

모든 이들이 내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신기하단 말이지.’

그가 사기꾼인 걸 알고 있는 나조차 지금 그의 말에서 합당함이 느껴지니까.

하지만 이걸 어쩌나.

내가 멍청하긴 하지만 기억력 하나는 끝내준단 말이지.

전생에 그의 언변과 심계에 당해 죽어갔던 동료들의 시체들이 눈앞에 보인다.

그리고 그 시체들이 생생하게 느껴지자 대답은 쉬웠다.

“싫습니다.”

“…….”

그 억울하고 부당한 죽음들을 난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이번 생엔 순순히 당해줄 수 없단 이 말이다.

예상치 못한 내 대답에 철순직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실망이군요. 그 어떤 기수보다 깨어있는 학관대표라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이윽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이들이 하나둘 적개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흥분을 발산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더러 보인다.

왜 이리 멍청하냐고.

철순직의 의견을 따르면 모두에게 이익이지 않냐고.

나를 그저 명분 없이 제 이익만 챙기는 사람으로 몰아간다.

하지만 욕을 먹을 각오가 되어 있는 자에겐 어떤 비난도 타격이 되지 않는다.

나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손뼉을 짝 쳤다.

“자! 지금까지 탐욕에 찌들어 짖어대는 개소리 잘 들었습니다.”

“진 대표……!”

나는 철순직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애당초 대표직 빼앗고 싶어 짱구 굴리는 걸 내가 왜 받아줘야 합니까?”

본심을 들킨 철순직의 가면이 움찔거린다.

“……이해를 못 한 겁니까? 이건 자리를 빼앗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현 무림맹의 장로회와 맹주전의 관계와 뭐가 다른 겁니까?”

만통부가 문제를 발원하면, 장로회가 논의를 하고 맹주전에서 결정을 한다.

최종 결정권이 맹주전에 있다지만, 맹주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다.

결국 장로회에서 결정을 내려야 맹주전에서도 결정을 ‘공표’할 수 있는 것.

“뭐, 말로는 ‘의원회’고 ‘협의회’고 좋은 말이라면 뭐든 가져다 붙일 수 있겠죠.”

너무도 투명히 드러나는 철순직의 욕망에 도저히 조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12봉성에서 대표직을 차지했더라면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을 이야기지 않습니까?.”

“…….”

철순직은 참으로 재미난 사람이다.

그에겐 적과 아군이 없다.

자신과 이익이 맞으면 상대가 마교라도 아군이 될 수 있고, 이익이 맞지 않으면 같은 12봉성의 문파도 적이 된다.

실질적이다 못해 합리성이 차고 넘치는 생각을 가졌으니, 북해의 무림맹에 자신의 문파를 떡하니 붙일 수 있었던 거다.

심지어 철순직의 문파는 정마대전 중에 손실도 거의 입지 않았다.

전생에서 내가 죽은 뒤의 일은 모르지만, 철순직의 문파는 북해의 무림맹 안에서도 커다란 한 축을 담당했을 것이다.

나는 철순직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이 하지 않았을 일을 다른 이에게 강요하는 걸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뭐지요?”

“사기.”

철순직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진다.

“상대를 등신으로 보는 사기꾼들이나 그런 짓거리를 하지요.”

“……지금 여기 모인 사람들을 모두 모욕하는 겁니까?”

공격을 흘려 다른 이들을 끌어들이는 게, 유운문의 이화접목이 부럽지 않은 수준이다.

“모욕이란 건 애당초 떨어질 명예가 있을 때나 하는 거고요.”

나는 철순직 뒤에 선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화산의 제자 하산동. 화산의 힘으로 학관에 들어왔지만, 매일 유흥가에 나가 기생들과 어울리다 본산에서 엄중한 경고를 받았지요?”

구파일방의 한 인원이 움찔거린다.

“제갈세가의 제자 백진성. 지난번 기문진의 사태에서 금옥살이는 면했지만, 이미 제갈세가에서 눈 밖에 나. 향후 제갈세가 내에서 출세할 길이 요원하고요.”

백진성이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정도회, 백도회, 그 어느 곳에서도 발원권 없는 사람들을 잘도 모았군요. 그나마 12봉성에서 온 이들은 철순직 그쪽을 따르는 사람들이고요.”

철순직의 말은 항시 극단적인 자기 이익 추구와 맞물려 있다.

그가 하는 모든 말들은 개인적인 이익과 연관되어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를 가장 경계해야 할 때는, 바로 상대의 이익을 챙겨주는 말을 할 때이다.

“아마 의원회가 조직된다 한들, 결국엔 철순직 그대의 말에 따라 움직이게 되겠지요. 모두의 의견이라지만 결국 그대가 이끌 테니까요.”

“…….”

“더구나, 그런 식으로 학관들의 대표라는 직함을 달려 한다면 적어도 학관생들의 의견은 좀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는 철순직을 둘러싼 자칭 ‘대표의원’들을 향해 물었다.

“학관생들에게 추천서 한 장이라도 받은 사람 있습니까? 아니면 선거를 통해서 뽑혔나요?”

그러나 대답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가슴속에서 차가운 분노가 차오른다.

“왜 학관생들이 가만히 앉아 있다 무능한 의원들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겁니까?”

전생에서는 매번 동료가 죽고 난 뒤에야 철순직의 계략이란 걸 깨달았다.

“책임? 책임이라고 했습니까?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지난번 사천의 외유처럼 파직을 당하거나 금옥에 갈 겁니까?”

그러니까 이번 생에서는 절대 당하지 않을 것이다.

“아, 그럴 리가 없겠군요. 학관생들의 선택이니 그대들은 아무런 징벌도 받지 않겠지요? 그거참 편리한 책임이군요. 정작 마지막에 가서 가장 큰 책임은 바로 나, 학관대표가 질 테니까요.”

나는 한껏 비웃음을 날려 주었다.

“권리는 누리면서 책임은 지지 않겠다라……. 차라리 당신들이 말한 ‘잘못된 관행’을 이어온 기득권 세력들이 더 나아 보일 지경이군요. 최소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들은 피 흘려 자신들의 자리를 지켜냈으니까 말입니다.”

입을 꾹 다문 이들의 낯빛이 점차 어두워진다.

“그쪽 ‘의원회’ 인원들이 바라는 게 바로 이겁니까? 권리는 가지고 책임을 회피하고?”

전생에 딱 한 번, 철순직의 의도와 반대로 행동하면서 감자를 한 방 먹여 준 적이 있었다.

제갈천기의 조언으로 철순직이 말하는 의도에 무조건 반대 의사만 표명했었다.

그 때문에 우린 염마귀안대와 맞상대를 해야 했었지만…….

철순직의 부대는 그날, 일 할의 인원을 빼고 모조리 몰살당했다.

“일단은 철순직 그대의 문파에서 먼저 이 의원회를 시행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문주는 그저 최종결정권자로 두고, 밑의 무사들끼리 의원회를 조직하는 겁니다. 모든 결정에 대한 책임은 문파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떠안는 거지요.”

“……사문은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예의를 지키시오, 진 대표.”

어느새 호칭이 ‘대표님’에서 다시금 ‘진 대표’로 돌아왔다.

“설마 내 제안이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

“지금 그 무례한 제안을 같잖은 인원들로 강제하려 한 겁니까?”

철순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전생에서의 내가 무조건 반대 의사만 냈던 그때처럼.

빌어먹게 그리운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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